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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몬테 카시노 전투(Battle of Monte Cassino, 1944년)
몬테카시노 전투(Battle of Monte Cassino), 로마 전투 또는 카시노 전투는 추축국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겨울 선을 형성하여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자 연합군이 4차례에 걸쳐 이를 돌파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격전이다. 이 전투의 목적은 로마로 향하는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4년 초, 라피도가리, 리리, 가리지리아노 계곡과 근처 능선 및 고지에 위치한 독일군은 겨울 선의 서쪽 절반을 방어하고 있었다. 몬테카시노는 AD 529년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에 의해 세워진 수도원이 위치한 고지였다. 이 고지는 인근 마을인 카시노와 리리 및 라피도 계곡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보호된 역사지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이곳을 점령하지 않고 있었다. 수도원 인근의 경사면에서 독일군은 몇몇 거점을 마련했다.
이태리 반도 남서부 해안에 상륙한 미 제5군(미군 장군이 지휘하지만 실제로는 영국군을 포함 다른 연합국 군대도 미군과 함께 편성되어있음)은 미육군 마크 크라크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북아프리카 횃불 작전부터 등장했던 조지 패튼 장군이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 못지않게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며 시실리 섬 점령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야전병원 방문 중에 전투 후유증으로 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던 병사가 장군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고 병사의 뺨을 때린 일이 언론에 보도되자 직위 해임되어 버리고 이태리 본토 상륙은 패튼보다 한참 모자라는 역량의 크라크 장군이 맡게 되었는데 따뜻한 태양을 기대했던 이태리의 날씨가 계속 비가 내리면서 악천후인데다가 오랜 전투 경험으로 연합군에 비해서 훨씬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독일군 방어 부대의 효과적인 공격으로 미 제5군은 애초 작전 계획에 큰 차질을 빚었다.
독일군은 8월에 시실리 섬을 점령당하고 후퇴하면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대포들의 대부분을 무사히 본토로 옮긴 후에 연합군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상륙 지점에 배치를 하게 되는데 상륙도 하기전에 이태리 무솔리니 체포와 연합군에 대한 항복 소식을 해상에서 접한 미 제5군은 이미 긴장을 늦추고, 심지어 상륙 작전 전에 함포 사격조차 안하고 상륙을 시도했다가 독일군의 강력한 포격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여기서 미 5군의 고전은 당시 쿠스타프 라인이라고 불리는 독일군의 제1방어선의 방어 준비를 하는 시간을 벌어줬고, 연합군은 어물쩍하는 동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쿠스타프 라인에서 독일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하게 된다.
한편 남동부 해안에 상륙한 몽고메리의 영국 제8군은 크라크 장군의 5군이 고전을 하는 것과는 달리 성공적으로 상륙을 했고 전진을 하게 된다. 당시 영국의 윈스톤 처칠 수상은 이태리 상륙 후에 불과 한 달이면 쿠스타프 라인에서 얼마 멀지 않은 로마를 점령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으며, 이런 예측은 연합군 수뇌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레르노 해안에 상륙한 마크 크라크 장군의 제5군은 초반에 해군 함포 지원도 없이 상륙을 시도하다가 독일군의 강력한 포격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함포 지원을 받으며 간신히 독일군 방어를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독일군은 쿠스타프 라인으로 후퇴를 결정하였고 1월 16일 영국 제8군과 살레르노에서 호되게 당했던 상륙부대 미 제5군은 합류하게 된다.
이제 바야흐로 연합군과 독일군이 쿠스타프 라인의 급소 “몬테 카시노”에서 대격전을 앞두게 되었는데 독일군은 카시노 산 주변에 진지를 파고, 카시노 마을 입구에 지뢰를 매설하였으며 마을 동쪽을 흐르는 라피도 강변의 야지를 침수시켜서 연합군의 접근을 막는 등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게다가 안지오 해안에 상륙한 존 루카스 장군 휘하 제6군(주로 미군 레인저 3개 대대와 영국 코만도 부대들이 앞장 선 상당히 강력한 전력의 부대)은 별다른 공격을 받지 않고 상륙에 성공한 후에 신속히 이동하기보다는 애초 시나리오 대로 쿠스타프 라인을 방어하던 독일군 병력들이 쇄도하여 공격할 것을 대비해서 해안에 교두보를 단단히 확보한다는 의도에서 같은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무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이유는 불과 몇 주 전에 살레르노 해안에서 엉성하게 상륙하였던 마크 크라크 장군의 5군이 상륙 직후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했던 탓에 크라크 장군은 안지오 상륙을 지휘하는 루카스 장군에게 상륙 직후 해안 교두보를 확고하게 마련하고 보급을 충분히 완료한 후에 움직이라는 충고를 하였는데 루카스 장군은 이 충고를 지나치게 “충실하게” 따른 탓에 적의 후방에 상륙하여 허를 찌르는 입장이었으면서도 도리어 쿠스타프 라인에서 보낸 독일군이 공격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충분히 보충된 병력으로 연합군 상륙 부대를 포위할 수 있게 된다.
