▲ <스톤> 주연배우 3인이 돌놓는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민수 역의 조동인, 남해 역의 김뢰하, 인걸 역의 박원상.
먼저, 조세래 감독에 대한 기억
그러니까 고(故) 조세래 감독을 처음 본 때가 93년 여름 무더위가 고개를 막 꺾을 쯤이었던 것 같다. 월간바둑 편집부로 바둑영화 <명인>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왔다. 국내 최초로 바둑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건 굉장한 소식이었다. 캐스팅한 주연급도 연기력이 대단한 배우들이었다. 김갑수(추동삼 역), 조재현(박민수 역), 박상아(박민수 애인 역. 이 무렵 박상아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재학중인 신인이었지만 후일 톱스타로 성장했다.)
‘국내 첫 바둑영화 크랭크인’ 93년 10월호 월간바둑에 3면에 걸쳐 소개했다. 메가폰을 잡을 조영철 감독은 정지영, 이광섭, 김성수 등 여러 중견감독들 밑에서 오랜 조감독 생활을 했고 시나리오 작가와 방송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와 ‘하얀전쟁’이 있고, ‘하얀전쟁’으로는 93년 대종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조영철은 개명하기 전 조세래 감독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유산되고 말았다. 30년 전에도 바둑영화에 투자자가 나서지 않아 크랭크를 돌려보지도 못한 채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조감독에게 바둑영화는 몽고반점 같은 것이었다. 영화판에 막 뛰어든 83년 무렵 여러 감독들 밑에서 연출공부를 할 때 처음 쓴 시나리오가 바둑이야기였다. 일생의 숙원이자 ‘한(恨)’으로 남아 이후에도 심청이 동냥젖 얻으러 다니듯 발품을 팔지 않은 곳이 없었고 여러 경로로 각고의 시도를 했다. 시나리오 <명인>을 바탕으로 <역수(驛水)>란 3권의 장편소설로 선보였고 이를 다시 <승부>로 개작, 재출간했다. 2007년에는 바둑사이트 세 곳에 동시연재하기도 했다.
▲ 2007년 무렵에 찍은 조세래 감독.
제작자를 구하려는 일념의 노력이었다. 한때 <승부>가 방송 드라마로 제작된다며 기뻐하던 때도 있었다. 이 소식 역시 기사화했다. 중간에 이번에야말로 <명인>이 제작될 거라는 기사까지 더하면 결과적으로 한 세번쯤 ‘오보’를 낸 꼴이 되었고 본의 아니었지만, 조감독은 만날 때마다 이에 대해 무척 미안해했다. 하지만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바둑영화 한 편에 대한 한 인간의 집념이 30년이다. 30년! 견습시절 바둑이야기로 첫 시나리오를 쓰던 때까지 거슬러올라가면 무려 40년의 세월이다. 그런 세월을 기다려 온 사람이 정작 평생 소원했던 ‘잇봉(데뷔)작’이 개봉관에 걸리는 걸 보지도 못한 채 훌쩍 가버렸다.
조감독은 바둑으로 <서편제>와 같은 예술영화를 꿈꿨다. 무산된 <명인>은 프로입단을 꿈꾸는 20대 중반의 박민수와 한때 출중한 기재로 촉망받았으나 떠돌이 내기바둑꾼으로 전락한 고수 추동삼의 인생역정을 대비시켜 바둑을 통해 구도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였다.
6월12일 개봉한 <스톤>은 젊은 청년 민수(조동인 분)가 프로기사를 꿈꾸다 좌절하고 막판 인생을 살다가 폭력조직 보스 남해(김뢰하 분)와 우연히 만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남해는 온갖 못된 짓을 하고 살아오다 인생에 대한 회한에 젖은 시기다. 인생을 다시 첫수부터 두고 싶어 하는 나이든 남자와 인생의 첫수부터 두어야 하는데 힘들어 하는 젊은 남자 두 사람이 바둑을 통해 우정과 사랑을 교감하는 스토리 라인은 <명인>과 <역수>와 인물설정,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뼈대는 고스란히 녹아 있다. 추동삼은 남해이고 남해는 곧 감독 자신이다. 조직폭력배가 등장하는 영화에 대해 일부 바둑의 이미지를 걱정하는 시각도 있으나 <스톤>은 ‘폭력성’을 앞세운 그런 상업영화가 아니다. ‘단수’가 뭔지조차 모르는 관객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우리네 인생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개봉을 앞두고 VIP시사회가 있던 날(6월5일) 주연배우 세명을 함께 만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바둑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생각하는 바둑은 어떤 모습일까. 바둑영화를 찍은 감회는 어떠할까.
