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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산을 넘으며.....
들어서 될 일이 아니다...
향토지의 자료를 뒤척이며
읽는다고만 될 일이 아니다...
가능하다면 직접 나서서 눈으로 봐야한다
발 품의 노력이 나를 성장케한다.....
맞는말인가요?...
불교의 성지 옛이름 영주산
현재의 지장산 지금은 지장산이라 불려지지만
보개산이 정답일듯...
지장봉(환희봉)을 경계로 동편을 외보개라하고
서편을 내보개라 칭했다
환희봉에 올라보면 부처님을 뵐 수 있다하여
다른이름으로 불견산이라고 했고
큰 빛이 내린마을이라 하여 대광리라 부르고
이곳의 지명은 불교에 영향을 받은곳이 많다..
지금의 보개봉근처에는 대송정이라는 커다란 정자가 잇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쨌던 많은명찰과 200여개의 암자가 있었다는 불교의성지...
현재 암자터는 40여곳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직접 눈으로 보려고
포천시 관인면 중리 지장계곡에서 올라
환희봉을 넘어 석대암과 성주암 그리고 원심원사로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까지 산을 넘어봤다
성주암 터를 찾아보려 풀섶을 헤처가며
가시덤불도 들춰가며
참으로 힘든 여정이지만 돌아서면
그래도 더 찾아볼 껄 하는 아쉬움만 남는 산행이었다....
석대암 뒤편에 널브러져있는 와편들과 간간히 눈에띄는 사기편
그리고 무너진 축대 등 옛사람들의 발길이 남아 있는듯...
제법 커다란 돌틈사이에서 솟아나는 석대암 지장샘....
석대암 오르는 길에서....
수행굴...
수행굴의 내부
수행굴 : 스님들이 수행정진을 위해 참선을 했던 곳이라 한다
성주암 터 이곳역시 와편들과 잡초속에 가리워져 무너져가는 축대만 보인다..
원심원사...
심원사 소개
고통받는 중생들을 다 제도하고서야 깨달음을 이루고. 지옥이 다빌 때까지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라는 서원을 세웠던
지장보살. 심원사의 원래 위치는 현재의 동송읍이 아니라 설악. 오대산등과 함께 명산으로 손꼽히던
신서면(현 연천군) 보개산 자락이었다.
심원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진덕여왕 원년인 647년. 영원조사가 영원사. 법화사. 도리사와 함께
영주산(현 보개산)의 4대사찰중 하나로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흥림사였다.
흥림사가 현재의 심원사로 개칭된 것은 1397년 무학대사에 의해서이다.
그 뒤에도 임진왜란의 병화와 1907년 일본군과의 싸움을 거치면서 당우가 전소되는 참사를 맞이했으나
스님들과 불자들은 굴하지 않고 복구와 중창을 거듭했다.
특히 1927년에는 보통강 습소를 설립하여 인근의 고아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으며
1935년에는 백일기도 중에 지장보살의 현현을 목격한 독립운동가 한규설의 부인 박선심화보살과
그녀의 동생 박대선화보살의 회사로 화산경원을 설립. 경학연구의 중심도량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오늘날 큰 스님중 이 화산경원 출신인 많음은 당시 화산경원의 위상을 입증해준다.
심원사는 6 . 25이전만 해도 2백 50여칸의 당우와 4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린 거찰이자
숱한 고승들을 배출한 중부내륙지방의 중심 도량이었다.6 . 25동란으로 잿더미가 된 심원사
옛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때1955년 4월이었다.
당시 주지 김상기 스님은 현 위치로 옮겨 조그만 절을 짓고 심원사로 편액하였다.
지장보살 이 모셔진 현재의 명주전이 지어진 것은 그 뒤인 1962년의 일이었다.
지장보살의 원력을 믿는 스님들과 불자들의 노력으로 심원사는 오랜 상처를 딛고 현재의 자리로 당우를 옮겨
다시 조금씩 일어서 지금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불자들이 찾아오는 명찰로 거듭나고 있다.
현재 옛 심웒사지는 군부대 내에 자리잡고 있다. 심원사지에는 이곳이 우람한 당우를 자랑했던 곳임을 알려주는 표지석과
천년고찰임을 입증해주는 역대 고승들의 부도 12기. 그리고 박선심화. 박대선화 보살의 공덕비를 비롯한 비석 3기가 남아있다.
부도중 제월대사비는 선조의 여덟번째 왕자인 의창군이 글씨를 썼으며
옥개석의 조각수법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취운당대사비에는 총탄 자국이 나있어 이곳이 불행한 우리역사의 현장임을 너무도 생생히 증언해주고 있다.
현재 심원사지 부도밭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38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심원사 사적기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647년(신라 진덕여왕 1) 영원(靈源)이 창건하였다.
영원은 보개산에 영원사(靈源寺)· 법화사(法華寺)와 함께 이 절을 세웠는데, 당시에는 흥림사(興林寺)라고 하였다.
