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감산사를 찾아가다
불상을 공부하면서 감산사에서 두 점의 불상이 출토되어서 국보로 지정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산사라는 절의 이름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답사 모임에서 답사지로 이 절터를 탐방지로 정한 일이 없었다. 나도 국보인 불상을 사진으로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절터가 있는 곳이 경주지역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내가 찾아 갈 생각은 해본 일이 없다.
절집 108곳을 찾아가기로 정해 놓고, 차가 없으니 대중교통으로 쉬이 찾을 수 있는 곳을 우선하여 돌아다녔다. 70여 절이 넘어가니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찾아갈 마땅한 절이 생각나지 않았다. 더구나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는 찾아가기 쉬운 곳이 먼저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절집을 뒤적이다 보니 감산사가 나왔다. 대구에서 교통이 편리한 경주지역이니 구미가 당겼다.
불국사 역에서 울산 쪽으로 두어 정류소만 지나면 괘릉 정류소이다. 절의 소재지가 괘릉리로서 괘릉에서 멀지 않는 곳으로 소개해두었다. 지금은 절집도 들어서 있다니 황량한 빈터가 아니겠구나 싶다. 괘릉리라면 멀지도 않겠네. 집사람더러 감산사를 이야기하니 좋다고 하면서, 점심 도시락을 준비한다. 나도 생수와 커피를 챙겼다.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의 정류장에 갔더니 외동면으로 가는 600번 버스가 바로 왔다. 한 시간을 기디려야 하는 버스가 이렇게 빨리 오면 기분이 좋다. 그런 날은 뭔가 행운으로 느껴진다. 내 차를 타고 다닐 때는 상상도 못하였던 행복감이다. 우리의 삶에 더 많은 행복거리를 만들면서 산다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리라.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버스에서 내려 10분 쯤만 걸으면 ‘괘릉’이다. 우리의 교과서에 반드시 사진이 나오는 신라 원성왕 능묘이다. 괘릉으로 걸어가는 길은 나무 숲이 감싸고, 산자락 아래에는 푸른 벼들이 빽빽하다. 산도 들도 온통 푸른 색이다. 마음도 푸르르다. 시원한 바람도 불어와서 그늘 속으로 걸어가니 기분이 맑아진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의 하나에 숭복사 비가 있었던 곳이라며 화살표로 숭복사 터로 가는 방향도 표시하고 있다. ‘숭복사도 여기네,’ 반가웠지만 오늘은 담사지가 아니다.
인터넷에서 감산사를 소개하는 글을 찾아 읽어보았다.
“불국사와 신라 원성왕릉(괘릉)에서 멀지 않는 마을의 뒤편에 남아 있는 옛 절터이다. 현재 이 절터에서 출토된 석조비로자나불 불상을 모신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여러 전각이 들어서 있다. 뒷 편에는 신라시대 때 건립한 삼층석탁이 있고, 그 옆의 빈터가 감산사 터이다.”
이 글을 일고 나는 ‘어, 이 절이 딱이네. 오늘은 이 절을 찾자’라고 작정했다. 괘릉은 여러 번이나 찾아갔지만 감산사는 빈 터라는 지레 짐작으로 아예 찾아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집사람은 일요일에 집에 있으면 축 늘어져서 시간만 허송함으로 어디에든지 찾아가자는 것이 평소의 주장이다. 그러니 좋다고 할 밖에.
초등학생 쯤의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가족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무인상을 사진도 찍고, 뛰어다니기도 한다. 젊은 부부들이 가족 나들이를 하는 모습은 보기가 참 좋다. 어린 시절에 부모와 이처럼 나들이를 한 아이들은 평생 동안 그 행복을 간직하리라. 그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부부의 사진을 찍었다.
괘릉에서는 화살표로 감산사 가는 길을 가르키고 있다. 나의 계산법으로는 감산사가 금방 나타나야 한다. 걸어가는 길의 양편 벼논에는 벌써 벼이삭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곧 가을이 오려나 보다. 더위도 힘을 잃으리라.
“이것 봐라. 더위란 넘이 나를 못 살게 굴더니만 이제는 너도 쫓겨 갈 신세가 되었구나.”
