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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쟁추연(士爭趨燕)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연나라로 모였다는 뜻으로, 인재를 우대했다는 의미의 말이다.
士 : 선비 사(士/0)
爭 : 다툴 쟁(爪/4)
趨 : 달릴 추(走/10)
燕 : 제비 연(灬/12)
출전 : 사기(史記) 卷3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이 성어는 전국시대 때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인재를 널리 구한 일화에서 연유한다. 사기(史記)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齊)나라가 연(燕)나라를 침공하여 연나라 왕 쾌(噲)를 죽이고 대승했다. 이에 연나라는 태자 평(平)을 왕으로 옹립하니 이 사람이 연나라 소왕(昭王)이다. 연나라 소왕은 무너진 연나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예물을 후히 하여 어진 자를 초빙했다.
그는 대신인 곽외(郭隗)에게 어진 선비를 얻어 나라를 부흥하고자 한다면서 어진 선비의 추천하도록 했다. 이에 곽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께서 반드시 선비를 초빙하려면 제 말을 따르는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물며 저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어찌 천리 먼 길을 마다하겠습니까?'
郭隗曰: 王必欲致士, 先從隗始. 況賢於隗者, 豈遠千里哉.
이에 소왕은 곽외를 위하여 궁궐을 고치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於是昭王為隗改筑宮而師事之.
악의(樂毅; 유명한 장군)가 위(魏)나라로 부터 왔고, 추연(鄒衍)이 제나라부터 왔으며, 극신(劇辛)이 조(趙)나라부터 왔으니, 선비들이 다투어 연나라로 달려온 것이다.
樂毅自魏往, 鄒衍自齊往, 劇辛自趙往, 士爭趨燕.
燕王噲死問孤, 與百姓同甘苦.
(史記/卷34 燕召公世家 第4)
연(燕) 소양왕(昭襄王) 희직(姬職)은 중국 전국시대의 제41대 연나라 군주이다. 악의(樂毅)와 곽외(郭隗)등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제나라의 침공으로 인하여 일시에 멸망한 연나라를 재건하였다. 줄여서 연 소왕(燕 昭王), 또는 연 양왕(燕 襄王)이라고도 한다.
소양왕은 연왕 쾌(噲)의 서자이다. 아버지 연왕 쾌는 국정에 무관심하여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맡기고 방관하였다. 재상 자지는 권력을 남용하고 연왕 쾌를 대신해 임금이 되는 등 연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 이에 태자 평(平, 연왕 쾌의 적자이자 소양왕의 형)은 연나라 장군 시피(市被)와 힘을 합쳐 거병하였다.
이 내전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를 틈타 기원전 314년에 태자의 원군이라고 자칭한 제나라 장수 광장(匡章)의 군대가 연나라를 기습하여 자지의 군대와 태자의 군대를 동시에 공격해 시피와 태자 평, 자지는 살해되고 연왕 쾌는 자살하였다. 이로써 연나라는 제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2년 후인 기원전 312년, 당시 한나라에 달아나 있던 공자 직이 제나라의 속국이 되는 조건으로 연왕으로 즉위하였다. 소양왕은 연나라를 부흥시켜 제나라에 복수할 것을 계획하고, 부국 강병과 인재 등용에 힘썼다. 소왕은 곽외를 스승을 삼고, 곽외에 의해 명장으로 유명한 악의를 등용하였다.
연나라 정벌로 제나라는 강국이 되었지만, 제나라 내부에 문제가 많았다. 소양왕은 악의의 건의에 따라서 한(韓)나라, 위(魏)나라, 조(趙)나라 등 세나라와 연합군을 결성하였고, 4개국 연합군은 기원전 285년에 제나라로 쳐들어가서 제나라 군대를 격퇴하였다.
이후 세나라의 군대는 철수하였지만, 연나라만은 악의를 총사령관으로 삼아서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臨淄)로 진군하여 함락시켰다. 소양왕은 크게 기뻐하며 스스로 임치에 가서 악의를 위로하였고, 악의를 창국군(昌國君)으로 봉하였다. 소양왕은 악의에게 군대를 지휘하여 제나라를 완전히 평정할 것을 명하였다.
제 민왕은 임치가 함락되자 거(莒)라는 곳에 몸을 숨겼다. 악의는 5년동안 제나라의 70여개 성을 탈취하였는데, 이로써 제나라의 영토는 제 민왕이 은신한 거(莒)와 전단(田單)이 있는 즉묵(即墨)만 남게 됐다. 악의는 거(莒)를 공격하였으나 제 민왕도 철저히 항전하여 장기전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 민왕은 초(楚)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초나라 장수 요치(淖齒)가 지원을 왔다. 그러나, 요치는 제나라가 패망할 것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연나라와 힘을 합쳐 제 민왕을 배신하였다. 제 민왕은 요치에 의해 대들보에 높이 매달려 3일 동안 굶다가 죽었다.
이로써 소왕의 복수는 이루어졌으나, 전단이 수비하는 즉묵과 왕손가(王孫賈)에 의해 새롭게 즉위한 제 양왕(齊 襄王)이 있는 거(莒)는 연나라에게 계속 항전하였다.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소왕은 기원전 279년에 불로장생하는 비술을 연구하다가 약물 중독으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태자인 연 혜왕(燕惠王)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곽외(郭隗)는 전국시대 연나라 사람으로 연소왕의 스승이다. 당시 연나라의 왕 쾌(噲)는 요·순을 본받는다며 재상 자지에게 왕위를 넘기는 희대의 사고를 일으켰고, 당연히 태자가 이를 거부하면서 내란이 터졌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제나라가 쳐들어와서 아예 연나라 종묘를 헐어버리고 사실상 속국으로 다스렸다.
왕도 자지도 죽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끝에 가까스로 제나라 군대를 쫓아낸 뒤 왕의 아들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왕이다. 소왕은 천하의 인재들을 끌어 모아 제나라에 복수할 날을 꿈꾸었고 그 방법을 곽외에게 묻자, 곽외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 어느 왕이 천금도 아끼지 않고 천리마를 구했으나(千金市馬) 3년 동안 허탕만 치길래 한 사람이 왕을 대신해 나섰는데, 뜬금없이 죽은 천리마의 뼈를 오백금에 사왔다(買死馬骨五百金而還). 왕이 무슨 짓거리냐고 화를 내자 그 사람은 "죽은 천리마의 뼈를 오백금에 샀으니, 이제 사람들이 '산 천리마는 대체 얼마에 팔릴까' 궁금해할 것"이라고 답했는데, 과연 1년도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이 천리마를 팔겠노라고 왕을 찾아왔다 한다.
