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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60년의 기억⑤> '우리 아이와 손자에게 사죄시키지 않겠다' 아베 담화, 일본의 철칙이 되다(1) / 7/20(일) / 중앙일보 일본어판
◇ 한일관계는 밀물과 썰물처럼 다가왔다가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6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왔다. 그 사이에 현재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초석이 된, 지금은 잊혀져 가는 기억이 있다.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면서도 결국 하나의 지향점을 갖고 있는 6개의 기억을 되살렸다.
격동의 한일 수교 60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있다. 아베 신조(1954~2022) 전 총리다. 아키에 여사가 한국의 대중문화와 음식을 즐겼듯이 그 역시 한국에 대해 호감을 보였다.
"조선통신사가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 여러 문화를 전파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 바로 내 고향 시모노세키다. 비석도 있다.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베의 '호감 발언'에도 불구하고 2015년 전후 7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되던 해에 그가 내놓은 '아베 담화'는 한일 관계의 변곡점이 됐다. 그 전쟁에는 아무 관련이 없는 미래세대가 사과를 계속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역사 수정주의' 기조의 싹이 트기 시작한 아베 정권을 거치면서 한일 관계는 그 후 꼬이면서 10년이 넘는 암흑기를 맞는다.
◇ 아베의 유산, 그리고 일본
펑 하고 폭발음이 거리를 뒤덮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조금 뒤 누군가가 황급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AED(자동체외식 제세동기)는 없나요"
2022년 7월 8일 오전 11시 28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나라현 야마토사이다이지역 앞 로터리에서 선거 응원 연설을 하던 총리가 두 발의 총격에 선혈을 흘리며 쓰러졌다. 심정지 상태로 나라현립(奈良県立) 의대부속병원 구급센터에 반송되었다. 병원 앞에는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남편의 위독 소식을 들은 아키에 여사가 병원에 들어간 지 얼마 뒤인 오후 5시 3분 사망 소식이 전파를 탔다.
며칠 뒤 도쿄타워가 보이는 마조지 일대에 수백m의 행렬이 이어졌다. 아베 씨의 운구차가 나오는 것을 보기 위한 인파로 일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일본인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총리이자 한국인에게는 매파 정치인으로 유명한 아베 씨. 그는 왜 아베 담화를 남기게 됐으며 아베 담화는 양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8년 9개월의 재임 기록. 역대 최장수 총리였던 아베가 꿈꾼 것은 전후 레짐(regime)으로부터의 탈피였다.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로의 회귀를 위해 그는 헌법 개정 외에도 일본이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일본의 패전일이자 한국의 광복절인 8월 15일을 하루 앞둔 2015년 8월 14일 그가 회견을 열었다. "정치는 역사에서 미래에 대한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해 그가 담화를 읽어 내려갔다.
"(중략) 100여 년 전 세계에는 서양 국가를 중심으로 한 나라들의 광대한 식민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기술 우위를 배경으로 식민지 지배의 물결은 19세기 아시아에도 밀려들었습니다. 그 위기감이 일본에 있어서 근대화의 원동력이 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시아 최초로 입헌정치를 수립하고 독립을 지켜냈습니다.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 아래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담화를 읽는 그의 입에서 한국이란 단어가 나온 것은 단 한 번이었다.
"우리나라는 지난 대전에서의 행적에 대해 거듭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의 뜻을 밝혀 왔습니다. 그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 대만, 한국, 중국 등 이웃 아시아인들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전후 일관되게 그 평화와 번영을 위해 힘써 왔습니다. 이 같은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말했다.
"일본에서는 전후 출생 세대가 이제 인구의 80%를 넘습니다. 그 전쟁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리 아이나 손자, 그리고 그 앞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본인은, 세대를 초월해, 과거의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과거를 이어받아 미래로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즉각 반발했다. 침략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겠다고 했지만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를 과거형, 간접형으로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윤덕민 전 주일한국대사의 평가다.
"한국에는 최악이었다.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한국에 대한 인식은 (담화에) 없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줬다는 부분은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데 영향을 미쳤다."
