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참고문헌은 한국 고전 번역원의 글을 참조,인용하였습니다.)
서유기(西遊記)나 여러 고문헌을 보면,서역(西域)의 오천축국(五天竺國)과 관련된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이 오천축국의 오늘날의 강역을 현재의 인도와 인도의 근방의 지역만을 일컬어 오천축국이 있었다는 역사해설은
터무니 없는 역사해설이자 거짓의 기록입니다. 오늘날의 오천축국에 대한 역사해설은 과거 오천축국 중의 동,남천축국 혹은 중,동,남천축국에 대한 역사해설입니다. 서천축국에 대한 역사가 빠져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쓴 "청나라의 강역"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오천축국 중에서 서천축국의 실체에 대한 글을 썼는데 ,문헌적으로 서천축국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전에 "청나라의 강역"에서도 쓴 글이지만, 이를 보면,
"서인도는 홍해(紅海)·지중해(地中海)가 있어 한계하여 예나 이제나 절연(截然)하여 어긋나지 않으며"--- (완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
"명(明) 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정효(鄭曉)가 지은 《오학편(吾學篇)》에 이르기를,
“서역에 묵덕나(默德那)라는 나라가 있는데 곧 회회국(回回國)이다. 처음에 국왕 모한맥덕(摹罕驀德)이 태어날 때부터 영성(靈聖)하여 서역의 나라들을 신복(臣服)시켰으므로, 이들 나라들이 높여서 별암원이(別諳援爾)를 삼았으니 중국말로 천사(天使)란 뜻이다. 나라 안에 불경 30장(臧)이 있는데 모두 3천6백여 권이다. 글은 전서(篆書)·예서(隷書)·초서·해서(楷書) 등이 혼합되어 있는데, 서양이 모두 이것을 사용한다. 그 땅이 천방국(天方國)에 접해 있는데, 일명 천당(天堂)이라고 한다."
---(순암선생문집 제17권 잡저(雜著) 천학고(天學考))
"서인도(西印度)에서 포사(包社 페르샤)와 아단(阿丹 아라비아) 및 서쪽으로 이미아주(利未亞洲 아프리카)와 동으로 총령(蔥嶺)의 좌우(左右)와 합살극(哈薩克) 포로특(布魯特)의 여러 유목(游牧) 지대와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여러 성곽(城郭)은 모두 천방교(天方敎 아라비아를 천방이라 하는데 이것은 이슬람교를 말한다)이고,"---(기측체의 추측록 제5권 추기측인(推己測人) 서교(西敎)의 연혁(沿革))
"서방의 교술(敎術)은 불교(佛敎)가 변하여 회회교(回回敎)가 되고, 회회교가 변하여 서양교(西洋敎)가 되었는데, 주재설(主宰說)로서 불교를 물리친 것은 잘 변한 것이나, 영괴(靈怪)의 설로 대중을 미혹하는 것은 잘못 변한 것이다. 그러나 장차 그 잘못 변한 것을 잘 변화시키면 상도(常道)에 이를 수 있다."---(기측체의 상동)
"사조제(謝肇淛)의 《오잡조(五雜組)》에 "서번(西番)에서 천방국(天方國)ㆍ묵덕나(黙德那)가 가장 먼 곳으로, 현장(玄奘 당(唐) 나라 때의 중)이 불경(佛經)을 가져온 지역이므로 서로 전하기를 불국(佛國)이라 한다. 그 경(經)은 36장(藏)으로 되어 3천 6백여 권이나 되고, 그 글씨는 전서(篆書)ㆍ초서(草書)ㆍ해서(楷書) 세 가지 법이 있다." 하였다."---(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1 석전총설(釋典總說) 석교(釋敎)ㆍ범서(梵書)ㆍ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 부(附) 석씨잡사(釋氏雜事))
"현장 법사(玄奘法師)에 대하여는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다. 당 나라 정관(貞觀 태종의(太宗)의 연호) 3년(629)에 삼장(三藏) 현장이 서역(西域) 여러 나라에 들어갔으니, 곧 서번(西番)의 천방(天方)ㆍ묵덕나(黙德那) 등 지방이며, 그곳 나란타사(那蘭陀寺)에서 계현(戒賢)을 만나 유식(唯識)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아 돌아왔었다."---(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2 석전잡설(釋典雜說) 서유진전(西遊眞詮)에 말한 오지 석후(五指石猴)에 대한 변증설)
위의 열거된 기록들을 보면,추사 김정희 선생은 서인도 즉 서천축국의 위치가 "홍해(紅海)·지중해(地中海)"의 위치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오늘날의 아라비아와 혹은 아라비아와 그 주변국가를 의미합니다.