그렇더라도 지금, 팔월 중-하순의 햇살은 두텁고 뜨겁다. 화살표를 따라 낮은 둔덕을 넘으면 바로 감산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다. 고갯마루 너머에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있다. 가까이 갔더니 ‘수봉정’이라 하여 수봉선생 고택이었다. 수봉선생은 내가 다닌 학교를 창건하신 분이다. 경주에서는 최부자만큼이나 유명하신 분이고, 존경받는 분이다. 나는 외동면에 고택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괘릉 바로 뒤편인 줄은 몰랐다. 집의 안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기와집이 즐비하여, 옛날의 부자 동네이다. 집 앞의 느티나무 아래에 앉으니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기 말할 수 없다. ‘그래, 바로 이 바람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 우리집의 대청마루에 등을 대고 누워 있을 때 뒷 들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잊지 못한다. 아내더러 그 바람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에어컨 바람도 아니고, 선풍기 바람도 아닌, 그래 바로 이 바람이다. 집사람에게 이것이 어릴 적 우리집의 대청마루에서 맞이한 여름의 들녘 바람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화살표를 따라 다시 걸었다. 절은 머리카락도 보여주지 않는다. 겨우 사람을 만나 절을 물으니 멀다 가깝다는 말 대신에 이 길 따라 쭈욱 가세요 한다. 토함산 자락에는 전원주택처럼 산듯한 집들이 즐비하고, 저쪽 산마루에는 불국사가 있는 듯하다. 햇살은 따갑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땀이 비 오듯 하지는 않는다.
저 멀리 산 아래에 나무들 사이로 기와지붕이 보인다. 저긴가 보다. 짜증스럽던 기분이었는데 생기가 돌아온다. 절 마당에 들어서니 대적광전의 현판을 단 주불전이 우뚝하다. 절 마당의 꽤 넓었고, 여기저기에 많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폐사지로 생각했는데, 최근에 절집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작은 절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대적광전에는 이 절터에서 출토하신 비로자나불을 모셔 두었다. 들어가서 두 손 합장하고 삼배를 올렸다. 법당 뒤에는 신라시대에 건립하였다는 삼층 석탑도 있었다. 아마도 이 탑 앞의 좁은 공간이 본래의 감산사의 터가 아니었을까 한다.
삼국유사 ‘남월산’ 조에 소개한 이 절의 내용을 좀 더 보기로 하자.
“이 절은 서울(경주 궁성)의 동남쪽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금당의 주불 미륵존상 화광후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개원 7년, 기미년 2월 15일에 종아찬 김지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의 명복을 빌어 감산사 한 채와 돌미륵 한 구를 정성껏 조성하고 ------”라고 되어 있다.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과 발원이 같다. 이때는 부유한 신라 왕족들이 기원불사를 많이 하였었나 싶다.
우리 부부는 음식점을 찾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 아이들과 다녀보면 인터넷에서 맛집 검색을 하여, 그 집을 찾아가는데, 맛집 들리기도 여행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다. 우리는 도시락을 사 들고 소풍 가던 세대라선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준비해간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 것에 익숙하다. 절집의 나무의 그늘에 앉아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도시락을 먹었다. 이곳은 조용하다. 지나가면서 우리를 힐긋힐긋 바라보는 사람도 없다.
기운 오후녁이 되었지만 해는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흩뿌린다. 사람도 잘 다니지 않는 산골 절이니, 내려가는 길은 또 걸어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니 올라올 때 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예전에는 걸음을 좀 많이 걸으면 몸의 피곤함보다 다리가 아파서 걷기가 힘들었는데, 요즘을 절집을 다녀보면 조금 많이 걸었다 싶어도 다리가 아픈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더러 발바닥이 화끈거리곤 했다. 내리막길이니 그냥 뚜벅뚜벅 걸었다. 작은 둔덕도 있었고, 이리저리 굽이치기도 하였지만 절을 찾아갈 때만큼 힘들지 않았다.
“어, 저기 차들이 다니는 큰길이네.”
생각보다 빨리 내려 왔었나 보다. 버스 정류장의 의지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버스가 왔다.
첫댓글 백팔사 이야기가 참 재미도 있고 좋은 재료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