- 안녕하세요. 개봉에 즈음해 정신없이 바쁘시죠? 바둑영화이고 사이버오로가 바둑인터넷사이트이니만큼 바둑에 입문한 동기, 기력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조직보스 남해 역, 김뢰하) “앗, 오로에서 오셨다니 더 반갑군요. 오로에 제 아이디가 아직 있지 않나 싶어요. 한창 둘 때 7~8급까지 올라갔었는데...그것 땜에 피해 많이 봤어요. 연극연습도 소홀히 하고...하하.”
(남해의 오른팔 인걸 역, 박원상) “그때가 대학로에 당구보다 사람이 모이면 바둑을 더 두던 시절이었죠. 분장실에 바둑판이 있고...인터넷바둑 하면 오로바둑을 으뜸으로 취급했어요. 전 18급으로 시작해서 한창때 14급까지 가다가 (자꾸 지니까) 에이씨 안돼...하고는 중단해버렸죠. 우리 어릴 때는 또래에 바둑을 두는 애들이 없어서 아버지와 형이 대국하는 어깨너머로 배웠는데 그 이상은 못 갔네요. 그래도 단수가 뭔지 룰 정도는 아는 ‘군대 3급’(인걸은 극중에서 군대3급을 자처한다) 정도 수준은 갖췄다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민수 역, 조동인) “보도를 통해 접하셨겠지만 제 아버지가 조세래 감독님이십니다. 바둑마니아셨죠. 아버지께선 아들과 바둑을 무척 두고 싶어 하셨어요. 먼저 형님에게 가르쳤는데 기재가 없다며 포기했고 둘째인 제가 곧잘 두니까 붙들고 가르치셨죠. 9점 깔고 한번 이기면 천원을 주셨어요. 그 욕심에...그래도 중학교 때 한번 이겼습니다. 오로바둑 많이 두는데요, 2~3급 됩니다.”
조감독이 30년전 <명인> 제작자를 찾지 못해 직접 독립영화사를 설립한 바 있는데 그때 영화사명이 ‘동인필름’이었다. 지금 보니 아버지에 이어 영화계에 뛰어든 둘째아들 이름(조동인)에서 따온 사명이었다.
▲ 연구생에서 퇴출된 후 인생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는 주인공 민수 역을 연기한 신인배우 조동인. 조세래 감독의 차남이란 게 밝혀지면서 더 눈길을 끌었다.
- 요즘은 영화 한 편에 웬만한 중소기업 규모 정도 되는 제작비가 투입됩니다. 이에 비하면 제작비 5억원에 불과한 <스톤>은 저예산 영화인데요, 출연료도 그렇고요 바둑영화다 보니 바둑을 이해하는 배우를 캐스팅했을 텐데, 이런 걸 헤아리면 감독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듯합니다.
(김뢰하) “이 동네가 서로 인연이 얼기설기 엮어 있는 동네라 모르고 지낼 수 없는 곳이죠. 배역 제의를 받고 사무실로 하겠다고 말씀드리려 찾아갔는데 느닷없이 돌 한번 놔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연기생활하면서 다른 오디션은 많이 봤는데 돌 놓는 오디션은 처음이었지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돌을 놓는데 허참, 그렇게 긴장되더라고요. 돌 놓는 폼을 보더니 ‘어, 됐네.’ 이러시더군요.”
