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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바꿔져 기록 순서에서 빠진 스토리지만,
삶의 가장 바닥으로 내려 갔었고 다시 시작되었던 나름 전하고 싶은 사연이라서 굳이 기록하고자 한다.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으며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넘기지도 아니하리라.”
한동안은 착찹한 심정을 겨뎌내기 힘들었지만 강해야만 했고, 강해져야 했다.
독한 약은 병약한 몸을 붙들고 있었고,
두가지의 기도 제목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붙들고 있었다.
세례를 받아야 하고,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문제는 일생일대의 불변의 과제였다.
한줌 독한 약을 몸으로 투척하며 1년이라는 기간을 버텨내려지만,
현저히 기력없는 몸 상태를 느낄 수 있었고, 한편으론 견딜 기간이 막막하기도 했다.
과연 1년 후에도 정상적인 건강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였기에
때론 막연하고 불안하고 낙심이 될 때도 있었다.
무기한적인 불확실한건 싫었다.
생사 화복은 하나님 뜻 가운데 있기에 확실하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다.
벅떡일어나 앉았다.
머리 맡에 놓아 두었던 성경책을 집어들었다.
성경말씀은 곧 하나님말씀이라고 믿고 있었다.
말씀을 통해 반드시 확실한 어떤 결과를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갈망하며 낫고 싶은 의지를 아뢰는 것이었다.
“하나님! 이책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오니 제게 합당한 말씀을 주세요.
아버지! 너무 힘겹고 지치나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저의 영혼을 취하시고, 아니면 낫게 해 주옵소서"
진심을 다해 절박한 기도를 마치고 비장한 맘으로 책을 펼쳤다.
순간 오른 쪽 상단의 구절이 클로즈업되어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으며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넘기지도 아니하리라.” (렘38:16)
(**훗날에 알았지만,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맹세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엔 내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이었다.**)
“오 ! 아버지, 감사합니다”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가운데, 두려움이 사라지니 한결 몸도 맘도 가벼워졌다.
우울하게 기진해 있던 기분이 변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진다.
확신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에 맞추어서 약을 잘 먹는 것이었고,
어느 날 쯤인지는 몰라도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게 될 그 때를 기둘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몸의 기력은 목에 걸린 가래도 쉬 못 뱉어내는 상태였다.
어느날 갑자기 목 줄기를 타고 올라온 농 덩어리가 식도에 걸렸다.
그것은, 찰거머리같이 붙어서 뱉어내지지도, 삼켜지지도 않고 매우 거슬리게 했다.
밥으로, 물로, 기침으로, 손으로 문질러도 보고, 목 살을 당겨도 보고, 갖은 방법을 다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강력 접착제로 착 붙여놓은 것처럼 좀체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덩어리는 날이 갈수록 숨쉬는데 거북하게 했고, 때때로 그 부위에 약간의 쓰린 통증도 느끼게 했다.
그렇게 나의 기력은, 발생되는 가래도 쉬 뱉어내지 못하는 최악의 상태였다.
몇날이 지난 어느날,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는그 덩어리에, 위로 치 솟던 또 다른 농이 합세되는 느낌이 들더니
갑자기 숨쉬기가 더욱 힘들기 시작했다.
혼자 있었기에, 긴장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누구에게든 아무런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당항해서 손으로 목살을 잡아늘이고 겨우 헐떡이며 가족 중 누군가 속히 귀가 하기를 원하던 중,
마침 여동생이 하교해서 귀가했고 곧 숨이 넘어갈 듯한 나를 업고는 겁에 질려 울면서 집을 나선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체적 한계 앞에 처해져서는 실오라기 같은 산소라도 갈급 하는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였다.
그 상황에서 아이들의 환영이, 또 읽은 말씀이 되뇌여 진다.
어쩌면, 그 다급함 속에서 잘 버텨내 보려고 스스로를 부축하는 의지였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믿는다.
때 마침 골목 앞에서 마주친 한 집에 사시는 아저씨의 차에 실려
신속히 병원(병원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에 옮겨졌다.
