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 / 황진숙
내 입술과 네 입술이 맞닿는다. 딱딱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보드라운 감촉이 좋다. 내 입술을 타고 넘어오는 촉촉함에 가슴속이 차오르고, 주저리주저리 말하지 않아도 전해오는 온기에 따스해진다. 네 도톰한 입술과 밍밍한 몸이 너와 나를 잇대어준다. 스며드는 커피의 향긋함과 달달함은 세상사에 부딪친 모난 마음을 위로해 준다. 손끝을 감도는 가벼움은 버거운 일상의 무거움을 어루만진다.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밀도는 성찰의 결과인가. 원형의 심상인가. 알량한 자존심으로 움켜쥐고 패대기치려 할 때 여리지만 탄탄함으로 버티는 너. 습기에 휘둘려 눅눅해지고 구겨질지언정 감내하는 깜냥은 우직하다. 손안에 밀착되는 냉기와 온기의 생생함에 무기력한 순간들은 환기되고 격정의 소용돌이는 가라앉는다. 무수한 사고의 단초는 몸체가 이루는 둔각에 뭉뚱거려지며 너그러워진다.
두터운 머그컵의 느긋함이 삶을 답답하게 하고 투명한 유리컵의 누드가 부담스러울 때 종이컵을 찾는다. 비칠 듯 말 듯한 은은함은 투명과 불투명의 그 어딘가를 맴돌며 속내는 비친다. 책상 위에나 차 안의 홀더에 동그마니 놓여 있는 종이컵. 언제 어디서 만나든 부담 없고 질리지 않는 친구 같다. 잦은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겸손함이 수수하기까지 하다.
종이컵은 귀하고 천한 걸 가리지 않는다. 일회용이지만 모든 걸 담아내는 종이컵의 용도는 무한하다. 컵 세계에서는 종전의 컵이 지닌 효용성을 거부하는 아웃사이드쯤 되지 않을까. 자판기용 컵으로 쓰이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옆구리 터진 호떡에서 흘러나온 설탕을 맛보는 건 애교다. 떡꼬치의 빨간 소스는 감내해야 할 양념이다. 코흘리개 아이들의 서툰 붓질을 받아내는 팔레트나 물통 등 미술용품으로 격상되기도 한다. 애연가의 재떨이로, 고기 구울 때 기름받이로, 병원에선 소변을 받는 용기로 격하되기도 한다. 때로는 어두컴컴한 동굴에 들어가 압정이나 클립 동전 같은 금속성 물질을 보듬고 묵상에 전념한다. 종이컵이 할 수 있는 일이 이백여 가지가 넘는다.
한 세기 전에 도자기판매용 종이컵을 최초로 발명한 휴그무어, 그는 자주 깨지는 도자기컵 대신 종이컵을 만들어 대대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종이컵이 이렇게 다양한 용도로 쓰일지 그는 상상이나 했을까. 용도뿐이겠는가. 규정되지 않은 한계는 도식적인 컵의 벽도 넘나든다. 살아생전에 무소유 정신을 설파했던 법정스님은 기내에서 받은 종이컵을 버리지 않고 몇 번이나 물로 헹궈 가며 다시 쓴 일화가 있다. 그에겐 종이컵이 일회용이 아닌 그냥 컵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떤 컵이 이만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장식장에 고이 모셔놓은 본차이나 찻잔에 번데기를 덜어 먹을 수 있으랴. 진열해 놓은 글라스나 머그컵에 면발을 담을 수 있으랴. 번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컵들은 고귀한 자태를 뽐내며 음료나 차, 알코올이 아니면 자신은 아니라고 외면하기 일쑤다. 하려함과 유려함으로 치장한 컵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한들 액상이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는 도도함에 다가서려는 마음이 차갑게 식곤 한다.
종이컵은 제대로 된 이름 하나 갖지 못한 채 단 한 번의 생을 위해 온몸으로 헌신한다. 봄꽃이 활짝 피었다 통절하게 지는 것처럼 순간의 생을 위해 열정으로 뭉쳐 있다. 자판기에서 홀더에서 누르기만 하면 낭랑한 몸짓으로 목마른 감성을 채워주고 삶의 온도를 높여준다. 그 든든함에 마음을 내려놓고 한 걸음 내디딜 용기를 가지게 된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집안의 듬직한 조력자였다. 큰일이야 직장에 다니는 아버지가 하셨지만, 그 외의 자질구레한 일은 할아버지께서 도맡아 하셨다. 농사일은 물론 손주들 돌보는 일도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할아버지는 봄부터 가을까지 논에서 살다시피 하며 열두 다랭이논을 경작했다. 아침을 먹고 해가 중천을 향하면 어머니는 양은 주전자를 내 손에 들려줬다. 새벽녘에 나간 할아버지 새참 막걸리 심부름이다. 어머니의 권으로 동네 점방에 들러 막걸리 반 되를 산 나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길가의 풀꽃들과 나비들의 너울춤에 온갖 해찰을 하다 보면 한참 후에야 논두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 밥통, 이제 오니? 허허허.”
점심때가 지나서 도착한 손녀를 보고 노여워할 법도 하건만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미적지근해진 막걸리를 드시곤 하셨다. 해가 지고 소에게 꼴을 다 먹이고 나면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때쯤 잠이 몰려온 나는 다리 아프다며 업어 달라고 떼를 썼다. 할아버지는 우는 나를 바지게에 태우고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셨다.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할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막걸리 심부름 뒤에는 늘 어리광이 붙어 다녔다. 업어 달라, 사탕 사 달라, 연필 깎아 달라, 숙제 해 달라 학교에 데려다 달라, 주전자 하나에 어리광 열 가지를 덧붙여 할아버지께 매달렸다. 여간하여서는 하지 않던 어리광이지만, 할아버지에게만은 예외였다. 끝없는 손녀의 요구에도 할아버지는 ‘이 밥통’ 하시며 어리광을 다 들어주었다.
유년 시절 할아버지가 베풀어 준 격려는 어린 손녀를 자신감이 넘치는 아이로 만들었다. 불어 넣어 주었던 애정은 지금까지 아련한 감성으로 남아 있다.
종이컵에는 할아버지의 손길처럼 보듬어 주는 살가움이 있다. 우아함만을 찾는 잔에서는 볼 수 없는 진심이, 부딪침에 여지없이 날카로움으로 상처를 주는 컵에서 볼 수 없는 가상함이 있다. 자신을 비우고 주어진 소명으로 채우는 삶, 채운 풍요로움을 타인에게 불어 넣어주는 삶, 마음이 흘러 흘러 타인을 여물게 하는 삶, 그것이 종이컵의 생이다.
사용 후엔 지는 꽃잎이 되어 지나는 행인의 발길에 채이거나 무관심 속에 잊힌다. 서술되지 않은 종이컵들의 사연은 디스펜서에 겹겹이 쌓이며 사장된다. 일회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컵의 세상에서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신세가 되어 홀대 받는다. 그럼에도 종이컵은 거추장스런 퇴장을 거부한다. 인과관계를 따지지 않는 간단명료함이다. 자신을 수식해 줄 글자 하나 없어도 퇴장할 때 박수 하나 없어도 어찌됐건 컵이 아니던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처럼 못다 한 생의 그리움을 지난 시간 속에 묻어둘 뿐이다. 진정한 아웃사이더다.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이지만 다감한 감성이 흐르는 하나의 종이컵처럼 내 일상에도 소명을 다한 진심이 깃들기를. 도란거리며 달래주는 부드러움이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