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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견문록이 밝혀주는 역사의 비밀 - 백이숙제의 수양산은 성삼문의 수양산(난산南山, 총난산宗南山, 박달산 - 바그다울라)이다. - 제목 변경 후 재게재
한헌석칼럼 34호 ‘카스에서 - 3 - 선조가 의주(카스) 몽진에서 환궁할 때 바이츠엉(拜城, 해주, 카이추)에서 참배했다’도 인용합니다.
먼저, 선조가 이 길을 지나갔다면, 마르코 폴로가 묘사하는 '카이추의 성채 안의 매우 아름다운 궁전에 있는 과거 그 지방의 모든 국왕들의 초상화-그 나라를 지배했던 국왕들이 이룩한 것이다-'에 몽진 시에는 겨를이 없다하더라도, 환궁할 때는 반드시 참배를 하고 지나 갔을 것이다. ‘임진왜란 시 서천했던 선조가 돌아올때 수양관에 머물렀다’는 내용이 아래 인용 글에도 보인다. 대륙조선사연구회의 최두환칼럼 794호의 서우성박사님의 글을 전문 인용한다.
‘Re:백이숙제가 인생을 마감한 황해도 해주 고죽국 수양산을 찾아야
언제나 대륙의 서북쪽을 향하여 화살을 겨누고 계십니다. 그런데 언제나 사료를 보면 화살 끝의 방향이 한결같이 그렇게 가리키고 있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더하여 참고로 올려봅니다. 해주는 고려때 鹽州 白州 安州의 세 현을 포함하여 安西 도호부라 하였던 지역이며 조선에서는 인접지역으로 연안, 백주가 있는데 “白州兔山半月岡實我國中興之地”라고 해서 왕조의 중흥지역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규장각도서관의 고도서 읍지류의 해주를 찾아보면
<海州>
高麗太祖統合羅濟後移邑于龍首山之南改爲海州
舊址在首陽瀑布之下鵲川之上 顯宗三年陞安西都護府領縣三鹽州白州安州
恭愍王五年復爲牧二十二年降爲知郡事以倭寇本州殺牧使誅吏之不救者降郡
(宮室)芙蓉堂在首陽館西蓮池上 宣祖癸巳回鑾時臨御此堂還都時留 王妃及王子諸嬪
于本州 元宗大王與 仁獻王后具氏住州民禹命長家乙未仁祖 誕降于此堂 肅宗戊午立誕降記蹟碑 英宗朝御筆揭額
(山水)龍首山北二里南山南二里高麗文宗七年登安西府南山召諸王宰樞侍臣置酒
至夜而罷首陽山東北十五里山頂有臺內多洞府泉石形勝爲一道之最山之南五里許有本邑古址後人
以此爲孤竹郡遺基按遼界有海州有首陽山又直隸永平府古孤竹國而有淸節祠祀夷齊蓋後人取首陽
孤竹海州等號而牽合之說牛耳山北十里石峯卓立淸秀佛足山北三十五里須彌山北二十里中有廣照
寺古址北嵩山西北三十里.....
위의 읍지에 기록된 대로라면 용수산 남쪽을 해주라 하며 해주의 옛 지역에 수양폭포가 있다. 안서도호부가 있었던 지역이며 고려 공민왕때 왜구가 침입하여 목사를 살해하였다 하여 군으로 강등되었는데 여기에 왜구가 있다는 것으로 보아 왜구라는 용어는 꼭 대륙의 동남쪽 해안지역에만 있었던 일반 무리들을 왜구라고만 일컫지는 않는 것 같다. (이것은 한헌석 선생께서 임진란이 대륙의 서북쪽에서 일어났다는 연구와 연관이 있을 수 있음)
임진왜란시 서천했던 선조가 돌아올때 수양관에 머물렀다는 내용이며 인조가 출생한 지역이라서 숙종과 영종때 탄강비와 사액을 내린 것을 보면 의미가 있는 지역임에는 틀림없다. 혹시 여기에서 하나의 사실을 추정한다면 인조반정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광해군 이후 중앙정부의 혼란(황실의 정통성?)속에 청(여진)의 세력을 업고 정권을 잡은 역사적 사실이 사실은 인조반정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도 더해진다.