위의 기록처럼 천방국(天方國)은 오늘날의 아라비아를 의미하며,천방교(天方敎)는 오늘날의 이슬람교 입니다. 기측체의의 기록을 보면 서인도(서천축)지역에 오늘날의 페르시아(이란)와 아라비아가 있고,그들은 천방교 즉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서천축국=서인도의 강역에 있었던 나라는 오늘날의 아라비아와 그 주변국가들과 페르시아(이란)이며 이슬람교의 성지인 묵덕나(黙德那=Medina=메디나)였습니다.
당나라의 현장법사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처럼 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갔는데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해온 서역지역은 서천축국이었던 천방국(天方國=아라비아)과 묵덕나(黙德那=Medina=메디나)였습니다.
현장법사가 불교에서 유명한 "유식불교"의 종지를 또한 역사상에 전하는 유명한 사찰인 나란타사(那蘭陀寺)가 있는 천방국(天方國=아라비아)과 묵덕나(黙德那=Medina=메디나)에 가서 전수받은 사실의 기록과
천방국(天方國=아라비아)과 묵덕나(黙德那=Medina=메디나)가 불교에서의 불국(佛國)이라 불린 사실이 놀랍습니다.
위의 사실로 알수 있는 사실은 아라비아와 그 주변국과 메디나,페르시아가 지금은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들이지만 이슬람교가 발생하기 그 이전에는 불교국가였다는 겁니다. 이 지역이 과거에 불교를 믿었다고 기측체의는
"서방(서역지방)의 교술(敎術)은 불교(佛敎)가 변하여 회회교(回回敎)가 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옛날에 파사(波斯)라 불린 오늘날의 이란은 불교와 관련이 많은데,참고로 옛날의 파사(波斯)국은 여러명칭으로 불려졌는데 이를보면,
한(漢)나라 때의 조지(條支),당(唐)나라 때의 파사(波斯) 그외 포사(包社),소라국(蘇喇國),불경에서는 사위(舍衛),페르시아등 입니다. 이것을 참고로 오늘날의 이란(페르시아)과 불교의 관련기록을 보면,
삼봉집 제5권 불씨잡변(佛氏雜辨) 불씨 걸식의 변[佛氏乞食之辨]
《금강경(金剛經)》에 이르기를,“어느 때 세존(世尊)이 식사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鉢]를 가지고는 사위성(舍衛城)에 들어가 그 성(城) 가운데에서 걸식(乞食)을 하였다.”
【안】 사위는 파사국(波斯國)의 이름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2 석전잡설(釋典雜說) 불상(佛像)에 대한 변증설,
"《증익아함경(增益阿含經)》에는 "우전국왕(優塡國王)은 공교한 장인(匠人)들을 선출 회합시켜 소머리만한 향나무로 불상을 만들도록 하여 공양을 올리고 새벽과 저녁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때에 파사국왕(波斯國王)도 공교한 장인들을 소집하여 석가여래의 형체를 일러주면서 진금(眞金)으로 불상을 만들어야 한다 하고, 즉시 자마(紫磨 황금의 최상품을 말한다)로 석가여래의 불상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역시 5척 남짓되었다."
여기서 사위성(舍衛城),파사국(波斯國)은 페르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삼봉집이 인용한 금강경의 기록을 보면,페르시아인 파사국은 불교의 초기부터 불교와 관련이 깊었습니다.또한 파사국의 왕이 불상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을 보면,
과거에 페르시아가 불교를 믿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불교를 믿다가 "기측체의"의 기록처럼 불교가 변해 회회교가 되었던 겁니다.역사에서 전하는 서천축국 관련 기록은 거의 다가 "아라비아와 그 주변국과 메디나,페르시아"에 관련된
사실이며 기록이었던 겁니다. 이 지역이 이슬람교 국가로 변하면서 역사서에서는 이곳을 회부(回部)혹은 회자(回子)혹은 회회교(回回敎)혹은 회회인(回回人)이라 일컬었던 겁니다.역사상에서 회부(回部)혹은 회자(回子)혹은 회회교(回回敎)
혹은 회회인(回回人)의 실체적인 의미를 아는 것은 상당히 중요 합니다. 왜냐하면,이 회회인(回回人)의 실체적인 의미는 조선과 더불어 아시아의 실체적인 역사를 알게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 입니다.
