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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게 지키는 사마의(司馬懿) -
뜻밖의 행운(幸運) 덕택(德澤)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扶持)한 사마의(司馬懿)는 다시 방어(防禦)에 주력(主力)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곽회(郭淮)가 사마의(司馬懿)에게 찾아와서 아뢴다.
"제가 염탐(廉探)해보니, 공명(孔明)이 군대(軍隊)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는 조짐(兆朕)이 보였습니다.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순시(巡視)를 자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마의(司馬懿)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을 꺼낸다.
"만약(萬若) 공명(孔明)이 무공산(武功山)으로 이동(移動)하여 동쪽에 자리를 잡으면 우리에게는 큰 위협(威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위수(渭水) 남쪽으로 나아가 서쪽 오장원(五丈原)에 자리를 잡으면 우리는 마음을 놓아도 된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공명(孔明)의 움직임을 세밀(細密)하게 관찰(觀察)하도록 지시(指示)했다.
얼마 후, 정탐(偵探) 갔던 자가 돌아와서 보고(報告)한다.
"공명(孔明)이 오장원(五丈原)에 영채(營寨)를 세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마의(司馬懿)는 무릎을 치며,
"허허허! 모두가 우리 대위(大魏) 황제의 큰 복이다! 공명(孔明)이 스스로 망(亡)하는 길로 들어섰으니 이제 지켜볼 일만 남았구나. 모든 장수(將帥)들은 싸울 생각은 말고 더욱 굳게 지키기만 하라!" 하고, 기뻐했다.
공명(孔明)은 오장원(五丈原)으로 옮기고도 사마의(司馬懿)를 싸움터로 나오게 하기 위해 계속(繼續) 노력(努力)을 기울였지만 사마의는 일절(一切) 응(應)하지 않았다.
공명(孔明)은 생각 끝에 최후(最後)의 수단(手段)을 써보기로 했다. 직접(直接) 쓴 서신(書信)과 함께 선물(膳物)을 사자(使者)를 통해 전달하(傳達)기로 했다.
공명(孔明)은 사마의(司馬懿)에게 갈 사자(使者)에게 서신(書信)과 선물(膳物) 상자(箱子)를 건네며,
"사마의가 이 선물(膳物)을 받으면 당장(當場) 뛰쳐 나올 것이다." 하고, 확신(確信)에 차서 말했다.
사자(使者)는 공명(孔明)의 서신(書信)과 선물(膳物)을 들고 사마의(司馬懿)의 영채(營寨)로 찾아갔다.
공명(孔明)의 사자(使者)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사마의는,
'나를 끌어내려고 군사들을 차례(次例)로 보내서 밖에서 갖가지 욕(辱)을 퍼붓더니 이젠 아주 적극적(積極的)으로 들이대는군.' 하고, 생각하며 사자(使者)를 들어오게 하였다.
"승상(丞相)께서 대도독(大都督)께 서신(書信)과 선물(膳物)을 보내셨습니다." 사자(使者)가 서신과 선물을 사마의 앞에 내려 놓는다.
사마의(司馬懿)는 상자(箱子)를 한 번 힐끗 보고, 서신(書信)을 먼저 펼쳐 본다.
[중달(仲達) 그대는 위군(魏軍)의 대장(大將)이 되어 중원(中原)의 군사(軍士)를 통솔(統率)하고 있거늘, 나와서 자웅(雌雄)을 겨룰 생각은 않고 토굴(土窟)에 틀어박혀 칼과 화살을 피하려고만 하는가? 그대의 용맹(勇猛)과 지휘력(指揮力)을 흠모(欽慕)해 온 나로서는 실망(失望)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그토록 몸을 사리는 것은 사내의 자세가 아니지. 지금 그대의 모양(模樣)새가 아녀자(兒女子)와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특별(特別)히 그대에게 어울릴 법한 아녀자의 옷과 족두리를 선(膳物)물로 보내니, 출병(出兵)하지 않을 것이라면 두 번 절하고 기꺼이 이 선물을 받게. 혹, 아직 사내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남아 있다면 이 글에 대한 답(答)으로 기일(期日)을 정(定)하고 싸움에 응(應)하도록 하게.]