그래야 인조의 출생지역이 해주이며 명조가 멸망하고 청조가 일어서는 과정에서 인조반정이라는 역사의 연결고리를 하나의 사실을 분리시켜 만든 것이 지금의 역사일수 있는 것이다. 더 연구가 필요한 사안이다. 海州에서 백이숙제, 수양산, 고죽국이라는 기록이 담겨있다는 사실과 牛耳山, 須彌山, 嵩山, 達摩山, 彌勒山이라는 산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불교의 태동지나 중흥지가 아닐까 하는 궁금증도 더하여 진다.’ - 인용 끝
- 이 인용문 중에 (宮室)芙蓉堂在首陽館西蓮池上 宣祖癸巳回鑾時臨御此堂還都時留 王妃及王子諸嬪 于本州 / '(궁실조에) 부용당은 수양관 서쪽 연지못 위에 있고 선조가 계사년(1593년)에 환궁할 때, 이 부용당에 납시었고, 환도시에는 왕비와 왕자빈들이 해주에 머무르셨다.'고 나온다. 궁실의 이름이 당이란 것은 사당인데, 궁의 자격과 급수를 가진 사당이니, 바로 국조를 모신 사당이란 말이다. 즉 국사당인 것이다.
참고로 조선 천산의 시인 이백의 望五老峰에 나오는 靑天削出 金芙蓉이란 어구의 뜻은, '천산산맥의 연이은 설봉들이 아침저녁의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연꽃봉우리들이 푸른 하늘을 가르고 튀어 나온 것 같구나.'란 의미의 시다. 그래서 唐조 이후 부용이라는 말은 천산산맥에만 쓰일 수 있는 용어인 것이다. 부용당은 그 말이 함축하고 있는 뜻은 천산산맥에서 개조를 하신 국조들을 모신 천산산맥하의 국사당이란 말이다.
돈황 이동의 감숙성이나, 서안 낙양 따위에서는 결단코 사용할 수 없는 말이다. 하물며 반도에서랴? 이 부용당은 쿠차 바로 옆에 있는 빠이츠엉(배성-백악궁이 있는 백악산[白岳城]-고려 조선사의 해주에 있는 안서도호부의 백주)에 있는 국사당인 것이다. 선조는 천산산맥을 따라 서천의 몽진을 하다가 여차직하면, 파미르를 넘어 만주로 튈려고 의주(카스)에 웅크리고 있다가 돌아 온 것이다.
일단 만주로 튀어 버리면, 언제 누가 황제로 즉위해 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자신은 개털이 되어버리는 것이니까, 그렇게도 만주(파미르 이서)로 넘어 가는 것은 극력 회피하는 것이다.
읍지류의 해주 조의 <산수>편을 보면 수양산과 고죽군과 청절사에서 백이 숙제의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참 신기하기도 하다. 반도의 해주에서 주무왕이 일어나서 상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울 때 수양산의 백이숙제가 주무왕을 말렸다는 얘긴데, 그럴 리는 없으니, 여기 해주 조에 고죽과 수양산과 백이 숙제를 박아 넣었다는 얘기다.
나중에 트루판 조에서 고죽의 수양산을 상세히 다룰 예정이지만, 빈풍루기와 관련해 다루었던 주나라의 발흥지는 트루판(졸본, 빈주, 빈국, 빈풍)의 고창(코초, 쿠차, 고죽)국이다. 주나라가 바로 옆에 있는 쿠차(고창, 주나라의 호경, 구려의 평양)에 도읍을 정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100킬로미터 쯤 떨어진 여기 바이츠엉(拜城,백주, 해주, 마르코 폴로의 카이추)에다 고죽국과 수양산을 박았다가 결국 반도사로 편입시키면서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 한헌석칼럼 5호 ‘마르코 폴로의 실제 여행경로를 밝힌다 - 2 - 不而城(PULISAN)에서 피양(PIYANG)까지’ 참조
오늘, 서우성선생님이 규장각도서관의 고도서 읍지류의 해주 조에서 인용했던 부분의 다음 부분을 읽다가 보니 놀랍게도 부용(芙蓉)이란 문구가 나온다. 아래 인용하는 첫부분에 오산도 나와 있다. 한번 분석해 보자.