(박원상) “감독님이랑 같은 아파트에 살다보니 동네에서 자주 만나는 사이였습니다. 감독님의 고민은 민수 역할이었어요. 그 역할은 주인공이니까 인지도 있는 젊은 배우를 써야한다는 주변 조언이 많았습니다. 바둑을 못 두어도 며칠 배우면 되지 않겠느냐고들 했지만 감독님은 그게 아니다, 돌 하나 놓는 손놀림 연기에도 많은 이야기가 내포돼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전 그 말씀에 공감합니다. 바둑을 소재로 하는 영화에서는 무척 중요한 점입니다. 아들을 주연으로 캐스팅하는데 부담이 컸겠지요. 그래서 ‘아니요, 그게(동인이를 쓰는 게) 맞는 거 같아요’라고 말씀드렸죠.”
(김뢰하)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등장인물마다 바둑돌을 놓는 맵시, 태도가 다 달라요. 그 점에 굉장히 집착하셨는데 아들인 이 친구한테는 오죽 주문이 많았겠습니까.”
(박원상)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부분...이는 영화의 살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톤>의 뼈대(스토리라인)는 튼튼하지만 살이 있어야 관객에게 자연스레 다가서고 공감을 얻을 수 있겠지요. 돌 놓는 연기가 도드라지는 장면은 아니지만 그게 그 사람을 대변해주는 또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둑의 정적인 면을 동적인 걸로 표현해 내야 하는 영화잖아요. 감독님께서 착점 하나에도 집착이라고 할만큼 천착하신 이유라고 봅니다.”
▲ 조직보스 남해 역을 열연한 중견배우 김뢰하. 인생회한에 젖어있던 중 민수에게 바둑을 배우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갈등에 휩싸인다.
공정하게 살아라, 왜 반칙을 일삼느냐
- 조세래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한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김뢰하) “감독님이 이 영화에서 가장 전달하고픈 메시지는 제 생각엔 이런 거 같아요. 사회에 대한 감독님의 신념 같은 거랄까. 공정하게 살아라, 왜 반칙을 하냐. 이 사회에 반칙, 공정하지 않은 게 너무 횡행하고 당연시되는 거에 대한 목소리를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극중 조직 보스 같은 사람은 반칙으로만 살아왔고 반대로 바둑으로만 살아온 민수 같은 사람은 공정한 걸 인생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왜 안 되는가? 이 사회에서는 왜 한수씩 공정하게 안 두는가? 하는 외침이 있는 거 같습니다.”
(박원상) “스톤이란 영화 안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아마 객석에서 한 분 한 분마다 자기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이 영화에는 용기에 대한 메시지도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들더군요. 조폭 남해가 살아온 날에 대해 회의하면서 새로운 선택을 놓고 갈등하는데 이때 필요한 게 용기지요. 진정한 용기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입니다.”
- 다른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바둑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연기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면?
(박원상) “바둑소재 영화였기 때문에 힘든 건 없었어요. 결국 영화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는 거 아니겠어요. 저예산 영화라 촬영 회차는 많지 않았지만 현장 가는 게 즐거웠습니다.
(김뢰하) “저도 뭐 힘들었다기보다는, 배우가 어차피 캐릭터 때문에 힘든 것은 힘들다고 표현하면 안되고...촬영할 때 힘들다기보다는 굉장히 긴장했던 건데...뭔지 아세요? 바둑판에 바둑돌 하나 착점하면서 동시에 쭈욱 밀어서 끝선에 딱 세워야 하는 씬이었어요. 연기에 대한 부담이 있어야 되는데 이게 더 부담되는 거야. 신기하게도 영화가 잘되려고 그랬는지 세 컷 만에 성공했어요. CG(컴퓨터그래픽)가 아니에요. 프로기사들이 아마 그걸 보고 앞으로 점심내기들 하지 않을까? 어느 인터뷰에서 우스갯소리도 했지요.”
(조동인) “입단이 좌절된 연구생에 대해 ‘이무기’란 표현을 쓰더군요. 애환과 아픔이 담긴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연구생 출신을 연기해야 했기에 기획을 담당한 강나연 박사(연구생 출신의 아마6단)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얘기를 많이 듣고 기원에 가 바둑도 둬보고 했지요. 전 바둑을 오래 둔 사람인 데도 손떨림으로 NG 많이 났어요.”
(김뢰하) “이 친구가 했는 데도 그럴 정도였으니 바둑을 모르는 다른 주연 썼으면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 영화의 감초 역할로 재미를 북돋운 남해의 오른팔 인걸 역의 박원상.
