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현왕후[慧炫王后]
그 네번째 이야기.
'그 시절이 그립구나.'
第 . 四
"날씨가 좋구나."
옥색도포에 고급말총으로 짠 갓을 쓴 선비와 하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무궁화가 잔뜩 심겨져있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근처 논에는 사람들이 모여 모내기를 위해 힘쓰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양쪽에서 줄을 잡고 그 줄에 맞춰 모를 심는 사내들을 보아하니 동네사람 모두가 모인듯하다. 선비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지었다.
"참으로 보기좋은 광경이로구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모습이라니."
선비는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이 고을의 사람들은 유난이 이웃간의 정이 돈독하다 들었사옵니다."
선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것 같구나. 조정[朝廷]의 대신들도 모두 저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비가 씁쓸한 표정으로 모내기를 한참보다 사내에게 물었다. 아니, 묻는다기 보단 칭얼댄다는 표현이 맞는듯 하다.
"헌데, 이리 가는 것이 맞기는 한 것이냐?"
공작깃이 달려있는 부채로 한길을 가리켜 보이는 선비에게 사내가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허면 서두르자꾸나. 자정에는 시강원[侍講院](주: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으로 돌아가야 하느니라."
그러면서 속으론 말을 가져올걸! 이라 불평불만칭얼대고 있었다. 사내는 선비의 마음을 이미 다 알고있다는 듯 말했다.
"말을 구해오겠습니다."
"되,됬다! 내 언제 말을 구해오라 하였느냐?"
하며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사내는 아무말 없이 그의 뒤를 쫒았다. 그들의 주변에는 여름을 대비해 작은 꽃망울들이 무수히 달린 무궁화가 푸른잎을 흔들며 웃고있었다. 참으로 소박한 정이 풍기는 마을 이었다. 노인을 대신해 지게를 짊어주는 젊은이의 표정에는 힘든 기색이라곤 찾아볼수 없었다. 매일 조정의 싸늘한 바람만 맞아오던 선비로써는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훈훈한 감정이었다. 입가에 미소가 가득한 선비를 보며 사내도 작은 미소를 띄었다. 무궁화 길을 빠져나오자 작은 우물터가 나왔다. 아마 여인네들이 빨래하고 물을 긷는 곳이리라. 그것을 본 선비는 왠지 목이 말라 사내에게 잠시 쉬어가자 하였다. 우물에 다가가니 양반집 노비로 보이는 여인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 놓인 항아리가 그녀들이 물을 길으러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선비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 거기 아무나 물을 좀 떠와 보거라. 목이 심히 마르다."
한참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찰나 왠 기생오래비같이 생긴 희멀건 선비가 자신들에게 물을 대령하라 하니 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것을 본 선비가 호통을 쳤다.
"무엄하도다! 감히 사대부를 비웃다니!"
선비의 호통에 수가 더욱더 크게 웃으며 벌떡 일어나 팔짱을 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당당한 수의 모습에 그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무엄? 댁이 뭐 상감마마라도 됩니까? 그리고 손이 없소, 발이없소?"
"뭐?"
얼빠진 그의 얼굴에 수가 바가지를 잡고 들이대었다. 이에 움찔거리는 그다.
"자! 바가지를 대령하였사오니 어디 한번 선비님 물떠먹는 자태좀 구경해봅시다. 뭐 진짜로 그 소매자락속에 손이 없다면 내 이 고운 손으로 나뭇잎까지 띄어 체하지 않게 고이 먹여드리지요."
선비는 이 쬐그만 천출 계집이 너무도 당당하여 할말을 잃었다. 멍한 선비의 표정을 본 사내가 안되겠는지 그의 앞을 가로서며 수에게 으르렁 댔다.
"네 이년, 이 분이 누구신줄 알고 이리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수가 사내의 호통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기생오래비주제에 꼴에 또 양반이라고 무사를 대동하는 것좀 보게? 무예를 익힌수의 눈엔 아무리 하인의 복장이라 해도 무인은 무인이었다. 마치 자신의 왼쪽 허리춤에 검이 있는 듯 오른손을 가져다 대는 저 자세는 일개 하인에게서 볼수 없는 모습이라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분을 불렀다.
"자분아."
"예, 언니."
"저 분들이 심심하신가 보구나. 네가 한번 손좀 봐주렴?"
"실행합죠."
왠지 모르게 저자의 무뢰배같은 수와 자분의 모습을 본 그들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왠만한 여인같지 않게 거대한 덩치를 가진 자분이 두팔을 걷어부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나가 요즘 거시기 한게 몸이 굳어브랐제. 근디 딱 맞춰서 몸풀요기가 나타났구마잉?"
자분의 무뢰배같은 말투와 알아들을수 없는 방언을 들은 선비와 사내가 당황하며 서로를 보았다. 그러나 위엄을 되찾은 선비가 자분에게 소리쳤다.
"어디서 감히 사대부를 협박하는게야!"
그의 말에 콧방귀를 뀐 수는 손바닥에 침을 짝 뱉어 머리에 발랐다. 더럽다는 표정이 역력한 선비와 사내가 표정을 찌푸렸다. 수가 그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대부는 얼어죽을. 보아하니 계집질이나 하러다니는 한량같은데 이 곳부터는 기생집이 없으니 저 쪽길로 가는것이 좋을 것이예요."
대체 이 계집은 뭘믿고 이리 당당한지 그는 정말 한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나 아무리 천것이라 해도 여인은 여인. 사대부로써 어찌 여인을 함부로 대한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억눌렀다.
"네 년은 뉘집 종이더냐? 내 가서 네 주인께 네 년의 방자함을 고하겠노라!"
수는 어디 한번 할수있음 해보라는 표정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것은 알 필요 없고, 얘 자분아. 그만 집으로 가자."
"예, 언니!"
그녀들이 오른쪽길로 항아리를 들고 가다 수가 고개를 홱 선비에게 돌려말했다.
"설마하니 사대부께서 이 천것 여인들의 뒤를 밟는것은 아니겠지요?"
하며 새침하게 고개돌려 오른쪽 길을 돌아 사라졌다. 치욕으로 얼굴이 붉어진 선비를 사내가 달래었다.
"저하. 갈길이 아직 멀었사옵니다. 그만 노여움을 푸십시오."
그는 분이 풀리지 않는듯 물을 벌컥벌컥들이 마신뒤 바가지를 저만치 던져버렸다. 애꿎은 바가지가 바닥에 뒹굴었다.
"에잇! 우리는 저 천것들과 반대로 간다!"
그러고는 왼쪽길을 향해 막무가내로 걸었다. 사내가 당황하여 얼른 그를 쫒아가 말렸다.
"저,저하. 이 길은 영상대감의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옵니다."
"시끄럽다! 나는 저 천것이 다니는 길로 가지 않을 것이야! 어서 따라오너라!"
"예? ..예...."
사내는 오른쪽 길을 안타까운듯 바라보다 선비를 뒤쫒아 왼쪽길로 사라졌다. 자신들의 목적지인 영의정 윤 정호의 가택이 오른쪽길에 있는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더 먼길을 택한 그들이었다.
첫댓글 ㅋㅋㅋㅋㅋ재밌어요~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다음편도기대할게요~재밌게잘봤습니다~~
재밌으시다니 다행이예요 ㅋㅋㅋㅋㅋ
정말 재밌어요~
혹시 수와 선비가 사랑에 빠지는데... 그래서 대비를 해치기 어렵게 되는 스토린가요??????
(추리중이예요~~)
선비와 사랑에 빠지는건 맞아요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