굴욕적(屈辱的)인 편지(便紙)였다.
하지만 사마의(司馬懿) 표정(表情)은 평상시(平常時)와 다를 것이 없다. 화가 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평온(平穩)하다.
사마의는 촉의 사자(使者)를 쓱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물 상자(箱子)를 연다.
과연(果然) 서신(書信)에 적힌대로 (女子)의 옷과 족두리가 잘 포개져 담겨 있다.
주변(周邊)에 서 있던 장수(將帥)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사마의(司馬懿)의 평온(平穩)한 표정(表情)과 대비(對備)되는 모습이다.
사마의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공명(孔明)이 보낸 옷을 상자에서 꺼내어 몸에 걸쳐보기까지 한다.
"흐흐흐흐... 하하하하! 공명(孔明)이 나더러 이녀자(兒女子)라고 하는구나."
사마의(司馬懿)의 말에 장수(將帥)들은 비로소 사태(事態)를 파악(把握)했다.
일제히 칼을 빼들고 칼 끝을 공명의 사자(使者)에게로 겨눈다.
"그만들 하게." 사마의(司馬懿)는 조용히 장수들을 제지한(制止)다.
그리고 사자(使者)를 가만히 바라보며,
"승상(丞相)께 선물(膳物)은 잘 받았다고 일러라. 난 아주 편안(便安)히 잘 지내고 있는데, 승상께서는 요새 침식(便安)이 어떠하신가?"하고, 오히려 공명(孔明)의 안부(安否)를 묻는다.
사자(使者)는 사마의(司馬懿)의 물음에,
"요즘 승상(丞相)께서는 새벽 일찍 일어나시고 늦게 주무십니다. 그리고 군율(軍律)에 엄(嚴)하시어 곤장(棍杖) 20대가 넘는 형벌(刑罰)은 모두 친(親)히 처결(處決)하십니다. 진지는 적게 잡수셔서 하루 세 끼니에 밥을 한 그릇 남짓 잡수실까 말까 합니다." 하고, 사실(事實)대로 말하였다.
"어허, 하는 일이 많은데 식사(食事)를 그리 부실(不實)하게 하면 어찌하려고..." 사마의(司馬懿)는 공명(孔明)을 걱정하는 말을 한다.
하지만 실(實)은 속으로,
'공명(孔明)의 명(命)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군. 격무(激務)에 시달리면서 밥을 그처럼 적게 먹으면 어떻게 버티겠는가.' 하고, 생각하며 흐뭇하게 여겼다.
사마의(司馬懿)에게 서신(書信)과 선물(膳物)을 전달(傳達)한 사자(使者)가 오장원(五丈原)으로 돌아와 공명(孔明)에게 사마의와 있었던 일을 보고(報告)한다.
"사마의(司馬懿)는 보내신 서신과 선물(膳物)을 받고도 화(火)내는 기색(氣色)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승상(丞相)의 침식(氣色)은 어떠신지 안부(安否)를 묻기까지 했습니다."
사자의 말을 듣고 공명(孔明)은,
"사마의(司馬懿)가 나를 잘 알고 있구나...!" 하고, 탄식(歎息)하며 혼자 생각하기를,
'사마의(司馬懿)를 불러내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내 상황(狀況)만 사마의(司馬懿)에게 알리는 꼴이 되었군.' 하고, 서신과 선물을 보낸 것을 후회하기까지 한다.
공명(孔明)의 곁에 있던 주부 양옹(主簿 楊顒)이 탄식(歎息)하는 공명을 보더니 말을 꺼낸다.
"승상(丞相),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해보게나."
