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내용을 읽기전에 청(淸)나라의 북경(北京)은 어디에 있었나?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하 참고문헌은 한국 고전 번역원의 글을 참조,인용하였습니다.)
전에 "대륙조선사 연구회"의 자유게시판에 올린 "청나라의 북경(北京)은 어디에 있었나?라는 글을 토대로 청나라의 강역은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청나라의 강역을 이해할려면 과거 서역(西域)의 실체적인 역사의 대략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배워왔던 청나라 관련 역사와 청나라와 관련된 서역의 역사는 허구와 오류로 가득한 역사입니다.
청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청나라의 강역은 상상을 초월 합니다. 지금껏 배워왔던 청나라의 역사는 왜곡된 역사이며,축소된 역사입니다. 청나라의 그 실체적인 역사를 안다는 것은 다시말해,조선의 역사를 알수있다는 말입니다.
심전고(心田稿)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제국(諸國)의 기록
"지금의 중국 땅이 서북쪽은 감숙(甘肅)에 이르고 서남쪽은 면전(緬甸 미얀마)에 이르며, 남쪽 끝에 운남(雲南), 귀주(貴州)가 있고 동쪽에는 오랄(瓦喇 랴오닝 성[遼寧省] 부근), 선창이 있다. 이른바 서역, 토번(吐蕃), 돌궐(突厥)의 땅이 모두 다 판도에 들어 있다. 신강(新彊)을 개척한 뒤부터는 폭원(幅圓)의 큼이 고금에 없었다. 조공하는 나라도 전대의 갑절로서, 점성(占城), 우전(于闐), 조와(爪哇 인도네시아의 자바), 유구(琉球), 안남(安南), 섬라(暹羅), 진랍(眞臘), 발니(渤泥 타이 남부의 바타니), 소록(蘇祿 군도의 이름), 타회(打回), 안정(安定), 합밀(哈密 신강성 합밀현) 등의 나라가 그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조공은 한 해에 한 번 오는 것과 해를 걸러 한 번 오는 것, 3년, 5년, 10년에 한 번 오는 것이 있고, 또한 1세(世)에 한 번 오는 것도 있다."
위의 기록처럼 청(淸)나라의 강역이 "서북쪽은 감숙(甘肅)에 이르고 서남쪽은 면전(緬甸 미얀마)에 이르며, 남쪽 끝에 운남(雲南), 귀주(貴州)가 있고 동쪽에는 오랄(瓦喇 랴오닝 성[遼寧省] 부근), 선창이 있다."라고 되어있는데,
위의 기록은 청나라의 전체적인 강역을 말하는 기록입니다. 조선의 강역과 상관관계에 있는 동쪽 강역의 한계선은 "오랄(瓦喇=兀喇=烏喇)'까지 입니다. 즉 이 오랄의 강역은 투르크메니스탄의 북경지역과 북경의 동쪽인
영평부(永平府)인 철문관까지로 봅니다. 즉,지금의 지나대륙 전체는 조선의 강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철문관의 경계선을 넘어서 까지 오랄의 강역일수는 없습니다.
청나라의 오랄지역은 과거 명대(明代)의 오이라트가 살던 지역 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오랄(瓦喇=兀喇=烏喇)"로 불리었던 민족입니다. 이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 현재의 중앙아시아의 아랄해 근방에 있는 우랄강(oral=Ural River)
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오랄(瓦喇=兀喇=烏喇)"로 불렸던 겁니다. 오랄이라는 민족명은 강(江)의 지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 문헌을 보면,
성호사설 제2권 천지문(天地門) 동삼성(東三城)
영고탑(寧古塔)ㆍ오랄(烏喇)ㆍ애호(艾滸)를 합하여 동삼성(東三城)이라고 합하여 부른다.
오랄은 심양(瀋陽) 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8백 리 지점에 있고 영고탑은 오랄 동북 7백여 리의 지점에 있고, 애호는 심양에서 정북으로 2천 8백여 리의 지점에 있으며 영고탑과는 동서의 거리가 2천여 리에 달한다. 두 성은 또 영고탑의 근기(根基)가 된다. 애호는 몽고와 접경이 되었고 오랄은 면적이 넓고 인구가 적기 때문에 귀천을 물론하고 범죄자는 모두 여기에 옮겨 넣었으며, 부정사범에 걸린 자들은 주호(珠戶)로 정하여 해마다 동주(東珠)를 채취하여 바치게 한다. 동주라는 것은 백산(白山)의 북강(北江)에서 산출되는데 크기가 탄환만하며 광채가 밤에 환하게 비치어 값이 천만 냥에 달한다고 한다.