그리고는 자기 월급부터 늘려달라고 미끼를 던진다. '곽외가 저렇게 대접을 받으면 분명 나는 더 후하게 대접받을 것'이라고 찾아올 사람들이 생길 것이라는 뜻이다.
소왕이 곽외의 월급을 몇 배로 올리고 스승으로 모시며 엄청나게 큰 집을 하사하자 정말로 각국에서 떡밥을 문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그 중에는 추연, 극신, 그리고 연나라와 제나라의 처지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명장 악의도 있었다. 이를 선종외시(先從隗始), 선시어외(先始於隗)라 한다. 이 일화에서 고사성어 매사마골(買死馬骨), 사마골오백금(死馬骨五百金)이 나왔다.
사쟁추연(士爭趨燕)
사쟁추연(士爭趨燕)의 출전은 한서(漢書) 권24, 식화지(食貨志)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한서는 후한(後漢)의 반고(班固)가 쓴 중국의 정사(正史) 중 하나이며, '식화지'는 경제와 물질생활에 관한 기록을 담은 편입니다.
'식화지'에서는 시대가 타락하고 사람들이 이익만 좇게 된 모습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선비들이 권력자의 잔치에 몰려드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때 사용된 표현이 바로 사쟁추연(士爭趨燕) 입니다.
한서 식화지 중 관련 부분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비들은 권력자의 연회에 몰려들어 다투고, 부녀들은 부유한 자를 아첨한다(士爭趨燕 婦女媚富 사쟁추연 부녀미부)." 당시 사람들은 모두 부귀를 좇아 명예와 도덕을 잊고, 출세와 이익에 몰두하는 풍조가 만연했음을 탄식하는 내용입니다.
추가로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는 한서(漢書) 중 경제와 재정 문제를 다룬 부분으로, 한나라 시대의 부패와 경제적 혼란을 비판하는 다양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표현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상하가 다투어 이익을 추구하고, 백성은 궁핍하다." 부유층과 관료들이 사익만을 추구하면서 민중은 점점 가난해진 현실을 비판합니다.
"법령은 있으나 지켜지지 않고, 금령(禁令)은 있으나 시행되지 않는다." 부정부패로 인해 법과 규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백성은 궁핍하여 도적이 되고, 관리들은 부정으로 부유해진다." 백성은 빈곤 때문에 범죄자가 되고, 관리들은 부패를 통해 재산을 축적한다는 대조적인 현실을 지적합니다.
"상업을 숭상하고 농업을 경시하여 나라가 쇠퇴한다." 경제구조의 왜곡(농업 기반 약화, 상업 투기)과 그로 인한 국가 기반의 붕괴를 우려합니다.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이 만연하여 나라의 재정이 고갈된다." 권력층의 사치로 국가 경제가 무너진다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식화지는 단순한 경제 기록이 아니라, 사회 부패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 역할을 했습니다. 또 당시 정책 실패와 제도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후대 정치경제론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지요.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는 한나라 전한(前漢) 말기의 사회 경제적 혼란과 부패를 깊이 비판한 기록으로, 단순한 경제사 자료가 아니라 정치와 사회 비판서 성격도 강합니다. 자세히 해설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부의 불균형과 지배층의 사치
식화지는 부유한 귀족과 상인 계층이 권력을 등에 업고 부를 독점하고, 일반 백성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상하가 이익을 다투다(上下交征利)"라는 표현은, 왕부터 관리, 백성까지 모두 사익만 좇아 공공의 이익을 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귀족과 부호들이 대토지를 사유화하면서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유민이 되었고, 이들이 생계를 위해 도적이 되는 악순환이 벌어졌습니다.
2. 법과 제도의 유명무실
법령은 있었지만 권력자들의 부패로 인해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식화지는 "법이 있어도 행해지지 않고(有法而莫行者)"라고 기록하여, 부패한 관료 체계가 국가 기반을 허물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경제적 통제 정책(예: 물가 안정, 시장 감독)이 있으나 부자와 권력자들의 로비와 사익 추구로 무력화됐음을 비판합니다.
3. 농업 경시와 상업 숭상
한나라 초기에는 '농업 중심'을 국시로 삼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상업이 과도하게 발달하면서 경제 균형이 깨졌습니다. 식화지는 "농업이 경시되고, 상업이 성행하여 나라가 쇠약해진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중간상인들이 농산물을 사재기하여 가격을 조작하고, 농민들이 정당한 수익을 얻지 못하는 구조를 문제 삼습니다.
4. 호화 사치와 재정 파탄
귀족들과 고위 관리들은 막대한 재산을 사치에 탕진했습니다. 식화지는 "거대한 저택과 값비싼 의복, 화려한 음식"을 예로 들며, 호화 생활이 국가 경제를 좀먹는다고 비판합니다. 국가가 호화로운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5. 정책적 제언
식화지는 단순 비판에 그치지 않고 해결책도 제시합니다. 토지제도 개혁(대토지 소유 제한), 세금 제도 개선(공평한 부과), 농업 장려 정책 강화, 사치 금지령 시행, 관리 부패 척결 등이다. 그러나 당시 현실에서는 이런 개혁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고, 결국 왕망(王莽) 등의 급진적 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요약하면, 한서 식화지는 한나라 후기의 부패, 불평등, 제도적 실패를 경제적 관점과 도덕적 관점에서 통렬히 고발한 텍스트입니다.
사쟁추연(士爭趨燕)
선비들이 잔치 자리에 몰려가려고 서로 다툰다는 뜻으로, 명분보다는 이익과 영달을 쫓아 서로 체면을 잊고 다투는 모습을 풍자하거나 경계하는 말이다.
사쟁추연(士爭趨燕)은 중국 고대 이야기나 경전 속 교훈에서 유래합니다. 옛날에는 권세 있는 사람들이 연회를 열면, 많은 선비나 관리들이 초대를 받거나 초대를 받기 위해 경쟁했습니다. 특히, 연회에 참석하면 권세를 잡은 이들과 친분을 쌓거나, 출세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명분보다는 이익과 영달을 쫓아 서로 체면을 잊고 다투는 모습을 풍자하거나 경계하는 데 쓰였습니다.
