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 파괴 투쟁 조직 병인의용대 결성, 상해 일본총영사관 폭파에 나서 정문 폐쇄시켜.
 이후 선생은 임시정부 내무차장으로 1925년 6월 13일 정위단(正衛團)을 조직하였다. 이는 일부 독립운동가를 사칭하는 사람들이 동포 학생 및 상인을 협박하여 금품을 강탈하고, 혹은 유복한 유학생을 인질로 하여 송금을 강요하는 등의 사건이 빈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미지가 손상됨은 물론, 한인 동포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나아가 독립운동의 전도에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를 방지하고자 선생을 비롯한 경무국 참사 강창제, 고준봉․박창세․유창준․김정근․박규명․김예진 등 8명은 경무국 응원단체로서 정위단을 조직한 것이다.
1926년 1월 선생은 정위단을 기반으로 병인의용대를 결성하였다. 이는 독립운동 고양과 실추된 임시정부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병인의용대는 투쟁방식으로 일제의 주요 식민통치 기관의 파괴, 일제 관리 및 친일 밀정의 처단, 반일 시위운동의 전개 등 의열투쟁 방략을 채택하였다. 병인의용대가 추구한 의열투쟁 방략은 다음과 같은 창립선언서에 잘 나타난다.
본대는 임시정부의 기치하에 철혈주의로 독립운동에 예신(銳身) 자진하는 의용청년을 체맹(締盟)하여 적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적에 부수하는 일체의 이적행위를 서제(鋤除)하기 위해 이를 선언한다.
본대는 3․1선언의 기본약속을 극존(克尊)하여 1인 1각까지 최후의 노력으로서 민족의 전위를 자임하고 사회의 기율을 엄수하여 전선의 통일을 보유하는 신성으로서 전운동의 대본영인 임시정부의 권위와 정신을 옹호선양하여 적의 정치상 경제상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침략정책을 주모(主謀) 행사하는 적리(敵吏)와 제국주의의 주구배인 한간(韓奸)을 습격 암살하는 적극행동을 취한다. 혁명은 길이 있다. 흑철(黑鐵)과 적혈(赤血)뿐이고 다시 제2, 제3이 없다. 암살 파괴는 혁명가의 무상(無上)한 무기이며 유일한 수단이다. 강대한 폭력을 타도 전복시키려면 오직 암살과 파괴뿐이다.
암살․파괴를 행동방략으로 내건 병인의용대는 우선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였다. 그것은 상해 일본총영사관이야말로 임시정부 요인들은 물론 독립운동가들과 한인 동포들을 체포 탄압하던 원부(怨府)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병인의용대원들을 지휘하여 세 차례에 걸친 폭탄투척의거를 전개하였다.
첫 번째 의거는 1926년 4월 8일에 단행되었다. 선생은 김광선․김창근․이수봉 등 3명의 대원으로 하여금 일본총영사관과 그 후면도로에 접한 부속건물에 폭탄 2개를 투척하도록 한 것이다. 두 번째 의거는 같은 해 9월 15일 선생이 직접 제작한 시한폭탄을 중국인 서윤쌍(徐倫雙)에게 주어 일본총영사관의 폭파를 기도한 것이다. 세 번째 의거는 1927년 강창제․김창근․이수봉 등으로 하여금 시한폭탄을 일본총영사관에 투척하도록 하여 창고건물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이 계속된 폭탄투척의거로 말미암아 일제는,
당관(상해 일본총영사관)에서도 충분히 경계하기로 하고 우선 경찰보조원 1명을 증원하여 감옥의 감시를 엄하게 하고, 정문을 폐쇄하여 출입구를 후문 1개소로 하고 이곳에 문번 이외에 순사 2명을 상치(常置)하여 입문자를 감시하게 하고, 또 수시로 관의 문외를 순시하게 하였다.
고 하는 등 재외공관으로서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세 번에 걸친 의거는 비록 상해 일본총영사관 폭파라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폭로하고 한국민족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는 데 충분히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의열투쟁이 목적하는 바이다. 의열투쟁의 진정한 의미는 메시지 전달에 있는 것이지 인명의 살상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신자는 반드시 처단한다.” 친일 밀정과 주구배 색출 처단하고 병인의용대 부흥시켜
 또한 선생이 이끈 병인의용대는 친일 밀정 및 주구배를 색출하여 처단하였다. 1926년 2월 1일에 최병선․장영환․김광선․박인 등 4명의 대원은 친일 밀정 박제건을 상해 북강서로에서 처단한 것이다. 최동윤․박남제라고도 불린 박제건은 한중협회 회원에 관한 자료를 일제에게 넘겨준 자이다. 그리하여 이들 회원 다수가 체포되게 한 장본인으로 독립운동진영에서는 반드시 처단해야 할 밀정이었다. 같은 해 2월에서 3월에 걸쳐 선생이 이끈 병인의용대는 4인의 친일 밀정을 처단하였으며, 4월 16일에는 이영선을 시켜 일본총영사관 순사인 내굴(內屈)의 처단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특히 병인의용대는 국내의 비밀결사와 연계하여 일제 식민통치 기관의 폭파나 반일 시위운동을 주도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그리하여 1926년 6월 10일로 예정된 순종황제의 인산일에 맞추어 의거를 수행하기 위해서 김광선․이영전․고준택․김석룡 등 4명의 대원을 국내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해의 황포탄에서 피체됨으로써 의도했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사천성(四川省) 만현(萬縣)으로 갔고, 여기에서 만현의원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갔다. 그리하여 도산 안창호의 피체 이후 처음으로 1933년 1월 상해 프랑스 조계의 미국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9회 흥사단 원동대회에 참석하였다. 20여 명의 단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이 대회에서는 일부 단칙의 개정, 작년도 사무보고, 안창호 체포의 전말 등에 대한 보고와 결의가 있었는데, 이때 선생은 흥사단 원동반 제5반 반원으로 선임되었던 것이다. 그 해 7월 선생은 다시 상해로 와서 1개월 동안 체재하며 병인의용대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그 결과 예전의 동지들은 다시 병인의용대를 부흥시켜 박창세를 대장으로, 강창제를 부대장으로 선임함으로써 조직을 재건하였다. 이렇게 병인의용대를 재건한 뒤, 선생의 의열투쟁 노선을 따라 친일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여 갔다. 1935년 12월 14, 15일경 병인의용대원 김창근은 남경에서 김동우(본명 나종균)로부터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근무하는 등정(藤井) 경부보가 우리들 혁명투사를 체포함이 혹심하므로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김창근은 상해로 돌아와 자택에서 폭탄 1개를 제조하여 12월 24, 25일경 상해 공동조계 소재의 등정 경부보 관사 정문에 폭탄을 장치한 뒤 그가 외출할 때 폭사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선생의 의열투쟁 노선은 재건 병인의용대에 의해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갔다.
하지만 선생은 1936년 봄부터 위암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6월 26일, 40세의 한창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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