右五山皆連紆盤據爲一山而名異延袤甚廣石勢插天望之如芙蓉內多洞府泉石善女山西四里紫丹山西九十里雄盤高大西支日恩洞山公須山東六十里達摩山西北九十里松禾界吹螺山東北六十五里六
王庵唱金山東北五十里麋鹿山東北四十里右三山連紆盤錯其北載寧界水多山(封山七)西五十里峯巒奇秀長峯山東五十五里禿山東三十五里靑苔山東三十里彌勒山
그리고 이백의 여산(여산)에 관한 시 두편을 인용한다.
望廬山瀑布
日照香爐生紫煙: 해가 향로봉을 비춰 자줏빛 연기가 피어나는데
遙看瀑布卦長川: 멀리 폭포를 바라보니 긴 개천이 걸린 듯하다
飛流直下三千尺: 나는 듯 흘러내려 곧바로 삼천 척을 떨어지니
疑是銀河落九天: 아마도 은하수가 구만리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하다
望五老峰
廬山東南五老峰: 여산 동남쪽의 오로봉이여
靑天削出金芙蓉: 푸른 하늘에 금색 연꽃이 불쑥 솟아 있구나
九江秀色可攬結: 구강의 빼어난 경치를 모두 모아 놓았으니
吾將此地巢雲松: 내 장차 이곳에서 구름과 소나무를 벗삼아 살리라
여산의 남쪽에는 여섯 개의 수려한 봉우리가 솟아있다. 이를 일컬어 秀峰이라 한다. 여섯 봉우리는 쌍검이 하늘을 찌르는 듯한 雙劍峰, 거북등 같이 신령스런 모습을 한 龜背峰, 마치 학이 목을 빼고 우는 듯한 鶴鳴峰, 보살과 같이 엄연한 文殊峰, 향로와 같이 구름이 피어오르는 香爐峰, 자매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듯한 姉妹峰 등이다. (- 강서성 구강의 여산을 묘사한 것이다.)
[출처] 이백과 여산 시|작성자 낙금경복 블로그
현재는 중국 강서성의 파양호(구강) 옆에 여산과 그 동남쪽에 오로봉을 조작해 둔 모양인데, 현 오로봉은 안타깝게도 여섯 봉우리란다. 봉우리가 하나 더 생겨버렸다. 그러나 천산의 시인 이백이 읊은 여산은 한텡그리산을 말하고 있다. 이 한텡그리산에서 설산이 동으로 약 400킬로를 달리다가 그 설산의 연봉이 끝나면서 100킬로 쯤 더 가면 카라샤르(개성, 개도, 송도)가 있다.
그 중간에 한텡그리산에서 70킬로쯤 동으로 오다가 남으로 뻗은 큰 설산의 산괴가 바로 오로봉이다. 그 오로봉의 동남방에 바이츠엉이 있다.
이제 이백의 시(망오로봉)을 보자. ‘여산 동남쪽의 오로봉이여 푸른 하늘에 금색 연꽃이 불쑥 솟아 있구나’라고 나와 있다. 고도서 읍지류의 五山皆連紆盤據爲一山而名異延袤甚廣石勢插天望之如芙蓉 / 다섯 산이 모두 연결되어서 빙 돌아서 한 쟁반에 담긴 것 같이 한 산을 이루었는데, 그(오산의) 이름은 각기 다르다. 쭉 연결되어서 참으로 넓다. 바위의 기세가 하늘을 꽂은 것 같은데, 바라 보면 마치 부용(연꽃) 같다.
이백이 이 오산을 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도서 읍지류는 오로봉을 오산으로 변조해서 반도에 박고, 현 중국의 구강의 여섯 봉우리의 여산은 오로봉을 육로봉으로 바꿔 옮겨 심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 오로봉 중의 한 봉우리의 이름이 향로봉인데, 망여산폭포에서 ‘해가 향로봉을 비춰 자줏빛 연기가 피어나는데 멀리 폭포를 바라보니 긴 개천이 걸린 듯하다’고 노래한 것이다.