오랄은 곧 강의 명칭인데 서쪽은 오랄, 동쪽은 선창(船廠)이라고 한다. 서로의 거리는 30여 리다. 그 지역은 동쪽은 큰 산에 붙어 있고 3면은 평야가 트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곳이다. 근년에 영고탑 장군이 오랄에 옮겨 주둔하고 영고탑에는 부도통(副都統)이 남아서 지키게 했다. 오랄은 금(金)시대의 오국성(五國城)인 듯하다.
성호사설에서는 오랄이 원래 강(江)의 명칭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오랄지역의 청(淸)나라의 발원지 입니다. 그리고 위의 심전고의 기록인
"서북쪽은 감숙(甘肅)에 이르고 서남쪽은 면전(緬甸 미얀마)에 이르며, 남쪽 끝에 운남(雲南), 귀주(貴州)가 있고 동쪽에는 오랄(瓦喇 랴오닝 성[遼寧省] 부근), 선창이 있다."에서,
청나라의 동쪽방면은 오랄강역까지 이므로 실제적으로 철문관을 경계로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청(淸)나라의 서북방면과 서남방면과 남쪽방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청나라의 신강지역이 어디에 있었나?
를 먼저 이해 해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의 지나대륙에 있는 신강지역은 역사왜곡과 역사축소의 결정판 입니다. 신강지역의 판도과 그 실체적인 상황은 그 상상을 초월 합니다. 이에 대한 다음의 자료를 보면,
심전고(心田稿)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거등만록(車燈漫錄)》
"효람(曉嵐) 기윤(紀昀)이 일찍이 황하의 물 근원을 가서 찾아보고 하원기(河源記)를 지어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곤륜(崑崙)은 곧 지금의 화전(和闐 신강성에 있는 땅 이름)의 남쪽 산인데 황하의 물이 여기서 나온다. 원 세조(元世祖)가 도십(都什)을 보내어 찾았으나 겨우 성수하(星宿河 운남성에 있음)에 이르러 그치었다. 그런데, 지금은 곧바로 발원처(發源處)에 이르러 그 땅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 장건(張騫)이 이른 데는 서역 36국인데, 무릇 그 범위가 2만 리로서 지금은 전부 중국의 군현에 들어 신강(新彊)이라 부른다. 면적의 크기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다. 서쪽은 동궐(突厥)을 지나가고 서남쪽은 토번(吐蕃)에서도 2, 3천 리를 더 나아간다. 신독(身毒)은 곧 인도(印度)이며, 현도(懸度)는 피산(皮山)에 있어 판도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감숙(甘肅)은 오래 전부터 내지(內地)이고, 약수(弱水), 흑수(黑水)는 함께 감숙 내지에 있다."
***"무릇 그 범위가 2만 리(凡延袤二萬里)"
심전고(心田稿) 제3권 응구만록(應求漫錄) 춘수청담(春樹淸譚)의 기록을 보면,
내가 묘교에게 묻기를, “중국 조정의 위덕이 멀리까지 미쳐 신강(新彊) 수만 리를 개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어느 쪽입니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신강 개척은 강희 성조(剛毅聖祖) 때 했습니다. 서북 경계에 있어서 지난해에 장가(張哥)가 난리를 일으켜, 이 네 성에 웅거하고 있었으나 곧 회복하였지요.” 하였다.
심전고가 효람 기윤의 글을 인용했는데,기윤은 청나라의 학자 입니다. 기윤의 글을 보면,한(漢)나라때 장건(張騫)이 이른 곳은 서역(西域) 36개국으로 연무(延袤)가 2만리인데,여기서 연무라는 뜻은 동서,남북의 의미 입니다.
즉 한나라때 장건이 개척한 서역의 36개국의 강역은 동서 1만리,남북1만리로 합쳐서 2만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서역의 36개국의 강역 동서,남북의 2만리 강역을 청나라가 8개 군현으로 합병하여 신강으로 불렀다는 기록입니다.
심전고의 저자도 조선시대 그 당시에 청나라가 수만리의 신강지역을 개척,지배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기윤의 글은 허위의 글이 아닌 사실의 글 입니다. 현재의 신강지역이 넓다고 한들 동서,남북으로 2만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윤은 기록에서 처럼 "면적의 크기가 과거에 없었던 일이다."라고 기록한 겁니다.
