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안군이 2009년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신안군 40년사>에 실린 ‘대흑산도 예촌 고래마을’. 신사로 가는 입구를 장식하는 도리이(鳥居)는 고래 뼈로 만들었다. 도리이의 좌우 양 기둥은 고래 턱뼈를 이용해 세웠다. 그리고 고래 엉치뼈를 그 가운데 장식으로 얹었다. 사진 속 신사의 도리이로 이용됐던 고래 턱뼈의 일부가 현재 흑산도 예리 여객터미널 인근에 있는 ‘자산문화관’에 전시돼 있다.
ⓒ 신안군
일제가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를 설치하면서 흑산도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큰 변화는 일본인 집단 주거촌이 형성됐고, 이에 따라 흑산도의 중심 공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를 증언한 박인순씨는 "일본인 집단 주거촌은 포경 회사 사무실 왼쪽 편, 정씨들 소유의 산 밑에 있었다"라고 말하며 "고래잡이 철이 오면 약 100명의 일본인들이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구역에 있는 일본인 집단 주거촌에서 생활했다"라고 기억했다.
박씨는 "고래철에만 흑산도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이들 외에도 평시에 흑산도에 상주해서 생활했던 일본인 수도 40∼50명에 이르렀다"라면서 "이들 중엔 일본 포경회사 직원들의 보건소 역할을 했던 '혼다 약방'의 가족들도 포함돼 있었다"라고 말했다. 혼다 약방은 일본인 직원들에겐 간단한 치료와 약을 처방하는 보건소 역할을 했다고 한다.
흑산도 고래작업이 끝나면 일본 포경선들은 일본 홋카이도(북해도)로 이동했다. 일본 포경회사를 다니고 있던 구술증언자 박인순씨의 아버지인 고 박복철씨도 일본 포경선을 타고 홋카이도로 갔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연근해에서 수산업을 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해 왔고, 울산 장생포나 통영 등지에 일본인 주거촌이 많이 생겼다. 김승 박사가 일찍이 밝혔듯이 포경철이 되면 일본인과 한국인 고래고기 상인들이 장생포로 몰려들어 거주 인구가 늘어난 사례는 있다. 하지만 흑산도처럼 포경근거지를 중심으로 일본인 주거촌이 형성된 것은 매우 특별한 사례다.
장생포의 사례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뒤섞인 복합 주거촌이었다는 점에서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 위치한 일본인 집단 주거촌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일제 강점기 흑산도에 만들어진 일본인 집단 주거촌은 오로지 일본인만이 거주했으며, 다른 어종이 아닌 고래잡이 즉 포경(捕鯨)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큰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산총독부 통계연감> 중에서 1916년부터 1943년까지의 '시군별 호주 및 인구'를 살펴 보면 확인할 수 있다.
▲ 사진 오른쪽 원이 일본 신사가 있던 예리 앞산이다. 일본인들은 곤삐라 신사를 세웠다. 왼쪽 원에 일제가 만든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와 일본인 집단 주거촌이 있었다. 이로써 예리는 흑산도의 중심 공간이 되었다.
ⓒ 이주빈
일제 강점기 흑산면이 속한 전남 무안군에만 일본인 거주자는 평균 1000명 안팎이었다.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설치된 1916년엔 전남 무안군에 890명의 일본인이 살았다. 그 다음해인 1917년엔 937명의 일본인이 무안군에 거주했고, 해방 이전 마지막 조사가 실시된 1943년엔 967명의 일본인이 무안군에 거주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무안군에 평균 1000명의 일본인이 거주했는데 그 1/10인 약 100명이 포경근거지가 있는 흑산도에 거주했던 것이다.