본래 선비(士)는 도덕과 절개를 지키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출세와 이익을 위해 잔치(燕)에 몰려가는 모습을 통해 명예를 버리고 이익만 좇는 비굴한 태도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또한, 사쟁추연(士爭趨燕)은 겉으로는 품격 있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권력과 이익을 좇는 위선적인 모습을 꼬집는 데 사용됩니다.
참된 인품을 지켜라: 명예와 절개를 잃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
권력과 이익에 휘둘리지 말라: 눈앞의 이익 때문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참된 선비 정신을 잊지 말라: 출세보다 바른 삶이 더 중요하다.
간단히 요약하면, 사쟁추연(士爭趨燕)은 권세를 좇는 부끄러운 인간 군상의 모습을 풍자하고, 참된 인품을 지키자는 교훈을 담고 있는 고사성어입니다.
이어서 사쟁추연(士爭趨燕)과 관련된 고전 사례와 짧은 요약을 함께 소개합니다.
대표적으로 춘추전국시대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당시 권력자들은 연회를 자주 열어 신하들과 교류했는데, 연회에 초대받는 것은 권력자의 신임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서로 먼저 가려고 다투었고, 때로는 상대방을 헐뜯거나 부끄러운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풍조는 명예보다 권력과 이익을 좇는 추한 모습이라 하여, 유교 사상에서는 크게 비판했습니다. 특히 맹자나 순자 등의 고전에서도 "진정한 선비는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사쟁추연(士爭趨燕), 선비들이 권력자의 잔치에 가기 위해 서로 다투는 모습으로 출세와 이익을 쫓아 명예와 절개를 버리는 부끄러운 행동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참된 인품과 절개를 지켜야 한다. 권력과 이익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의 말입니다.
추가로, 이 내용을 짧은 글귀(명언 형태)와 현대적 해석(요즘 사회에 적용)입니다.
짧은 글귀 (명언 형태)로 "진정한 선비는 권력의 연회에 서둘러 달려가지 않는다. 그는 절개를 품고, 홀로 바른 길을 걷는다." 또는 "출세의 연회에 몰려드는 군상 속에서, 진짜 사람은 고요히 자신의 길을 지킨다."
오늘날 사쟁추연(士爭趨燕)은 다음과 같은 모습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권력자나 유명인 주변에 줄을 서는 문화, 승진이나 특혜를 얻기 위해 비굴하게 아부하는 직장 문화, 본인의 신념을 포기하고 이익을 좇는 행태를 말합니다. 즉, 현대 사회에서도 권력과 이익 앞에 체면을 버리고 다투는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훈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남들 모두 '줄 서기'에 몰려갈 때, 자신의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진짜 품격이라는 점입니다.
"잔치에 몰려가는 것이 출세는 아니다. 진짜 출세는 품위를 잃지 않는 데 있다."
소왕(昭王)과 곽외(郭隗)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전국 7웅의 하나인 연나라의 소왕과 그의 신하 곽외의 이야기다. 연나라 국정의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제나라가 침략을 해와 연의 전 국토는 유린당하고 황폐해졌다. 제는 물러갔지만, 나라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이 때 즉위한 사람이 소왕이다.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후한 선물로 천하의 현인을 불러 모았다. 어느 날 소왕이 신하 곽외에게 말했다. “제는 나라의 혼란을 틈타 불시에 습격해 우리 연을 멸망시켰소. 나는 연이 작고 국력이 약해 이대로는 제에 복수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인재를 초빙하여 국력을 키우고 부왕의 치욕을 씻어주고 싶은 것이 내 평생 염원이니 선생께서 가르침을 주시오.”
곽외가 말했다. “옛날 어떤 왕이 천금을 들여 천리마를 구하고자 했으나 3년이 지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때 측근 한 사람이 ‘내가 구하여 오겠습니다’하고 나섰습니다. 이에 왕은 그를 맡겨 내보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그는 천리마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말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말 머리를 5백금을 주고 사서 돌아왔습니다. 왕은 대노하여 말했습니다. ‘산 말을 사오라고 하였는데, 어찌 죽은 말을 사왔으며, 5백금이나 버렸는고?’ 그 사람이 말하길, ‘죽은 말조차 5백금으로 사들였으니, 항차 산 말은 어떻겠습니까? 천하 사람들은 왕이 반드시 말을 사려고 함을 알 것입니다. 하니 말은 이제 곧 모여들 것입니다.’ 그뒤 1년도 지나지 않아 천리마가 3필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왕께서 선비를 초치하시려면 먼저 저(곽외)부터 중용해 시작하십시오. 저 같은 이도 중용하시면, 저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천리길도 마다 않고 찾아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에 소왕은 곽외를 위해 궁을 지어주고 스승으로 모셨다.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장수 악의(樂毅)가 위(魏)에서, 음양가로 유명한 추연(鄒衍)은 제(齊)에서, 극신은 조(趙)로부터 모여드는 등 천하의 인물들이 다투어 연으로 모여들었다. 소왕은 전사자를 조문하고 민생을 살피는 등 백성과 고락을 함께 했다. 이리하길 28년, 연은 부강해졌다.
이에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고 진, 초, 한, 위, 조와 연합하여 제를 쳤다. 제는 패하고 민왕(閔王)은 국외로 도망쳤다. 연은 홀로 패배하는 그를 추격했다. 제나라 수도 임치를 함락하고, 갖은 보물을 모조리 취했으며, 궁궐과 종묘를 태워버렸다. 제나라성중에서 항복하지 않은 곳은 요성, 거성과 즉묵성 뿐으로 나머지 성은 모두 연의 소유가 되었다.
인재를 찾아내는 일은 매우 어렵지만 그 인재를 그 그릇에 따라 대우하는 일도 쉽지 않다. 이 이야기는 '우선 (곽)외부터 시작하십시오.' 즉 선종외시(先從隗始)라는 중국 속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말은 '위대한 계획도 먼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착수하라'는 뜻으로 쓰인다. 또 '물건과 일은 먼저 말을 꺼낸 자로부터 시작하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제나라에 복수하고자 하는 일념에 불타는 연나라 소왕이 자신의 신하 곽외를 우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인재를 모으고 목적을 달성했다는 교훈이다.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사람에게 얻은 한 마디 말
黃金千兩未爲貴(황금천냥미위귀)요
得人一語勝千金(득인일어승천금)이니라.
황금 천 냥은 귀한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한 마디 말을 얻는 것이 천금보다 더 가치가 있다.