고려 때 나머지 절은 폐사되었으나 이 절만은 명맥을 유지했다. 720년(성덕왕 19) 사냥꾼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지장보살의 감화를 입어 석대암(石臺庵)을 세웠으며, 이후 우리 나라 제일의 지장신앙 성지로 이름났다.
859년(헌안왕 3) 범일(梵日)이 천불을 조성했고, 1393년(조선 태조 2) 불에 탄 것을
1395년에 자초(自超)가 중창하면서 산 이름을 영주산(靈珠山)에서 현재의 보개산으로 바꾸고
절 이름도 심원사로 고쳤다고 한다. 1398년 성주암, 1400년(정종 2) 석대암을 각각 중창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595년 인숭(印崇)과 정인(正印) 등이 중건했다.
이후 많은 고승을 배출하고 천불전과 해장전 등 건물 만도 250칸이 넘는 대사찰로 발전했으나
1907년에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고 말았다. 1909년 연수 등이 중창하였으며, 1931년 사찰 건물의 내부를 완전히 중수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절이 불에 탔고, 전쟁 후에는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자
1955년 김상기(金相基)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였다. 본래 절터의 위치는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이다.
1962년 명주전을 짓고, 1970년에 대웅전과 요사채 2동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명주전과 대웅전·삼성각·노전·화산경원 등이 있다.
이 중 화산경원은 1935년 한규설(韓圭卨)의 부인 박선심화(朴善心華)가
지장보살의 발광을 보고 시주하여 지은 불교연구원이다.
유물로는 1991년 4월 1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재138호로 지정된 연천군 심원사지 부도군이 있으며,
옛 절터에 사적비와 공적비 등이 남아 있다.
심원사 연혁
서기 647년 신라 진덕여왕 원년 정미에 영원조사 - 영원,법화,흥림,도리4대사를
영주산(보개산원명)에 차제로 개창하다.
서기 720 신라성덕왕 19년 경신에 엽사 이순석등이 출가하여 석대암을 창하다.
서기 859 신라 헌안왕3년 기묘에 범일국사 - 흥림사를 재창하고 천불을 조성 봉안하다.
서기 860 신라 헌안왕4년 경진에 범일국사 - 성주암을 개창하다.
시세에 지장암급 남암을 동창하다 (단, 남암은 후에 무학대사가 중창운이나 년조는 미상이요,
남암의 우방산 곡간에 무학대사의 토굴유지와 단갈이 현존하다)
서기 1307 고려 충열왕3년 정미에 법희거사 민지 - 석대암사적을 창하다.
서기 1320 고려 충수왕7년 경신 8월에 석대암사적비를 건하다.
서기 1393 조선 태조2년 계유 3월에 심원사가 재하다.
서기 1396 조선 태조5년 병자에 무학왕사 - 사를 삼창하고 산명영주를 보개로 사호 홍림을 심원으로 개칭하다.
서기 1398 조선 태조7년 무인에 무학왕사 - 성주암을 재창하다.
서기 1400 조선 정종2년 경진에 사승이 석대암을 삼창하다. (려대에 중열사 - 재창하였다 하나 연대는 미상)
서기 1592 조선 단조28년 을미에 인숭, 정인양사 - 병선의 겁회를 소제하고 제사회중건하다.
서기 1619 조선 광해11년 기미에 사승 성일이 영은사를 중건하다.
서기 1620 조선 광해12년 경신에 색품사 - 어파집암구기에 대승암을 신건하다.
서기 1633 조선 인조13년 을해에 석대암 지장영험비를 세우다.
서기 1634 조선 인조14년 병자 8월에 제월당경헌대사비를 세우다.
서기 1652 조선 효종2년 임진 8월에 취운대사비를 세우다.
서기 1689 조선 숙종14년 기사에 화주 박신윤이 오층석탑을 건설하다.
서기 1710 조선 숙종35년 경인에 화주 대간등이 무학대를 석각하다.
서기 1807 조선 순조 7년 정묘 7월에 기봉쾌성대사 - 축성암을 건축하다.
서기 1854 조선 철종5년 갑인에 사승 신학, 보성, ,선찬등이 성주암을 중건하다.
서기 1861 조선 철종12년 신유에 자상으로 내탕금을 하사하야 석대암을 중건하다.
서기 1874 조선 고종11년 갑술에 석대암사적비를 민규현이 중서하다.
서기 1876 조선 고종13년 병자에 현허화주 - 성주암을 삼창하며 나한전을 중건하다.
서기 1887 조선 고종24년 정해에 사승이 김상궁의 알선을 득하여 석대암을 중건하다.
서기 1891 조선 고종28년 신유에 신사 이만성이 답 4두락, 전 2일경을 석대암에 헌납하다.
서기 1893 조선 고종30년 계사에 단신 이정엽이 일본제의 범종 1구를 헌납하다.