상륙 후 얼마 안 되어 1월 29일 안지오 해안에 북쪽에 위치한 시스테르나 마을에서 미 육군 최강의 부대로 알려진 “레인저” 2개 대대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거의 전멸을 하는 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애초에 시스테르나 마을은 미군 3 보병 사단이 점령하려다가 실패하였고 그 후에 레인저 3개 대대가 투입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4호 전차를 앞세워 레인저 부대들보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공격을 했고 761명 중에 751명이 전사하여 2개 대대는 사실상 전멸을 한 셈입니다.
뒤늦게 미군 전차 부대가 지원을 나섰지만 마을 어귀에 파묻어 놓은 독일군의 지뢰들로 인해서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6군에 편성되었던 미군 제1기갑 사단은 개전 첫날 100대의 전차를 잃었다. 대부분 셔먼 탱크였는데 지뢰로 인한 파괴뿐만 아니라 백전노장이었던 독일 기갑병들이 몰고 나온 4호 전차와 소수의 팬저 전차들의 신속한 공격에 경험이 부족한 미국 기갑병들은 셔먼 탱크와 함께 숯덩이가 되곤 하였다.
결국 안지오 해안에 상륙한 6군은 독일군의 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애초에 기대했던 쿠스타프 라인을 방어하는 독일군의 병력 약화에 별로 기여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과 44km 떨어진 로마로 신속하게 진군하지도 못하고 제 자리에서 수 주일에 걸쳐서 교착 상태에 빠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안지오 상륙에 투입된 연합군 6군과 독일 14군은 1월 22일 상륙일로부터 5월 23일 연합군 반격에 이르는 4개월간에 걸쳐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5월 22일까지 6군의 사상자는 3만명으로 4400명 전사, 18000명 부상으로 집계되었고 미군에 한해서는 2800명 사망, 11000명 부상을 포함, 17000명의 병력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독일군측 기록에 의하면 미군 2400명을 포함 68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독일 14군은 5500명 사망, 17500명 부상으로 약 3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연합군은 독일군 포로 4500명을 잡았다고 기록했다. 1월 상륙 초기에 독일군이 보여줬던 강력한 전투력은 시간이 가면서 사상자들이 발생하면서 교체된 신병들로 인해서 점차 전력이 약화되었다.
어쨌든 안지오 상륙 작전은 계획 단계에서 이후 한국 전쟁 중에 인천 상륙 작전 만큼이나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발한 전략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막상 상륙 당일부터 연합군 측 지휘관이었던 존 루카스 장군의 지나치게 신중했던 움직임으로 인해서 백전노장의 독일군들이 초반에 상륙 부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시간을 주었던 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런 안지오 상륙 작전의 실패는 결국 쿠스타프 라인을 돌파하기 위해서 미 5군과 영국 8군이 자력으로 뚫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으며 이런 작전의 차질은 결국 이태리 전선에서 교착 상태를 장기화 시키게 된다.
1월 17일에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비교적은 작은 규모의 영국군과 미군 부대들의 공격이었고 일부는 전진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공격의 실패함에 따라 성공한 병력조차도 현 위치에서 참호를 파고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 되었다. 연합군 지휘부는 1월 20일 미 36사단이 라피도 강에 수많은 보트를 띄우고 본격적으로 도강을 시도하는데 규모로 봤을 때 이 공격이 최초의 대공세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일군은 유리한 위치에서 강을 건너오는 미군들을 향해 집중 포화를 쏟아 부었고 대부분의 미군 병력들은 도하를 포기하고 후퇴하거나 강 한가운데서 익사하여 시체조차 찾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일부 간신히 도하에 성공한 병사들조차 더 이상의 전진은 엄두도 못내는 신세였다. 게다가 강변에 곳곳에 묻어놓은 지뢰들은 간신히 살아서 육지로 기어 올라온 병사들을 한순간에 산산조각 내버렸다.