위의 기윤의 기록은 청나라의 전체강역을 말하는게 아니라 신강지역에 대한 강역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신강지역의 내부적인 현황에 대해 "서쪽으로는 돌궐(突厥)을 지나고 서남쪽으로는 토번(吐蕃) 바깥 20리 신독(身毒)을 나가니,
곧 인도(印度)이다. 그리고 현도(懸度 국명)는 피산(皮山) 팔첩도(八牒圖)에 있고, 감숙(甘肅)은 오래도록 내지(內地)가 되었으며, 약수(弱水)ㆍ흑수(黑水)도 모두 감숙 내지에 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신강지역에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다음의 기록을 통해 신강지역이 어디에 있었는지 이해하기 쉬울겁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일사집략(日槎集略)인(人) 산록(散錄) 중전무웅(中田武雄)의 글
"지금 대개 구주(歐洲) 각국이 동아(東亞)에 땅을 얻으려 하면서, 왜와 청국과 한국에 침을 흘리는 것은 흔히 모두 이러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심하게 땅을 탐하는 나라는 러시아ㆍ영국ㆍ프랑스ㆍ프러시아입니다. 이리(伊犁)와 신강(新疆) 변방에서는 청국과 땅을 다투었고, 화태도(樺太島)에서는 우리와 다투었으며, 또 틈을 찾아서 귀국을 잠식(蠶食 남의 토지를 점점 먹어 들어감)하려고 하니, 이것이 동아의 큰 근심입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간사한 꾀로 항상 남의 땅을 병탄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이리(伊犁)와 신강(新疆) 변방에서는 청국과 땅을 다투었고"라는 기록은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에 관한 기록으로 이 국경분쟁으로 "이리조약(1881년)"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사학에서는 "이리(伊犁)"지역을 오늘날의 신장자치구에 있는 지역으로 해설합니다. 과연 그러한지 알아보겠습니다.
"이리(伊犁)"에 관한 한국고전 번역원의 주석을 보면, "강 이름으로 혹 이열(伊列)·이려(伊麗)·익리(益離)라고도 한다. 부명(府名)으로는 한(漢) 나라 때에는 오손국(烏孫國)이었다가 청(淸) 나라 초에 준갈이(準噶爾)가 살았는데, 건륭 때에 준부(準部)를 멸하고 이이부(伊犁部)를 두었다."
"오손국(烏孫國)"에 관한 주석을 보면,"한(漢) 나라 서역국(西域國)의 이름인데, 그 종족은 돌궐족(突厥族)이라고도 함.", "한나라 때 서역(西域)에 있었던 나라 이름이다. 돈황(燉煌)과 기련(祁連) 사이에 살다가 뒤에 대월지(大月氏)를 축출한 뒤 오손국을 건국하였는데,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경내의 온숙현(溫宿縣) 이북에서 이령현(伊寧縣) 이남이 그 지역이다."
주석의 글을 토대로 보면 신강지역의 "이리(伊犁)"지역은 과거의 한(漢)나라때 "오손국(烏孫國)"이었으며 청(淸)나라때 이곳을 명대(明代)의 오이라트 몽골 4부(部)의 하나였던 준갈이(準噶爾)가 살았습니다.
현재의 사학에서는 이 지역이 현재의 지나대륙의 신강자치구에 있다고 합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현재의 사학이 얼마나 잘못된 해설인지 알게해 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권 세기(世紀) 4 부여(夫餘)
《후한서》에 또, “6년에 선비(鮮卑)의 단석괴(檀石槐)가 용맹이 있고 지략이 있어서 남쪽으로 변경을 침략하면서 북쪽으로는 정령(丁零)을 막고 동쪽으로는 부여(夫餘)를 퇴각시키고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을 격파하여 흉노(凶奴)의 옛 땅을 모두 점거하였다. 그런 다음 스스로 그 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우북평(右北平)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러 부여와 예ㆍ맥과 경계를 접해 25개 고을을 묶어 동부(東部)라 하고는 각각 대인(大人)을 두어 관할하게 하였다.” 하였다.
