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m.greatcorea.kr/a.html?uid=877
↑ 2019 년 5 월 30 일에 열린 한 뿌리 사랑 세계 모임 제 53 차 역사 포럼에서
성헌 식 (사) 고구려 역사 문화 보전회 학술 위원장의 '고구려 도읍지를 찾아서'발제 동영상 ↑
국 문 요 약
우리 민족의 고대강역을 분명하게 하는 키워드인 ‘고구려의 도읍지를 찾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무척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의 역사이론이 수세기 동안 중국에 의해 또 이후 백년 넘게 일본에 의해 왜곡되어졌다보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고구려의 강역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며, 한국의 모든 학생들은 고구려의 강역이 남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로 축소된 역사를 배우고 있다. 동양사학계가 비정한 고대 고구려의 도읍지는 건국 후 464년간은 길림성 집안과 그 부근이었고, 이후 240년간은 한반도북부의 평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중국사서나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역사자료들을 동원해 지명에 대한 참고자료가 풍부한 전쟁기록을 오랫동안 연구해본 결과 명나라 이래 지금까지 수세기동안 중국은 우리의 역사강역을 축소시키기 위해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자행했음을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고대 고구려의 모든 도읍들은 산서성에 있었다. 첫 도읍지 졸본은 태원시에, 두 번째 국내성은 평요현에, 세 번째 환도와 안시성은 신강현에, 마지막 평양성은 임분시이고 아직도 그곳에는 유적이나 그 흔적이 남아있다.
즉 대제국 고구려는 동아시아대륙을 지배했던 큰 호랑이였으나, 그러다보니 중국과 일본에 의한 역사왜곡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원상대로 바로 잡는 일이야말로 대한민국 출발 100년의 중요한 숙제가 될 것이다.
Ⅰ. 머리말
동방의 등불이었던 우리 민족은 명나라의 속국이 된 조선왕조 600년과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찬란했던 역사를 많이 잃어버렸다. 특히 대일항쟁기간 중에는 우리 역사가 거의 말살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내 취조국을 두고 식민통치에 필요한 역사자료의 수집·조사사업을 해오다가 1915년 중추원에 편찬과를 신설해 이관시켰다. 1919년 범국민적인 기미독립선언 이후 일제는 우리의 혼인 민족사를 본격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역사편찬전문기관의 설치를 서두르게 된다. 그 결과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직할기관으로 설치된 조선사편찬위원회가 1925년 조선사편수회로 재조직되었던 것이다.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은 크게 ‘단군신화’와 ‘반도사관’으로 대변된다. 단군신화는 우리 역사의 뿌리를 거세해 스스로 조상을 부정하는 우매한 민족으로 만들겠다는 것이고, 반도사관이란 대륙에서 활동했던 삼국 이전 조상들의 무대를 작은 한반도 내로 축소시킨 것을 말한다. 대한민국의 미래에 큰 위험요소라고 할 수 있는 동북공정과 황국사관과 같은 역사왜곡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다.
반도사관이 얼마나 잘못된 이론인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척도라 할 수 있는 고구려 도읍지를 찾는 과정을 통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특히 지명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관구검의 침략과 당태종과의 안시성전투와 같은 전쟁기록을 통해 그 위치를 추적해보도록 하겠다. 국제전이었던 관계로 중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참고자료들이 많아 그 위치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Ⅱ. 고구려 도읍지 관련 기록
고구려 도읍지의 연혁에 대해 정리해놓은 『삼국사기』「권37 잡지6 지리4」에 기록은 다음과 같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40년이 지나서 유류왕22년(3)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겼다. (중략) 국내성에 도읍한 지 425년이 지난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옮겼으며, 평양에서 156년이 지난 평원왕 28년(586)에 장안성으로 옮겼으며, 장안성에서 83년이 지난 보장왕 27년(668)에 멸망하였다.”