황금 천 냥이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써버리면 그 가치는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얻은 천금 같은 한 마디 말은 두고두고 남아 끝없이 그 가치를 더하기 때문에 천금보다 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한 마디 말이 지닌 가치'를 헤아릴 때 앞서 소개한 연나라 소왕과 곽외의 고사(故事)만큼 훌륭한 사례는 쉽게 찾기 힘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웃한 제나라에게 연나라의 강토가 철저하게 유린당한 후 새롭게 왕위에 오른 소왕은 오직 제나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겸손하고 공손한 마음으로 천하의 인재들을 연나라로 초빙해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소왕을 선뜻 찾아오는 인재가 있었겠는가.
소왕이 어떻게 천하의 인재들이 연나라로 오게 할 지 막막해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소왕에게 천금보다 더한 가치가 있는 한 마디 말을 전해준 사람이 바로 곽외였다. 당시 곽외는 '어떻게 하면 연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인재를 구할 수 있겠느냐?'는 소왕의 물음에 천하의 명마인 천리마를 구하는 방법을 예로 들며 천하의 인재를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곽외가 소왕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대충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옛날 어떤 임금이 몇 년 동안이나 천리마를 구하려고 했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나서서 천리마를 구해오겠다고 했다. 이에 임금이 그 사람에게 천리마를 구입할 돈을 주고 보냈다.
3개월 만에 돌아온 그 사람은 천리마를 구입하는 가격의 절반에 해당하는 500금이나 주고 겨우 천리마의 머리뼈만을 구해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임금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죽은 말의 머리뼈를 500금이나 주고 사왔다면서 크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오히려 임금에게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죽은 천리마의 머리뼈도 500금이나 주고 샀다는 소문이 퍼지면 반드시 살아 있는 천리마를 가진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천리마를 가진 사람이 연이어 나타났고, 임금은 구하고자 했던 1마리 외에 다시 1마리를 더 구입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곽외는 소왕에게 들려준 이 천리마 이야기에 빗대어 “(죽은 말의 머리뼈처럼)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저 곽외를 먼저 중용한다면 저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살아 있는 천리마와 같은) 천하의 인재들이 너나없이 앞 다투어 대왕을 찾아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소왕은 곽외를 중용해 스승으로 섬겼다.
그때부터 앞서 소개한 적이 있는 당대 최고의 명장이자 병법가이며 군사 전략가였던 위(魏)나라의 악의가 소왕을 찾아왔고,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지혜를 지닌 추연(鄒衍)이 제나라를 떠나 소왕에게 달려왔고, 또한 조(趙)나라의 정치가 극신(劇辛)이 소왕을 찾아와 투신하였다.
이렇듯 곽외의 말을 따른 덕분에 천하의 명장(名將)과 명사(名士)를 얻게 된 소왕은 제나라를 정벌해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소왕은 막대한 재물이나 강력한 군대가 아닌 곽외의 단 한 마디 말로 인해 당시 최강대국인 제나라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던 셈이니 한 마디 말이 지닌 가치가 어찌 막대한 재물이나 강력한 군대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나라 곽외의 자신을 낮추는 방법
전국시대 연나라 소왕이 고국에 돌아와서 물려받은 것은 피폐한 나라였습니다. 국운이 기울어 안팎으로 곤궁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의 연나라는 지금의 베이징, 텐진, 허난성 북부, 그리고 랴오닝성 서부 일대에 걸쳐 있었습니다. 연소왕은 무너져가는 연나라를 중흥시키고자 인재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는 겸손한 태도와 풍성한 예물로 어진 선비를 구하고자 했고, 마침내 연나라의 현사인 곽외를 찾아가 어떻게 해야 인재를 얻을 수 있는지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곽외는 자신을 낮추는 방법으로 연소왕을 가르쳤습니다. 연소왕의 부탁을 받은 곽외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원칙을 얘기했습니다.
첫째, 제업을 이룰 사람은 선생님과 함께 지낸다. 즉, 황제가 될 사람은 어진 선비를 예외의 겸손으로 대하고, 현인을 스승으로 모신다는 뜻입니다. 둘째, 왕업을 이룰 사람은 친구와 함께 지낸다. 셋째, 패업을 이룰 사람은 신하와 함께 지낸다. 넷째, 망국의 임금은 하인과 함께 지낸다. 망국의 임금은 어질고 능력있는 사람을 질투해서, 그들이 신임하는 사람은 명령에 순종하는 하인이나 소인배라는 말입니다.
이 네가지의 분석은 큰일을 성취하고자 할수록 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곽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처하(處下)의 마음가짐과 인재 등용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첫째, 겸허한 태도로 마음을 비워 선생님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청하면, 자기보다 100배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오게 됩니다. 둘째, 일은 남보다 많이 하고, 휴식은 남보다 뒤에 하며, 가장 먼저 어진 사람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가장 늦게 질문하기를 그치면 자기보다 10배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오게 됩니다. 셋째, 타인이 예의 있게 다가올 때 자신도 예의 바르게 나아가 만나면, 자기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오게 됩니다. 넷째, 탁자에 기대어 지팡이를 짚고서 곁눈질로 사람을 부리며 예의 없이 대하면, 막일이나 하는 하인 같은 사람이 오게 됩니다. 다섯째, 사람을 난폭하게 대하여 타인에게 상처 주고, 발을 구르며 훈계한다면, 단지 죄수나 노예 같은 사람만이 오게 됩니다.
위의 내용은 큰 인재를 얻고자할 수 있도록 구하는 자는 겸허하게 현자와 인재의 아래에 위치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대응관계가 형성되는데, 당신이 자신을 낮추는 정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인재가 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뛰어난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서 그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삼국지 유비의 제갈공명에 대한 삼고초려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든 일이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결국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훌륭하고 능력있는 인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재들이 많지도 않고 자신의 뜻을 따라 준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인재를 구하고자 할 때는 자신을 반드시 낮추고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현사 곽외의 자신을 낮추는 방법은 결국 더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고전을 통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같아서 글을 올려 봅니다.