축 처진 몸이 X-ray에 찍혀졌고, 응급조치를 받게 되었는데, 엄청난 오진이 실행되어졌다.
그들은 나를 부축해 앉혀놓고, 서로 전문용어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의 등에다 주사를 놓는 듯 하더니, 잠시 후 내게 중요한 문제를 해결한 듯 물었다.
“이젠, 시원하시죠?”숨쉬기가 편하시죠?”
그들은 나의 폐에 필요없는 공기가 차서 숨쉬기에 곤란한 것으로 오진했고,
기존의 폐의 공기를 주사기로 빼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되었다.
힘겹게 호흡하고있는 상태였는데 말이다.
잠시 후 생 사 사이에서 1초가 다급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나마 겨우 호흡을 하고있었는데..,공기를 빼낸 뒤로는 실 호흡이 되었다.
들이 마시기도 내 뱉을 수 도 없었다
곧 숨이 끊어질 듯 했다.
안간힘을 다해 의식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때를 생각하면 사람이 눈을 뜨고 죽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의식은 있다해도 신체적 한계에 의해서 숨이 넘어갈 때 눈을 뜬 채로 죽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의료진은 허우적 거리는 나를 다급히 싣고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사의 기로에서 의식을 붙잡고자 안간힘을 쓰자니 생 땀이 비오듯이 온몸에 흘렀다.
다급히 집을 나오면서 약을 못챙겼기에 시간 맞춰 약을 먹지 않아서 그러는줄 알았다.
넘어가는 숨을 안간힘으로 붙잡고 온 힘을 다해 겨우 속사이듯 말했다.
“아버지,..저... 약...같다... 주세요.”
“오냐, 알았다. ...
오냐, 알았다.”
급한 발걸음으로 옆에 따라 오시며 아버지는 비통한 어조로 대답하신다.
어디론가 실려가서 그야말로 젖은 빨래처럼 처진 몸이 부축되어 다시 X-ray에 찍혔고...,
거기 까지는 기억이 난다.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보니, 코에는 산소호흡기가 꼽혀 있었다.
오른 쪽 옆구리에는 새끼손가락 반 정도 굵기의 호수가 꼽혀 있었는데,
한쪽끝은 물이 반쯤 채워진 큰 물병에 연결되어 물에 잠겨져 있었다.
그렇게 죽음의 위기를 모면했다.
입원하고 몇 날이 지나고 나니 사람이 죽고 사는 것 보다 병원비가 더 큰 문제로 야기 되었다.
이런 저런 사정을 이해한 병원 측의 서대문 시립병원에 입원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일러준다.
옆구리의 꽂혀 있는 호수는 한뼘 길이로 잘려 끝부분이 접혀서 고무줄로 단단히 묶여졌다.
호흡도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지탱하기도 힘든 몸이 어느 건물 계단에 버려졌다.
돈앞에서 냉혹하게 외면 당한 채, 곧 경찰차가 태우러 온다는 각본속에서
강한 한기로 떨며 계단벽에 몸을 지탱한채 얼굴을 무릎에 묻고 앉아서는
어서 빨리 계획된 일이 진행되어지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며 애써 힘겹게 기다렸다.
강한 삶의 애착은 병약한 몸을 붙들고 있었다.
점점 아련해지는 의식 속에서 어린 아들이 방문에 서서 펄쩍 펄쩍 뛰며 울고 있었다.
“엄마, 갖다 와” 라는 딸아이의 나직한 말이 뇌리에서 다짐받듯 속삭였다.
'그래 애들아, 기둘리고 있어...
엄마가 꼭 갈께...
반드시 살아야해...
살아서 애들을 키워야 하고,
예수님께서 받은 세례, 나두 꼭 받아야해...
세례를 받고 엄마가 있는 천국으로 가야해...'
살기위해서는 오직 백차에 실려야만하는 방법 앞에서 기다림이란 참으로 힘들게 버텨내야 하는 사투였다.
그때의 그 기다림이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긴 기다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버티고 버틴, 그나마의 기력이 다 소진되어질 쯤 이윽고 백차에 실려졌다.
경찰 차의 사이렌 소리가 귓전에서 아득히 의식을 붙잡는 듯 들려왔다.