위 기록에는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 산상왕 “13년(209) 겨울 10월 도읍을 환도(丸都)로 옮겼다.”는 기록과,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도읍 환도성이 불타 “21년(247)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는 기록과 고국원왕 조에 “12년(342) 가을 8월 환도성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와 “13년(343)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산상왕 때 천도한 환도성이 누락된 이유는 한중일 사학계가 『괄지지(括地志)』의 “불내성(不耐城)은 곧 국내성(國內城)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든 것이라 하였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환도성을 국내성과 같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사학계는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길림성 집안을 환도성과 국내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분명한 역사왜곡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최초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삼국사기』「지리」에는 장수왕이라고 되어있으나, 「고구려국본기」에는 동천왕으로 기록되어 있어 본기와 지리지가 다르게 기록된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1. 고구려의 시국처 졸본성
(1)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의 졸본성 기록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에서의 졸본성(卒本城)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부여의 왕자들과 여러 신하가 주몽을 죽이려고 모의하자, 어머니 유화부인이 그들의 계략을 몰래 알아내 아들에게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할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 간들 못 살겠느냐? 여기서 지체하며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그리하여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벗과 함께 엄표수(淹淲水)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강을 건너려고 했으나 다리가 없어 따라오는 병사들에게 잡힐까 두려워했다. 주몽이 강을 향해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말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해주고는 곧 흩어져버려 뒤쫓던 기병들을 따돌렸다.”
호태왕 비문에는 이 부분이 약간 다르게 되어 있다. “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기초를 세웠다.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으니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거마를 타고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에 다다랐다.
왕이 나루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잇고 거북이들을 뜨게 하라.’고 했다. 그 소리에 응하여 곧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들이 물 위에 떴다. 그런 뒤 물을 건너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 성산(城山) 위에다 도읍을 세웠다.”
고구리인이 직접 새긴 비문에 의하면 추모왕이 말이 아닌 수레(駕)를 타고 순행 길에 엄리대수에 이른 것으로 보아 그를 죽이기 위해 뒤를 추격하는 병사들도 없었을 것이며, 또한 나루터에서 자신이 추모왕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미 왕의 신분이었으므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기보다는 도읍을 옮긴 기록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어 『삼국사기』에는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黙居) 세 사람을 만나 각자에게 성씨를 주고 각자의 능력에 맞는 일을 맡기고,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그곳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도읍으로 정하려 했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였다. 19년 가을 9월, 왕이 죽으니 나이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서 “다른 설로,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고,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소개되어있다.
(2) 『삼국사기』「지리」의 졸본성 기록
『통전』에는 “주몽이 한나라 건소2년(기원전 37)에 북부여에서 동남쪽으로 길을 떠나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성씨를 ‘고(高)’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古記)에는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홀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지방인 듯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보술수는『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에는 엄표수(淹淲水)로 기록되어 있다.
이어 “『한서지(漢書志)』에는 “요동군(遼東郡)은 낙양과의 거리가 3천6백 리이며 이에 속한 현으로 무려(無慮)현이 있었으니 바로 『주례(周禮)』에 이른바 북진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 때는 그 아래쪽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현도군(玄菟郡)은 낙양과 동북으로 4천 리 떨어져 있었고 이에 속한 현은 셋이다.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즉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과 졸본이란 지방은 아마도 한나라 현도군의 경내이고 대요국 동경의 서쪽인 듯하며, 『한서지』에 이른바 현도군의 속현으로써의 고구려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옛날 대요가 멸망하기 이전에 요제가 연경에 있었으므로 우리 사신들이 동경을 지나 요수를 건너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에 당도하여 연계(燕薊)로 향하였기 때문에 『한서지』의 기록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는 기록들이 있으나, 이것들로 졸본성의 위치를 알아내기는 어렵다. 위 『삼국사기』「지리」에 언급된 졸본이 현토군의 경내라는 설명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한서』「지리지」의 기록에 유주에 속하는현토군에 있는 3개의 현 중 고구려(高句驪)현은 나라 고구려(高句麗)가 아니라 일개 지명임에도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에 이용되고 있다.