해동역사가 인용한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선비족 단석괴가 흉노의 옛땅을 모두 차지했다는 기록인데,여기서 "정령(丁零)"이라는 민족은 흉노족의 후예인 철륵민족을 가르키는 것인데 철륵의 활동강역에 대해 두산백과에 의하면, 오늘날의
카스피해,아랄해 일대 입니다.그럼 선비족 출신 단석괴가 흉노족의 옛땅을 모두 차지하는 과정에서 흉노족의 후예인 정령이라 불린 철륵을 원거주지인 카스피해,아랄해에서 북쪽으로 몰아내고,그 서쪽으로는 역시 흉노족의 후예인 돌궐족의
오손국을 격파했다는 기록인데,오손국은 적어도 카스피해,아랄해의 서쪽에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즉 카스피해,아랄해의 서쪽이 한나라때 오손국이 있었으며,청나라때의 준갈이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사학에서는 이 오손국을 현재의
신강자치구에 있다며 역사를 왜곡하며,축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효람 기윤이 말한 신강지역의 강역이 동서,남북 2만리라는 기록은 결코 허튼 기록이 아닙니다. 심전고의 기록의 일부인 "서북쪽은 감숙(甘肅)에 이르고.....감숙(甘肅)은 오래
전부터 내지(內地)이고, 약수(弱水), 흑수(黑水)는 함께 감숙 내지에 있다.""라는 내용을 보면,현재의 지나대륙의 현황과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감숙(甘肅)"이 신강지역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대륙의 감숙지역은 왜곡된 지명이며,역사왜곡의 잔재로 봅니다. 왜냐하면 역사상 대륙의 감숙지역을 이해하려면, 전재조건이 따릅니다. 감숙지역에는 항상 곤륜산이 있고, 이 곤륜산을 중심으로 한 하수(河水)가 있는데 약수(弱水)와 흑수(黑水)입니다. "한국 고전 번역원"의 흑수 관련 주석을 보면,역사상의 흑수(黑水)는 지금의 흑룡강(黑龍江)을 의미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효람 기윤조차도 감숙지역에 약수(弱水)와 흑수(黑水)가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감숙지역이 오래전부터 내지(內地)라고
기록한 이유는 오래전 부터 청(淸)나라 민족,즉 만주족=여진족의 내지였다는 의미의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고래로 부터 내려오는 역대의 문집이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흑수여진,흑수말갈이라는 명칭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즉,청나라 민족의 조상들이 살던곳이 이 흑수지역 이었으므로 기균은 이 흑수가 있는 신강지역의 서북쪽의 경계에 있는 감숙지역이 오래전부터 내지(內地)라고 기록했던 겁니다. "한국고전 번역원"의 주석에서는 역사상의 흑수(黑水)는 지금의
흑룡강(黑龍江)을 의미 한다고 하는데,그럼 현재의 지나대륙과 러시아 지역에 걸쳐있는 흑룡강이 역사상의 흑수(흑룡강)라면 현재의 그 지역에 감숙성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기균의 기록과 심전고의 기록을 보면, 분명히 감숙지역은 신강지역의
서북쪽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현재의 대륙지도를 보면 감숙지역이 서북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현재의 사학의 주장이 맞을것 같으나 현재의 대륙의 감숙지역에는 흑수(=흑룡강)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사학에서는 현재 지나대륙과
러시아에 걸쳐있는 흑룡강이 역사상의 흑룡강이라 말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사학은 자신들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낸채 말도 되지 않는 학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다음의 기록을 보면 확증적으로 현재의 흑룡강은 역사상의 흑수(흑룡강)
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홍재전서(弘齋全書) 제93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0 ○ 서경(書經) 1
흑수(黑水)라는 한 물줄기를 양주(梁州)와 옹주(雍州)의 하천에 나란히 나열하였으나, 이제 책 첫머리의 도면을 살펴보면 이른바 흑수는 멀리 황하 서쪽에 있으니 양주와 옹주 봉계(封界)와는 관계가 없다. 그것이 남해로 들어간다고 논한 것은 황하 원류의 밖으로 둘러서 흐르면서 곤륜산 뒤를 끊고 빙 돌아 바다까지 이르는 것인데, 그 물줄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를 또한 누가 보고 누가 기록할 수 있겠는가. 아니 또한 무엇 하려고 요복(要服)과 황복(荒服) 밖까지 물길을 통하는 데 힘을 허비하였겠는가. 만일 정씨(程氏)가 말한 것처럼 ‘서이하(西珥河)’로써 이에 해당시킨다면 겨우 양주(梁州) 남쪽의 경계가 될 뿐, 옹주(雍州)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 결코 서하(西河)와 함께 일컬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이른바 흑수는 과연 어떤 물이며, 어느 지방에 있는 것인가?
[박종정이 대답하였다.]
흑수에 관한 논변은 예로부터 분분하였고, 여지도(輿地圖) 또한 잘못된 부분이 많습니다. 명 나라 때에 이르러 서남쪽 변방 밖까지 모두 판도(版圖)에 편입되어 사신을 보내어 그 땅을 두루 답사하여 지도를 그려 올림으로써 지파(支派)와 경락(經絡)이 손바닥 보듯이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가(諸家)들의 근거 없는 말들을 비로소 절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흑수는 세 곳이 있습니다. 《집전》에서 말한, 장액계산(張掖雞山)에서 발원하여 돈황(燉煌)에 이르러 삼위(三危)를 지나 남쪽으로 남해로 들어가는 것은 곧 옹주(雍州)의 흑수입니다. 지리지(地理志)에서, “분관산(汾關山)은 흑수가 발원한 곳이다. 혹 노수(瀘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약수(若水)라 말하기도 한다. 그 물줄기는 산 남쪽으로부터 흘러 토번(吐藩)의 경계로 나와 금사강(金砂江)과 합류하여 민강(泯江)으로 들어간다.” 한 것은 곧 양주(梁州)의 흑수입니다. 정대창(程大昌)이 난창강(瀾滄江)을 흑수라 말한 것은 곧 도천(導川)에서 말한 흑수입니다. 옹주의 흑수의 원류는 황하 북쪽에 있고, 양주와 도천에서 말한 흑수의 원류는 황하 남쪽에 있습니다. 옹주는 흑수가 흐르는 곳이 모두 내지에 있는 까닭에 이를 가리켜 논하고 있으나 그 나머지 두 흑수는 변방 외진 곳에 있어 중국 사람으로서는 보기 드문 바였습니다. 이 때문에 강물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이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산수(山水)에 관련된 책은 비록 믿을 만한 책이라 하더라도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큼 친절하지는 못합니다.