러일전쟁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했고, 이는 이후 강제 한일합방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중국 외교부 역시 "일본은 피해국 국민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도 아베 담화에 대해 희석된 사과라고 했다.
◇ '마지막 사과' 꿈꾼다
아베는 왜 이런 담화를 냈을까. 아베 신조 회고록(2023년)에서 그는 이렇게 술회한다.
"침략, 사죄, 식민지 지배, 통절한 반성이라는 키워드가 있었습니다만, 예를 들면 침략에 대해서는, 일본은 과거 몇번이나 사죄해 왔습니다. 몇 번 사과를 시키면 끝이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어요. 그래서 70년 담화에서는 '우리나라는 (중략) 반복적으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의 마음을 표명해 왔다'거나 '이러한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이 없다'는 표현으로 제가 사과드립니다, 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글을 전략적으로 쓴 것입니다"
요컨대 대학교수 등을 내세워 21세기 구상 간담회라는 조직까지 만든 자신의 담화는 전략적 글쓰기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지 않는 미래 세대, 이것은 아베 씨의 신념으로, 그는 제2차 정권(2012년 12월~2020년 9월)에서 이 신념의 실행에 들어갔다. 그가 가장 큰 불만을 갖고 있던 것은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河野 洋平) 당시 관방장관이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밝힌 '고노 담화'와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 富市) 당시 총리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였다.
아베 씨의 말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만 식민지배를 한 것처럼 쓰여 있다. 전쟁 전에는 구미 각국도 식민지 지배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종차별이 당연한 시대, 아프리카에서 잔학한 일을 한 나라도 있다. 벨기에 국왕이 잔학행위를 했다며 콩고공화국에 사과한 것은 2020년이에요."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아베 담화를 이렇게 평가했다.
"아베 씨의 말은 뒤따르는 위안부 합의와도 통하게 된다. 아베 총리는 사과에 대해 털끝만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위안부 피해자에게 사과 편지를 보낼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 이 일관성이 한국에 대한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아베 씨 사망 후에 레거시(유산)가 되어 일본 사회의 철칙으로서 남겨졌다"
윤 전 대사는 "박근혜·이명박 보수정권이 출범했지만 총리의 역사 수정주의 인식 때문에 한일관계가 복원되지 못하고 표류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위안부 합의 백지화, 계속되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 그리고 일본의 수출 규제까지 이어지면서 전후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이 아베 정권에서 벌어지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의 유산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자신의 담화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랐던 아베 총리는 "전후 80년에는 (총리 담화를) 할 필요가 없다" 고도 했지만 아베 총리의 장기집권으로 주류로서의 위상을 확립해 온 자민당의 옛 아베파를 중심으로 아베 총리 사망 이후인 지금도 이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아베 총리와 대칭점에 섰던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올해 초 전후 80주년인 올해 담화를 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나 당내 보수파로부터 반발을 사고 있다.
<韓日60年の記憶⑤>「私たちの子や孫に謝罪させない」安倍氏の談話、日本の鉄則になる(1)
<한일 60년의 기억⑤> '우리 아이와 손자에게 사죄시키지 않겠다' 아베 담화, 일본의 철칙이 되다 (2) / 7/20(일) / 중앙일보 일본어판
◇ 고노담화 검증과 아사히신문 오보 사과
한일관계에서 아베의 발자취를 이해하려면 아베 담화 이전으로 시계를 돌려봐야 한다. 미국으로부터 '실망'이라는 반응을 얻었던 2013년 12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이어 2014년 4월 25일 아베는 팀을 꾸린다. 고노 담화 작성 과정 등에 관한 검토팀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그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검증 조직이었다. 아베가 검증에 나선 고노 담화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991년 8월 김학순 씨(1997년 사망)가 위안부 피해 사실 공개 증언을 한 지 1년 만. 미야자와 기이치(宮沢 喜一) 당시 총리가 1월 한국을 찾았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조사에 들어간 일본 정부가 한국을 찾으면서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양국 정상 간 문제로 떠올랐다.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일본의 미온적인 입장에 한국의 반발은 거셌다. 야노 사쿠타로 당시 내각 외정심의실장이 조사팀을 이끌었는데 일본 문필가이자 공산당원인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 역시 조사 대상 중 하나였다.