2. 초기도읍지 국내 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
국내 위나암성은 유리명왕 이래로 200년 이상 오랫동안 고구려의 도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전쟁이 없던 평화시대의 도읍지라 그런지 역사기록에 자주 등장하지 않아 그 위치를 찾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1)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의 국내성 기록
“유리왕 21년(2) 봄 3월, 하늘에 제사용 돼지가 달아났다. 임금은 제물을 관장하는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그는 국내 땅 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돼지를 붙잡아 국내 민가에 가두어두고 돌아와 왕에게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의 산수가 깊고 험한데다가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게다가 고라니와 사슴, 물고기와 자라 등 산물이 많았습니다. 임금께서 만약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시면 백성들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9월에 국내를 순시하여 지세를 살핀 후 이듬해 겨울 10월, 임금은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삼국사기』잡지 지리편의 국내성 설명
“『한서』에 이르기를 ‘낙랑군에 속한 현에 불이현이 있다.’고 하였고, 총장2년(서기 669)에 영국공 이적이 칙명에 의해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와 주현을 설치했다. 그 목록에 ‘압록강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11개인데 그 중 하나가 국내성이며, 평양으로부터 국내성까지는 17개의 역(驛)을 거친다.’하였으니, 국내성 역시 북조(고구려) 경내에 있는 것이지만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국내성에 도읍하여 425년을 지낸 후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기이다. 국내성이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해는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에는 유리명왕22년(3년) ~ 산상왕13년(209)으로 206년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리지」에는 425년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국내성과 아무 상관없는 낙랑군의 불이현이 왜 언급되어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황후의 농간으로 서출 동생에게 태왕위가 돌아가자 반란을 일으킨 적출 형님 발기
3. 관구검에게 불탄 환도성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자 다음 보위가 동복아우인 발기(發岐)에게 가지 않고, 우(于)왕후가 가짜조서를 꾸며 연인이었던 서출 이복동생 연우(延優,산상왕)를 즉위시킨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발기가 반란을 일으켜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을 찾아가 3만의 병력지원을 요청하니 공손탁은 발기를 도와주는 척하다가 고구려의 서쪽 땅인 요동을 차지해버렸다.
역적 발기가 자결함으로써 사태는 수습되었으나 고구려가 입은 손실은 실로 컸다. 이어 산상왕은 3번째 도읍지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에 산상왕 2년(198) 봄 2월에 환도성을 쌓고, 13년(209) 겨울 10월에 도읍을 환도로 옮겼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1) 관구검에게 불탄 환도성
고구려와 위나라 사이에서 3대에 걸쳐 50년 동안 독자세력을 구축했던 공손(公孫)씨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은 위나라의 공격에 의해 238년에 멸망하고 만다. 려위(麗魏)상호동맹에 의해 공손씨가 멸망하면 요동을 원래 주인이었던 고구려에게 돌려주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위나라가 오히려 주력부대를 전략적 유충지인 서안평으로 옮겨 동쪽을 도모하려 하자, 이에 대노한 동천왕이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전해 242년 5월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해 차지해버린다. 이에 위기를 느낀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한다.
식민사학계에서 멋대로 그린 관구검침공로
『삼국지』「위서」관구검전의 두 기록을 보기로 하겠다. 첫째 기록인 “정시(正始)중 고구려가 배반해 수차례 침범하자 관구검이 보·기병 1만을 이끌고 현토에서 출전해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왕 궁(동천왕)이 보·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상류로 진군해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워 계속 패해 궁이 패주했다. 관구검은 말이 미끄러지지 않게 말발굽을 싸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여 환도(丸都)에 올라 고구려의 도읍을 도륙내고 수천 명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의 왜곡 여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 언급된 지명을 추적해 환도성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있는 역사적 사실은 환도성이 올라가기 상당히 힘든 험한 산 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1) 비류수(沸流水)는 어디인가?
『통전』에 “한나라 건안(196~220) 중 고구려왕 이이모가 새 도읍을 세웠는데 성은 환도산 아래 비류수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과 동천왕이 위나라 관구검과 1차 전투를 벌였던 비류수는 과연 어디일까? 비류수는 일반명사로 온천수일 수도 있고, 고유명사로 특정 물길의 이름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명이라 그런지 노출되어있지 않고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는 강수(絳水)로 설명되어 있었다.
환도성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비류수 즉 강수는 바로 ② 산서성 남부 운성시 동쪽에 있는 강현에서 나와 임분시의 남쪽 곡옥현을 흘러 회수로 들어가는 물길이었던 것이다. 또한 『括地志』에는 “강수는 일명 백수, 현재이름 비천, 근원은 강산에서 나온다.”는 기록이 있는데, 비류수가 같은 뜻인 비천(沸泉)으로 바꿔져있음을 알 수 있다.
강수는 산서성 분하의 지류를 모아놓은 『수경주』권6의 회수(澮水)편과, 산서성 동남부를 흐르는 탁장수(濁漳水)와 청장수(淸漳水)에 대한 설명인 『수경주』권10에 많이 언급되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환도성은 산서성 동남부에 있어야 하거늘, 1906년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길림성 집안을 환도성으로 비정한 것이야말로 그야말로 역사조작이 아닐 수 없다. 발견된 비석의 일부가 관구검기공비라는 근거도 빈약함에도 말이다...