사기(史記) 卷3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연소왕(燕昭王)
이 편은 30세가(世家) 중 네 번째 편으로 주나라의 개국 공신인 소공 석이 연나라에 봉해진 이후 연나라의 800여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연(燕)나라는 춘추시대의 주나라 제후국이자, 전국시대의 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였다. 주 무왕(周 武王) 희발(姬發)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의 동생 소공(召公) 석(奭)을 연(燕)의 제후에 봉하여 소공 석이 연(燕)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기원전 227년, 연(燕)나라의 태자(太子) 단(丹)이 형가(荊軻)를 자객으로 보내 진왕(秦王) 정(政)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분노한 진왕(秦王)이 왕전(王翦)으로 하여금 연(燕)을 공격케 하여 기원전 226년 연(燕)나라를 함락시켰다. 연왕(燕王) 희(喜)는 태자(太子) 단(丹)을 죽여 화의(和議)를 요청하며 요동지역으로 피신했지만, 기원전 222년 진(秦)나라 장수 왕분(王賁)에게 사로잡혀 연(燕)나라는 멸망되었다.
24. 연소왕(燕昭王) / 곽외(郭隗)
燕昭王於破燕之後即位, 卑身厚幣以招賢者.
연 소왕(燕 昭王)은 연나라가 제나라에게 격파된 후 즉위하여 몸을 낮추고 후한 폐백으로 현자를 초빙했다.
謂郭隗曰 : 齊因孤之國亂而襲破燕, 孤極知燕小力少, 不足以報. 然誠得賢士以共國, 以雪先王之恥, 孤之願也. 先生視可者, 得身事之.
곽외(郭隗)에게 말했다. "제나라가 우리나라의 혼란을 틈타 우리를 기습하여 무너뜨렸소. 우리 연나라의 땅은 작고 힘이 약해 되갚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진실로 유능한 인재를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리며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나의 바람이오. 선생께서 보기에 이런 인재가 있다면 이 몸이 친히 그를 모시겠소."
郭隗曰 : 王必欲致士, 先從隗始. 況賢於隗者, 豈遠千里哉.
곽외가 말했다. "왕께서 반드시 인재를 모시려 한다면 먼저 이 곽외부터 시작하십시오. 하물며 이 곽외보다 나은 인재들이 어찌 천 리를 멀다 하겠습니까!"
於是昭王為隗改筑宮而師事之.
이에 소왕은 곽외를 위해 궁을 짓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樂毅自魏往, 鄒衍自齊往, 劇辛自趙往, 士爭趨燕.
악의(樂毅)가 위(魏)나라에서 오고, 추연(鄒衍)이 제나라에서 오고, 극신(劇辛)이 조(趙)나라에서 오는 등 인재들이 다투어 연나라로 달려왔다.
燕王噲死問孤, 與百姓同甘苦.
연 소왕은 죽은 사람에게는 조의를 표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문하는 등 백관들과 동고동락했다.
25. 연소왕(燕昭王)
二十八年, 燕國殷富, 士卒樂軼輕戰.
연 소왕 28년(기원전 284년), 연나라는 부유해지고 병사들은 기꺼이 전투에 나가려 했다.
於是遂以樂毅為上將軍, 與秦楚三晉合謀以伐齊.
이에 마침내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진(秦)나라와 초나라, 삼진(三晉)과 함께 제나라를 정벌하기로 했다.
齊兵敗, 湣王出亡於外.
제나라의 군대는 패했고 제 민왕(齊 湣王)은 도성 밖으로 도망쳤다.
燕兵獨追北, 入至臨淄, 盡取齊寶, 燒其宮室宗廟.
연나라의 군대만 추격하여 임치에 진입해서는 제나라의 보물을 취하고 궁실과 종묘를 불태웠다.
齊城之不下者, 獨唯聊莒即墨, 其餘皆屬燕, 六歲.
함락되지 않는 제나라의 성으로는 요(聊), 거(莒), 즉묵(卽墨)만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의 차지가 되어 6년 동안 지속되었다.
혜왕(惠王)
이 부분은 원문에는 기록이 없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昭王三十三年卒, 子惠王立.
소왕이 재위 33년(기원전 279년) 만에 죽고 아들 혜왕(惠王)이 즉위했다.
惠王為太子時, 與樂毅有隙.
혜왕은 태자 때 악의(樂毅)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及即位, 疑毅, 使騎劫代將.
즉위한 후 악의를 의심하여 기겁(騎劫)에게 상장군을 대신하게 했다.
樂毅亡走趙.
악의는 조나라로 망명했다.
齊田單以即墨擊敗燕軍, 騎劫死, 燕兵引歸, 齊悉復得其故城.
제나라의 전단(田單)이 즉묵에서 연나라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기겁은 전사하고, 연나라의 군대는 철수했으며, 제나라는 잃었던 성들을 모두 되찾았다.
湣王死于莒, 乃立其子為襄王.
제 민왕이 거(莒)에서 죽고 그 아들이 제 양왕(齊 襄王)으로 즉위했다.
惠王七年卒.
혜왕은 재위 7년(기원전 272년) 만에 죽었다.
韓魏楚共伐燕.
한, 위, 초가 함께 연나라를 정벌했다.
燕武成王立.
연나라의 무성왕(武成王)이 즉위했다.
26. 무성왕(武成王)
武成王七年, 齊田單伐我, 拔中陽.
무성왕 7년(기원전 265년), 제나라의 전단이 연나라를 정벌하여 중양(中陽)을 빼앗았다.
十三年, 秦敗趙於長平四十餘萬.
무성왕 13년(기원전 259년), 진(秦)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패배시켰다.
十四年, 武成王卒, 子孝王立.
무성왕 14년(기원전 258년), 무성왕이 죽고 아들 효왕(孝王)이 즉위했다.
27. 효왕(孝王)
孝王元年, 秦圍邯鄲者解去.
효왕 원년(기원전 257년), 한단(邯鄲)을 포위하고 있던 진(秦)나라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三年卒, 子今王喜立.
효왕이 재위 3년(기원전 255년) 만에 죽고 지금의 왕 아들 희(喜)가 왕이 되었다.
28. 연왕 희(燕王 喜)
今王喜四年, 秦昭王卒.
연왕 희(燕王 喜) 4년에 진 소왕(秦 昭王)이 죽었다.
燕王命相栗腹約歡趙, 以五百金為趙王酒.
연왕 희가 재상인 율복(栗腹)에게 조나라와 동맹을 맺게 하고 500금을 주어 조(趙)나라 효성왕(孝成王)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가도록 했다.
還報燕王曰 : 趙王壯者皆死長平, 其孤未壯, 可伐也.
율복이 돌아와 연왕에게 보고했다. "조나라 왕의 장정들은 모두 장평 싸움에서 죽고, 고아가 된 자식들은 아직 자라지 않아 정벌할 만 합니다."
王召昌國君樂閒問之.
연왕이 창국군(昌國君) 악간(樂間)을 불러 물었다.