요시다 씨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1977년) "나의 전쟁범죄"(1983년) 등을 펴냈지만 그의 위안부 관련 증언을 기사화한 것은 아사히신문이었다. 1990년 아사히신문 가와사키 지역판을 비롯해 1992년에는 "제주도에서 2000명에 가까운 조선인 여성 사냥을 했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1990년대에 실린 위안부 관련 보도는 16차례에 달했다. 조사에 들어간 야노 팀은 16명의 위안부와 만났고, 조사 결과에 근거해 1993년 8월 4일에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당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회견했는데, 그는 "당시의 군의 관여 아래,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깊게 해쳤다. 진심으로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드린다"고 말했다.
나중에 '고노 담화'로 불리는 이 담화는 자민당 보수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아베 전 총리의 이야기를 담은 숙명의 아들을 쓴 후나바시 요이치 아사히신문 주필은 고노 담화에 대한 일본 사회의 영향에 대해 자민당 보수파 중 역사 문제로 신인류로 불리는 젊은 파벌 횡단적인 그룹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고 그 중심 역할을 맡은 사람이 아베 씨였다고 썼다.
한국에서는 우익 성향으로 분류되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모임이 생겨났는데 그 중심 역할을 맡은 것이 아베였기 때문이다. 1992년 7월 소장파 모임은 구체화돼 일본의 앞길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소장파 모임으로 불렸다. 아베 총리는 이 모임을 통해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야스쿠니 신사 참배, 위안부 문제 등을 논의의 주제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제2차 아베 정권 들어 아베는 고노 담화 검증 의지를 구체화했다. 그의 지시로 만들어진 검증팀은 조사 시작 2개월 만인 2014년 6월 20일 보고서를 냈다. 아베 정권은 고노 담화 작성 과정에서 양국 정부 간에 내용 조율이 있었다는 취지로 담화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낮게 평가했다. 한국 외교부는 반발했다. 외교에서 협의 과정을 밝히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검증 후 아베 담화까지 이어지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기 시작했다.
고노 담화의 근간이 된 위안부 문제를 놓고 아베 정권은 박근혜 정권과 물밑 협상을 계속하던 상황이었지만 위안부 문제에 논란의 불씨를 지핀 적도 있었다. 아사히신문의 오보 사과였다.
2014년 8월 5일 아사히(朝日) 신문에 기사가 게재되었다. 제목은 '독자의 의문에 답합니다'. 2차 대전 중 제주도에서 여성을 강제로 연행해 왔다는 그의 증언은 허위로 판단돼 기사는 취소한다는 글로 기사는 마무리됐다. 위안부 문제 보도에서 선도적 역할을 한 아사히신문의 오보 인정은 고노 담화에 대한 아베의 생각을 확신하게 했다.
그는 아사히신문의 오보 보도 후 한 방송에서 "오보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명예가 훼손된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향적인 역사인식을 가진다고 가로막는 이시바(石破) 지방창생담당상(당시)도 "얼마나 국어능력을 갖고 있었느냐"며 요시다 발언 보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아사히신문의 오보 인정과 한 달 뒤 이어진 사과는 일본 정계에도 여파가 확산됐지만 당시 일부 자민당 의원들이 고노 담화의 주인공인 고노 요헤이 씨를 국회에 유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을 정도였다. 아사히신문은 이 오보에 관한 지면과 제3자 조사위원회의 조사 내용 등을 현재까지도 공개하고 있다.
