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박종훈 감독은 여러 차례 “임찬규는 마무리 투수가 아니다”라고 밝혀 왔다. 하지만, 실제 등판 내역을 보면 임찬규는 분명 LG의 마무리 투수가 맞다.
특히 5월 이후의 기록을 보면 더 그렇다. 4월 한 달을 주로 패전처리로 등판하며 1군에서 경험을 쌓은 뒤, 5월부터 임찬규는 ‘불펜 에이스’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5월 6일 삼성전, 10일 한화전에서 각각 4이닝 1실점, 3.2이닝 1실점으로 버티며 2연속 구원승을 따낸 게 신임을 얻은 결정적 계기였다. 그리고 13일 열린 넥센전. 마무리 김광수의 불쇼로 3-2 한 점차로 추격당한 9회말 2사 1, 2루 위기에서 임찬규가 등판했다. 아무리 베테랑 투수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초대형 위기에서 임찬규는 씩씩하게 자기 공을 뿌리며 알드리지를 스탠딩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임찬규의 데뷔 첫 세이브는, 슈퍼 세이브이자 터프 세이브였다.
시즌 중반부터 LG 마무리 역할을 담당했던 고졸 신인 임찬규 (사진=연합뉴스)
그 날 이후 임찬규는 네 차례의 구원승과 네 개의 세이브를 추가했다. 시즌 성적은 6구원승 2패 5세이브. 마무리 자리를 잃은 김광수(6세이브)에 이은 팀내 세이브 2위다. 등판시 상황의 평균 중요도(enLI)도 1.63에 달했고(평균은 1.00), 5세이브 중 3세이브가 터프세이브(터프 블론 1)일 정도로 부담감이 큰 상황에서 자주 등판했다. ‘마무리’라는 단어의 뜻이 바뀌지 않은 이상, 임찬규는 마무리 투수가 맞다.
그럼 왜 박종훈 감독은 임찬규를 마무리가 아니라고 강조했을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19살 고졸 신인 투수에게 팀의 마무리라는 중책은 그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줄 수 있다. 아무리 임찬규가 씩씩하고 패기 넘치고 똘똘한 어린이라도 부담은 부담이다. 선배들의 승리를 자신이 지켜내야 한다는 마음, 팀의 성적이 내 어깨에 달려 있다는 책임감, 내가 무너지면 뒤를 책임져줄 투수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은 어린 투수에게는 엄청난 짐이다. 게다가 감독 입장에선 기존 마무리 투수나 다른 베테랑 불펜요원들의 동기유발도 고려해야 한다. 말이라도 ‘마무리가 아니다’라고 한 데는 이런 복합적인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임찬규 이전까지 고졸 신인 마무리 투수가 성공을 거둔 사례는 많지 않았다. 19살에 전담 마무리로 활약한 예는 2006년 19세이브를 거둔 롯데 나승현이 유일했고, 그 외 입단 2년차에 실질적인 마무리로 뛴 고졸 투수는 임창용, 이용찬, 한기주, 우규민, 최한경, 조용훈, 이동현 등이 있었다. 이 중 지금까지 마무리로 활약하는 투수는 임창용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괴물- 이 유일하다. 나머지 투수들은 부상이나 멘탈 문제로 데뷔 초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경력을 쌓아 나갔다. 그나마 두산 이용찬은 마무리로 기용되는 동안에도 코칭 스태프가 철저하게 보호하고, 올 시즌에는 선발로 돌리면서 ‘고졸 마무리 흑역사’에서 예외가 될 수 있었다.
고졸 신인 마무리가 성공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삼성 선수들의 심리 상담을 맡고 있는 경북대학교 김진구 교수는 “고졸 신인은 프로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신인 선수는 마음은 아직 아마추어나 다름없는 상태다. 사람으로 치면 아이다. 그런데 프로에 들어왔다고 ‘너는 지금부터 프로야’하면 프로가 되나? 속이 아마추어인데, 프로 옷을 입었다고 프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김 교수의 말이다. 결국 신인은 프로 무대에 적응하면서 경험을 쌓고, 자신감을 갖고, 그 뒤에 단계를 밟아 마무리로 기용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는 이야기다.
실제 방대한 경험이 축적된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신인투수를 곧장 마무리로 기용하는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데니스 에커슬리처럼 수년간 선발투수로 활약하며 경험을 쌓다가 마무리로 전향하거나, 마이너리그 단계에서 여러 해 동안 마무리 경험을 쌓게 한 뒤 메이저로 올리는 경우, 또는 셋업맨을 마무리로 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데뷔 첫 해부터 마무리로 기용되는 선수들도 이미 대학 시절 마무리로 명성을 날린 선수들이 주로 쓰인다. 마무리가 겪게 마련인 심리적 충격이나 부담감에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훈련 기간을 주기 위해서다. 한국처럼 신인에게 곧바로 마무리 중책을 떠맡기는 일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 등판하느냐도 중요한 문제다. 경찰청 야구단 유승안 감독은 “투수가 2아웃에 주자 3루에서 마운드에 오르는 것과 1아웃에 3루에서 오르는 것과 노아웃에 오르는 것은 천양지차”라고 말한다. “1아웃 3루면 외야플라이만 나와도 점수가 들어온다. 투수가 자꾸 이런 상황에서 등판하고, 안 좋은 결과를 반복하다 보면 자신감을 잃고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선수를 배려한다면 1사 3루는 투수를 바꾸기 어려운 상황이다. 차라리 그 앞의 투수에게 책임지라는 게 나을 수 있다. 그런 부담을 안고 오르는 건 선동열이라도 힘들지 모른다. 하물며 팀의 막내인 고졸 투수에게는 어떻겠나.” 두산 김경문 전 감독이 온갖 비난을 다 들어가면서도 이용찬을 철저하게 보호했던 건, 이런 심리적인 요소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팀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매번 등판하는 임찬규. 베테랑 투수도 감당하기 힘든 부담을 고졸 신인 투수에게 지우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사진=연합뉴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올 시즌 임찬규는 굉장히 힘든 상황 속에서 프로 데뷔 초반을 헤쳐온 셈이다. 임찬규는 거의 정찬헌과 우규민을 합쳐놓은 크기의 부담을 지고 마운드에 올랐다. 임찬규는 실질적인 마무리였고, 이용찬처럼 보호를 받으며 등판하지도 못했으며, 때로는 ‘불펜 에이스’로 승부처에 나와서 1이닝 이상을 던져야 했다. 거의 매 경기마다 팀 전체의 운명을 혼자 짊어지고 마운드에 오른다는 건, 아무리 강한 멘탈을 지닌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 특히 ‘참사’가 벌어진 6월 17일은 팀을 4연패 수렁에서 건져야 한다는 부담까지 더해진 경기였다. 실패는 어느 정도 예정되어 있었다.
물론 고졸 루키 임찬규를 마무리이자 불펜 에이스로 기용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LG의 마운드 사정이 좋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임찬규 카드를 안 쓰고 버틴 28일 삼성전 결과가 대표적이다. 만일 그 경기에서 LG가 임찬규 없이도 승리를 지키는데 성공했다면 LG에겐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결국은 다시 임찬규의 씩씩함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해설가는 “만일 올해 LG가 4강에 진출한다면, 신연봉제도대로 하면 임찬규의 연봉은 5억”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