1930년에 발행된 <전남사정지(全南事情誌)>에 따르면 1920년 당시 흑산도의 인구는 6903명으로, 이 중 일본인은 29명(9호)이 거주하고 있었다. 압해도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숫자다. 구술증언자 박인순씨가 "고래철이 아닌 평시 거주 일본인은 약 40-50명(약 10호)이었다"고 증언한 것과 비슷한 수치다.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설치되면서 일본인 집단 주거촌이 있었음을 증빙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신사(神社)다. 신사는 흑산도 주민들이 '앞산'이라 부르는 산에 있었다. 일본인들은 이 산을 '곤삐라 산'이라고 불렀다. 일본인들이 흑산도 예리에 있는 앞산을 '곤삐라 산'이라 불렀던 까닭은 그곳에 '곤삐라' 신을 모시는 신사(神社)가 있었기 때문이다. 곤삐라(こんぴら 金比羅·金毘羅)는 '비를 오게 하고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신'이다. 일제는 물이 부족하고 험한 바다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흑산도 특성에 걸맞게 '곤삐라 신사'를 세웠던 것이다.
신안군이 2009년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신안군 40년사>에는 '대흑산도 예촌 고래마을'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이 사진은 2008년 흑산면사무소가 주민들을 상대로 '우리 마을 옛 사진 모으기'할 때 예리마을 한 주민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진촬영 년도, 촬영자는 미상이다.
하지만 사진은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신사로 가는 입구를 장식하는 도리이(鳥居)는 고래 뼈로 만들었다. 도리이의 좌우 양 기둥은 고래 턱뼈를 이용해 세웠다. 그리고 고래 엉치뼈를 그 가운데 장식으로 얹었다. 사진 속 신사의 도리이 기둥으로 이용됐던 고래 턱뼈의 일부와 장식으로 얹혀졌던 엉치뼈가 현재 흑산도 예리 여객터미널 인근에 있는 '자산문화관'에 전시돼 있다.
오로지 고래잡이 때문에 만들어진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내 일본인 집단 주거촌, 집단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고래잡이에 어울리는 신으로 곤삐라신을 모시고, 신사의 도리이 역시 고래 뼈로 장식함으로써 고래를 고리로 그들만의 일체감을 형성했다.
▲ 일본인들이 세운 흑산도 예리 곤삐라 신사 도리이를 장식할 때 기둥으로 이용되었던 고래 턱뼈 일부와 그 장식물로 이용되었던 고래 엉치뼈가 흑산도 예리 자산문화관에 전시돼 있다.
ⓒ 이주빈
곤삐라 신사까지 세우며 흑산도 근해에서 고래 학살에 열을 올리던 일제. 일제의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설치는 흑산도의 중심 공간이 바뀌는 계기로 작용한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시대에 흑산도는 이른바 '황해 사단해로'의 분기점이자 합류점이었다. 서남해지역-흑산도-산동반도의 적산포로 이어지는 해로와 서남해지역-흑산도-명주(영파)로 이어지는 해로의 중심에 흑산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흑산도의 중심 공간은 읍동(邑洞) 마을이었다. 읍동마을 인근에서 대거 발굴된 유적과 유물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강봉균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장은 "통일신라-고려시대 국제해양도시 면모를 갖춘 흑산도의 거점 포구는 읍동 마을이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조선시대 중반까지 이어진 공도정책(空島政策)은 섬과 바다를 포기한 정책이었다. 조선의 공도정책은 임진왜란 이후 폐기된다. 조선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에 수군진을 설치하며 섬을 영토로 인식하고 관리하기 시작한다. 이때 흑산도의 중심 공간은 읍동에서 진리(鎭里)로 이동한다.
최성환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교수는 "임진왜란 이후 진리에 수군진이 설치되었고 그 이후부터 진리가 대흑산도의 중심 공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현재도 흑산면사무소가 있는 면소재지는 진리이다. 진리가 읍동 이후 흑산도의 중심 공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1916년 12월 예리(曳里)에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설치된 이후부터는 예리가 흑산도의 중심 공간으로 성장하였다. 포경근거지가 설치된 이후 예리에 일본인 집단 주거촌이 형성됐으며, 각종 주점이나 당구장 등 상업시설과 편의시설이 예리에 들어섰다. 그리고 흑산도의 여객 운수 항로 기점은 진로에서 예리로 바뀐다. 예리가 흑산도의 거점 포구가 된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제가 설치한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흑산도의 중심 공간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 사진 오른쪽이 통일신라-고려시대까지 국제해양도시 면모를 갖춘 흑산도의 거점 포구 읍동 마을이다. 사진 왼쪽이 임진왜란 이후 수군진이 설치되면서 흑산도의 중심 공간이 된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