눈을 감으면 쓰러져 버릴까 해서는 애써 실눈을 치켜올리며 어서 속히 병원에 도착되기를 소망했다.
뒷 자석에 기대어 앉아 숨을 헐덕이는 나를 Room mirror로 살피며 쓰고 있던 모자까지 벗은 경찰관은
연실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일방통행으로 달렸고, 얼마 후 나는 서대문 시립병원 응급실에 눕혀 졌다.
지치고 긴장된 마음이 진정되기도 전에 두려움으로 철렁 내려앉는 말이 들린다.
“허참! 그 사람, 금방 식사하고 돌아눕더니 그새 죽었네, 간호사 불러, 싱거운 사람 다 보겠네.”
부축되어 응급실에 들어설 때 몇몇이 둘러 앉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식사하고 얼마되지않아 죽었다니...
앓고 있는 병이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것 보다 더 심각한 질병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죽은 사람의 벗겨진 환복이 내 침대 발쪽에 놓여진 큰 고무통에 의미 없이 담겨졌고, 그 사람은 실려갔다.
원활치 못한 숨을 몰아 쉬며 복잡한 심정으로 누워있는데
몇 겹의 두꺼운 마스크를 한 의사와 간호사들이 내게로 다가 왔다.
의사는 표정없이 명령하듯 말했다.
“기침해봐!”
기침해 보았다.
“그게 무슨 기침이야?! 더 크게!!”
온 힘을 다해서 기침하려했지만,
그것은 입만 벌린채 고개만 애써 끄덕일뿐 소리도 들리지도 않는 날숨이었다,
왜 그렇게 기력이 없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의사는, 기침소리를 내려고 온 힘을 다해 애쓰는 나를 향해 같은 말만 몇번 되풀이 하며 지켜보더니
아무런 말없이 돌아갔고, 잠시 후 제일 큰 링겔병의 주사기 바늘이 내 팔에 꼽혔다.
주변 사람들이, 언제부터 앓았는데 그렇게 말랐느냐고... 젊은 여자가 안됐다는 듯이 물어왔다.
뜻밖에 치뤄야 하는 투병 생활속에서 거울조차 보지 못했는데,
난 내가 그렇게 말랐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유아적에
다리를 고쳐보기 위한 방법으로 몸에 좋다는 약을 많이 먹여서 힘이 장사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래선지 유년시절 동네 같은 또래의 남자아이들에게도 힘으로 거뜬히 밀어 부치곤 했다.
성장하면서도 늘 언니에게 꽃돼지라는 별명을 들었었다.
그 인식은 늘 뇌리에 자리하고 있어서 스스로 뚱뚱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래선지 사람들이 물어 보는게 실감되지 않았었는데,
화장실 거울에 빛쳐진 모습은 과연 쇠골에 소주한잔이 들어갈 만큼 많이 마른 몰골이었다.
이틀 후 내 옆구리에 호수가 꼽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의사는 몹시 화를낸다.
“어느 병원이야?!...말을해봐! 어느병원에서 수술 받았냐구?!”
사람을 이런 상태로 내보내다니, 이건 살인에 해당하는 경우야!!
병원에서 지내다보니 알게 되었지만,
서대문 시립병원은 대체로 돈없고 홀로 버려진 사람들이 많이 실려오는 곳이었다.
나역시 버려진 채 백차에 실려간 사람이였다.
노여움은 계속되었다.
"호수가 빠지고 공기가 폐로 들어가면 당신은 죽을 수 밖에 없어!!!
왜 말을 안 하는거야?!!! 그 병원을 상대로 손해 배상을 청구 할 수 있는거라구!
그런 병원, 의사는 용서할 수 없어, 환자를 이렇게 내어버리다니...
어느 병원이야?!! 어느 병원에서 수술 받았냐고?!!!”
그러한 몸 상태로 길가에 버려진 사실을 용납할 수 없다며 크게 흥분한 의사는
격한 화를 내며 설득하며 대답을 추궁한다.
“저... 모르겠어요.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 이렇게, 되어있었습니다.”