고노 담화 검증, 아사히신문의 오보 인정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은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권과 위안부 합의를 공동으로 발표한다. 일본 측에서 발표를 맡았던 당시의 기시다 후미오 외상이 읽은 문장은 이렇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한 문제로 관련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의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재차, 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경험해,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고노 담화 재검증, 아베 담화와 비교해 진일보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위안부 합의는 국내에서 굴욕외교라는 비판을 받으며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위안부 합의에서 "최종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해결"을 고집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 사과를 모두 잊어버린 것 같은데 박근혜 한국 대통령에게 전화했어요. '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으시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강제연행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저를 포함해 앞으로 일본 총리는 위안부 문제의 ''위"자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합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원덕 교수는 "아사히신문의 오보는 고노담화 검증과 함께 한일 60년사에서 양국 관계가 과거사 문제로 악화된 순간에 확산된 것으로 일본발 과거사 갈등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아베 개인은 역사 수정주의적 신념이 강한 사람으로 아베 출현 이후 일본의 이른바 역사인식 문제와 국가주의 경도 현상이 강해졌다. 전체가 우경화, 역사 수정주의로 가는 데 아베의 역할은 컸다고 했다.
<韓日60年の記憶⑤>「私たちの子や孫に謝罪させない」安倍氏の談話、日本の鉄則になる(2)
<韓日60年の記憶⑤>「私たちの子や孫に謝罪させない」安倍氏の談話、日本の鉄則になる(1)
7/20(日) 11:55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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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日報日本語版
2013年12月26日、A級戦犯が合祀された靖国神社を参拝する当時の安倍晋三首相。[写真 ロイター=聯合ニュース]
◇韓日関係は満ち潮と引き潮のように近づいては遠ざかるを繰り返しながら60年という長い歳月を過ごしてきた。その間に現在の関係を形成するのに礎石となった、いまでは忘れられつつある記憶がある。肯定と否定が交差しながらも結局ひとつの指向点を持っている6つの記憶を呼び戻した――。
激動の韓日修交60年史から省くことのできない人物が1人いる。安倍晋三(1954~2022)元首相だ。昭恵夫人が韓国の大衆文化と食べ物を楽しんだように、彼もやはり韓国に対し好感を見せた。
「朝鮮通信使がかつて日本に渡り、日本に様々な文化を伝えた。彼らが一番先に上陸したところがまさに私の故郷の下関だ。碑石もある。私は彼らを尊敬している」とするほどだった。