홍재전서의 저자는 조선의 임금인 정조대왕 입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천하의 흑수는 3곳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흑수는 옹주(雍州)의 흑수,양주(梁州)의 흑수,도천(導川)에서 말한 흑수 입니다.
그런데 역사상의 흑수였다고 현재의 사학에서 말하는 역사상의 흑수인 흑룡강은 "러시아 시베리아 남동부에서 발원하여 중국 동북(東北:滿洲)의 국경을 따라 동류하고 하바롭스크 부근에서 북동류하여 오호츠크해(海)로 흘러드는 강 입니다.
홍재전서에서 말하는 3곳의 흑수 중에 그 어느 하나도 현재의 흑수를 말하며 의미하는 기록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즉 현재의 흑수인 흑룡강은 역사왜곡 차원에서 만든 역사왜곡의 산물로서의 지명이었던 겁니다.
효람 기윤이 기록한 신강지역에 대해 약간의 이해를 돕고자 윗글에서 문헌을 근거로 해 역사상의 그 실체에 대해 상술했지만 위의 상술된 내용을 토대로 신강지역의 그 실체에 대해 좀더 확대하여 심층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강지역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 할려면 신강지역의 광역적인 현황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신강지역은 서역(西域)전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며,서역지역은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임을 알게될 것입니다.
완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
오인도(五印度)의 강역(疆域)은 남인도는 큰 바다로써 한계하고 서인도는 홍해(紅海)·지중해(地中海)가 있어 한계하여 예나 이제나 절연(截然)하여 어긋나지 않으며 오직 동·북의 두 인도는 육지의 경계가 각국과 들쑥날쑥하다. 그러나 동인도는 항해(航海)가 서로 통하여 상이(商夷)가 모두 익히 내왕하며 북인도는 총령(蔥嶺)의 서쪽이 간격이 되어 내왕하지를 못한다. 또 원·명 이후에는 나라 이름이나 땅의 이름이 당 나라 이전과는 서로 일관되지 못하며 다행한 것은 극십미이(克什彌爾)가 당·송의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이 되어 천여 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대설산이 있어 그 북을 경계했는데 그를 근거로 하여 북인도의 계빈(罽賓)이 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1 석전총설(釋典總說) 석교(釋敎)ㆍ범서(梵書)ㆍ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부(附) 석씨잡사(釋氏雜事)
원(元) 나라 성희명(盛熙明)의 천축서(天竺書)를 논한 《법서고(法書考)》에 "서역(西域)에 있는 오천축(五天竺 오인도(五印度)와 같은 말로 동인도ㆍ서인도ㆍ남인도ㆍ북인도ㆍ중인도를 말한다)의 문자가 각기 조금씩 다른데, 중천축의 문자만을 가장 정통으로 삼는다. 대를 깎아 붓을 만들고 패다수엽으로 종이를 삼아 썼는데, 글씨 종류가 자그마치 64종이나 된다." 하였다.