對曰 : 趙四戰之國, 其民習兵, 不可伐.
창국군이 대답했다. "조나라는 사방으로 전쟁을 치르는 나라로 사람들이 싸움에 익숙하므로 정벌할 수 없습니다."
王曰 : 吾以五而伐一.
연왕이 말했다. "우리가 다섯 명으로 한 명을 칠 것이다."
對曰 : 不可.
창국군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燕王怒, 群臣皆以為可.
연왕은 화를 냈고, 신하들은 모두 할 수 있다고 했다.
卒起二軍, 車二千乘, 栗腹將而攻鄗, 卿秦攻代.
끝내 군대를 동원하여 두 길로 나누고 전차 2,000승(乘)을 내어 율복에게는 호(鄗)를, 경진(卿秦)에게는 대(代)를 공격하게 했다.
唯獨大夫將渠謂燕王曰 : 與人通關約交, 以五百金飲人之王, 使者報而反攻之, 不祥, 兵無成功.
오직 대부 장거(將渠)만이 왕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과 우호를 맺고 500금(金)까지 보내 그 왕의 건강까지 빌었는데, 사신의 보고만 듣고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려 하시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군대가 공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燕王不聽, 自將偏軍隨之.
연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별동대를 이끌고 따라갔다.
將渠引燕王綬止之曰 : 王必無自往, 往無成功.
장거가 왕의 인끈을 잡아당기며 만류하며 말했다. "왕께서 직접 가시면 정말 안 됩니다. 가셔도 성공하지 못 합니다.
王蹵之以足.
왕이 발로 그를 걷어찼다.
將渠泣曰 : 臣非以自為, 為王也.
장거가 울면서 말했다. "신은 저를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라 왕을 위해서 이러는 것입니다."
燕軍至宋子, 趙使廉頗將, 擊破栗腹於鄗.
연나라의 군대가 송자현(宋子縣)에 이르자 조나라는 염파(廉頗)를 장수로 삼아 호에서 율복을 격파했다.
[樂乘] 破卿秦, (樂乘) 於代, 樂閒奔趙.
악승(樂乘)은 대(代)에서 경진(卿秦)을 격파했으며 악간(樂閒)은 조나라로 달아났다.
廉頗逐之五百餘里, 圍其國.
염파는 500여 리나 추격하여 연나라의 도성을 포위했다.
燕人請和, 趙人不許, 必令將渠處和.
연나라가 화친을 요청하자 조나라는 허락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장거가 화친을 주관하게 하라고 요구했다.
燕相將渠以處和.
연나라가 장거(將渠)를 재상으로 삼아 화친을 주관하게 했다.
趙聽將渠, 解燕圍.
조나라는 장거의 요청을 듣고 연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 士(선비 사)는 ❶회의문자로 하나(一)를 배우면 열(十)을 깨우치는 사람이라는 데서 선비를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士자는 '선비'나 '관리', '사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士자는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고대 무기의 일종을 그린 것이다. 士자는 BC 2,000년경인 오제(五帝)시대에는 감옥을 지키는 형관을 뜻했고, 금문에서는 형관들이 지니고 다니던 큰 도끼를 말했다. 그러니 士자는 본래 휴대가 간편한 고대 무기를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학문을 닦는 사람을 '선비'라고 하지만 고대에는 무관(武官)을 뜻했던 것이다. 士자에 아직도 '관리'나 '군사', '사내'와 같은 뜻이 남아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士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선비'나 '관리', '남자'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士(사)는 (1)장기에 있어서 궁을 지키기 위하여 궁밭에 붙이는 두 개의 말 (2)중국 주(周)나라 때 사민(四民)의 위이며 대부(大夫)의 밑에 처해 있던 신분 등의 뜻으로 ①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②관리(官吏), 벼슬아치 ③사내, 남자(男子) ④군사(軍士), 병사(兵士) ⑤일, 직무(職務) ⑥칭호(稱號)나 직업의 이름에 붙이는 말 ⑦군인(軍人)의 계급 ⑧벼슬의 이름 ⑨벼슬하다 ⑩일삼다, 종사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선비 유(儒), 선비 언(彦)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장수 장(將), 백성 민(民)이다. 용례로는 병사를 지휘하는 무관을 사관(士官), 선비의 아내 또는 남자와 여자를 사녀(士女), 선비의 힘 또는 병사의 힘을 사력(士力), 장교가 아닌 모든 졸병을 사병(士兵), 병사의 대오를 사오(士伍), 학식이 있되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를 사인(士人), 군사를 사졸(士卒), 군사의 기세 또는 선비의 기개를 사기(士氣), 선비로서 응당 지켜야 할 도의를 사도(士道), 선비들 사이의 논의를 사론(士論), 선비와 서민 또는 양반 계급의 사람을 사민(士民), 일반 백성을 사서(士庶), 선비의 풍습을 사습(士習), 문벌이 좋은 집안 또는 그 자손을 사족(士族),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선비의 무리를 사류(士類), 군사와 말을 사마(士馬), 선비의 기풍을 사풍(士風), 양반을 일반 평민에 대하여 일컫는 말을 사대부(士大夫), 사회적 지위가 있으며 덕행이 높고 학문에 통달한 사람을 사군자(士君子), 교육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을 인사(人士), 하사관 아래의 군인을 병사(兵士), 절의가 있는 선비를 지사(志士),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성심껏 장렬하게 싸운 사람을 열사(烈士),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의사(義士), 기개와 골격이 굳센 사람을 장사(壯士), 세상을 피하여 조용히 살고 있는 선비를 은사(隱士), 학덕이 있고 행실이 선비처럼 어진 여자를 여사(女士), 의욕이나 자신감이 충만하여 굽힐 줄 모르는 씩씩한 기세를 떨쳐 일으킴을 일컫는 말을 사기진작(士氣振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음을 일컫는 말을 사기충천(士氣衝天),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둘도 없다는 뜻으로 매우 뛰어난 인재를 이르는 말을 국사무쌍(國士無雙), 수양이 깊어 말이 없는 사람 또는 말주변이 없어서 의사 표시를 잘못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무언거사(無言居士), 백금을 받은 용사라는 뜻으로 매우 큰 공을 세운 용사를 이르는 말을 백금지사(百金之士), 산림에 묻혀 사는 군자를 두고 이르는 말을 산림지사(山林之士), 세속밖에 홀로 우뚝한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특립지사(特立之士), 궤변을 농하여 국가를 위태로운 지경에 몰아넣는 인물을 일컫는 말을 경위지사(傾危之士), 보잘것없는 선비 또는 식견이 얕은 완고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일개지사(一介之士),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는 기개가 높고 포부가 큰 사람을 일컫는 말을 우국지사(憂國之士), 세상일을 근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우세지사(憂世之士), 좋은 일에 뜻을 가진 선비를 일컫는 말을 유지인사(有志人士), 무슨 일이든지 한마디씩 참견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사람 또는 말참견을 썩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일언거사(一言居士), 조그마한 덕행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일절지사(一節之士),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편하게 할 큰 뜻을 품은 사람을 일컫는 말을 지사인인(志士仁人), 바위 굴속의 선비라는 뜻으로 속세를 떠나 깊은 산 속에 숨어사는 선비를 이르는 말을 암혈지사(巖穴之士),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될 사람을 보필하여 대업을 성취시키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좌명지사(佐命之士), 항우와 같이 힘이 센 사람이라는 뜻으로 힘이 몹시 세거나 의지가 굳은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항우장사(項羽壯士) 등에 쓰인다.