다음의 기록은 조선과 아시아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획을 긋는 기록이라 생각됩니다. 상세히 고찰해 보면 놀라운 기록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를 보면,
순암선생문집 제17권 잡저(雜著) 천학고(天學考)의 기록을 보면,
"살펴보건대, 회흘은 당(唐) 나라에서 말하던 회흘이 아니고 바로 후세에 회회(回回)라고 불리우던 것이다. 서역의 나라들은 별도로 천신(天神)을 높여서 섬겼는데, 지금의 이른바 회부(回部)가 이것으로서, 한 나라의 이름이 아니다. 지봉(芝峯)도 말하기를, ‘회흘은 당 나라 때의 회흘이 아니고 곧 옛날의 대식국(大食國)이다.’ 하였다."
위의 기록은 "동사강목"의 저자인 안정복의 기록인데,자신의 기록과 더불어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의 기록을 기록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회흘은 당(唐) 나라에서 말하던 회흘이 아니고 바로 후세에 회회(回回)라고 불리우던
것이다."라는 기록의 의미는 당(唐)나라 당시의 회흘(回紇) 또는 회골(回鶻)로 불려진 민족은 "성호사설"에서 인용한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의 기록처럼 회흘(回紇),돌궐족은 고대의 흉노족(匈奴族)의 후예를 의미하므로 후세의 회회(回回)가
될수 없다는 겁니다. 현재의 역사에서는 이 회흘(回紇) 또는 회골(回鶻)로 불린 민족의 후예를 위구르(uighur)민족이라 말하고 있고, 이슬람교가 대륙에서 회교(回敎)나 회회교(回回敎)로 불리게 된 것은 회흘(回紇), 회골(回鶻)이라 불리던 위구르가 믿던 종교로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지만,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학설이고,조선시대에 그 당대에 살았던 "동사강목"의 저자인 안정복과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은 현재의 학설과는 다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학설에서는 회흘(回紇) 또는 회골(回鶻)로 불린 위구르 민족이 믿던 종교였기 때문에 회교나 회회교로 불려졌다고 하지만,위의 기록처럼 안정복이 인용한 지봉유설에서 말하는 회흘(回紇)의 의미는 당나라때의 회흘(回紇)민족과
오늘날의 위구르 민족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옛날의 대식국(大食國)을 의미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대식국은 오늘날의 아라비아를 의미합니다. 역사상의 기록인 "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회회인에 관한 기록은
한결같이 옛날의 대식국을 의미하는 기록이지 회흘이라 불린 위구르인을 의미하는 기록이 아닙니다. 위구르인은 당나라때 회흘,회골로 불리었다가 몽고,원나라 시대때에는 "외오아(畏吾兒)"로 불렸습니다. 그러므로 조선,명,청의 시대의
회부(回部)의 의미는 "이슬람교 발생지의 나라(대식국)를 기점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그 주변국가들"을 의미하는 기록인 겁니다.물론 위구르인들도 11세기부터 이슬람화가 시작되어 15세기에 와서는 이슬람교를 거의 다가 믿게 되었지만,
역대의 사서에서 나오는 회회인 또는 회부의 의미는 옛날의 대식국(아라비아)과 그 주변국가들을 의미하는 기록이므로 회부,회회인의 정확한 개념면에서의 위구르인은 이 회부,회회인의 부속적인 부차적인 측면으로서는 인정되나,
"동사강목"의 저자인 안정복의 기록과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의 기록처럼 정확한 개념적인 차원에서의 회부,회회인으로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회부,회회인의 정확한 개념이 "이슬람교 발생지의 나라와 이슬람교를 믿는 그