비류수는 산시성 강현에 있는 강수, 양수는
산서성 장치시를 흐르는 강
2) 양구(梁口)는 어디인가?
고구려 동천왕과 위나라 관구검이 전투를 벌인 곳이 『삼국사기』에는 ‘양맥(梁貊)의 골짜기’로 적혀있고, 『삼국지』「위서」관구검전에는 양구(梁口)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양구는 바로 양수(梁水)의 하구를 말하는 것이다.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의 요동군에 언급된 양(梁) 역시 바로 양수를 말하는데,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양수는 산서성 장자현 동쪽에 있다.
『수경주』에 양수는 남양산에서 나와 북류해 장자현 고성 남쪽까지 흘러 북쪽에서 장수로 들어간다.”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수경주』는 권10으로 산서성 동남부를 흐르는 탁장수(濁漳水)와 청장수(淸漳水)의 물길에 대한 설명이다. 그 위치가 강수(降水)의 동북쪽으로 상류에 있는 강으로 『삼국지』「위서」관구검전의 “비류수(沸流水) 상류로 진군해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워”라는 문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고구리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긴 광명제
고구리의 도읍지, 국내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서
고구리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긴 광명제
고구리의 초도 졸본성에 머물던 광명제(유리명왕)는 도읍을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성으로 옮겼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년(B.C 1) 8월, 제천의식용 돼지가 달아나자 두 사람이 쫓아가 돼지를 잡아 칼로 다리 힘줄을 끊었다. 이에 임금이 대노하며 “제천에 쓸 신성한 제물에 어찌 상처를 입힐 수 있단 말인가”라고 꾸짖고는 두 사람을 흙구덩이에 파묻어서 죽이니 임금이 병에 걸려 위중해져 황후와 무당이 귀신에게 맨발로 빌면서 사죄하니 병
www.skyedaily.com
고구리의 초도 졸본성에 머물던 광명제(유리명왕)는 도읍을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성으로 옮겼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년(B.C 1) 8월 제천의식용 돼지가 달아나자 두 사람이 쫓아가 돼지를 잡아 칼로 다리 힘줄을 끊었다. 이에 임금이 대노하며 “제천에 쓸 신성한 제물에 어찌 상처를 입힐 수 있단 말인가”라고 꾸짖고는 두 사람을 흙구덩이에 파묻어서 죽이니 임금이 병에 걸려 위중해져 황후와 무당이 귀신에게 맨발로 빌면서 사죄하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21년(2) 3월 제천용 재물돼지가 달아나니 설지가 뒤쫓아가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돼지를 잡아 그곳 민가에 가두고는 돌아와 임금에게 “국내 위나암의 산수가 깊고 험한데다가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게다가 고라니와 사슴, 물고기와 자라 등 산물이 많았습니다. 만약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시면 백성들의 수익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4월에 광명제가 사냥 후 황후와 함께 국내 땅이 도읍으로 적합한지를 살폈다. 9월에 다시 지세를 살피다가 사물 못(沙勿澤)에서 은거하던 한 사내를 데리고 돌아오기에 황후가 “산 속에 사는 미천한 사내를 데려다가 어디다 쓰시렵니까”고 물으니 임금이 “그렇지 않소이다. 이윤과 여상도 이런 사람이었소”라고 대답했다. 이윤(伊尹)은 탕(湯)왕을 도와 하나라를 멸하고 은나라를 세우게 한 어진 재상이다. 여상(呂尙)은 무(武)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우게 한 인물이다.
이듬해 10월 광명제는 도읍을 국내로 옮기고 은천령(銀川岺) 아래에 위나암(尉那巖)성을 쌓아 북도(北都)라 했다. 12월에 임금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며 5일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태보 협보(陜父)가 “천자가 사냥하심은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거늘, 사냥터의 기병들을 심하게 내돌리며 행락하심이 가당하신지요”라고 말하니 협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슴속에 응어리가 있었던 임금이 크게 노하며 협보의 관직을 파하니 협보는 분개하며 신라로 들어가 버렸다.