"한국고전 번역원"의 "오천축(五天竺)"관련 주석을 보면,"인도를 동·서·남·북·중의 5부로 나누어 일컫는 말. 오천축(五天竺)이라고도 한다.(西域記)"라고 합니다. 그런데 추사 김정희 선생의 완당전집을 보면,
오천축국의 강역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서인도의 강역은 "홍해(紅海)·지중해(地中海)가 있어 한계하여 예나 이제나 절연(截然)하여 어긋나지 않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연대가 (1786년 - 1856년)이므로 홍해나 지중해라는 명칭의 사용에 있어서는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의 서남아시아 아라비아 일대와 유럽이 접해있는 홍해와 지중해가 있는 지역을 서인도(西印度)라
칭한 사실이 놀랍습니다. 즉, 김정희 선생의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서남아시아의 아라비아 일대가 서역지역이며,오천국 중에 서천축이었다는 겁니다. 이 오천국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근거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인,
오천축국과 중천축국 관련 기록을 인용한 겁니다. 서남아시아 아라비아 지역이 서천축(西天竺)이었다는 증거의 기록이 또 있는데 이를 보면,
기측체의 추측록 제5권 추기측인(推己測人) 서교(西敎)의 연혁(沿革)
"서인도(西印度)에서 포사(包社 페르샤)와 아단(阿丹 아라비아) 및 서쪽으로 이미아주(利未亞洲 아프리카)와 동으로 총령(蔥嶺)의 좌우(左右)와 합살극(哈薩克) 포로특(布魯特)의 여러 유목(游牧) 지대와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여러 성곽(城郭)은 모두 천방교(天方敎 아라비아를 천방이라 하는데 이것은 이슬람교를 말한다)이고,"
이 기록을 보면 오늘날의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의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데 저자는 서인도(서천축) 지역에 "포사(包社:페르샤)와 아단(阿丹:아라비아)"가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순암선생문집 제17권 잡저(雜著) 천학고(天學考)
명(明) 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정효(鄭曉)가 지은 《오학편(吾學篇)》에 이르기를,
“서역에 묵덕나(默德那)라는 나라가 있는데 곧 회회국(回回國)이다. 처음에 국왕 모한맥덕(摹罕驀德)이 태어날 때부터 영성(靈聖)하여 서역의 나라들을 신복(臣服)시켰으므로, 이들 나라들이 높여서 별암원이(別諳援爾)를 삼았으니 중국말로 천사(天使)란 뜻이다. 나라 안에 불경 30장(臧)이 있는데 모두 3천6백여 권이다. 글은 전서(篆書)·예서(隷書)·초서·해서(楷書) 등이 혼합되어 있는데, 서양이 모두 이것을 사용한다. 그 땅이 천방국(天方國)에 접해 있는데, 일명 천당(天堂)이라고 한다. 풍경이 융화(融和)하고 네 계절이 봄과 같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곡식이 풍성해서 사는 사람들이 생업을 즐거워한다. 음양·성력(星曆)·의약·음악 같은 기예를 가지고 있고, 풍속이 살생을 중히 여겨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기구가 매우 정교하다. 선덕(宣德) 연간에 천방국을 따라 조공을 바쳤다.” 하였다.
위의 기측체의와 순암선생 문집을 보면, 오늘날의 이슬람교를 옛날에는 천방교(天方敎)라 불렀으며, 오늘날의 아라비아를 천방국(天方國)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역국가 중에 "묵덕나(默德那)"라는 나라는
천방국에 접해있으며,회회국(回回國)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근거로 다음의 기록을 보면 옛날 서역국가의 그 실체를 알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1 석전총설(釋典總說) 석교(釋敎)ㆍ범서(梵書)ㆍ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부(附) 석씨잡사(釋氏雜事)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 "서번(西番)에서 천방국(天方國)ㆍ묵덕나(黙德那)가 가장 먼 곳으로, 현장(玄奘 당(唐) 나라 때의 중)이 불경(佛經)을 가져온 지역이므로 서로 전하기를 불국(佛國)이라 한다. 그 경(經)은 36장(藏)으로 되어 3천 6백여 권이나 되고, 그 글씨는 전서(篆書)ㆍ초서(草書)ㆍ해서(楷書) 세 가지 법이 있다." 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2 석전잡설(釋典雜說) 서유진전(西遊眞詮)에 말한 오지 석후(五指石猴)에 대한 변증설
"현장 법사(玄奘法師)에 대하여는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다. 당 나라 정관(貞觀 태종의(太宗)의 연호) 3년(629)에 삼장(三藏) 현장이 서역(西域) 여러 나라에 들어갔으니, 곧 서번(西番)의 천방(天方)ㆍ묵덕나(黙德那) 등 지방이며, 그곳 나란타사(那蘭陀寺)에서 계현(戒賢)을 만나 유식(唯識)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아 돌아왔었다.