주변국가들" 이므로 이 개념을 토대로 조선과 명나라,청나라의 회부,회회인 관련 기록을 풀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전개 됩니다. 이와 관련 회부,회회인 관련 기록을 보면,
회국자(回國子)는 무릇 12부(部)이니, 합밀(哈密)ㆍ벽전토로번(闢展土魯藩)ㆍ합랍사랍(哈拉沙拉)ㆍ고지기[庫直]ㆍ사아이(沙雅爾)ㆍ새리목(賽里木)ㆍ배(拜)ㆍ아극소(阿克蘇)ㆍ오십(五什)ㆍ객승랍이(喀升臘爾)ㆍ대이강(蔕爾羗)ㆍ화전(和闐)인데, 또한 회회국(回回國)이라고도 한다. 바다 안에 있고 동북으로 육지와 통했다. 공로(貢路)가 멀어서, 육지로 무릇 5개월을 지나야 북경에 도착된다. 그래서 공사(貢使)가 해마다 한 번 오는데 대임자가 이른 뒤에야 귀국한다.---(계산기정)
회자(回子)는 회회국(回回國)이라고도 하며, 바다 가운데에 있어 다섯 달이 걸려야 비로소 중국에 이른다. 강희(康煕) 때에 명령을 거역하였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풀어 토벌하여 그 왕을 사로잡아 서울로 데려오자 그 딸을 후궁으로 바치었다. 그곳 사람들은 검은 얼굴에 눈이 깊고 구레나룻이 더부룩하다. 옷과 모자는 청인과 같고, 여자는 알롱달롱한 옷을 입으며 머리는 땋아서 늘어뜨린다. 도광(道光) 때에 또 반역하였으므로 양우춘(楊遇春)을 보내어 토벌, 평정하였다.
---(심전고(心田稿)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제국(諸國))
현재의 역사를 보면 회회국을 포함한 서역국의 거의다가 신강자치구에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심전고의 기록이나 계산기정의 기록을 보면 회회국은 "바다 가운데에 있어 다섯 달이 걸려야 비로소 중국에 이른다."라는 기록에서,
"바다 가운데에 있어"의 의미는 반도(半島)를 의미하는 기록으로 봅니다. 현재의 아라비아의 지도를 보면 홍해와 페르시아해를 낀 반도로서 북쪽으로 지중해를 보면 바다가운데 있었다고 표현할만 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현재의 역사에서 서역국의 대다수가 신강자치구에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바다가운데 있다는 의미의 표현이 가능한 지역이 신장자치구에서 과연 있을까요? 또한 위의 기록을 보면 "다섯 달이 걸려야 비로소 중국에 이른다."고 하는데,
오늘날 신강자치구에서 현재의 대륙의 북경까지 얼마나 멀기에 그 공로(貢路)가 육지로 거의 반년(半年)인 5개월이나 걸리는지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참고로 한반도 조선 관점에서 조선의 의주에서 북경까지의 거리를
조선의 "연행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의주에서 북경까지 약1개월 걸립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강자치구에서 북경까지 5개월 걸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수 없습니다. 오늘날 신장자치구에 회회국을 포함한 서역국의
대다수가 신강자치구에 있다는 역사관이 얼마나 허구에 의한 학설인지 증명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성소부부고 제19권 문부(文部) 16 ○ 기행 하(紀行下) 기유서행기(己酉西行紀)
“젊었을 때 도독(都督) 뇌여림(雷汝霖)을 따라 서천국(西天國)에 갔는데, 가락관(嘉峈關)에서 출발하여 서번(西番)관 토로번(土魯番)을 지나 곤륜산(崑崙山) 밑으로 해서 갔다. 그 산을 바라보니 높고 크기가 마치 하늘의 반은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서천국에 도착하니 장안(長安)에서 1만 8천 리였다. 5개월이 걸려서야 도착하였는데 그 나라의 서울은 사위성(舍衛城)이었다. 그 나라 왕은 백반(白飯 석존의 숙부)의 자손이며 고관들은 모두 승복(僧服)을 입고 있었다. 한문자(漢文字)를 쓰지 않으며 기후는 중국과 비슷하나 겨울에도 춥지 않았다."
청장관전서 제6권 영처잡고 2(嬰處雜稿二) 관독일기(觀讀日記)
"회회국(回回國)은 중국에서 수만 리 밖에 있다."