▶️ 爭(다툴 쟁)은 ❶회의문자로 争(쟁)의 본자(本字)이다. 손톱 조(爪)와 또 우(又) 그리고 물건을 가리키는 갈고리 궐(亅)을 합친 글자로서, 위와 아래에서 손으로 물건을 잡고 서로 잡아당기며 다툰다는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爭자는 '다투다'나 '경쟁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爭자는 爪(손톱 조)자와 又(또 우)자, 亅(갈고리 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爪자는 '손톱'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손'의 동작으로 쓰였다. 갑골문에 나온 爭자를 보면 소의 뿔을 놓고 서로 잡아당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금문에서는 소뿔 대신 쟁기가 그려져 있었지만 서로 다투고 있다는 뜻은 같다. 爭자는 이렇게 무언가를 놓고 서로 다툰다는 의미에서 '다투다'나 '경쟁하다'라는 뜻을 갖게 된 글자이다. 그래서 爭(쟁)은 ①다투다 ②논쟁하다 ③다투게 하다 ④간하다(웃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다) ⑤경쟁하다 ⑥모자라다 ⑦차이(差異) 나다 ⑧다툼 ⑨싸움 ⑩어찌 ⑪어떻게 ⑫하소연(딱한 사정 따위를 간곡히 호소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툴 경(競)이다. 용례로는 서로 다투는 중요한 점을 쟁점(爭點), 싸워서 빼앗아 가짐을 쟁취(爭取), 서로 다투어 무슨 사물이나 권리 따위를 빼앗는 싸움을 쟁탈(爭奪), 서로 다투며 송사를 일으킴을 쟁송(爭訟), 서로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다툼을 쟁의(爭議), 서로 권리를 다툼을 쟁권(爭權), 앞서기를 다툼을 쟁선(爭先), 우승을 다툼을 쟁패(爭覇), 일을 먼저 하기를 서로 다툼을 쟁두(爭頭), 서로 다투어 토론함을 쟁론(爭論), 같은 목적을 두고 서로 이기거나 앞서거나 더 큰 이익을 얻으려고 겨루는 것을 경쟁(競爭), 싸움으로 무력으로 국가 간에 싸우는 일을 전쟁(戰爭), 상대를 쓰러뜨리려고 싸워서 다툼을 투쟁(鬪爭), 얼크러져 다툼이나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게 다툼을 분쟁(紛爭), 말이나 글로 논하여 다툼을 논쟁(論爭), 버티어 다툼을 항쟁(抗爭), 말로써 옥신각신 함을 언쟁(言爭), 여러 패로 갈라져 다툼을 분쟁(分爭), 당파를 이루어 서로 싸움을 당쟁(黨爭), 말로써 굳게 간하여 실수를 바로잡고 잘못을 고치게 함을 간쟁(諫爭), 앞서기를 다투고 뒤처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뜻으로 격렬한 경쟁을 비유하는 말을 쟁선공후(爭先恐後), 서로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다툼을 이르는 말을 쟁장경단(爭長競短),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은 물에 젖는다는 뜻으로 이익을 얻으려고 다투는 사람은 언제나 고생을 면치 못함을 비유하는 말을 쟁어자유(爭魚者濡),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방휼지쟁(蚌鷸之爭), 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양자의 싸움에서 제3자가 이익을 봄을 이르는 말을 견토지쟁(犬兔之爭), 달팽이의 촉각 위에서 싸운다는 뜻으로 작은 나라끼리의 싸움 또는 하찮은 일로 승강이하는 짓을 이르는 말을 와각지쟁(蝸角之爭), 여러 사람이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일 또는 많은 학자들의 활발한 논쟁을 일컫는 말을 백가쟁명(百家爭鳴), 뼈와 살이 서로 다툼의 뜻으로 형제나 같은 민족끼리 서로 다툼을 일컫는 말을 골육상쟁(骨肉相爭), 만씨와 촉씨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시시한 일로 다툼을 일컫는 말을 만촉지쟁(蠻觸之爭), 도요새와 조개의 싸움으로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휼방지쟁(鷸蚌之爭), 동족끼리 서로 다툼을 일컫는 말을 동족상쟁(同族相爭), 용과 범이 서로 친다는 뜻으로 강자끼리 승부를 다툼의 비유하는 말을 양웅상쟁(兩雄相爭), 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두 사람의 싸움에 제삼자가 이익을 봄을 이르는 말을 견토지쟁(犬兎之爭), 있는 힘을 다하여 앞서기를 다툼을 일컫는 말을 분투쟁선(奮鬪爭先), 닭과 집오리가 먹이를 서로 먼저 먹으려고 다툰다는 뜻으로 여염의 사람들이 서로 다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계목쟁식(鷄鶩爭食), 오나라와 월나라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끈질긴 다툼을 이르는 말을 오월지쟁(吳越之爭) 등에 쓰인다.
