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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쓰임받게 하소서 (요2-47) 2022년 6월 27일(월)
찬양 : 주님 내 안에
본문 : 요9:6-34절 ☞ https://youtu.be/zOTosQ-zs8w
이제 상반기 6월의 마지막을 지나는 한 주간을 시작한다. 특히 오늘과 내일 목회사관학교 강사 수련회를 가진다. 총 16분을 모시고 가지는 강사수련회가 은혜가운데 진행되고 좋은 날씨 가운데 자비량으로 섬겨주신 강사님들께 작은 쉼이 되고 목회사관학교의 발전을 위한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주님, 은혜와 평강으로 축복해 주소서. 섬겨주신 그 은혜를 저희가 갚을 길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은혜로 채워주소서.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은 맹인이었던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능력과 그로 인해 펼쳐지는 바리새인과 고침 받은 맹인 사이에 펼쳐지는 논쟁이 기록되고 있다. 먼저 중요한 사실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자. 6-7절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여기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이 말씀을 하시고>다.
이것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하신 말씀이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으로 왔음을 드러내시며 말씀만 하지 않으시고 지금 맹인 된 사람에게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 주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신다.
그리고 놀랍게 이 맹인은 밝은 눈으로 예수님께 왔다고 한다. 이분이 주님이시다.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는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에 빛이 되시는 일을 행하신 분이다. 말만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너무도 화려한 말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말씀을 하시고 난 후 곧 바로 행동하시며 세상에 빛으로 오신 자신의 말을 증명하셨다. 이 사실에 세상은 놀라지만 그 반응이 참으로 놀랍다. 10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다양한 반응이 나타난다. 그런데 어디에도 축하가 없고 질문만 있다. 마을이 소란해졌을 것은 당연한데 엉뚱한 소란함이 벌어진 것이다. 심지어는 믿을 수 없어 맹인이었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람까지 나왔다. 세상은 참으로 신기하다. 어떻게 그런 말까지 할 수 있는지 ~
맹인이었던 사람이 <내가 그라>고 분명히 밝히자 이제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떠졌느냐고 묻기 시작한다. 안타까운 것은 여기 누구도 이 사람이 맹인에서 빛을 얻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이들이 단 한 사람도 보여지지 않는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인가?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 빛을 얻은 이 사람이 얼마나 기뻤을까? 그런 그에게 그 밝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보여준 현실은 그야말로 어둠뿐이었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을 치료해 주신 예수님을 소개한다. 11절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행복하며 축하할 일인가? 그런데 오늘 단 한 사람도 이 사실을 축하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다. 주님 저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
그들은 이제 맹인을 고치신 예수님을 찾기 시작한다. 맹인이 알지 못한다고 하자 이들은 맹인이었던 자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간다. 이들은 맹인이 고침을 받았다는 놀라운 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눈에 발랐다는 사실을 통해 예수님을 붙잡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오셔서 어둠에 갇혀 사는 영혼에게 새 빛을 보여 주셨건만, 바리새인들은 새 빛을 얻어 세상을 본 이 사람에게 어둠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 가운데 이 일로 분쟁이 일어난다. 16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진리는 모두를 자유케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아무리 좋은 일에도 분쟁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 것임을 본다.
그러자 이들은 부모까지 불러와 맹인이었던 사람의 가족들을 힘들게 한다. 그러나 부모는 참 지혜로운 대답으로 이 상황을 넘어간다. 20-21절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지혜로운 지도자여야 할 바리새인들은 이 일로 점점 추해지고 맹인이었던 자의 부모와 당사자는 놀라운 모습으로 드러나며 예수님의 일은 점점 드러나기 시작함을 본다. 심지어 맹인이었던 자는 이 논쟁의 마침표를 찍으며 이렇게 말한다. 31-33절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지도자가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도리어 이런 수모를 겪을 수 있음을 본다. 세상을 살면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빛이 되어야 할 사명을 맡은 자로서 오늘의 삶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놀라운 소식 앞에 축하하지 못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이런 어리석은 자리에 섰을까?
우선 이들은 맹인이 눈을 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는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소식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놀라운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믿지만 믿음이 없다. 상식적인 예수님을 믿고 비상식적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아이러니한 사실이 벌어지는 것이 세상이다.
아울러 바리새인들은 이런 놀라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붙잡을 기회로만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선입관을 잘못 가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율법의 조항에 묶여 예수님을 율법을 따르지 않는 자로 보았던 것이다. 시기의 대상일 뿐이다.
율법의 조항을 지키느라 율법의 정신인 사람을 살리는 일을 보지 못하는 자가 된 것이다.
오늘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빛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오히려 세상에서 어둠을 보여주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케 된다. 축하해야 할 자리에 진심의 축하를 하지 못하면 결국 축하의 자리에 저주를 외치는 자가 된다. 그리고 결국은 바리새인처럼 자신들이 있어야 할 지도자의 자리에 서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이란 시간, 1박2일의 강사 수련회로 섬기면서 진정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라 빛이 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진정 한 분 한 분 기뻐해야 할 일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복해 줄 수 있는 하루가 되고, 안타까운 일에 함께 안타까움을 나누는 자로 서기를 기도한다.
작은교회와 사역자들의 비빌언덕과 플렛폼이 되는 라마나욧으로 진심의 축하와 위로로 함께하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주님, 이 하루 빛이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어둠에 있는 자에게 어찌하든지 빛을 드러내게 하소서. 예수님처럼 소경을 눈뜨게 할 능력이 없지만 그런 마음으로 한 분 한 분 눈뜨게 하는 일에 이 종의 은사와 재능과 언어가 쓰임 받게 하소서. 어둠으로 이끌지 않게 하소서.
<라마나욧 선교회 중보기도>
1. 30억 씨앗자금을 통해 작은교회에 비빌언덕과 플렛폼이 되게 허락하소서.
2. 온라인 플렛폼 스콘(스스로 창조하는 콘텐츠)앱을 통해 작은교회(젊은세대사역자)의 다리가 되게 하소서.
3. 2022년 예수님의 속도와 방향에 맞춘 새로운 라마나욧이 되게 하소서.
4. 땡스기브가 견고하게 세워져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5. 라마나욧선교회의 사단법인 작업을 통해 건강한 선교단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