1930년대에 찍은 사진.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알려진 집안에 있는 성벽
고구리 도읍 국내성의 연혁
이러한 사연이 있는 국내성은 과연 어디일까. 「삼국사기」지리편에는 고구리 도읍지에 대해 “주몽이 흘승골(졸본)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40년이 지나 유류왕 22년(3)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겼다. (중략) 이후 425년이 지나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옮겼으며, 평양에서 156년이 지난 평원왕 28년(586)에 장안성으로 옮겼으며 장안성에서 83년이 지난 보장왕 27년(668)에 멸망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위 연혁에는 산상왕 “13년(209) 겨울 10월 도읍을 환도(丸都)로 옮겼다”는 기록과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도읍 환도성이 불타 “21년(247)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는 기록과 고국원왕 조에 “12년(342) 가을 8월 환도성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와 “13년(343)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 등이 누락돼 있다.
산상왕 때 천도한 환도성이 누락된 이유는 사학계가 「괄지지」의 “불내성(不耐城)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든 것이라 하였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는 기록이 있어 같은 곳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환도성에 대한 기록은 「괄지지」 편찬 약 400년 전의 일이라 잘못된 중국기록을 확인 없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집안을 환도성과 국내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괄지지(括地志)는 중국 당나라 때 복왕 이태 등이 편찬한 지지다. 당 태종 13년(639)을 기준으로 전국 358개 주의 연혁, 산천의 형세, 풍속, 문물, 고적 따위를 기술한 책이다. 원본은 전하지 않으며 그 내용은 여러 책에 인용돼 전해지고 있다.
환도산성과 국내성이 있다는 길림성 집안현
「삼국사기」지리편에는 국내성에 대해 “「한서」에 불이현이 낙랑군에 속한 현이고 669년에 이적 장군이 칙명에 의해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와 주현을 설치했다. 그 목록에 ‘압록강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11개인데 그 중 하나가 국내성이며, 평양으로부터 국내성까지는 17개의 역(驛)을 거친다’하였으니 국내성 역시 북조(고구려) 경내에 있는 것이지만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국내성으로 천도 이후 425년을 지내다가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는데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에는 산상왕 13년(209)에 환도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이는 명백한 오기다. 또한 국내성과 아무 상관없는 낙랑군의 불이현이 왜 언급되어 있는지 그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데 국내성의 위치를 찾는데 있어 문제는 고구리가 국내성에 도읍할 때는 중국과의 전쟁이 별로 없었기에 그 위치를 추적할만한 자료들이 많지 않다는데 있다. 그런 와중에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의 도읍지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단골로 소개하는 자료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신당서」「열전 145 동이」이다.
그런데 이런 기록도 있다고 소개만 될 뿐 인용·설명된 적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기록된 “압록수변에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 평양성, 환도성(안시성)이 위치했다”는 내용이 지금까지 자신들이 주장한 지명비정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다들 중국이 고구려의 도읍을 고의로 왜곡한 기록 정도로 알았을 것이다.
성헌식의 ‘대고구리’…반도사관에 왜곡·날조·축소된 전성기 강역도
광개토태왕, 알산더대왕보다 큰 광활한 영토 정복
훗날 징기스칸, 동유럽까지 정복한 대제국 기틀…고조선·고구리 유전인자 몽골에 영향
스카이데일리, 광개토태왕, 알산더대왕보다 큰 광활한 영토 정복
스카이데일리,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 광개토호태왕의 빛나는 업적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호태왕 즉위 당시 주변국들의 상황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www.skyedaily.com
고구려, 서西와 남南으로 최대 영토는?
현재 학생들의 52%는 교과서의 현행 국사를 믿지 않고 있다는..
성훈 칼럼니스트기사입력 2008-03-04
[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font color=red><b>고구려, 서西와 남南으로 최대 영토는?
고구려의 핵심강역(수도권)은 현 중국의 하북성과 내몽고 지방이었고, 동쪽으로는 한반도와 만주가 그 영토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도 현 압록강변 집안 지역이 아니라, 하북성 북경 인근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전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과학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m.pluskorea.net
위 논문과는 별도 관련 자료
고구려 도읍지는 어디였을까 ?