백마(白馬)로 경(經)을 싣고 왔다는 설은, 곤 한 명제(漢明帝) 때 서역의 중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백마에 경을 싣고 난양(雒陽)에 이르자 명제가 홍려시(鴻臚寺)에 거처하게 했으므로 후세에 시(寺) 자를 따서, 중이 거처하는 곳을 다 절[寺]이라 칭한 것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을 보면 당(唐)나라의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러 간 지역은 오늘날의 인도가 아니었다는 기록 입니다.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서역지역의 여러나라에 들어갔는데,불경을 가져온 지역이 옛날의 천방국(天方國)이라
불린 오늘날의 아라비아이며,또한 옛날에 "묵덕나(默德那)"라 불린 오늘날의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디나(Medina)였습니다. 그러므로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기록은 제대로 기록된 것이며,오늘날의 아라비아와 그일대의 서남아시아가
옛날의 서역지방이며,서천축국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겁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이러한 과거의 서역지대의 연혁을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세세동점기의 서구세력과 이 서구세력의 앞잡이 역할을 한 일본세력이 과거에 중조(中朝)가 서남아시아
일대의 아라비아등의 여러 나라를 서번(西番)이라 칭한 사실등을 감추고 은폐해서 아시아의 역사와 중조의 역사를 축소,왜곡해서 자신들의 초라한 역사를 감추고 산업혁명으로 인한 발달된 물질문명을 앞세워 아시아의 역사를 축소,왜곡하여
자신들의 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했던 겁니다. 위의 사실을 바탕으로 서역지역과 청(淸)나라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열하일기 반선시말(班禪始末)
내가 열하에 있을 때 몽고 사람 경순미(敬旬彌)가 나를 위해 말하기를,
“서번(西番)은 옛날 삼위(三危 나라 이름) 땅으로 순(舜)이 삼묘(三苗)를 삼위로 쫓아 보냈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이 나라는 셋으로 되어 있으니, 하나는 위(衛)라 하여 달뢰라마(達賴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오사장이요, 하나는 장(藏)이라 하여 반선라마(班禪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이름도 역시 장이요, 하나는 객목(喀木)이라 하여 서쪽으로 더 나가 있는 땅으로서 이곳에는 대라마(大喇嘛)는 없고 옛날의 강국(康國)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땅들은 사천(四川) 마호(馬湖)의 서쪽에 있어 남으로는 운남(雲南)으로 통하고 동북으로는 감숙(甘肅)에 통하여 당의 원장 법사(元裝法師)가 삼장(三藏)으로 들어갔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위의 기록인 "열하일기"의 내용을 상세히 분석하면 청(淸)나라의 효람 기윤이 신강지역이 동서,남북으로 2만리이며 "면적의 크기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다."라고 기록한 이유를 알것입니다.
여기서 "서번(西番)은 옛날 삼위(三危 나라 이름) 땅으로 순(舜)이 삼묘(三苗)를 삼위로 쫓아 보냈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 "감숙(甘肅)에 통하여 당의 원장 법사(元裝法師)가 삼장(三藏)으로 들어갔다는 곳이 바로 이 땅"
"옛날의 강국(康國)이 바로 이곳" 이 기록들이 핵심의 기록들인데,여기서 당나라의 원장법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국고전 번역원"의 주석에서는 당나라의 현장법사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 현장법사가 동북으로는 감숙지역을
통하여 서번(西番)지역인 "삼장(三藏)"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열하일기의 내용을 토대로 보면 여기서의 동북방면은 서번지역의 입장에서 동북방면이며 중조의 입장에서는 서북방이 되므로 이른바 청(淸)나라의 강역이 서북방면의
감숙지역이라는 기록을 전제로 할때 제대된 기록입니다. 그리고 위의 기록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해온 지역이 천방국(아라비아),묵덕나(메디나)이므로 즉,"삼장(三藏)"지역이 되며,이 삼장지역을
감숙지역을 통해서 왔으므로 이 감숙지역이 서역지역에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고 봅니다. 또 "열하일기"에서 삼장지역에 옛날에 "강국(康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강국은 강거(康居)로도 불렸던 나라였습니다.
강국에 관한 "한국고전 번역원"의 주석을 보면 "고대의 나라 이름인데, 대월지(大月氏)와 동족이며, 지금의 신강(新疆) 북쪽 경계로부터 아령(俄領)ㆍ중아(中亞)의 지역까지 영유하였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주석입니다. 강거가 대월지와 동족이라는 기록은 인정하는데 이들의 강역은 오늘날의 신강지역과 관련이 없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다음의 기록을 보면,
성호사설 제11권 인사문(人事門) 북적(北狄)
중고시대에 북적(北狄)에는 흉노(凶奴)와 동호(東胡) 두 종족이 있었다. 흉노의 서쪽에는 월지(月支) 등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탕창(宕昌)ㆍ당항(黨項)은 곧 삼묘(三苗)의 후예(後裔)이며, 동호의 동쪽은 곧 말갈(靺鞨)ㆍ실위(室韋) 등 여러 나라였다. 흉노의 후예가 회흘(回紇)ㆍ혁련(赫連)이 되고 그 별부(別部)는 돌궐(突厥)과 철륵(鐵勒)이 되었다. 돌궐의 별부(別部)는 또 사타(沙陀)가 되고, 철륵의 별부는 설연타(薛延陀)가 되었다. 동호의 후예가 오환(烏桓)과 거란(契丹)이 되고, 그 지속(支屬)이 선비(鮮卑)가 되었는데, 선비의 종족이 매우 번성하여, 토곡혼(吐谷渾)은 요동 선비(遼東鮮卑), 우문(宇文)은 요동 새외 선비(遼東塞外鮮卑), 독발(禿髮)은 서선비(西鮮卑), 걸복(乞伏 서진(西秦) 선열왕(宣烈王))은 농서 선비(隴西鮮卑), 탁발(拓跋)은 별부 선비가 되었다. 토번(吐蕃)은 토곡혼의 서남쪽에 있으니, 이는 흉노의 별부인 듯하다. 이상은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보인다.