위의 문헌인 "성소부부고"는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저작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천국(西天國)은 서천축(西天竺)이며 서인도(西印度)입니다. 제가 위에서 상술한 것처럼 역사상의 진정한 서천축국은 오늘날의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국 입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천방국(天方國=아라비아=대식국)과 묵덕나(黙德那=Medina=메디나)에서 당(唐)나라의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해온 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이 과거에 불국(佛國)으로 불려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측체의"에서는 아라비아,페르시아 지역이 서인도(西印度)라고 기록하고 있고,"완당집"에서는 서인도는 홍해와 지중해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묵덕나(黙德那)"가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디나 였는지,
그 근거를 알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다음의 기록으로 증명할수 있는데 이를 보면, 추재집(秋齋集) 권지7 시,죽지사(詩,竹支詞) "默德那回回祖國也" (묵덕나는 회회의 조국이다.) 지금까지 배워왔던 역사에서의 조선은 국제정세와
역사에 어두운 부정적인 요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상술한 내용과 추재집의 내용을 보면 조선은 국제 정세와 역사에 어둡지 않았습니다. 추재집의 기록을 보면,묵덕나가 회회국의 조국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 자체는 심층적으로
국제적으로 회회국의 역사와 정세를 안다는 겁니다. 이슬람교에서 역사상의 메디나의 의미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헤지라(이주)이후 메디나 지역이 이슬람교의 정치,교단 활동의 중심이 된 지역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기록이
추재집의 기록입니다. 위의 "성소부부고"의 기록인 "서천국에 도착하니 장안(長安)에서 1만 8천 리였다."라는 기록을 오늘날의 대륙에 대입을 해보면,거의 하자가 없는 기록으로도 보입니다. 현재의 학설에서는 위의 기록인 "그 나라의 서울은
사위성(舍衛城)"에서 "사위성(舍衛城)"을 중인도의 교살라국(憍薩羅國)의 도성(都城)이고,현재의 인도(印度) 곤다주(Gonda州)라고 해설하지만, 분명히 "성소부부고"의 기록에서는 서천국 즉 서인도에 갔다고 기록했습니다.
중인도가 아닙니다. 오늘날 현재의 학설에서는 "사위성(舍衛城)"을 중인도의 교살라국이라 주석을 하지만,고문헌인 "삼봉집"에서의 주석에서는 "사위성(舍衛城)"은 옛날의 파사국(波斯國)이라 하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파사국(페르시아)은 서인도이며,서천축국이었습니다. 이처럼 여러 고문헌과 현재의 학설을 비교,고찰해 보면 현재의 학설은 허구와 오류로 가득합니다. "기측체의"의 기록처럼 서천축국인 서인도가 불교를 믿었다가 회회교로 변했다고 한 것처럼 옛날의 서천축 지역이 회부,회자 지역이 되었습니다. 위의 계산기정,심전고의 기록을 보면,청(淸)나라때 그 회자 지역에서 청나라로 조공을 가는 길이 육로로 5개월 걸린다는 기록과 위의 "성소부부고"에서 장안에서 서천축 지역까지
5개월 걸렸다는 동일한 여정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만큼 먼 거리의 여정이었다는 것인데 얼마나 먼거리였는가를 "청장관전서"에서는 "회회국(回回國)은 중국에서 수만 리 밖에 있다."라고 기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학설에서는 역사상의 회자,회국의 상당수가 오늘날의 신강자치구에 있다고 말합니다.
회부,회회인의 정확한 개념이 "이슬람교 발생지의 나라와 이슬람교를 믿는 그 주변국가들" 이므로 위의 회회국의 위치는 오늘날의 서남아시아이며 옛날의 서천축국 지역인 아라비아와 그 주변국가들이므로 위의 회회국 또는 회국자 12부는 오늘날의 아라비아 일대와 그 주변에 있었습니다. 위의 기록과 관련된 그 당대의 상황과 관련하여 회부,또는 회회인에 관하여 좀 더 심층적으로 고찰해 보겠습니다. 이를 보면,
영조실록 36년 경진(1760,건륭25)
"임금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호칙(胡勅)을 맞이하고 돌아와 인정전에서 칙서를 선포하였다. 당초 회부(回部) 소속의 추장 대화탁목(大和卓木) 파라니도(波羅泥都)와 소화탁목(小和卓木) 곽집점(霍集占)이 준이(準夷)에게 붙잡혀 있었는데, 청(淸)나라에서 구제해 주어 제 소굴에서 추장 노릇을 그대로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도리어 청나라를 침략하므로, 청나라에서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섭이기목(葉爾奇木)과 합십합(哈什哈) 같은 등지에까지 추격하였다. 이에 별부(別部) 발달산(拔達山) 등은 모두 항복을 하고, 마침 곽집점은 상처를 입고 죽었으며, 파라니도는 그 부하들에게 살해되어 서변(西邊)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에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보국 장군(輔國將軍) 종실(宗室) 종복(鍾福)과 내각 학사(內閣學士) 부덕(富德)을 보내와 칙서를 반포(頒布)하였는데, 말하기를, ‘거리를 따져 본즉 변경에서 다시 2만여 리나 더 개척하였고 시일을 꼽아 본즉 군사를 일으킨 이래 5년을 넘지 않았다.’는 것이 그 대략이었다."