바둑이나 인생이나 무를 수 없잖아요
- 영화를 찍으면서 바둑에 대한 남다른 매력을 새삼 느낀 게 있다면? 바둑과 인생의 유사한 점을 든다면?
(김뢰하) “결국은 그게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거 같아...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두다 보면 내 말 사는 거 생각 않고 잡을 생각만 하게 되지.”
(박원상) “아생연후에 살타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아생연후살타 아니하시다가 저한테 ‘개박살’ 나셨어요, 그래? 저가 계가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그 후로 뢰하 형님과는 절대 안둬요. 하하.”
(김뢰하) “야, 그건...나참~. 촬영현장에서 그 당시는 영화인물에 들어가 있어야 할 시간대였는데 근데 옆에서 자꾸 쿡쿡 찌르며 바둑을 두자는 거예요. 요놈 혼좀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 잡아버렸는데 절대 돌을 안 던지는 거야. 다음 씬 몰입에 딴생각을 하다 살려주는 바람에 역으로...”
(박원상) “살려주는 바람에? 그렇게 얘기하면 안되지. 내가 이미 본 거야. 형의 약점을. 하수를 경적하면 진다...그것도 교훈이죠. 제가 일요일 KBS 바둑왕전은 절대 안 놓치거든요. 제 수는 18급이지만 제 눈은 거의 단 수준이랍니다. 흐흐흐.
바둑의 매력이라면, 내가 한수 상대방이 한수씩 두는 게 바둑이잖아요. 극중에도 나오지만 공정한 룰을 따르는 세계가 바둑세계죠. 인생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한수를 두면 부족함을 느끼고 그래서 두수씩 두고 싶지만 그러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이 사회에는 한번에 두수씩, 다섯수씩 두려고 하는 인간들이 많잖아요.“
▲ 티격태격, 주거니 받거니...친형제 같은 김뢰하, 박원상 두 사람의 입심은 소문이 나 여러 방송으로부터 '콜'을 받고 있다.
(조동인) “엎치락뒤치락 하고 위기도 맞고, 그런 면들이 인생을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위기가 왔을 때 잘 벗어나면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게 인생과 닮았다고 봐요. 아직 제가 어리긴 하지만...빠른 게 중요시 되는 사회에서 바둑이 너무 느려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어마어마한 전투와 수읽기가 있잖아요. 그게 큰 매력이죠.”
(김뢰하) “또 있죠. 일수불퇴! 바둑도 놓다보면 실수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나 한번 두면 못 무르잖아요. 인생도 그렇죠. 살다보면 무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때가 많죠. 그렇지만 결코 무를 수 없는 게 인생이죠. 바둑도 그렇지만 영화도 처음 설계, 포석을 잘해야 하지 않나요? 영화도 사전 판짜기를 잘해야 완성했을 때 좋은 영화가 나옵니다. 말 많고 탈 많은 영화는 결코 잘되지 않아요. 한번 찍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바둑과 영화와 인생이 닮았다고 봅니다.”
극중인물 남해는 감독 자신
- 바둑에 복기란 게 있죠. 아직도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습니까?
(박원상) “끝내고 나면 잊어버리는 데 익숙해져 있어서...영화에서 인걸이 남해한테 ‘마무리, 끝내기가 중요한 겁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죠. ‘형님의 마음을 알겠습니다.’가 그 의미입니다. 감독님이 처음 이 영화 제목으로 ‘끝내기’라고 지었어요. ‘끝내기’란 제목에 굉장히 애착을 가지셨지요.”
(조동인) “바둑을 아는 사람에겐 그렇지 않지만, 일반사람들에겐 ‘끝내버린다’ 막장 같은 어감이 든다 하여 ‘끝내기’는 선택되지 못했죠. 그 전에는 ‘아마추어’로 갈까 고심하기도 했고요.”