고구려 도읍지는 어디였을까 ? - 새마갈노
조선 중기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의 평안도 평양부가 고구려의 도읍지였고, 평안도 의주목에 고구려의 국내성이 있었으며...
www.eswn.kr
기록과 유적으로 살펴본 고구려의 도읍지는 여덟곳
조선 중기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의 평안도 평양부가 고구려의 도읍지였고, 평안도 의주목에 고구려의 국내성이 있었으며, 평안도 성천도호부의 옛 지명이 졸본부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편찬 시 참고했다는 '해동고기'에는 고구려의 환도성이 고려의 서북면 영원진에 있었다고 전한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는 주몽이 졸본에서 건국했고, 시조 주몽은 졸본에서 눌현으로 천도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졸본천에서 고구려를 건국했고, 2대 유리명왕 때 국내성으로 도읍지를 옮겼는데 10대 산산왕때 환도성으로 천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11대 동천왕은 도읍지를 평양성으로 옮겼는데 이 때의 평양성은 왕검성이었다고 한다. 왕검성 평양은 대부여의 3국인 진조선,번조선,막조선 중 중심국인 진조선의 치소였던 부소량으로 추정할 수 있다. 16대 고국원왕은 외침으로 파괴된 평양성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어 환도성으로 잠시 머물다가 동황성으로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20대 장수왕은 도읍지를 평양성으로 옮겼는데 이 때의 평양성은 대부여 시기의 막조선의 도읍지였던 백아강으로 보는 것이 옳다. 24대 양원왕은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한 후 그곳에 장안성을 축조하고 거대한 도시를 조성했다고 한다. 고구려는 이곳에서 멸망하는데 이곳이 신라의 평양, 당의 안동도호부, 고려의 서경이었고, 원의 동녕부, 명의 동녕위였던 곳이다. 이와같이 역사서에 나타나는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의 도읍지는 모두 여덟곳이다.
요약하면 고구려의 도읍지는
1) 졸본(홀본)
2) 눌현
3) 국내성
4) 환도성
5) 평양성1
6) 동황성
7) 평양성2
8) 장안성이다.
반도인가, 대륙인가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역사관은 고려는 물론,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그리고 남북국 이전의 역사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반도사관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반도사관은 오늘날에도 아무런 의심없이 이어지고 있어 고구려의 강역은 당연히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있었다는 지리적 설정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도사관에 의하면 고구려의 도읍지 또한 만주와 한반도로 설정하고 있는데 대체로
1) 졸본 ( 요녕성 환인현 )
2) 국내성과 환도성 ( 길림성 집안시 )
3) 평양성, 동황성, 장안성 ( 평안남도 평양시 ) 으로 비정하고 있다. <지도 1 >
그렇지만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에서 영위된 국가였음을 뒷받침하는 역사의 기록이나 유적은 참으로 보잘것 없다.
고구려의 건국지인 졸본이 요녕성 환인현이라는 견해는 언제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모호한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졸본은 평안도 성천도호부의 옛 지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바 요녕성 환인현의 유적이 졸본의 유적이라는 추정은 근거도 없는 무리한 판단인 것이다. 그 판단이 옳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허위라고 해야 옳다.
또, 국내성과 환도성이 길림성 집안시에 있었다는 주장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배치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국내성이 조선의 평안도 의주목에 있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사관이 이렇게 무리한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소이는 지금의 의주에서는 고구려의 역사유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도사관론자들은 그들의 시각으로는 고구려의 역사유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고분이나 성터가 남아있는 길림성 집안시에 집착하는 것이다. 유적이 없는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 국내성이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황당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의 의주가 원래 다른 곳이었는데 지명이 옮겨진 것이라면 사정은 달라지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당시의 의주목과 지금의 의주가 다른 곳일 가능성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지금의 압록강 이북 지역은 조선 초에는 조선의 강역이었다. 조선과 명은 지금의 요하 부근에서 국경을 직접 접하고 있었는데 그 동쪽에서 건국한 후금이 명, 조선과 전쟁을 치르면서 요하를 중심으로 하는 남북지역을 후금의 강역으로 흡수한 것이다. 전쟁 이후 조선과 청의 새로운 국경이 획정되면서 압록강 북쪽에 있던 의주목이 압록강 이남으로 위치와 지명이 함께 이동했던 것이다. 반도사관론자들은 역사의 현장을 확인하면서 기록을 무시하고 유적만을 중시했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 것이다.