"사람에게는 각자의 직분(職分)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내 종은 밖에 나가 밭을 가는 것이 직분(職分)이고, 여자 종은 집안에서 집안일을 하는 것이 직분(職分)이고, 닭은 새벽을 알리고, 개는 집을 지키는 것이 각자(各自)의 직분(職分)이옵니다. 집주인은 다만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차려주는 음식(職分)이나 맛있게 먹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집주인이 나서서 모든 일을 처리(處理)하고자 하면 몸이 고단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끝내는 아무 것도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주인의 지혜(智慧가 비복(婢僕)들만 못해서이겠습니까? 주인(主人)은 주인의 도(道)가 따로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이르길, 앉아서 도(道)를 논(論)하는 사람은 삼공(三公)이요, 일어나 행(行)하는 사람은 사대부(士大夫)라 했습니다. 옛적에 병길(丙吉)은 소가 기침하는 것은 걱정하면서도 길가에 쓰러져 죽은 사람은 그냥 지나쳤고, 1, 진평(陳平 : 한고조(유방)를 도와 천하 통일에 기여한 자)은 자기가 쌓아둔 곡식과 돈의 수량(收量)을 몰라서 '그런 일은 맡아 보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만 말했다고 합니다. 2, 그런데 지금 승상(丞相)께서는 세세(細細)한 일까지 모두 신경(神經)을 쓰시느라 한시도 편(便)히 쉬시는 때가 없으니 어찌 건강(健康)을 해(害)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양옹(楊顒)의 말은 구구절절(句句節節) 맞는 말이었다.
양옹(楊顒)의 말을 듣고 생각이 많아진 공명(孔明)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선제(先帝 : 유비)의 당부(當付)를 떠올리면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면 나같이 마음을 다하지 않을까 염려(念慮)가 되어......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으니 이제라도 편(便)히 쉬는 시간을 자주 갖도록 해보겠다." 하지만 이미 공명(孔明)의 건강(健康)은 극도(極度)로 쇠약(衰弱)해져 있었다.
사마의(司馬懿)가 공명(孔明)으로부터 아녀자(兒女子)의 옷을 선물(膳物) 받았다는 소문(所聞)은 위군(魏軍) 진영(陣營) 곳곳으로 삽시간(霎時間)에 퍼졌다. 위(魏)의 장수(將帥)들은 대도독(大都督)이 공명에게 모욕(侮辱)을 받았다는 사실(事實)도 사실이지만, 그런 치욕(恥辱)을 당(當)하고도 가만히 있는 사마의(司馬懿)에게 화(火)가 났다.
그리하여 장수(將帥)들이 사마의(司馬懿)를 찾아와서 말한다.
"대도독이 당하신 일은 입에 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치욕적(恥辱的)입니다. 당장(當場) 군사를 일으켜서 촉군(蜀軍)을 쳐야 마땅합니다!" 장수들의 강력(強力)한 요청(要請)에도 사마의(司馬懿)는 평소(平素)와 다른 기색(氣色)이 없다.
그리고
"내가 공명(孔明)의 선물(膳物)이 반가워서 가만히 있는 것이겠나? 나도 분(憤)한 것을 참고 있는 중이다. 천자(天子)께서 친(親)히 조서(詔書)를 내리셔서 지키기만 하고 싸우지는 말라하셨는데 내가 어찌 나의 사사(私私)로운 감정(感情)을 앞세워서 가벼이 나가 싸울 수가 있겠나." 하고, 천자(天子)의 조서(詔書)를 핑계 삼는다.
하지만 장수(將帥)들의 울분(鬱憤)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에 사마의는,
"정 그렇다면 내가 황제(皇帝)께 표문(表文)을 올려 보겠다. 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윤허(允許)가 내려지면 그때 싸우러 나가자." 하고, 제안(提案)한다.
모든 장수(將帥)들이 사마의의 제안(提案)에 입을 모아 동의(同意)했다.
사마의(司馬懿)는 바로 표문(表文)을 써서 합비(合肥)에 있는 위주(魏主) 조예(曺叡)에게 보냈다.