(김뢰하) “정지영 감독님이 조감독님과 친분이 각별하셔서 <스톤> 시나리오를 오래전부터 보고 본인이 제작하려고도 한 바 있지요. 지금 완성된 영화 말고, 정감독님은 민수 쪽으로 초점을 완전히 맞춰서 가야 한다, 남해는 부수적으로 가야 한다고 조언하셨나 봐요. 어지간하면 조감독님이 따를 텐데 그걸 못 견뎌 하고 시나리오를 들고 나갔다고 합니다. 조감독님이 지키고자 하는 어떤 게 있었던 거 같아요. 남해라는 인물을 축소시키지 못할 만큼의...남해라는 인물이 조감독 본인이 아닌가...그 인물을 통해 뭔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던 듯해요. 그러니 정감독님이 이렇게 해야 성공한다며 ‘꼬셨을’ 때도 ‘마이 웨이’를 고집한 거라고 봐요. 영화 플롯의 주인공은 민수지만 흐름의 주인공은 남해입니다. 감독의 가치관, 세상을 바라보는 눈...남해의 눈으로 보는 감독의 눈이 온전히 드러나 있지요.”
- 세계 영화제로부터 초청을 많이 받았죠?
(김뢰하) “수상만큼이나 명예스런 게 초청작입니다. 어느 영화제든 오겠다는 걸 다 받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심사를 거쳐 초청하는데 로카르노 영화제, 하와이 국제영화제, 이탈리아 아시아티카 영화제, 미라케시 국제영화제 등등에서 초청받았다는 것은 작품성을 인정받았다는 거지요.”
(조동인) “프랑스 르카르노 영화제는 세계 4번째로 큰 영화제인데 거기서 비중 있는 신인감독상을 받았어요.”
(김뢰하) “제가 그때 함께 현지에 갔었는데, 외국인들은 바둑을 잘 모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제일 좋았어요. 초청받은 경쟁작들 중 가장 큰 영화관을 배정받았고 3번 틀었는데 다 꽉 찼어요. 다른 작품들은 반도 안 찼는데 말예요.”
▲ VIP 시사회에는 많은 프로기사가 걸음했다. 이민진, 강다정, 이창호 9단이 포토존에서 포즈를 취했다.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한 프로기사와 아마고수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 영화를 찍을 때 위암에 걸린 걸 아셨던가요?
(조동인) “영화 편집을 마무리할 즈음 알았어요...”
(박원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가까이 살고 있는 저도 다른 이를 통해 알았어요. 그 어떤 운명인지, 자기가 이야기를 쓴 대로, 가수가 자기가 부른 노래, 김정호처럼 말에요. 인생이란 게 참 공교롭구나 하는 생각이 감독님 뵈면서 많이 들어요”
30년을 기다린 영화, 바둑팬을 기다리는 영화
- 극중 남해와 민수가 LP판이 가득 찬 와인바에서 대화를 나눌 때 흘러나오는 노래 있죠? 조감독이 평소 좋아하시던 곡인가요?
(조동인) “최양숙 씨가 부른 ‘기다리겠어요’라는 곡이에요.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노래이긴 한데 가장 좋아하신 노래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너무나 당신을 사랑했기에 떠나가버린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배면에 흐르는 중저음의 허스키한 여가수 목소리가 중년의 한 남자를 떠올리게 한다. 바둑영화 한 편을 만들고자 30년을 새벽안개처럼 엎드려 기다린 사람이다. 그가 만든 영화처럼, 일면식도 없었던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가 기원에서 우연히 스쳐지나가지만 교집합이 되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인생이 바둑이라면 다시 두고 싶은데 그게 안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자신을 죽이고 민수를 살림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길을 택한 극중인물 남해처럼, 중년의 감독은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 한 편을 남기고 새벽안개처럼 떠났다. 떠났다고, 사라진 건 아닐 것이다.
오늘, 6월12일 그의 영화가 개봉되었다. 단 몇 천만원이라도 끌어오면 촬영을 재개했다 멈췄다 하기를 반복한 영화. 편집을 완료하고도 걸어주겠다는 개봉관을 잡지 못해 1년 넘게 문전박대를 마다않고 동분서주한 끝에 빛을 보게 된 한 중년감독-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바둑인’조세래 감독의 영화가 오늘 걸렸다. 1시간 40분 남짓 러닝타임이지만, 거기엔 30년 응축된 그의 바둑행마, 인생행마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기다리겠어요.’ 그가 말하고 있다. 바둑팬이라면... <사진/ 김수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