기록과 배치되는 유적을 어떻게 역사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 우리민족의 강역을 연구하면서 유의해야 할 사안은 해당 지명이 같은 곳에서 변화된 것인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옛 지명을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위치가 바뀌면서 지명도 함께 바뀐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적은 옮겨다닐 수 없지만 지명은 옮겨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평안남도 평양시가 고구려의 평양성,동황성,장안성이었고 고려의 서경이었다면 평양시에는 왜 고구려나 고려의 유적이 없을 까 ?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옛 고구려의 강역이었다가 신라의 강역이 되었다는 평양에 관한 기사가 없다. 심지어 경주에 대한 기록도 없다. 삼국사기는 원본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의 서경에 대해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그 기록을 감안할 때 고려의 서경에는 고려의 궁궐이 다섯 곳 이상 일곱 곳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지금 그 위치가 어디였는 지 짐작이라도 하는가 ? 또 당시 고구려의 왕들은 과연 어디에 묻혀있나 ?
신증동국여지승람 강계도호부 항목을 보면 그 지역에 황성평과 황제묘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곳에 거대한 무덤과 비석이 세워져 있는 광경을 서술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무덤은 여진족의 금나라 황제의 릉으로 전해져 왔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 무덤은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의 릉으로 확신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그 비석이 광개토호태왕의 훈적비이기 때문이다. 왜 조선 중기의 현지인들은 그것이 고구려의 유물이 아니라 훨씬 후대인 금의 유적으로 알고 있었을까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광개토경호태열제의 훈적비는 동압록수의 동황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도사관으로 보면 평안남도 평양시 부근에 있어야 부합된다. 어찌되었던 기록과 유적이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북부여를 이은 나라였으며 북부여는 고조선의 대부여를 계승했다. 그런데 고조선이나 북부여, 고구려가 만주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역사서의 기록이나 유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만주나 한반도나 모두 고구려의 기본적인 역사의 자취가 없다. 고구려의 역사적 실체는 삼국사기와 고구려국 본기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접근할 수 있다. 고구려의 강역을 알아볼 때 고려해야 할 개념의 틀에서 다음 두가지는 피할 수 없는 기준이 된다. 우선 고구려는 성읍국가였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기본이 성곽을 갖춘 도시였고 전국에 200여 개의 성읍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번째 중요한 기준으로 천체관측지가 어디였느냐 하는 것인데 고구려의 천체관측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도읍지에 대한 기록에 부합하는 역사유적은 만주와 한반도가 아니라 오히려 대륙의 감숙성과 섬서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도 2 >
유적으로 추적한 고구려 도읍지
고구려의 건국 도읍지를 졸본이라고 표기하지만 홀본을 바른 표기로 보아야 옳다. 1) 홀본은 북부여의 도읍지였으며 서압록지역이었다. 만주와 한반도에는 서압록수, 동압록수로 지칭하는 강이 없다. 감숙성과 섬서성에는 북서에서 남동으로 흐르는 두개의 큰 강이 있는데 이것이 고대의 동서압록수였다. 따라서 홀본은 섬서성 빈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섬서성 빈현에는 고대사의 면모를 보여주는 역사유적이 즐비하다.
2) 눌현은 고조선 때 이궁이 있었던 곳인데 고조선 당시의 지명은 상춘이었다. 후대에 주가성자로 바뀌었는데 주몽이 축조한 성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지금 이지명은 길림성장춘시 부근 주성자로 옮겨졌다. 눌현은 감숙성 경성현으로 비정된다. 지금 이곳에는 고구려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유적이 남아있다.
3) 국내성은 감숙성 경양시로 보는 것이 옳다. 고구려의 국내성이 어디였던 가를 알아보기는 비교적 수월하다. 관련 기록이 역사서의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발해의 서경압록부였고 고려의 보주로 내원성이 있었다. 요나라에 일시 빼앗겼던 곳이고 원,명,청의 강역으로 편입된 곳이다.
4) 환도성은 고조선의 도읍지였던 장당경으로 추정된다. 환도성이 고려사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곳이 고려의 강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발해의 환주, 그리고 요,금,원의 환주였다. 지금의 길림성 환인현은 청이 지명을 옮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졸본을 옮긴 것이 아니라 환도성의 위치와 지명을 옮겨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5) 평양성은 왕검성이라고도 지칭했는데 왕검성은 고조선 진한의 도읍지 부소량이었고 고구려 11대 동천왕 때 천도한 평양성이다. 이 평양성은 섬서성 기산현으로 판단된다. 이곳은 고려 때 요와 강역을 다투었던 강동6주의 용주였고 원의 동녕부에 속했던 파사부였다. 이곳 가까이에서 고려의 천리장성이 시작되었다.