だが安倍氏の「好感発言」にもかかわらず、2015年の戦後70周年、韓日国交正常化50周年の年に彼が出した「安倍談話」は韓日関係の変曲点になった。「あの戦争には何の関わりのない未来世代が謝罪を続ける状況を作ってはならない」という論理だった。「歴史修正主義」基調の芽が出始めた安倍政権を経て韓日関係はその後こじれながら10年以上の暗黒期を迎える。
◇安倍氏の遺産、そして日本
パンパンと爆発音が通りを覆った。おびえた人たちが悲鳴を上げた。そして少し後、だれかがあわてて大声で叫び始めた。
「AED(自動体外式除細動器)はないですか」
2022年7月8日午前11時28分、参議院選挙を控え奈良県の大和西大寺駅前ロータリーで選挙応援演説をしていた首相が2発の銃撃に鮮血を流し倒れた。心停止状態で奈良県立医大付属病院救急センターに搬送された。病院の前には取材陣が群がった。夫の危篤の知らせを受けた昭恵夫人が病院に入ってしばらく後の午後5時3分、死亡を伝えるニュースが電波に乗った。
数日後、東京タワーが見える増上寺一帯に数百メートルの行列ができた。安倍氏の霊柩車が出るのを見るための人波で、一部は涙をぬぐったりもした。日本人に最も多く愛された首相であり、韓国人にはタカ派の政治家として有名な安倍氏。彼はなぜ安倍談話を残すことになり、安倍談話は両国の社会にどのような影響を及ぼしたのだろうか。
8年9カ月の在任記録。歴代最長寿首相だった安倍氏が夢見たのは戦後レジームからの脱却だった。戦争が可能な「普通の国」への回帰に向け、彼は憲法改正のほかにも日本が「過去史」に縛られないことを臨んだ。
日本の敗戦日であり韓国の光復節である8月15日を翌日に控えた2015年8月14日、彼が会見を開いた。「政治は歴史から未来への知恵を学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という言葉から始まり、彼が談話を読み上げた。
「(中略)100年以上前の世界には、西洋諸国を中心とした国々の広大な植民地が、広がっていました。圧倒的な技術優位を背景に、植民地支配の波は、19世紀、アジアにも押し寄せました。その危機感が、日本にとって、近代化の原動力となったことは、間違いありません。アジアで最初に立憲政治を打ち立て、独立を守り抜きました。日露戦争は、植民地支配のもとにあった、多くのアジアやアフリカの人々を勇気づけました」。
談話を読み上げる彼の口から「韓国」という単語が出てきたのはたった1回だった。
「我が国は、先の大戦における行いについて、繰り返し、痛切な反省と心からのお詫びの気持ちを表明してきました。その思いを実際の行動で示すため、インドネシア、フィリピンはじめ東南アジアの国々、台湾、韓国、中国など、隣人であるアジアの人々が歩んできた苦難の歴史を胸に刻み、戦後一貫して、その平和と繁栄のために力を尽くしてきました。こうした歴代内閣の立場は、今後も、揺るぎないものであります」。
そして彼がまた述べた。
「日本では、戦後生まれの世代が、今や、人口の8割を超えています。あの戦争には何ら関わりのない、私たちの子や孫、そしてその先の世代の子どもたちに、謝罪を続ける宿命を背負わせてはなりません。しかし、それでもなお、私たち日本人は、世代を超えて、過去の歴史に真正面から向き合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謙虚な気持ちで、過去を受け継ぎ、未来へと引き渡す責任があります」。
韓国と中国はすぐに反発した。侵略という単語に言及し、歴代内閣の立場を継承するとしたが、「痛切な反省と心からのお詫び」を過去形、間接形で伝えたためだった。
尹徳敏(ユン・ドクミン)元駐日韓国大使の評価だ。
「韓国には最悪だった。そのような意図があったのかはわからないが韓国に対する認識は(談話に)なかった。特に日露戦争でアジアとアフリカの人々を勇気づけたという部分は韓日関係が最悪に突き進むのに影響を及ぼした」。
露日戦争を口実に軍隊を派遣し、これはその後の強制韓日併合につながったためだ。中国外交部もやはり「日本は被害国の国民に対する心からの謝罪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て反発した。中国国営新華社通信も安倍談話に対して「希釈された謝罪」とした。
◇「最後のお詫び」を夢見る
安倍氏はなぜこうした談話を出したのだろうか。『安倍晋三回顧録』(2023年)で彼はこのように述懐する。
「侵略、おわび、植民地支配、痛切な反省、というキーワードがありましたが、例えば侵略については、日本は過去何度もおわびしてきましたよ。『何回謝らせれば済むんだ』という思いはありました。だから、70年談話では『我が国は(中略)繰り返し、痛切な反省と心からのおわびの気持ちを表明してきた』とか『こうした歴代内閣の立場は、今後も、揺るぎない』という表現にして、私がおわびします、とは言わなかったのです。いろんな書きぶりを戦略的に打ち出したのです」。