어쨌든 이렇게 연합군의 야심찬 라피도 강 도하 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게 된다. 작전 개시 이틀 만에 36사단은 1,000명이 넘는 전사자와 행방불명, 그리고 부상자를 합하면 무려 2,100명의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1월 22일에 시작된 안지오 상륙 작전도 이미 설명 드렸듯이 몬테 카시노를 방어하는 독일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얻지 못하였고, 라피도 도하 작전이 실패로 끝난 후에 1월 24일 이번에는 미 2군단에 편성된 미 육군 34 보병 사단과 자유 프랑스군 부대(프랑스 망명 정부의 부대로써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 병사들도 함께 편성되었음)가 함께 공격을 시작합니다. 2월 11일까지 이어진 처참한 전투의 결과 독일측 프랑크 장군이 지휘하는 44 보병 사단을 밀어내고 드디어 몬테카시노 산 초입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성과를 얻게 된다.
특히 산의 우측 경로로 진격했던 자유 프랑스군은 독일 링겔 장군 휘하의 제5 산악 사단에 타격을 가하면서 전진을 하게 되는데 1월 31일까지 이어진 공방전에서 프랑스 사단은 무려 2,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프랑스 군에 뒤를 이어서 미 36사단의 잔여 병력과 합쳐진 미육군 34 사단은 추가 전진의 임무를 받게 된다. 본격적으로 산악 지대에 진입한 34 사단은 온통 돌투성이의 척박한 지형에서 전차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이 유리한 위치의 독일군과의 전투를 시작한다. 특히 사방 천지에 설치된 독일군의 부비트랩으로 미군은 뜻밖의 피해를 입고, 병사들은 공포에 떨게 된다.
독일군은 쿠스타프 라인의 급소라 할 수 있는 몬테카시노 지역에서의 전투를 위해서 이미 3개월 동안 충분한 시간을 갖고 방어 준비를 해왔으며 치밀하게 설치된 부비트랩을 건드린 미군 병사들은 순식간에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로 목숨을 잃곤 하였다. 게다가 돌산은 공격하는 입장에서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자연 엄폐물이 없는 탓에 독일 저격병들에게 좋은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태리의 겨울은 끝없이 내리는 비와 뼈 속까지 얼게 하는 추위로 병사들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게 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2월 초까지 공격 목표인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불과 1마일 전방까지 전진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2월 7일 1개 대대 병력이 수도원이 위치한 언덕 바로 밑에 지점에 도착하였고 이 지점은 불과 370m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 중 1개 분대가 최초로 절벽이나 다름없는 수도원을 향해 접근하려는 순간 수도원 바로 앞에 배치되어있던 독일 제2 공수 여단의 일제 사격이 시작된다. 지형적으로도 유리하였지만 나치 최정예 부대라 할 수 있는 그들의 공격에 미 34사단 병사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후퇴하게 된다. 미군의 후퇴 후 그 자리는 미8군 소속 뉴질랜드 사단(뉴질랜드 군과 인도군으로 구성)이 맡게 된다.
2월 11일까지 3일 동안 수도원에 진입하려던 미군의 공격은 독일 공수 부대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약 20일 간의 치열한 전투의 결과로 미 34사단의 2,000명(사단 병력의 80%)의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근접한 연합군과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독일은 수도원을 방어하는 공수부대에 추가로 보병 대대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새롭게 투입된 인도군 부대는 카시노를 공격한다는 것이 지형적으로 얼마나 불리한 조건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전투를 시작하였다. 그런 탓에 유리한 지형에서 반격을 가하는 독일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 고전을 면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군 수뇌부는 구스타프 라인을 뚫기 위한 공격의 거듭되는 실패의 주된 이유가 바로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독일군들이 거점을 잡고 공격해오는 연합군들을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정확한 공격 지점을 관측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런 판단은 실제로 객관적인 증거도 없이 정황상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들이 모여서 기정사실화 된 상황이었고 1944년 2월 11일 제4 인도군 사단은 수도원의 공습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미공군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강력한 폭격기들이 얼마나 위력적으로 지상군을 지원하는지 선전할 수 있는 기회라 판단하고 수도원 폭격 작전을 위한 폭격 규모를 필요 이상으로 증가시켜서 계획한다. 하지만 마크 클라크 장군과 같은 일부 지휘관들은 이런 수도원 폭격의 필요성에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 독일군이 수도원에 주둔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주둔해있다면 분명히 수도원이 방어를 위한 효과적인 관측 거점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에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한다. 실제 독일군의 포격은 수도원 밑쪽에 언덕에 구축된 진지에서 이루어졌고, 수도원을 폭격할 군사적인 필요성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 훗날 알려진 사실이었다.