다산시문집 제15권 서(敍) 대청 세계략(大淸世系略)
"고종법천륭운지성선각체원립극부문분무효자신성순황제(高宗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孝慈神聖純皇帝). 휘는 홍력(弘曆)이고 세종의 제4자이다. 강희 신묘년 8월 13일에 태어났는데, 처음에는 보친왕(寶親王)에 봉해졌다. 옹정 을묘년에 위를 계승하여 건륭(乾隆)이라 개원하였다. 원년은 병진이다. 을해년에 준갈이(準噶爾)를 평정하였다. 기묘년에 화탁목(和卓木)을 토벌(討伐)하여 국토(國土)를 2만여 리 개척하였다. 곧 회부(回部)이다."
영조실록을 보면 회부(回部) 소속의 추장이 "준이(準夷)=준갈이(準噶爾)"에게 붙잡혀 있었고,이에 청(淸)나라가 준갈이를 토벌하여 회부소속의 추장을 구해주었는데,회부가 도리어 청나라를 배반하자 청나라가 회부를 평정했는데,
기록에서 처럼 그 평정한 지역이 청나라의 변경에서 2만리를 더 개척하였다는 기록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청나라가 회부를 평정하여 개척한 지역이 2만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전에 제가 올린 "청나라의 강역"에서
청나라의 학자 효람 기윤의 기록인 "연무(동서,남북) 2만리"의 기록과 동일한 기록입니다. 또한 그 당대에 살았던 "심전고"의 저자도 청나라가 신강지역 수만리를 개척한 사실을 알고있습니다. 다산시문집에서도 청나라가 회부를 평정한 사실을
기록했는데 다산시문집의 기록에서 화탁목(회부)을 토벌하여 국토를 2만리 개척했다고 하는데, 이 지역이 곧 회부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역사상의 회부(回部)는 신강지역이고 신강지역은 오늘날의 흑해연안과 페르시아(이란),
지중해 연안과 그 주변국,동부 유럽지역,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국 즉 통칭 서남아시아 전체를 아우른다고 봅니다. 특히 오늘날의 동부 유럽국가들 중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들의 상당수가 옛날의 회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역사상에 전하는 기록들을 보면 이 회회국과 천산(天山)과 총령(蔥嶺)과의 관계가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역사상의 기록인 천산과 총령이 과연 현재의 천산과 총령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중요한 근거가
위에서 누차 강조한 기록과 이를 설명한 회부,회회인의 대한 개념입니다.(회부,회회인="이슬람교 발생지의 나라와 이슬람교를 믿는 그 주변국가들")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는 위에서 부연설명한 서천축국의 위치입니다.( 회부,회회인의
개념과 동일한 내용임)이를 바탕으로 하면 옛날의 총령과 천산은 지금의 총령과 천산이 아닙니다. 또한 총령주변에 감숙지역이 있고 곤륜산이 있고,흑수=흑룡강이 있는데, 현재의 지나대륙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 옛날의 천산이며,총령은 어디란 말인가? 또한 지금의 총령과 천산은 뭐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제가 위에서 말한 근거를 토대로 하면 옛날의 총령이자 천산은 오늘날 흑해연안 일대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금의 총령과 천산은 조선의 황해도 지역의 총령현이 총령이었으며,조선의 백두산이 천산이었다고 봅니다.