고도서 읍지류의 부용 다음에 나오는 紫丹山이 바로 자주빛 연기가 피어 오르는 향로봉인 것이다. 이백의 여산 시 두 편의 제목 두 가지가 다 望으로 시작하는 것이 설산을 멀리 바라 보는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가? 고도서 읍지류의 하늘을 꽂은 것 같은 설산을 바라보는 느낌이 어디 반도의 해주나 구강의 1300미터 높이의 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진국명산이라는 판소리 가사의 첫머리의 ‘진국명산 만장봉이요, 청천삭출금부용이라’는 명구는 문자 그대로 만장봉인 한텡그리산의 한 줄기인 오로봉 설산을 두고 노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에서 바라보고 노래하는가 하면 이 해주(현 바이츠엉)에서 이백이 노래하고, 판소리를 짓고 노래하고, 고도서 읍지류의 기자도 바라보면서 부용 같다고 적어 놓은 것이다.
한헌석칼럼 7호에서 인용한다.
'좀 엉뚱해 보이겠지만, 삼국유사/을유문화사 P39의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檀君壬儉, 立都阿斯達....御國一千五百年(經云, 無葉山, 亦云, 白岳. 在白州地. 或云, 在開城東, 今白岳宮是)'
- '위서에서 2천년전에 단군임검이 아사달을 세워서 도읍하셨다. ....이곳에서 천오백년을 나라를 다스리셨다. (경에 아사달은 무엽산인데 백악이라고도 했다. 백주 땅에 있는데, 개성 동쪽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백악궁이다.)
- 여기서 開城을 開州의 성채로 해석하면, 개주의 동쪽에 백주가 있고, 백주에 매우 아름다운 궁전 백악궁이 있는데, 거기에는 과거 그 지방의 모든 국왕들의 초상화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서 장관을 이루고 있고, 이 모든 것은 그 나라를 지배했던 국왕들이 이룩한 것이다(고구려 신라 고려 국왕들이)고 해야 문맥과 의미가 통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야 그곳의 현지명이 拜城(바이츠엉-국조와 제왕들의 제사와 참배를 위한 궁성)이 되는 의미가 살아날 것이고, 白城(바이츠엉-삼국유사의 백악산[산은 성의 옛 발음이다]즉 백주의 성)과 같은 발음으로 바꿔치기도 가능해서, 백주를 숨기고 말소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환하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삼국유사 P37~38 '단군왕검은 당요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平壤城[今西京-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그곳을 궁홀산(宮忽山 - 궁궐성[궁궐이 있는 도성]의 고대음을 그 소리대로 표기한 것)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지금의 彌勒山과 達摩山 지역이다’고 해야 말이 된다. '금미달이다.'고 한것은 고의인지 무지 탓인지 모르지만 오역이다. 고도서 읍지류에서 미륵산, 달마산이 선명히 나오지 않는가? - 백악산 아사달의 의미는 밝성(白城, 拜城, 바이츠엉)의 새터(쇠터 新(神)那 新羅 수도 부도 밝도 밝달, 혹은 새로운 수도)라는 뜻이다. (- 인용 끝)
윗글에 달았던 댓글도 인용한다.