"사마의(司馬懿)가 표문을 올렸다 하였느냐?" 위주(魏主) 조예(曺叡)는 사마의가 올렸다는 표문(表文)을 펼쳐 보았다.
[신(臣)이 재주는 가벼운데 책임(責任)이 무거운 까닭에 폐하(陛下)께서는 일전(日前)에 밝은 가르침을 내리시어 저희들에게 굳게 지키고 나가서 싸우지는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갈량(諸葛亮)이 신에게 아녀자의 옷과 족두리를 보내와 신(臣)을 아녀자(兒女子)와 같다고 농락(籠絡)하니 치욕(恥辱)이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폐하께 아뢴 뒤 죽기를 각오(覺悟)하고 싸워 조정(朝廷)의 은혜(恩惠)를 갚음과 동시(同時)에 우리 삼군(三軍)의 치욕(恥辱)을 씻을까 합니다. 격분(激忿)을 참을 수 없어서 감(敢)히 폐하(陛下)께 이렇게 아룁니다.]
조예(曺叡)는 모여 있는 여러 관료(官僚)들에게 표문(表文)을 돌려보게 한 후에 말한다.
"사마(司馬) 도독(都督)이 지금까지 방위(防衛)에만 힘쓰다 갑자기 나가서 싸우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理由)가 단순(單純)히 공명(孔明)에게 받은 모욕(侮辱) 때문일까?"
조예(曺叡)의 의문(疑問)에 위위 신비(衛尉 辛毗)가 의견(意見)을 낸다.
"아마도 사마(司馬) 도독(都督)은 싸울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제갈량(諸葛亮)이 준 모욕(侮辱) 때문에 장수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 통에 마지못해 표문(表文)을 올렸을 것입니다. 폐하(陛下)의 뜻을 앞세우면 장수(將帥)들을 달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신비(辛毗)의 말을 들어보니 그럴 듯하였다.
조예(曺叡)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비(辛毗)로 하여금 사마의(司馬懿)에게 어명(御命)을 직접(直接) 전달(傳達)하라고 분부(分付)를 내렸다. 신비는 조예(曺叡)가 내린 신절(信節)을 받아 사마의(司馬懿)가 있는 위북(魏北) 진채(陳寨)로 향(向)했다.
"어명(御命)이다! 앞으로 감(敢)히 다시 출전(出戰)을 입에 올리는 자(者)가 있으면 누구를 막론(莫論)하고 칙명(勅命)을 거역(拒逆)한 죄(罪)로 엄(嚴)하게 다스릴 것이니라!" 신비(辛毗)는 모든 장수(將帥)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명(命)을 전달(傳達)하였다.
황제(皇帝)의 칙명(勅命)까지 다시 내려 왔으니, 장수(將帥)들은 더이상 싸우러 나가자는 말을 꺼낼 수 없게 되었다.
사마의(司馬懿)는 나가서 싸워서는 안 된다는 황제(皇帝)의 명을 널리 소문(所聞) 내라고 지시(指示)하였다. 소문(所聞)을 내라는 것은 물론 공명(孔明)의 귀에 들어가게 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마의(司馬懿)가 의도(意圖)한대로 위주(魏主) 조예(曺叡)가 출정(出征)을 금지(禁止)했다는 소문(所聞)은 오장원(五丈原)까지 전(傳)해졌다.
공명(孔明)은 소문(所聞)을 듣자마자 사마의(司馬懿)의 지략(智略)에 또 다시 감탄(感歎)하며,
"역시(亦是) 사마의(司馬懿)의 지략은 대단하다. 삼군(三軍)을 안정(安定)시키기 위한 계책(計策)을 썼군." 하고, 말한다.