또한 역사상의 흑수=흑룡강이 이 흑해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이 흑해가 흑해로 불린 이유에 대해 현재의 사학에서는 "13세기에는 몽골인(人)의 유럽 침입에 의해서 슬라브의 세력이 한때 후퇴하였고, 이어서 15∼16세기에 오스만투르크가 연안지역을 정복하고 투르크의 바다가 되었을때 비로소 ‘흑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는 광막한 바다에서 이따금 때아닌 폭풍이나 짙은 안개로 위험에 휩싸이게 되는 데서 유래하였다."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흑해로 불린 이유는 "육지로 막혀 있어 수면층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산소가 부족하고 유화수소가 고도로 농축되어 있어 흑색을 띄우게 되어 붙인 이름이다."라고 합니다. 저는 위에서 설명한 흑해연안 또는 그 주변에 총령이 있다고 보는데,흥미로운 사실은 이 흑해연안에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는데,이는 아마존 여인족 왕국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왜 흥미로운 사실이냐면? 제가 옛날의 총령이 흑해연안 혹은 주변에 있을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고전 번역원"의 여인국(女人國)관련 주석을
보면 "총령(葱嶺)의 남쪽에 있었던 나라이다."라고 합니다. "성호사설"에서는 "직방외기"을 인용하여 "여인국은 달단(韃靼)의 서쪽에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달단(韃靼)족은 타타르라 불린 몽골계의 민족입니다.
역사에서 여인국(女人國)관련기록은 고대사(古代史)관련 기록 입니다. 그리고 "직방외기"는 명나라때 쓰여진 책입니다. "직방외기"는 그 당대에 달단족 또는 오이라트(준갈이)는 몽골 민족이므로 이들의 서쪽에 고대의 여인국이 있었다고,기록한 겁니다. "성호사설"에서 인용한 "직방외기"의 기록인 "여인국은 달단(韃靼)의 서쪽에 있었다."는 기록과 흑해연안의 여인국(女人國)전설을 비교해보면, 묘하게 일치되는것 같습니다.즉 이 흑해연안에 총령이 있었고 총령이 있으므로 이 지역 어딘가가 감숙지역이며,흑수=흑룡강의 실체가 있을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이러한 사실들과 관련된 서역국가에 대해 알아보면 황당한 사실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역사상에 전하는 천마(天馬)의 나라가 대완국(大宛國)인데,이 대완국에 관한
추재집(秋齋集) 권지7 시,죽지사(詩,竹支詞)의 기록을 보면," 嗒烈漢之大宛也。" (탑렬은 한나라때의 대완이다.) 그리고 "지봉유설"에도 같은 기록이 나오느데 탑렬이 대륙의 가욕관(嘉峪關)에서 1만 3천리의 거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대륙의 가욕관이 있는 지역이 감숙성 북부지역인데, 그 가욕관에서 옛날의 대완이었던 탑렬이 1만 3천리의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지금의 대륙의 상황을 보면 현재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에 걸쳐있는
페르가나 지역이 대완이 있었던 지역이라 현재의 학설은 말하지만,대륙의 감숙성의 가욕관을 기점으로 해서 서쪽으로 1만 3천리를 어림 짐작으로 보아도 현재의 학설에서 말하는 지역을 훨씬 초과 합니다. 무려 1만 3천리의 거리입니다.
"한국 고전 번역원"의 주석을 보면 "한나라 소제(昭帝) 때의 무신(武臣)이, 대완국(大宛國)에 사신으로 가서 조령(朝令)으로 누란국(樓蘭國)과 구자국(龜玆國)을 책하여 모두 복종시켰다."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 설명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대완국 근처에 누란국(樓蘭國)과 구자국(龜玆國)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대완국 근처에 누란국(樓蘭國)과 구자국(龜玆國)이 있으나까,한(漢)나라 조정에서 명령을 내렸던 겁니다.
대완국에서 누란국(樓蘭國)과 구자국(龜玆國)이 아득히 먼 거리의 나라였다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명령입니다. 또한 "한국 고전 번역원"의 주석을 보면 대완국의 주변에 대월지가 있었습니다." "《正韻》에 "월지는 대완(大宛)의 서쪽에 있다." 또한 고대의 구자국(龜玆國)은 불교로 유명했는데 인도의 유명한 승려인 구마라습(鳩摩羅什)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사학에서는 이 누란국(樓蘭國)과 구자국(龜玆國)이 신강 자치구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현재의 지리지식에 입각해도 고대의 역사에 나오는 국가들을 고문헌을 통해 고찰해 보면 이렇게 현재의 사학과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해야 겠지만 직장인으로서 시간 관계상 제약이 참 많습니다.
평소에 생각했던 바를 문헌적인 근거를 통해 저의 생각을 밝힌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