고개 숙인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물질만능주의 사회구조와 주어진 냉정한 현실 앞에 철저하게 버려진 몸,
돌아볼 부모형제도 없는 신분이 되어야 입원이 가능하고 치료받을 수 있다고 들었기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홀로 단신의 조금을 모자라는 사람으로 위장을 해야했다.
그 날 후로도 몇 차례 화를 내기도 하고 되어진 상황을 납득시키기도 하며
대답을 유도 했지만 나의 대답은 변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다행히 시립병원 응급실에 입원되어 치료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가장 힘든 것이 화장실 왕래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25미터쯤 되는 화장실을 보행한다는 것은 나름 큰 일과였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그나마 살아 있을 만큼은 숨 조절이 되는데, 움직이면 바로 숨이 차올랐다.
몇 걸음 내딛고 턱까지 차서 막히는 숨을 겨우 가다듬고를 되풀이하면서 25미터를 왕복해야 하니
화장실 가는 것이 젤 난감하기만 했다.
공기를 마음껏 들이킬 수 없다는 것은 실로 큰 고통이었다.
식도에 붙어있는 농 덩어리, 그 하찮은 것에 의해서도 생채 기능들이 좌우되는
인간은 실로 한없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철저하게 습득한다.
나약함을 인정할 수 록 나름의 성찰의 시간이 주어졌고
그렇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 앞으로의 회귀의 시간이 이어졌다.
내 뒤로도 2주동안에 응급실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입원되어 들어왔다.
공군소위, 노숙자 분들, 기성복집 미싱사 아가씨, 잊어버릴만 하면 다시 들어온다는 사람들...,
그들도 다 나처럼 백차에 실려 왔다.
대낯이고, 초저녁이고, 한 밤중이고, 새벽이고간에 아무 때나 백차의 차인벨이 울려 들리면
여지없이 병약한 이들이 부축되어 응급실로 입원되어졌다.
그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두 사람이 있다.
공군소위와 미싱사 아가씨이다.
공군소위는 아주 잘 생긴 젊은 남자였다.
처음에 입원되었을 때에는 조금의 식사도 하고 가끔 실눈을 뜨고 창밖을 의미 없이 바라보기도 하곤 했다.
보여지는 모습으로는 마음을 다잡고 잘 치료받으면 곧 퇴원할 수 있을것 같았던 그는
날이 갈수록 식음을 전폐하고 초연히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식사 대체로 링겔 병이 팔목에 꼽혔고, 배뇨는 비닐 호수를 통해서 배출되었다.
날이 갈 수록 몸도 점점 야위어 갔다.
잠이 들었는지, 기력이 없는지 그는 늘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는데,
간혹 깨어 천장을 처다보고 있을 때의 그의 휑한 눈은 삶을 포기한 듯 한 체념의 빛을 띠고 있었다.
어느날
실눈을 뜨고 있던 그는, 마주한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한참을 지켜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아주머니,... 돈, 필요하세요?”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고, 그는 안스러운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더니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응급실에서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듣는 말이었다.
그 역시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병실에서 혼자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영양주사도 한계가 있는것, 죽기를 바라듯이 누워있던 그가
어느날 부턴가 눈을 감은 상태에서 불교의 주문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그는 육체의 한계 앞에서 어디론가의 떠날 준비를 하는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으로 딱한 모습이었다.
그를 위해 기도했지만, 지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한사람,
내가 폐에 차있는 공기를 빼내기 위한 수술을 받기 몇 일 전,
늦은 밤에 백차에 실려왔는데, 그녀는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그녀가 미싱사라는 것과 처음 실려 온게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삶의 의욕을 잃었는지 매일 눈을 감고 체념한 듯이 누워만있었다.
그녀의 골반 살가죽은 뼈에 붙어 욕창이 되어 진물이 나 있는 상태로 옷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저 모진 목숨이 끊어 질 때만 기다리는 듯 꼭 감은 눈을 좀체로 뜨려하질 않았다.
그녀팔에도 링겔주사기가 꼽혀져 있었다.