실제 독일 방어군 사령관 케슬링 원수는 수도원을 방어 거점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연합군측에 전달하였으나 연합군이 이런 사실을 믿지 않고 공격을 해올 것이라는 사실도 예측하여 공습 전에 대부분의 귀중한 고문서들과 서적들을 수도원 밖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어쨌든 2월 15일 무려 142대의 “하늘에 요새” B-17 중폭격기와 47대의 B-25 미첼 폭격기 그리고 40대의 B-26 마로더 폭격기까지 하늘을 뒤덮고 무려 1,150톤의 고성능 폭탄을 수도원 위로 쏟아버렸다. 엄청난 폭발이 거듭되면서 수도원의 윗부분은 순식간에 거대한 자갈 더미로 바뀌어버렸는데 공습 당시에 수도원에는 독일군들이 없었고, 수도원을 피신처로 삼아 거주하던 230명의 이태리 주민들만 폭격의 희생물이 되었다. 게다가 수도원 주변에 주둔해있던 독일군들은 수도원에 집중된 공습에서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막연한 추측만으로 수백년 동안 귀중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지닌 중세 수도원을 무지막지한 폭격으로 부숴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셈이다.
당시 공습이 얼마나 서둘러서 준비되었는가는 미 공군의 공습 당일 수도원 코앞에까지 전진해있던 인도군 사단 병력이 그날 공습 계획을 전혀 통보받지 못하였고, 정작 공습이 시작되자 독일군 못지않게 인도군들도 크게 놀랐다. 연합군 지상군이 공격 준비도 되기 전에 공습이 너무 일찍 시작되었고, 이어진 악천후로 효과적인 지상군의 공격이 이어지지 못하였다.
카톨릭 교계에서는 이 어리석은 공습에 대해서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하지만 정작 바티칸에 교황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당시 교황은 이태리 독재자 무솔리니와 결탁하고,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눈 감았던 비열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일부 폭격은 오폭으로 연합군 지상군에게조차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실제로 16개의 폭탄이 몬테카시노에서 무려 27킬로미터나 떨어진 5군 부대에 떨어져서 피해를 입혔다. 심지어 클라크 5군 사령관이 집무 중이던 임시 관사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던 트럭이 폭탄으로 파괴되었다.
공습 이전까지 독일군은 수도원에 진입하지 않고 성직자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도리어 공습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수도원에서 성직자들과 주민들이 모두 떠나자 이제는 마음 놓고 수도원을 방어 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아이러니컬하게도 연합군의 공습 덕분에 자갈 더미가 되어버린 수도원은 독일군 입장에서 이눈치 저눈치 안보고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최정예 공수부대원들이 본격적으로 수도원의 폐허를 효과적인 방어진지로 구축하게 된다.
공습 후에 연합군 소속 인도군 부대들은 지상 공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공격은 절반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폐허 더미 속에서 맞닥뜨린 독일 공수부대와 인도군들의 전투는 때로는 백병전이 될 정도로 처참한 지경이었다. 이틀 밤에 걸친 공격의 결과 인도군에 15명의 장교들 중에서 12명이 전사했고, 313명의 사병들 중에서 절반이 넘는 162명을 잃었다. 2월 18일까지 300명이 넘는 전사자가 추가로 발생하면서도 인도군은 더 이상의 전진을 못하고 도리어 후퇴를 하게 된다.
수도원 공습 후에 지상군 공격이 독일군 공수부대의 강력한 반격으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게 되자 연합군은 다시 한 번 공격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악천후가 계속됨에 따라 실제 공세가 시작된 것은 3월 15일이었다. 3월 말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 수백명의 전사자를 양산하면서 끊임없이 살육전이 이어졌다. 연합군 폭격에 수도원과 카시노 마을에 진입하여 방어를 하던 독일군 공수부대들도 절반 이상이 전사하였고, 특히 인도군 부대에 소속되었던 네팔 출신의 산악전 전문 부대 고르카군은 몬테카시노 돌산에서 독일군 공수부대원들과 맞서서 용맹하게 싸웠으나 거의 절반의 병력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게 된다.
인도군이 수도원 코앞까지 전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전진을 못하자 연합군 사령관 알렉산더 장군은 새로운 전략을 고심하게 되는데 이때 자유 프랑스군(점령된 프랑스에서 탈출한 드골 망명 정부 소속 부대) 지휘관 주앵(Juin) 장군의 의견을 채택하게 되는데 카시노를 빙 둘러싸고 포위하여 압박해가자는 것이었다. 이 작전에는 미5군(미 2사단과 자유 프랑스 군)과 영국8군(13사단과 망명 폴란드 군 사단)이 투입되었다. 4월이 되자 완연한 봄이 되어 3월까지 인도군의 진격을 방해했던 끔찍한 악천후는 멈추게 되었고 공격하는 입장에서 보다 넓은 진영으로 기갑부대의 효과적인 운영이 가능해졌다.