6) 동황성은 섬서성 한성시로 보는 것이 옳다. 이곳에는 섬서성의 서안시, 화음시, 기산현, 빈현과 같이 수많은 양의 역사문화유적이 남아있다. 고대 궁궐, 묘사, 사찰, 천체관측소 등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남아있어 이곳이 고대국가의 도읍지였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7)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천도했다는 평양성은 고조선의 마한의 도읍지였던 백아강으로 보는 것이 옳다. 고조선의 강역에서 마한의 도읍지는 가장 동쪽에 위치했다고 전하는데 고구려의 도읍지 평양이 마한의 도읍지였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한반도의 사정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곳은 고려 때 무주였고 원의 동녕부에 속했으며 고려말, 조선초에는 명의 강역이었다.
8) 고구려 24대 양원왕이 축조했다는 장안성은 섬서성 서안시로 비정해야 한다. 섬서성 서안시에 남아있는 역사유적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 지역의 역사유적은 그것이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 신라, 고려 등 우리민족의 유구한 역사의 살아있는 증거임을 증언하고 있다. 고려사에 나타나는 기록을 감안할 때 이곳이 고려의 서경이었음을 간파할 수 있다.고구려의 장안성은 신라의 평양, 당의 안동도호부, 고려의 서경, 원의 동녕부, 명의 동녕위였던 곳이었다. 고려의 강역을 흡수하면서 경사를 북평( 감숙성 란주시 )에서 북경( 북경시 동성구 )으로 옮기고 대륙에 있던 조선의 강역을 완전히 점령한 후 동녕위라는 지명을 한,당의 역사중심지로 위장하면서 지명을 서안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중심강역은 지금의 감숙성과 섬서성 지역이었다. 그곳에 남아있는 역사유적이 사서가 전하는 사실과 일치하는 지 면밀하게 대조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역사는 주체와 객체가 뒤바뀌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형되었다. 한반도에는 조선 중기 이후의 역사사실을 입증하는 역사유적이 있지만 그 이전의 우리민족사를 알려주는 역사유적은 찾기 힘들다. 대륙에 남아있던 우리민족의 역사유적은 명대 이후 무수히 파괴되었고 화하족의 것으로 위장되었고 변조되었다. 더구나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우리민족의 문명은 대대적으로 훼손되었다. 그나마 섬서성의 역사유적이 상당량 남아있는 것은 그 지역이 화하족의 중심강역이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적이 화하족의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었던 것이다.
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
윤여동설 -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고구려의 네 번째 도읍 평양성의 위치 - 최초공개 고구려의 평양성은 옛 고조선의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이었으며,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낙..
blog.daum.net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이다. 낙랑군 패수(浿水)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위성지도를 스크린에 띄워 놓고 패수로 의심되는 하천의 물줄기를 하류에서 부터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거슬러 올라가던 중 한 마을의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필자 지구인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서론 이미..
earthlin9.tistory.com
윤여동설 - 고구려 장안성의 위치
윤여동설 - 고구려 장안성의 위치
윤여동설 - 고구려 장안성의 위치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황성으로부터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25대인 평원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는 또 다시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삼국사기 평원왕 28년(A.D.586)..
blog.daum.net
장수태왕 때 천도한 평양성은 북한 평양성 아니다
고구려 멸망과 함께 한 평양성은 평원태왕 때 이전한 현재 북한의 평양성(장안성)이다
[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장수태왕 때 천도한 평양성은 북한 평양성 아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태왕기 15년조]에 의하면 고구려는 장수태왕 15년(A.D 427년)에 수도를 국내성(집안)에서 평양성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는데, 국내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장수태왕 때 옮겨간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장수왕(長壽王) 15년(A.D 427년) 수도를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十五年移都平壤」三國史記 高句麗本紀 [註 평양은 서울처럼
m.pluskorea.net
고구려의 평양, 대륙에 있었나
고구려의 평양, 대륙에 있었나 - 시사IN
산 정상의 백암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해발 300~400m밖에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인데도, 막상 들어서자 발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등산로에는 얼음이 녹는 중이라 미끄러지기 십상이었고, 그 옆에...
www.sisain.co.kr
[출처] 고구려의 도읍지를 찾아서(성헌식 칼럼니스트)|작성자 어이무사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