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공 홍언필(文僖公 洪彦弼·1476∼1549)이 부모상을 당하여 산소(山所)에서 여묘(廬墓:侍墓)살이를 했다.
때는 여름철이었다.
그의 아들 섬(暹·1504∼1585)은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 여묘살이하는 아버지께 문안(問安)드리러 갔다.
그의 아버지는 잠을 자고 있었는데 뱀이 배 위를 가로로 감고는 입을 벌려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음 속으로 이를 알아차렸지만 뱀한테 물릴까 두려워서 감히 움직이지도 못하고 다만 목석(木石)같이 누워 있을 따름이었다.
섬은 곧 풀밭으로 가서 개구리 여러 마리를 잡아 와서 그것을 땅에 놓았다.
뭇 개구리들은 폴짝폴짝 뛰면서 흩어져 도망쳤다.
뱀은 이내 빙빙 돌려 감았던 몸을 풀더니 사람을 버리고 개구리를 쫓았다.
아버지는 비로소 일어날 수 있었고 아들 섬을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섬은 어릴 때부터 임기응변(臨機應變)이 이와 같았다.
뒤에 어른이 되어 과연 이름난 재상이 되었다.
홍섬의 자(字)는 퇴지(退之)이고 호는 인재(忍齋)였다.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1482∼1519)의 문인(門人)으로 문장에 능하고 경서(經書)에 밝았으며 검소하고 청렴(淸廉)해서 1552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기도 했다.
흥양으로 유배당했을 때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가사 '원분가(寃憤歌)'가 있다.
관직(官職)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경헌(景憲)이다.
홍섬의 어머니는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송질(1454∼1520)의 딸이었다.
영의정의 딸로 영의정의 아내(남편은 홍언필)이며 게다가 영의정의 어머니까지 되었다.
또 아흔 살까지 살았으니 그 당시(當時)에는 보기 드물게 장수(長壽)했다.
이런 일들은 그 유례(類例)를 찾기 어려우리라 본다.
이신성 부산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