▶️ 趨(달아날 추, 재촉할 촉)는 형성문자로 趋(추), 趍(추)는 통자(通字), 趋(추)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달아날 주(走; 달아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芻(추)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趨(추, 촉)는 ①달아나다 ②달리다, 달려가다 ③뒤쫓다, 추구하다(追求--) ④따라 행하다(行--) ⑤종종걸음치다 ⑥빨리 걷다, (걸음이)빠르다 ⑦붙쫓다 ⑧추창하다(趨蹌--: 예도(禮度)에 맞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걸어가다) ⑨취하다(取--) ⑩취향(趣向), 취지(趣旨) ⑪손짓, 그리고 ⓐ재촉하다, 독촉하다(督促--)(촉) ⓑ핍박하다(逼迫--)(촉) ⓒ빠르다(촉) ⓓ부추기다, 유도하다(誘導--)(촉) ⓔ줄이다, 짧게 하다(촉) ⓕ빨리, 서둘러(촉)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달아날 둔(遯)이다. 용례로는 어떤 현상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는 힘 또는 그 형편을 추세(趨勢), 빠르게 지나 감을 추과(趨過), 권력에 붙좇음을 추권(趨權), 명령을 좇음을 추명(趨命), 다투어 이익을 꾀함이나 다투어가면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을 추리(趨利), 추창해 나아가서 절을 함을 추배(趨拜), 빠른 걸음으로 달림을 추보(趨步), 앉기 위하여 자리로 나아감을 추석(趨席), 시속에 따름을 추시(趨時), 뛰어나와 맞아 들임을 추영(趨迎), 윗사람의 앞을 지나갈 때에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걸음을 추주(趨走), 빨리 나아감을 추진(趨進), 달려 내려감 또는 물이 빠른 속도로 흘러감을 추하(趨下), 대세에 쏠리어서 좇아 따라감 또는 마음에 쏠리어 따라감을 추향(趨向), 남을 붙좇아서 따르고 달라 붙음을 추부(趨附), 예에 맞추어 제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걸어감을 추창(趨蹌), 자식이 부모의 가르침을 받음을 추정(趨庭), 사람의 마음이나 사물의 돌아가는 형편을 귀추(歸趨), 즐겁게 따름을 낙추(樂趨), 윗사람 앞에 나아가거나 또는 그의 집으로 찾아감을 배추(拜趨), 급히 뛰어 달려감을 분추(奔趨), 권력에 붙좇고 세력에 아부함을 일컫는 말을 추권부세(趨權附勢), 세력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여 지냄을 일컫는 말을 추부의뢰(趨附依賴), 겉으로만 우와 순같은 성인의 흉내를 내고 학식과 인격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우행순추(禹行舜趨), 흉한 일을 피하고 길한 일로 나아감을 일컫는 말을 피흉추길(避凶趨吉) 등에 쓰인다.
▶️ 燕(제비 연)은 ❶상형문자로 㷼(연)은 본자(本字), 鷰(연)은 동자(同字)이다. 제비가 나는 모양을 본떴다. 음(音)을 빌어 주연(酒宴) 또는 쉬다의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燕자는 '제비'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燕자는 제비를 그린 것이다. 燕자의 갑골문을 보면 긴 꽁지가 특징인 제비가 그려져 있었다. 집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사는 제비는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길조로 인식되었다. 제비는 겨울이 오기 전에 따뜻한 중국 남부와 동남아로 떠나는데, 이전에는 중국 남부를 강남 지방이라 불렀기 때문에 '강남 갔던 제비'란 말도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燕(연)은 (1)주대(周代)의 제후국(諸侯國). 무왕 때 소공석이 지금의 하북(河北)을 영토(領土)로 하여 북경에 도읍(都邑)했음. 점차 북동으로 발전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칠웅(七雄)의 하나로 됨. 기원전 222년, 진(秦)나라에 망함 (2)4~5세기에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중 선비(鮮卑)의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나라. 전연(前燕; 337~370), 후연(後燕; 384~409), 서연(西燕; 385~394), 남연(南燕; 398~410)의 네 나라가 있었음 (3)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하나. 북연(北燕)이라 불리었으며, 후연(後燕)을 정복하여 건국했음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제비(제빗과의 새) ②잔치, 향연(饗宴), 연회(宴會) ③연(燕)나라, 나라의 이름 ④잔치하다 ⑤즐겁게 하다 ⑥편안(便安)하다 ⑦예쁘다, 아름답다, 얌전하다 ⑧함부로 대(對)하다, 업신여기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면과 면을 맞추기 위하여 문짝 따위 기구의 모서리를 을모지게 엇벤 곳을 연구(燕口), 잠깐 들러 쉬게 베풀어 놓은 방을 연실(燕室), 하는 일없이 집에 한가히 있음을 연거(燕居), 하는 일없이 집에 한가히 있음을 연식(燕息), 일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있음을 연석(燕席), 주연을 베풀고 놈을 연유(燕遊), 아무 근심 걱정이 없고 몸과 마음이 한가함을 연한(燕閑), 조상이 자손을 편안하게 도움을 연익(燕翼), 제비의 꼬리를 연미(燕尾), 제비의 집을 연소(燕巢), 제비의 발을 연족(燕足), 제비와 참새를 연작(燕雀), 제비의 새끼를 연추(燕雛), 볏과에 딸린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 풀을 연맥(燕麥), 제비가 날아올 즈음 기러기는 떠난다는 뜻으로 사람이 서로 멀리 떨어져 소식 없이 지냄을 이르는 연안대비(燕雁代飛), 자손을 위하여 숨겨 놓은 계책을 일컫는 말을 연익지모(燕翼之謀), 소인의 무리를 일컫는 말을 연작지도(燕雀之徒), 안심하고 있어 재앙이 닥쳐오는 것도 모름을 이르는 말을 연작처당(燕雀處堂), 편안히 지내느라 장차 화가 자기에게 닥칠 것을 깨닫지 못함을 비유한 말을 연작처옥(燕雀處屋), 제비 같은 턱과 범 같은 머리라는 뜻으로 먼 나라의 제후가 될 생김새나 후한의 무장 반초를 이르는 말을 연함호두(燕頷虎頭), 봄과 가을에 엇갈리는 제비와 기러기처럼 서로 반대의 입장이 되어 만나지 못함을 한탄하는 말을 연홍지탄(燕鴻之歎), 제비가 날아올 즈음 기러기는 떠난다는 뜻으로 사람이 서로 멀리 떨어져 소식 없이 지냄을 이르는 말을 연안대비(燕雁代飛), 영 땅 사람의 글을 연나라 사람이 설명한다는 뜻으로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끌어대어 도리에 닿도록 함을 이르는 말을 영서연설(郢書燕說), 물고기의 눈과 연산의 돌이라는 뜻으로 두 가지가 옥과 비슷하나 옥이 아닌 데서 허위를 진실로 현인을 우인으로 혼동함을 이르는 말을 어목연석(魚目燕石)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