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自閉)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주었다."(본문 중에서)
'영원한 현역' 소설가 박완서(정혜 엘리사벳, 79)씨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나왔다.
4년 동안 쓴 글을 모은 책이다.
가을바람 소슬한 해질녘, 이 시대를 향해 읊조리는 넋두리 같은 글이다.
자연과 생물,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에 그의 연륜과 성찰이 더해져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올해 등단 40년을 맞는 그의 글에는 꿈틀대는 생명력과 죽음을 넘어선 초월자의 숨결이 살아있다.
그는 소중한 책이 꽂힌 그의 책장을 열어 독자들에게 구경시켜주고(2부), 자신의 삶에 보석처럼 빛나는
이들을 그리워한다(3부).
1부에는 그가 걸어온 인생길을 여과없이 담아냈다.
고통과 슬픔, 기쁨이 교차하는 3차선 인생길에서 건져 올린 사랑과 감사에 대한 메시지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고통도 거침없이 고백한다.
"나를 스쳐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156쪽)
그러나 그는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인다고 털어놓는다.
"6ㆍ25의 경험이 없었으면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느끼고 남들도 그렇게
알아줄 정도로 나는 전쟁 경험을 줄기차게 울궈먹었고 앞으로도 할 말이 얼마든지 더 남아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중략)
나는 내가 소설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걸 인정하고 소설가인 것에 자부심도 느끼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마치 허세를 부린 것처럼 뒷맛이 허전해지곤 한다."(24쪽)
그는 경제 제일주의가 만들어낸 인간성 황폐도 통렬히 비판했다.
무너진 숭례문, 천안함 침몰 사건 앞에서는 뻔뻔스러운 정의감과 비겁한 평화주의에 대해서도 반성했다.
시대의 상처를 온 몸으로 살아낸 작가의 연민과 회한이 섞인 회고다.
천진한 얼굴을 가진 노신사 김수환 추기경과, 세상을 등졌을 때 세상 속으로 끌어준 박경리 선생,
박수근 화백을 그리워하는 애달픈 마음도 글로 옮겼다.
작가는 머리글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이 양다리가 아직은 성해서 이렇게 또 한 권의 책을 묶을 수 있게
된 것을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다"면서 "늙어 보인다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고, 누가 나를 젊게 봐준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은 평범한 늙은이이지만 글에서만은 나잇값을 떳떳하게 하고 싶다"고 썼다.
저자는 경기도 구리에서 잔디를 가꾸고 씨를 품은 흙냄새를 맡으며 지낸다.(현대문학/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