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의 역사(History of Cruise)_1900년대
크루즈 항해의 황금기: 바다 여행의 즐거움에 관심을 가진 시대
항공을 이용한 여행이 각광받기 이전에 크루즈를 이용한 대서양 횡단은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유일하면서도 인기있는 방법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크루즈선이 타이타닉호다.
RMS 타이타닉(Royal Mail Steamer or Ship Titanic)은 영국 선적으로 영국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社가 운영한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이다. 총 톤수 46,328 GRT였고, 정원은 3,327 명(승객 2,435 명)이었으며 모항은 리버풀이었다.
타이타닉 호
☞GRT와 DWT
GRT는 Gross Tonnage의 약자로서, 용적톤수를 뜻함. 선체 외판으로 둘러막힌 모든 공간의 용적을 나타냄. DWT는 Dead Weight 의 약자로서, 말씀하신 것 처럼 재화중량톤수를 말함. 선박의 만재배수량에서 선체의 무게(Light Weight)를 뺀 값으로 일반적으로 선박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무게+선원+소모품 등의 무게를 합한 값임. DWT는 중량톤수이고 GRT는 용적톤수 이므로 그 쓰임새도 많이 다름. 일반적으로 DWT는 화물선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단위로 많이 쓰이고 GRT는 여객선 등에 주로 쓰임.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스햄튼(Southampton)을 출발하여 미국의 뉴욕으로 향하던 첫 항해 중에 4월 15일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승객 대다수는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들이었다. 출항 당시 승선 인원은 약 2,224명(승객 1,317명, 선원 885명, 여성 승무원 23명)이었으며 침몰로 1,514명이 사망하였다.
타이타닉호는 선내에 체육관과 수영장, 그 외의 호화로운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구명정은 20척(최대 정원은 1,178명) 밖에 없었다. 구명정에 타지 못한 채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은 수 분 내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하였다. 침몰 당시 배에는 1,000여명의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구명정을 타고 있다가 몇 시간 뒤 구조된 사람은 706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이 발발했고, 군수품과 병력 이동에 대형 크루즈선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성능과 용적률은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1 차 세계 대전 중 레저를 위한 크루즈 항해는 중단되었습니다. Cunard社의 Queen Mary와 Queen Elizabeth 등이 군함으로 전환 되었습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창궐했고 선박과 철도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스페인 독감은 1918년에 발생했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가장 크게 유행했고 치명률도 높았다. 스페인독감은 A형 바이러스에 속하는 H1N1 변종형으로 소멸하지 않고, 적응하고 변형되어 인간을 숙주로 삼고 살아간다. 코로나19도 스페인독감 바이러스의 변종이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채무국이었던 미국이 영국에 전쟁 비용을 빌려줌으로써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변하였다. 세계의 패권도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에 미국 도시에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대량의 범죄가 발생했고 이들의 원인이 바로 음주라고 여겼기 때문에 1919년 금주법이 시행된다.
☞금주법 시대(禁酒法時代, Prohibition era)란 미국 의회에서 미국 수정 헌법 제18조, 즉 금주법을 비준한 1919년부터 1933년을 말한다.
미국은 육지에서 주류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했는데, 연안 또는 공해 선상에서 주류 판매와 위락 시설 제공이 성행하면서 유람선업이 발달하게 된다. 최초의 세계일주 크루즈선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Cunard line의 라코니아호(Laconia)가 1922년 2,20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오대양을 항해한 최초의 크루즈선이 되었다.
큐나드 라인의 라코니아호
제1차 세계대전 종전(1918년 11월 11일)부터 제2차 세계대전 개전(1939년 9월 1일)까지 세계 경제는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되고 블록화 보호무역으로 나아갔다. 보호무역으로 국제무역은 축소되었지만, 전쟁과 스페인독감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이후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이르게 되고 크루즈선의 승객 수도 감소하게 된다.
☞대공황은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지속된 경제 위기로 검은 화요일로 알려진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에 의하여 발생했다.
1930년대에 디젤 선박 시대가 열리며 크루즈 산업은 더욱 발전했다. 이 시기에 퀸메리호, 카로니아호, 로테르담호 등이 취항하며 본격적인 유람선 시대가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 1일~1945년 9월 2일)은 항공 기술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8년, 유럽 최초의 상용 논스톱 대서양 횡단 제트여객기의 등장으로 크루즈 운항는 점차 쇠퇴하였으며 선사들이 파산하고 선박이 매각되거나 운항이 중단되었다.
현대적인 크루즈는 1960 년대에 등장 했다. 선사들이 일반 대중에게 운송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휴가 목적지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들이 오직 크루즈를 위한 기항지가 된 것도 이 때부터다. 크루즈가 움직이는 리조트, 호텔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사랑의 유람선(Love Boat)은 1977 년부터 1986 년까지 ABC에서 방영 된 호화 여객선 선MS 퍼시픽 프린세스를 배경으로 한 미국 로맨틱 코미디 TV드라마 시리즈. 또한 1986 년, 1987 년 및 1990 년에 3 시간 분량의 스페셜 4 편이 방영되었음.
러브보트 MS 퍼시픽 프린세스
대서양을 횡단하는 크루즈는 뉴욕 항, 보스턴 항 등을 이용했으나 카리브해 지역을 운항하는 크루즈 노선이 개발되면서 많은 선사들이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에 본사를 두게 된다. 캘리포니아는 멕시코 리비에라 지역 운항 크루즈의 본거지로, 벤쿠버는 여름 시즌 알래스카 크루즈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이애미 항 전경
1966년, 노르웨이 사람 Knut Kloster와 이스라엘 사람 Ted Arison에 의해 Norwegians Cruise Line이 설립되었다.
1968년, 에드 스테판(Ed Stephan)과 3명의 노르웨이 선박 소유주( Sigurd Skaugen, Anders Wilhemsen 및 Gotaas Larsen)들이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크루즈 선사를 만들고 이름을 "Royal Caribbean"이라고 지었다. 첫 번째 배(Song of Norway)는 1970년 11월 7일 마이애미에서 처녀 항해를 시작했다.
1972년 테드 애리슨(Ted Arison)이 Carnival Cruise Lines를 설립한 후 1987년 기업을 공개했습니다.
1988년 Mediterranean Shipping Company(MSC)는 Monterey의 정기선을 인수하여 크루즈 사업에 뛰어 들었다.
카니발 주식시장 상장
Carnival Corporation은 1989년 프리미엄 선사 Holland America Line(Windstar Cruises 등 포함); 1992년 럭셔리 선사 Seabourn; 1997년 컨템포러리 선사 Costa Cruises; 1998년 프리미엄/럭셔리 선사 Cunard Line과 합병했다.
1993년, Genting은 Star Cruises를 설립했다.
Royal Caribbean은 1997년 Royal Caribbean Cruise Line이 Celebrity Cruises를 인수하면서 Royal Caribbean Cruises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