要するに大学教授などを前面に出して「21世紀構想懇談会」という組織まで作った自身の談話は「戦略的な作文」にすぎなかったという話だ。「謝罪の宿命」を担わない未来世代、これは安倍氏の信念で、彼は第2次政権(2012年12月~2020年9月)でこの信念の実行に入った。彼が最も大きな不満を持っていたのは1993年8月4日に当時の河野洋平官房長官が日帝強占期の日本軍慰安婦問題に対し謝罪と反省を明らかにした「河野談話」と、1995年8月15日に当時の村山富市首相の植民地支配に対する謝罪を盛り込んだ「村山談話」だった。
安倍氏の言葉だ。
「村山談話は、日本だけが植民地支配をしたかのごとく書かれている。戦前は、欧米各国も植民地支配をしていたでしょう。人種差別が当たり前の時代、アフリカで残虐なことをしていた国もある。ベルギーの国王が、残虐行為をしたとしてコンゴ共和国に謝罪したのは、2020年ですよ」。
国民大学日本学科の李元徳(イ・ウォンドク)教授は安倍談話をこのように評価した。
「安倍氏の話は後に続く慰安婦合意とも通じることになる。安倍氏は謝罪について毛頭考えていないと話したが(※慰安婦被害者に謝罪の手紙を送る意向があるかとの質問に対する答)、この一貫性が韓国に対する政策に定着した。安倍氏死去後にレガシー(遺産)となり日本社会の鉄則として残された」。
尹元大使は「朴槿恵(パク・クネ)・李明博(イ・ミョンバク)保守政権が発足したが、首相の歴史修正主義認識のため韓日関係が復元されず漂流することになった」と診断した。「慰安婦合意の白紙化、続く強制徴用賠償判決、そして日本の輸出規制まで続き戦後最悪へ突き進む状況が安倍政権で起きることになった」と付け加えた。
安倍氏の遺産はいまも受け継がれている。自身の談話が最後になるように望んだ安倍氏は、「戦後80年には(首相談話を)する必要がない」ともしたが、安倍氏の長期執権で主流としての地位を確立してきた自民党の旧安倍派を中心に、安倍氏死去後のいまでもこの声は変わらない。安倍氏と対称点に立っていた石破茂首相は今年初めに、戦後80周年の今年談話を出すという意志を表明したが、党内保守派から反発を受け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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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60年の記憶⑤>「私たちの子や孫に謝罪させない」安倍氏の談話、日本の鉄則になる(2)
7/20(日) 11:55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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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日報日本語版
朴槿恵大統領が2015年に青瓦台で日本の安倍晋三首相と就任後初めての首脳会談を行った。朴大統領が会談に先立ち青瓦台本館に到着した安倍首相と記念撮影をしている。[写真 青瓦台写真記者団]
◇河野談話検証と朝日新聞の誤報謝罪
韓日関係において安倍氏の足跡を理解するためには安倍談話以前に時計を戻してみなければならない。米国から「失望」という反応を得た2013年12月の靖国神社参拝に続き、2014年4月25日に安倍氏はチームを作る。「河野談話作成過程等に関する検討チーム」だった。慰安婦問題に対し強制性を認めた河野談話が「事実に基づいていない」という彼の考えで作られた検証組織だった。安倍氏が検証に出た河野談話はどのように作られたのだろうか。
1991年8月に金学順(キム・ハクスン)さん(1997年死去)が慰安婦被害の事実の公開証言をして1年後。当時の宮沢喜一首相が1月に韓国を訪れた。韓国政府の要請で慰安婦問題に対する真相究明調査に入った日本政府が韓国を訪れ慰安婦問題が初めて両国首脳間の問題に浮上した。「資料を探す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日本のぬるい立場に韓国の反発は強かった。当時の谷野作太郎内閣外政審議室長が調査チームを率いたが、日本の文筆家であり共産党員である吉田清治氏の「証言」もやはり調査対象のひとつだった。
吉田氏は『朝鮮人慰安婦と日本人』(1977年)、『私の戦争犯罪』(1983年)などを出版したが、彼の慰安婦関連証言を記事化したのは朝日新聞だった。1990年に朝日新聞の川崎地域版をはじめ、1992年には「済州島(チェジュド)で2000人近い朝鮮人女性狩りをした」という記事が掲載されたが。90年代に掲載された慰安婦関連報道は16回に達した。調査に入った谷野チームは16人の慰安婦と会い、調査結果に基づいて1993年8月4日に報告書が発表された。当時の河野洋平官房長官が会見したが、彼は「当時の軍の関与の下に、多数の女性の名誉と尊厳を深く傷つけた。心からお詫びと反省の気持ちを申し上げる」とした。