‘한헌석 : 위에서 인용한 고도서 읍지류의 두번째 줄에 등장하는 수양폭포가 이백의 여산폭포다. 수양산이 여산인 것이다. 여산은 야르산의 한문표기다. 밝달, 밝, 불, 스키타이 소그드 사가드 쟈가드 쟈갈 야가드 야갈 야르 계열의 의미는 하날님 즉 탱그리다. 한탱그리산 즉 야르산을 여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수양산은 마리首 밝은 볕陽이니까 마리밝산이다. 한탱그리산이 되는 것이다. 여기가 원 수양산이 된다. 트루판 북쪽의 박달산 혹은 종남산이 백이숙제의 수양산인 것이다. 조작세력은 구려와 주나라의 출신지인 트루판의 수양산을 숨기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여기 원 수양산 야르산 여산 한탱그리산을 노출시킨 것이다. 08.10.20 22:51
한헌석 : 宗南山이 수양산이 되는 이치는 간단하다. 마루宗과 마리首가 같지 않은가? 남쪽南과 밝은 볕陽이 같지 않은가? 트루판 북쪽의 종남산 혹은 박달산이 백이숙제의 수양산이 되는 것이다. 08.10.20 22:51
한헌석 : 자유게시판 3618호의 고도서 읍지류의 하단부 수양폭포조를 인용해 보자. 首陽瀑布出自首陽山(城中?)飛流石壁三百餘尺望之如長虹. 자, 어떤가? 이 인용문이 삼천척을 삼백척으로 줄였든지 이백이 삼천척으로 과장을 했든지 이백의 비류직하삼천척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 아닌가? 이제 어디선가 바이츠엉에서 한탱그리봉 쪽의 거대한 폭포의 사진을 누군가가 찾아 내 준다면 여한이 없겠다. 해주의 수양폭포는 바이츠엉의 여산폭포인 것이다. 나머지 대륙사나 반도사는 다 조작이다. 08.10.21 10:28’
유근완 : 신강성 지도를 놓고 도시를 찍어보니 천산남쪽의 도시들이 동서로 점점이 연결됩니다. 움직이는 경로의 앞뒤가 맞아 떨어집니다.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이백의 조상은 농서 성기(成紀)사람이라고 하는데(지금의 감숙성 천수부근으로 추정), 수나라 말에 죄를지어서 서역으로 유배를 당했답니다. 이백의 부친이 신룡(神龍) 원년(701년경)에 몰래 사천으로 돌아왔다고 하니, 이백의 출생지는 서역이 분명하고, 아마도 서양인의 피가 섞였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망여산폭포-- 서역에서 지은 시라면 여기겠지요. 그런데 망오로봉이란 시는 당시 三百首에도 안 보입니다. 더 큰 시집에나 나올라나??? 08.10.25 18:41
한헌석 : 선생님, 또 오셨네요. 진국명산이란 판소리 단가는 제가 즐겨 듣는 곡입니다. 요즘은요, 네이버에서 진국명산을 칩니다. 그러면 여러 관련 항목이 열 댓개나 뜹니다. 노래 듣기를 치면, 바로 판소리도 한곡 감상할 수도 있읍니다. 윗 글에서 인용한 '이백과 여산시'를 치면, 여산시들이 몇편 나옵니다. -컴맹의 검색 강의 끝. 08.10.26 09:37
한헌석 : 롱서는 키르키스 일대(파미르의 서쪽)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힌두쿠시 산맥 주변의 지역이 원 촉나라이고 사천땅입니다. 이백은 25세에 촉땅을 떠나 청운의 꿈을 안고 파미르를 넘어 장안(쿠차)로 갑니다. 이 시의 현장인 해주는 쿠차의 서북쪽 100킬로 지점입니다. 마르코 폴로는 여기를 카이추라고 하면서 과거 그 지방의 국왕들의 초상화가 아름답게 그러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고 했읍니다. 그리고 현재의 지명이 拜城이니, 제 감으로는 여기가 삼국유사의 백악궁 아사달이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언젠가 단군사화를 다루게 되겠지요. 08.10.26 09:47
그로부터 18일 후 2008년 11월 7일 현상태님이 한헌석칼럼 48호에 아래 사진을 올려 주셨다.
과연!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 수양폭포 혹은 여산폭포의 위용이다.
참으로 장쾌하지 않은가?
통쾌하지 않은가?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현상태선생님께 한없는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아랫 글은 단 한 줄 현상태선생님이 올려 주신 글이다.
‘拜城縣 서북 45~50킬로미터에 있는 鐵熱克溫泉 사진입니다’
사육신으로 유명한 성삼문의 시조가 하나 있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菜薇)도 하난것가
비록애 푸새엣거신들 긔 뉘 따헤 낫다니'
- 푸새엣거신들 - 채소일망정
- 아마 의금부 감옥에 갇혀 있었겠지만 당대 최고의 명문거족에 집현전의 최고 학자에 승지(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를 지내다가 역모에 연루되어 들어 왔으니 그래도 감옥 안에서 전망 좋은 감방에 있었나 보다. 수양산이 바라 보였으니 말이다. 성삼문이 한양의 의금부 감옥에서 바라본 수양산은 무슨 산인가?