곁에서 공명(孔明)의 이야기를 듣던 강유(姜維)가 묻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마의(司馬懿)는 전혀 싸울 마음이 없으면서 황제(皇帝)에게 싸우러 가겠다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이것은 장졸(將卒)들에게 싸울 힘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겠지. '장수(將帥)가 밖에 나가 있으면 임금의 명령(命令)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옛말이 있지. 그런데 천 리(千里)나 떨어져 있는 장수가 굳이 임금에게 싸움을 허락(許諾)해달라고 청하는 경우(境遇)가 어디 있겠는가? 사마의(司馬懿)가 칙명(勅命)을 핑계로 군대(軍隊)의 화를 가라앉히려는 속셈이고, 이렇게 내 귀에까지 들리게 만든 것은 우리의 군심(軍心)을 해이(解弛)하게 만들려는 속셈일 것이다."
사마의(司馬懿)의 수(手)를 파악(把握)한 공명(孔明)에게 장수(將帥)들이 감탄(感歎)하고 있는 사이, 돌연(突然) 성도(成都)에서 비위(費褘)가 공명(孔明)을 찾아 왔다.
황제(皇帝)를 옆에서 보좌(補佐)하는 비위(費褘)가 찾아오자 공명(孔明)은 덜컥 걱정이 앞선다.
"기별(奇別)도 없이.... 무슨 일이오?" 비위(費褘)를 맞이하는 공명의 목소리에도 불안(不安)이 드러난다.
비위(費褘)가 심각(深刻)한 표정(表情)으로 입을 연다.
"동오(東吳)와 위(魏)의 소식(消息)을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전에 오왕(吳王 : 손권)이 승상(丞相)께 약속(約束)한대로 동오군(東吳軍)이 출격(出擊)하였는데, 그 이후(以後)의 소식(消息)입니다. 위주(魏主)는 대군(大軍)을 이끌고 합비(合肥)로 가고, 만총(滿寵), 전예(田豫), 유소(劉邵) 셋에게 군사를 주어 세 갈래로 진격(進擊)하는 동오군(東吳軍)을 막게 했습니다. 만총(滿寵)이 계책(計策)을 써서 전투(戰鬪) 초반(初盤)부터 동오 제갈근(諸葛瑾)이 이끄는 진영(陣營)의 군량(軍糧)과 마초(馬草), 무기(武器)들을 모두 태워버렸고, 오군(吳軍)의 인마(人馬)는 병(病)까지 들어 싸움이 동오(東吳)에게 불리(不利)하게 돌아갔습니다. 게다가 육손(陸遜)이 오왕(吳王)과 약속(約束)하여 위군(魏軍)을 앞뒤에서 협공(挾攻)하기로 하였는데, 그 사실(事實)을 적은 표문(表文)을 전달(傳達)하는 과정(過程)에서 심부름꾼이 위군(魏軍)에게 사로잡혀 기밀(機密)이 누설(漏泄되는 바람에 오군(吳軍)은 아무 소득(所得)도 없이 그대로 회군(回軍)하고 말았습니다."
"뭐...뭐라.....?" 공명(孔明)에게는 지나치게 가혹(苛酷)한 소식(消息)이었다.
위(魏)가 동오(東吳)와의 싸움으로 정신(精神)을 다른 곳에 둔 사이에 중원(中原)을 도모(圖謀)해보려는 공명(孔明)의 계획(計劃)이 모조리 무위(無爲)로 돌아간 것이다. 사마의(司馬懿)를 불러내는 것도, 동오(東吳)와 손잡고 중원(中原)을 치려는 것도 모두 공명(孔明)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비위(費褘)로부터 뜻밖의 소식(消息)을 들은 공명(孔明)은 한참 한숨을 거듭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며 정신(精神)을 잃었다.
"승상(丞相)!" 놀란 장수(將帥)들이 모두 쓰러진 공명(孔明)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공명을 부축하여 자리에 눕혔다.
공명(孔明)의 나빠진 건강(健康)과 밝지만은 않은 국가(國家)의 미래(未來)에 촉 장수(蜀將帥)들의 한숨도 깊어지는 날이었다.
삼국지 -395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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