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버린 아픔
아이들과 저녁상을 마주하고 앉아 TV를 틀었다.
화면 가득 또 자살 소식이 안타깝게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타고 전해지고 있었다.
생활고를 비관해서 죽어가는 사람들...
얼마 전에는 가정주부가 아이 셋을 차례로
아파트 아래로 던지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가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었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선택으로 삶과의 인연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사람들의 가슴은 어떨까.
오죽했으면 얼마나 힘들었으면
세상 속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영원한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걸까.
난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있을듯하다.
나 역시도 아이들과 함께 죽으려고
약병을 품에 안고 괴로움에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으니까…….
2002년의 봄과 여름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들이 폭풍우처럼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신이 나에게 한 가지 소원을 말해보라면
주저 없이 그때의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달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내 결혼생활은 첫출발부터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은 것처럼
삐거덕거리고
뒷굽이 까이고 불편하고 위태로웠다.
축복 받지 못한 신혼이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6남매의 막내로 그것도 엄마의 나이 사십에
얻은 귀염둥이는 언니 오빠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한 남자를 만나기전까지는 평범하고
꿈 많은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철부지였다.
같은 직장의 동료로 인사를 한 그에게 호감이
생기고 사랑의 감정을 느꼈을 때
우리 집에서 거센 반대가 있었다.
가난하고 배움도 부족하고 어머니도 안 계신
집안에 아직 어린 딸을 보낼 수 없다며
피를 토하시는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고
형제들에게 내 인생이니 내가 알아서 할
거라는 야멸친 말을 하고 등을 돌렸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고아아닌 고아가 되어
살아온 10여년의 시간이 눈물이 되어
가슴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난 사랑을 택한 대가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고 결국엔 사랑에 배신까지 당하여
벼랑 앞에 서고 말았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내가 저지른 일이었기에...
남편은 한마디로 이중인격자였다.
밖에 나가면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는 애처가였고...
집에서는 가장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모두를 두려움에 몰아넣는 사람 이였다.
10년의 세월 속에 기억나는 건
술과 노름과 여자와 손찌검과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답답한 단어들의 나열뿐이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가슴에 문신이 되었고...
술만 먹으면 때려 부수는 발길질은
온몸에 멍자욱으로 아파했다.
직장이라고는 한달을 다녀 본적이 없었기에
항상 생활은 빈곤의 악순환이었고
아이들에게 가난을 유산으로
물려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은 나에게
불면증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하루를 알 수 없는 생활을 지속하면서도
그를 포기할 수 없던 이유는
부모형제를 버리고 택한 선택 이였기에
성공해야한다는 나 자신의 다짐 이였고,
또 한 가지는 10년을 살아보고
결정하자했던 약속의 말 때문이었다.
가슴에 병이 생기고 피고름이 맺혀도
삶을 이어나가려던 나에게 남편은
마지막 화살을 심장에 던져버렸다.
컴퓨터 채팅에 빠져 생활자체를 포기하고
미친 듯이 여자들을 만나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2002년의 봄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이별을 가져다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과 아이 둘을 버리고 집을 나와
당당하게 내 앞에 섰을 때
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에서 한 남자와의 질기고도
억센 인연이 끝이 났음을 얘기해 주었기에…….
“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건데.”
“내 새끼 아니니 죽이든지 살리던지 너 알아서 해!”
그것이 끝 이였다.
더 이상 그에게서 무슨 말을 기대했던
어리석은 나를 비웃으며 조용히 돌아섰다.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보며
당장 살아야 할일을 생각했다.
보증금도 없는 사글세방에서
버텨나가던 생활이 바뀌어 질 일은 없는데
무엇이든 해야 했다.
눈만 뜨면 찾아오는 빚쟁이들의 방문도 싫었고
아이들과 내가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올라
손가락질 받는 건 더욱 싫었다.
정작 버리고 간 건 그였지만
아픔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저녁 끼니걱정을 해야 하는
현실이 미치도록 싫었다.
동사무소에 찾아가 여러 가지를 물어보니
나에게 해당되는 건
생계보조금 약간이 전부라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소문이 이리 났는데
어찌 살래하며 혀를 차셨고...
텅 빈 방에서 시간을 죽여 나가는 나에게
삶은 고통이었다.
위자료는커녕 남편의 빚까지 떠안아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린 나...
거기다가 아픈 몸까지 덤으로 안아버린
난 죽음의 유혹을 뿌리 칠 수가 없었다.
봄바람이 미치도록 따스하게 불던 날.
약병을 품에 안고 절을 찾았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그동안의 삶을
고해하고 싶었는지 이상하게 발길이 향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미리알고
나를 그곳에 데려다 준 것도 같다.
가끔씩 마음이 허허로울 때 가던 절인데
몇 번 눈인사를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죠?”
“네.”
그렇게 시작된 첫 만남이 자연스레 이어져
우리는 오래도록 앉아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남편이 죽고 혼자가 되셨다는 얘기와
지금은 부산에서 동생의 아이들을 키워주고 있는데
집은 울산이라는 얘기와 살아보면
다 해결된다는 얘기를 했다.
난 죽고 싶다는 말과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말과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했다.
이사를 가고 싶은데 아무것도 없다는 말도 함께.
“세상 어디엔가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세상 어디엔가는
내가 도와주어야할 사람도 있는 거란다.
여기서 너와 내가 만난 것도
전생에 얼마나 큰 인연인지 모르는 일이야.
죽음을 생각해 보았으니
살아있는 지금도 생각해 보자.
네가 살아있다면 아이들도 사는 거야.
넌 여자이기 전에 엄마라는 걸 잊지 마!”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만 흘렀다.
그날의 작은 인연이 이어져 지금 난
그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이사를 해서 살고 있다.
보증금으로 천 오백만원이라는 돈을
선 듯 빌려주시며 꼭 막내 동생 갔다며
열심히 살라했다.
계약 하는 날 그 먼 부산 하단에서
장장 3시간을 새벽부터 달려와 잔금을 치러주고,
자신에게 돈이 모자라 청도에 있는
엄마에게 가서 돈을 빌려와
이사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평생 돈을 빌리며 살아 본적이 없다는데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주셨다.
정말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부모 자식간에도 믿지 못하는 요즘 세상에
얼굴 몇 번 본 것이 다인 나에게
큰돈을 내어주며 웃으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도 이모라며 안길 때마다
코끝이 시려오며 눈앞이 흐려진다.
열심히 사는 게 최선을 다해 사는 게
갚는 길이라며 등을 두드려 주던
따스한 손길이 있기에
난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다.
아이들에게도 좋은 엄마가 되고
세상에도 쓸모 있는 부분에 서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상 어딘가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기에 포기란 건 없다.
오늘도 내일도 …….
이 기회를 빌어서 박 윤순 이모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내 목숨과 삶을 이어주었으니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평생을 두고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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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MBC라디오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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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 어딘가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기에 포기란 건 없다..눈물도 찍어내며 나쁜사람 나쁜사람 그래가면서...한숨도 쉬어가며..그래서 어찌 살았나? 하면서..읽었습니다..그래요 가진것 아무것도 없는 나이지만 내가 세상에 보내진 이유가 잇을거에요..좋은글 고맙습니다..행복한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