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필점승
실패 혹은 실수를 믿을 수 없는 성공으로 이끈 사례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말 중에 하나가 낙필점승(落筆點蠅)이지 싶다. 낙필점승은 본디 ‘붓 떨어진(落筆) 자리에 파리(蠅)를 그린다.’는 뜻으로 ‘화가의 걸출한 재능’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이와 관련된 고사(故事)를 담고 있는 출전(出典)을 바탕으로 생성된 유래와 실제 내용과 만남이다.
유래는 대체로 이렇다.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때 오(吳)나라 화가인 조불흥(趙不興)이 오왕(吳王)인 손권(孫權)의 청으로 병풍(屛風) 그림을 그리려다가 뜻하지 않은 실수로 붓을 떨어뜨려 점이 찍혔다.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점(點)을 승화시켜 파리(蠅)로 그려냄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던 고사로부터 비롯된 성어이다. 여기서 다른 것에 앞서 주인공격인 화가 조불흥에 중요 사항에 대해 바르게 인지해야 도움이 될 것 같다.
고대 중국에서 화가들이 명성을 얻고 대접을 제대로 받기 시작된 게 위진시대(魏晉時代)로 알려졌다. 그 때 처음으로 명성을 얻고 대접을 받기 시작한 화가가 오나라 조불흥으로 용(龍)을 위시한 동물 그림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불화(佛畫)의 비조(鼻祖) 즉 시조(始祖)로 알려졌다. 그 시절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어난 화가들이 여러 나라에서 많이 배출되었던가보다. 그런 까닭인지 사람들은 당시의 유명했던 화가들을 일컬어 육조사대가(六朝四大家)라고 불렀다. 이는 오(吳)나라 조불흥, 동진(東晉)의 고개지(顧愷之), 양(梁)나라 장승요(張僧繇), 송(宋)나라 육탐미(陸探微) 등을 지칭한다. 한편 조불흥의 제자로는 서진시대(西晉時代) 화가였던 위협(衛協)과 동진(東晉)의 화가였던 고개지(顧愷之) 등으로 알려졌다.
그 옛날 중국의 관직을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 사례 중 하나가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임명했던 기대조(棋待詔)라는 벼슬이다. 이 직(職)은 왕과 바둑을 대적해 두는 자리로서 바둑의 최고수만이 임용되었다. 이 자리에 최초로 올랐던 이가 왕적신(王績薪)인데 그는 ‘바둑을 두는 10가지 비결’인 위기십결(圍棋十訣)을 천명했었다. 세상에 이런 벼슬도 있었는데 오나라 창업군주인 손권(孫權)의 조정에는 궁중화사(宮中畫師) 혹은 궁중화공(宮中畫工)이 따로 없었던가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궐 밖의 화백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특별히 청탁을 했지 싶다.
평소 교분을 쌓았거나 가까운 이웃이 아닌 지엄한 황제의 엄중한 청이다. 그러하니 당대 최고의 화백이라도 긴장을 할밖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황제의 면전이 아니라 궁궐에 들어가면서부터 잔뜩 긴장이 되고 주눅이 들게 마련이이라. 이런 맥락에서 최고의 예술가도 보통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 싶다. 이 고사를 담고 있는 출전은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의 ⟨조달전(趙達傳)⟩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를 바탕으로 낙필점승에 관련된 내용의 대략적인 간추림이다.
원래 발군의 화백이기에 궁중에도 익히 잘 알려진 조불흥이었을 게다. 오나라 황제인 손권이 병풍 그림이 필요했던가보다. 수소문하여 당대 최고인 그에게 연락해 병풍 그림을 그려달라는 청을 했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 그림을 그릴 요량으로 입궁을 했다. 황제가 원하는 병풍용 그림이라는 중압감 때문이었으리라. 그림을 그릴 준비를 마치고 붓에 먹을 찍은 뒤에 화선지 앞으로 서서히 다가서다가 그만 불의의 사단이 발생하고 말았다.
/ ..... / 실수로 붓을 화선지위에 떨어뜨려 점(點)이 찍혔는데(誤落筆點素 : 오락필점소) / 이 점을 파리(蠅)로 둔갑시켜 완성했다(因就以作蠅 : 인취이작승) / (완성된 그림을 황제에게) 바쳤더니(進御)(旣進御 : 기진어) / 손권(權)은 살아있는 파리(生蠅)로 착각해서(權以爲生蠅 : 권이위생승) / 손을 흔들어 그것(파리)을 내 쫓으려했다(擧手彈之 : 거수탄지) / ......... /
위의 고사 내용에서 낙필점승이라는 성어가 비롯되었다. 뜻하지 않은 실수로 화선지에 생긴 점을 곧바로 파리로 바꿔 그리는 기막힌 기지와 생각이 보통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압권이고 달관이었다. 게다가 급하게 그렸던 파리를 얼마나 생동감 있게 잘 그렸으면 황제가 살아있는 것으로 착착하고 쫓아 날려 보내려고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을까. 이 일화를 통해 화백의 걸출한 재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초등학교 시절 물리도록 들었던 그림 얘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바로 신라의 뛰어난 화가 솔거(率居)가 황룡사 벽에 그렸다던 노송(老松) 얘기다. 얼마나 실제 살아있는 나무처럼 생동감 있게 그렸으면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와 앉으려다가 머리를 벽에 부딪쳐 죽었던 사체가 땅바닥에 수북하게 쌓였었다는 믿겨지지 않았던 고사 말이다.
오나라 조불흥이나 신라 솔거 경지의 화가라면 해탈의 경지를 넘어선 대덕고승과 별로 다를 바 없지 싶다. 보통의 경우이라면 황제가 준비한 귀한 화선지에 실수로 붓을 떨어뜨려 점이 생겼을 때 그처럼 걸출한 임시변통의 빼어난 대응은 언감생심이지 싶다. 이는 세상 이치에 대해 달관하고 온 세상을 너끈하게 조감(鳥瞰)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을 떴을 때 가능할 게다.
세상의 변방에서 소시민으로 살아온 까닭일까. 돌이켜 생각하니 크게 기뻐하거나 뉘우칠 일을 겪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하지만 삶의 굽이굽이에서 결코 녹록치 않은 실수나 실패를 범했을 때 제대로 대응하거나 맞서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채 우물쭈물 댔거나 쭈뼛쭈뼛 뒷걸음질 치는 경우가 숱하게 많았다. 그로부터 꽤나 세월이 지난 작금에 돌아보니 다른 현명한 방법이나 길도 수월찮게 보이는데도 말이다. 지난날은 차치하더라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실수나 실패에 맞닥뜨렸을 경우 조불흥이 취했다던 낙필점승처럼 지혜로운 대응을 하는 나와 만나는 행운을 맛볼 수 있을까.
춘하추동, 가을호 2024년 9월(제7호), 2024년 9월 3일
(2024년 6월 1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