後に「河野談話」と呼ばれるこの談話は、自民党保守派の反発を呼び起こした。安倍元首相の話を盛り込んだ『宿命の子』を書いた船橋洋一元朝日新聞主筆は河野談話に対する日本社会の影響について、自民党保守派のうち歴史問題で「新人類」と呼ばれる若い派閥横断的なグループが誕生する契機になり、その中心的役割を担った1人が安倍氏だったと書いた。
韓国では右翼性向に分類される高市早苗元経済安全保障担当相らを中心に新たな会が生まれたが、その中心役割を担ったのが安倍氏だったためだ。1992年7月に若手議員の会は具体化し、「日本の前途と歴史教育を考える若手議員の会」と呼ばれた。安倍氏はこの会を通じて河野談話と村山談話、靖国神社参拝、慰安婦問題などを議論の「主題」として持ち出し始めた。
第2次安倍政権に入り安倍氏は河野談話検証の意志を具体化した。彼の指示で作られた検証チームは調査開始2カ月後の2014年6月20日に報告書を出した。安倍政権は、河野談話の作成過程において両国政府間で内容調整があったという趣旨で談話自体を無意味なものと低く評価した。韓国外交部は反発した。外交で協議過程を明らかにするのは前例のないことだった。この検証後に安倍談話まで続き両国関係は悪化の一途をたどり始めた。
河野談話の根幹となった慰安婦問題をめぐり安倍政権は朴槿恵(パク・クネ)政権と水面下の交渉を続けていた状況だったが、慰安婦問題に議論の燃料を注ぎ火を付けたこともあった。朝日新聞の誤報謝罪だった。
2014年8月5日、朝日新聞に記事が掲載された。見出しは「読者の疑問に答えます」。第2次大戦中に済州島から女性を強制的に連行してきたという吉田氏の証言は虚偽と判断され記事は取り消すという文で記事は終えられた。慰安婦問題報道で先導的な役割をした朝日新聞の誤報認定は河野談話に対する安倍氏の考えを確信にした。
彼は朝日新聞の誤報報道後にある放送で「誤報により多くの人が苦痛を受け国際社会で日本の名誉が傷つけられたことは事実と言ってもいいだろう」と話した。前向きな歴史認識を持つとさえれる石破地方創生担当相(当時)も「どれほどの国語能力を持っていたのか」として吉田発言報道を批判したりもした。
朝日新聞の誤報認定と1カ月後に続いた謝罪は日本政界にも余波が広がったが、当時一部の自民党議員が河野談話の主人公である河野洋平氏を国会に招致すべきという主張を出すほどだった。朝日新聞はこの誤報に関する紙面と第三者調査委員会の調査内容などを現在も公開している。
河野談話の検証、朝日新聞の誤報認定にもかかわらず、安倍政権は2015年12月28日に朴槿恵政権と慰安婦合意を共同で発表する。日本側で発表を務めた当時の岸田文雄外相が読み上げた文面はこうだ。
「慰安婦問題は、当時の軍の関与の下に、多数の女性の名誉と尊厳を深く傷つけた問題であり、かかる観点から、日本政府は責任を痛感している。安倍内閣総理大臣は、日本国の内閣総理大臣として改めて、慰安婦として数多の苦痛を経験され、心身にわたり癒しがたい傷を負われた全ての方々に対し、心からおわびと反省の気持ちを表明する」。
河野談話再検証、安倍談話と比較して一歩進んだ内容だった。だが慰安婦合意は韓国内で屈辱外交という批判を受け議論に包まれた。安倍氏は回顧録で、当時の慰安婦合意で「最終的かつ不可逆的解決」に固執した理由をこのように説明した。
「私の謝罪をみんなすっかり忘れてしまったようですが、朴槿恵韓国大統領に電話しました。『慰安婦として数多の苦痛を経験され、心身にわたり癒やしがたい傷を負われたすべてすべての方々に対し、心からおわびと反省の気持ちを表明する』という内容でした。強制連行を認め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私も含めて、今後の日本の首相は、慰安婦問題の『い』の字も言わなくて済む合意というつもりでした」。
李元徳(イ・ウォンドク)教授は「朝日新聞の誤報は河野談話検証とともに韓日60年史で両国関係が過去史問題で悪化した瞬間に広がったもので、日本発の過去史対立だった」と評価した。その上で「安倍氏個人は歴史修正主義的信念が強い人で、安倍氏出現後に日本のいわゆる歴史認識問題や国家主義傾倒現象が強まった。全体が右傾化、歴史修正主義に進んで行くところに安倍氏の役割は大きかった」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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