백이 숙제의 그 수양산인가?
그렇다.
현재 우루무치의 동쪽의 천산 이름이 박격달산(博格達山-발음은 박달산 혹은 바그다울라) 혹은 총난산(宗南山)인데, 그 최고봉(博格達峰)의 높이가 5445미터이다. 바로 조선의 한양의 종남산(밝달산, 백두산 - 박격달산 전체를 부를 때는 난산[남산]이라고 부른다.)이 수양산이 아닌가?
- 宗南山=首陽山[마루宗=마리首, 南(볕 잘 드는)=陽(볕)]
- 밝달산 혹은 白頭山(밝은 마리산)=首陽山(마리 밝은산)[陽은 볕陽, 밝은陽(밝陽), 首=頭-그래서 首陽산은 밝頭산,밝달산이기도 하다.]
한헌석칼럼 60호 ‘하미(哈密, 카미, 카이민푸-개평부-元의 上都) 혹은 이오(이오로)에서 - 齊桓公의 명재상 관중, 연행록의 실제 경유지인 영평부’에서 이제묘가 나왔다. 하미의 소성읍국가의 공자로서 바로 옆에 있는 고죽국(고창국, 코초, 코자, 쿠차, 구자, 구려)의 서백창(주문왕)의 덕망을 듣고 빈읍(졸본, 트루판)으로 들어간다.
사기열전 제1 백이열전 P13 '그런데 주나라에 가서 보니, 서백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부왕의 목주(위패)를 받들어 문왕이라 칭하고, 동진하여 은의 주왕을 치려하고 있었다. 이에 백이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들고 간했다. "부왕이 돌아가시어 아직 장례도 다 치르기도 전에 전쟁을 하려 하니, 이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하의 몸으로 군주를 죽이려 하니, 이 어찌 인(?-충!)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기의 주나라는 고죽(고창, 코초, 코자, 쿠차, 구자, 구려)국이었던 것이다. 그 후 무왕이 은나라를 평정하고, 은나라의 북쪽 수도였던 현 쿠차지방으로 옮겨서 천하의 종국으로 자리 잡는다. 그때가 BC1122년인데, 그로부터 AD668년(구려가 망할 때)까지 쿠차는 천하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호경 평양 피양 장안으로 불린다. 그리고 당신라 송고려 조선의 서경 혹은 장안 평양이 된다.
트루판의 고죽국이 쿠차의 고죽국으로 옮겨 가버린 뒤에 주무왕의 동생 주소공(周召公)을 여기 트루판에 봉하여 연나라라고 하고(史記世家 燕召公世家), 그 옆 하미에 최고의 공신 강태공을 봉하여 제나라로 하고(齊太公世家), 그 남쪽 돈황에 주공을 봉해 노나라라고 한 것이다(魯周公世家).
백이숙제 이 두 양반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필 그 고죽국의 트루판에 있는 박달산(종남산, 수양산)에 들어가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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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날로 증거가 쌓여 가십니다...경하 드립니다...한선생님...송도의 송악이란"만슈산"은 어딜까요...?
근데...읍지류"의 정확한 뜻이 뭔가요...?...邑誌類"이 자가 맞습니까...?...사전에도 없네여...ㅡ. .ㅡ
혹시, 수양대군의 수양이기도 한 것 아닌가요..? 세조가 대군 시절에 그 지역에 있었다면, 성삼문 시조의 함축성이 더 멋들어질텐데요..~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가 다음 편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좀 상세히 그 상황과 시대를 살필 작정입니다. 말하자면, 수양산과 수양대군의 중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네요! 지금 많은 이들이 보고 있는 숨결을 느낍니다. 뜨거운 숨길을 뿜어대며 자기의 역할에 시동을 걸고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민족이라는 허구를 뛰어넘어 선조들의 숨결을 찾아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