서기 1895 조선 고종32년 을미 10월에 화주 성욱이 모연금으로 중종 1구를 석대암에 매입하다.
서기 1899 조선고종광무 3년 기해 4월에 화주 비구니 계선이 남암 대웅전을 중건하다.
서기 1903 조선고종광무 7년 계묘에 사패정계비를 산의 입구에 수립하다.
서기 1906 조선고종광무 10년 병오에 상궁임씨 대련화 - 황실에 주품하야 당사에 위국치성케하고
기반하여금으로 사암에 토지를 매헌하니 심원사에 28.583평,
성주암에 31,499평, 석대암에 12,337평이니 공계72,269평이라.
서기 1907 조선순종융회원년 정미 9월 11일 병화에 250칸의 사우와
1,602위의 불상이 회신에 몰입됨으로 월2년 기유세부터 유련수 화상이 점차로 복구를 경영하다.
서기 1910 조선순종융회4년 경술에 함남 북청군 대동사로부터 목제불상 8위를 이안하다.
시년에 이홍제, 유련수 - 유실하였든 사패산림 백여정보를 회수하다.
서기 1918 대정7년 무오에 주지 유련수 - 호암화백을 청하여 천불을 조성봉안하다.
서기 1925 대정 14년 을축에 주지 홍월운이 법무 이진학의 열심부좌로 인하여 사동소재 비석 2대와
부도 전부를 사전의 입구인 영원교 부근 광장으로 이전하고 사채 1,500원을 정리하다.
서기 1927 소화2년 정묘에 주지 이진학이 보통강습소를 설립하고 부근 무산자의 아동을 교육하다.
서기 1928 소화3년 정묘에 주지 이진학이 영원, 반야, 불이, 신흥, 사대교를 가설하거 사계도로를 확장수치하다.
서기 1929 소화4년 기사에 주지 이진학이 산림매각대금으로 재단법인부채 금
1,500원을 상환하고 토지 36,500평을 매입하였다.
서기 1930 소화5년 경오에 주지 이진학이 토지 23,015평을 모연매수하고 사내석계를 전부 신축하다.
시세에 백자목 6,000본을 노방에 식부하야 사원풍치림을 경영하다.
서기 1931 소화6년 신미에 주지 이진학이 사원건물의 내부를 일신수리하고
중종 2좌 각 150근을 모연매입하다. 시세에 석대암을 모연중수하다.
서기 1933 소화8년 계유 4월에 신녀김씨 보인화가 12,958평의 토지를 당사에 납부하고
대방전면 초자창신설비 200여원을 의연하다.
서기 1934 소화9년 갑술에 주지 이진학이 모연하야 토지3,779평을 매납하다.
성주암 주지 김영월이 회사금 230원으로 성신각을 건하다.
서기 1935 소화10년 을해에 주지 이진학이 박씨 선심화,
박씨 대선화 형제에게 금15,000원의 희사를 득하야
토지 49,097평을 매입하고, 교과요의 경적을 인출하야 익년도부터 화산경원을 설립하고
공비생을 교수하야 선교양종의 종학을 진흥하기로 한다.
시세에 석대암 주지 서상인이 모연하야 석대암을 일신중수하고 도로에 석축하다.
서기 1936 소화11년 병자에 주지 이진학이 화산경원 부족으로 박씨 대선화 방에
가격 10,000원의 토지를 시득하야 사중에 납부하다.
동년 8월에 박씨 선심화, 대선화 방에 금 2,500원을 시득하야 대구품가사불사를 하고,
동년 9월 1일에 화산경원 개원식을 거행하다.
서기 1939 소화14년 기묘에 주지 이진학이 사재로 천불전 봉향각을 건축하고
시년에 박씨 대선화방에 순은향화로(82량중) 국화문 3족
명치천황 하사품 1좌와 은다기 1좌를 시득하야
사중보물에 편입하다.
원심원사...중창불사로 조금 어수선하다...
심원사 부도군
어제 둘러본 고향이었습니다
전문가적 지식이 없어 설명을 다하지는 못하지만
본것을 토대로 또 검색을 해가며 비록 다 암기는 못하지만
하나씩 하나씩 상식을 늘려갈 요량입니다...
철원군 동송읍 상노리 심원사 명주전
명주전에 모셔진 지장보살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은
너와 함께 별을 보고 싶었고
단순해도 의미있는 것들을 지나쳐버리고 싶지 않아서지
함께 세상의 경이로움을 탐구하고 싶었고
늘 긴장하며 살고 싶어서란다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은
내 상상력에 다시 불을 지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란다
그레고리 E. 랭의 [ 우리가 너를 선택한 이유 ] 中에서 --.
첫댓글 아...
감미로운 음률에...
섬섬옥수 주옥같은 주석까지...
대사 그 닉네임이 오늘따라 더욱 빛나는 구료...
그렇지...우리의 대사니이임~~멋져부러^^
다음에 다시 그길을 함께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