성호사설의 기록을 보면,"두산백과"에서는 고대에 오늘날의 카스피해,아랄해 일대에 철륵민족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이 철륵민족의 조상은 위의 기록처럼 흉노족입니다. 그러므로 흉노족의 강역은 카스피해,아랄해등지 입니다.
그 흉노족이 사는 곳을 기준으로 하여 흉노족의 서쪽방면에 월지국이 있었습니다. 그 월지국과 강거=강국은 같은 민족 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의 강국의 위치는 오늘날의 카스피해,아랄해의 서쪽입니다. 즉 오늘날의 흑해연안 일대로
봅니다. 그러므로 "한국 고전 번역원"의 주석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강국과 같은 민족의 월지국을 한(漢)나라때 흉노족의 후예인 돌궐족의 오손국(烏孫國)이 축출하여 오손국을 세웠습니다. 위에서 심전고의 기록과 관련된 오손국에 대한
기록을 상술했는데,이 대월지를 축출한 오손국의 있었던 실제의 영역이 오늘날의 흑해일대 였습니다. 청나라가 이리(伊犁)와 신강(新疆) 변방에서는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에 의한 조약이 "이리조약(1881년)"인데,이 지역이 실제적으로
오늘날의 카스피해,아랄해의 서쪽인 흑해연안 일대 였던 겁니다. 심전고와 효람 기균의 기록에서 청(淸)나라의 서쪽 강역에 돌궐이 있고,감숙지역이 있다는 기록은 다시말해서 서역지대에 진정한 감숙지역이 있었음을 의미하며,
돌궐족이 있었다는 기록은 청나라의 강역이 오늘날 터키에 인접했다는 기록인 겁니다.또 "서번(西番)은 옛날 삼위(三危 나라 이름) 땅으로 순(舜)이 삼묘(三苗)를 삼위로 쫓아 보냈다는 곳이 바로 이 땅"이라는 기록의 의미는
위의 성호사설의 기록으로 말할수 있는데, 위의 상술한 것처럼 카스피해,아랄해를 거점으로 했던 흉노족을 기점으로 보면,이 흉노족의 서쪽에 살던 민족이 대월지,강국,탕창(宕昌),당항(黨項)인데, 성호사설에서는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을 인용하여 대월지,강국,탕창(宕昌),당항(黨項)이 "삼묘(三苗)의 후예(後裔)"라 기록했습니다. 이들이 서역국가의 서번(西番)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살던 곳은 오늘날의 카스피해,아랄해의 서쪽이므로 곧, 흑해연안 일대였습니다.
이 삼묘의 후예 중에 역사상 가장 많이 알려진 나라가 당항(黨項)족이 세운 서하(西夏)였습니다. 서하의 실제적인 강역은 오늘날의 지나대륙이 아닌 중앙아시아 일대 였던 겁니다. 삼묘족의 실제의 후손과 강역은 오늘날의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서쪽방면 이라고 봅니다. 이 지역을 원(元)나라 이후 다시 넓게 개척하며 지배했던 나라가 청(淸)나라 였던 겁니다. 물론 그 이전의 고려시대,삼국시대,더욱 그 이전인 고조선시대때 부터 활발한 교류를 했으며,
이 지역을 중조에서는 서역지방이라 지칭했으며 서번(西藩)이라 칭하며 제후국으로 삼아왔었던 겁니다. 이 서역지역에 감숙지방이 있었으며 그 감숙지역에 흑수가 존재했으며 그 흑수지역과 관련된 고대사에서의 역사적인 사실들은
이 중아아시아 일대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중앙아시아와 관련된 현재의 아시아의 역사나 서구의 역사는 서세동점기의 서구의 침략과 왜곡으로 각색된 역사이므로 그 역사는 허구의 역사이므로 믿을수가 없습니다.
이 허망한 역사를 접한 지금의 저의 심정은 전에 제가 읽었던 김종윤 선생님의 "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라는 글을 조금 변색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아시아인에게 역사는 있는가?"라고..,
김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