본격적인 공세는 5월 11일부터 이틀간 시작된다. 영국8군의 1,060문의 대포와 미5군의 600문의 대포가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고 영국, 미국, 뉴질랜드, 폴란드, 남아프리카 그리고 자유 프랑스군까지 총동원된 지상군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였다. 4개로 나뉘어 진 지점에서 1시간 30분의 공격이 지속되었으나 몬테 카시노 서쪽을 공략하던 미군 쪽은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거의 진격을 못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다행히 미5군 소속 자유 프랑스군이 먼저 전진에 성공을 거두고 동쪽에 영국 8군이 맡은 지역에서 영국 제4보병 사단과 제8 인도군 사단은 라피도 강을 건너서 몬테카시노에 근접한 거리까지 전진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독일군의 치열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인도군 사단의 공병들은 라피도 강에 다리를 놓고 캐나다 제1기갑여단의 전차들을 도하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동안 미군과 인도군이 선봉에 섰던 뉴질랜드 사단의 공세 때 라피도 강에 가교 설치에 실패하여 전차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을 고려하면 라피도 강 도하 작전의 성공은 향후 연합군 공격의 판도를 바꾸게 된다. 향후 맞닥뜨리게 될 독일 전차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연합군 전차의 투입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몬테카시노 위쪽 산악 지대에서는 독일군 산악부대가 폴란드 망명 정부군에 의해 패퇴하고 3일 동안 용맹한 폴란드 군은 독일군 공수부대와 양쪽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폴란드 군은 3일 동안의 전투에서 무려 281명의 장교들과 3,500명의 사병들을 잃게 된다. 놀랍게도 이런 연합군의 집요한 포위 공격을 막아낸 독일군 공수부대 병력은 고작 800명이었습니다. 훗날 생존한 독일군 공수부대 장교의 증언은 당시 폴란드 군의 용맹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우리가 진격해 들어간 폐허 속에서 한명의 폴란드 병사가 피투성이로 두 다리가 절단된 채 발견되었다. 이미 탄환도 바닥이 난 채 우리를 보면서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주변에 돌맹이를 집어들어 던지면서 저항했다. 그는 곧 총알 세례를 받고 절명했는데 정말 끔찍한 순간이었다....”
폴란드는 나치 독일이 전쟁을 발발한 직후 전격전의 희생물이 되어 철저하게 초토화되었고 엄청난 숫자의 군인들과 주민들은 점령군 독일군의 집단 학살로 희생되었다. 그런 탓에 폴란드 망명 정부의 병사들은 독일에 대한 적개심으로 말하면 미군이나 영국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탓에 비록 영국 8군에 소속되어 참전한 전투였지만 독일 최정예 부대인 공수부대와 전투에서 단 한걸음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임했던 것이다.
5월 12일 오후까지 라피도 강을 건널 수 있는 가교는 추가로 설치되었고 5월 13일에 드디어 독일군의 동쪽 진영이 미5군의 공격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몬테카시노에 인접한 몬테 마조 산 정상을 점령한 자유 프랑스 군의 활약으로 연합군은 몬테카시노를 향해 대등한 높이에서 포격을 가할 수 있게 되면서 독일군은 퇴각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포탄들을 전부 연합군을 향해 일제히 쏟아 내면서 타격을 주게 된다. 케슬링 원수가 이끄는 독일군 방어 병력은 쿠스타프 라인을 드디어 포기하고 약 13킬로미터 북쪽에 설정한 방어선(일명 히틀러 라인)으로 후퇴하게 된다.
5월 15일 영국 78사단이 투입되면서 몬테카시노 공격에 큰 타격을 입고 주춤했던 폴란드군은 두 번째 공세를 시작한다. 몬테카시노에 고립된 독일군 병력은 치열한 저항으로 연합군에게 마지막까지 엄청난 타격을 주었지만 결국 쌍방이 맞닥뜨리는 거리까지 접근하게 되자 코앞에 적에게 총검을 찔러대는 백병전 양상이 되어갔다. 결국 5월 17일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폐허에 남은 독일 공수부대원들은 최초로 수도원에 진입한 폴란드군의 공격에 하나 둘씩 쓰러져갔고, 얼마 안 되어 온통 돌무더기로 변한 수도원을 점령한 폴란드군은 폴란드 국기를 게양하면서 몬테카시노 전투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영국 8군은 히틀러 라인까지 후퇴한 독일 방어 부대를 뒤쫓아 거침없이 진격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결국 연합군은 오랜 몬테카시노 전투의 승리 후에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다음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