시립병원의 좋은 조건 속에서도 자신들 스스로가 삶의 의욕을 잃고
묵묵히 죽어 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은 의지에 따라서도
좌우된다는 것을 목격했다.
아님 어쩜 말기라서 차라리 삶을 포기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어느날 식도에 붙어 그처럼 고통스럽게 하던 덩어리가 시원스럽게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시원한, 너무 시원한 공기가 폐 속으로 깊이 빨려들어 왔다.
온 몸으로 느끼는 그 공기의 상쾌함,
그 기분, 그 시원함, 어찌 말로 표현하리..
아!
드디어 살 것 같았다.
진공상태 같았던 머리속까지 맑아지는 듯 했다.
순간 온몸에 생기가 돌았다.
시원하게 몸 속으로 깊이 흡수되어지는 공기의 맛!
그건 세상 어느 맛 보다 짙은 삶의 맛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무슨 영문인지 다시 정상적인 호흡은 되지 않았다.
몇 날 뒤,
화장실을 다녀온 후 침대에 오르기 위해 양손을 침대에 딛고 몸을 침대위로 끌어올릴 때,
그만 옆구리에 꼽혀있던 호수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몸에서 ‘쑤욱’하고 빠졌다
순간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황급히 옆구리를 손으로 막고 간호원을 불렀다.
빠진 호수 끝에는 젤리같이 응고된 큰 농 덩어리가 붙어있었다.
그것은, 목줄기를 막고 있다가 몇일전 떨어졌던 그 문제의 농덩어리같았다.
잠시 후에 간호원이 왔고, 급히 응급조치가 취해졌다.
그 일로 인해 외부공기가 또 폐에 들어 갔는지 여전히 쉼쉬기는 원만치 않았다.
달에 몇번 결과를 보기 위한 X-ray찍는 지정된 날이 있었는데,
검사 결과 불필요한 폐의 공기를 빼내기 위한 수술 날짜가 잡혀졌고,
나로서는 비장한 각오로 싸인을 하고 수술대위에 눕혀졌다.
생에 있어 더 이상의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현장이었다.
두손이 양쪽으로 벌려져 간호원들에 의해 붙들려 고정되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마취도 시키지 않은 채 수술이 진행되었다.
너무 저 체력이라 깨어나지 못할까봐 그랬을까?... 훗날 그런 생각도 해봤다.
내 가슴은 뾰족하고 차디찬 금속?에 의해 찍혔다.
뭄부림쳐 보았지만 몸은 꼼짝할 수 가 없었다.
아무리 말랐어도 누운 상태이니 가슴의 부피가 밀려 살의 두께가 있을터,
의사는 수술 도구에 힘을 주어 정확한 표적에 맞추려고 찔러 꼽기를 반복했다.
의도대로 잘 안뚫리는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안 뚫리지?!!... 이크, 혈관이 터졌네! ...나일론 실...!”
얼굴과 목, 가슴으로 뜨끈한 액체가 튀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떠올랐다.
‘오! 주님! 얼마나 고통스러우셨나요?.'
세상 죄 지시고, 찔리고 상하고 채찍에 맞으며,
사랑하는 이들의 배신에 아픈 마음 참으시며, 생명 주시기 위해 잠잠한 양같이 침묵하셨던 주님!!
아가페가 아니면 결코 다시 볼 수 없는 고멜과 같은 인간들에게 소망의 나라를 허락하시기 위해
그렇게도 고통의 길을 가신 주님...!!
감히 나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었지만,
아이를 해산할 때 비로서 자신을 낳은 엄마의 해산의 고통을 알 수 있듯이,
대책 없이 쌩살이 찢기고 통증을 느끼다 보니 십자가의 예수님이 생각났다.
팔벌려 잡혀진채 꼼짝 못하고 무참히 뚫리고 있는 그 고통에서
달리 벗어날 길 없어 울부짖으며 읽었던 말씀을 떠올린다.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으며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넘기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선 생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시는 분이셨다.
죽이지도, 넘기지도 아니하신다는 말씀속에서 아버지의 의지를 알 수 있었다.
의사는 이미 각오한듯이 병실이 떠나갈 듯한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끝내고 돌아갔다.
옆구리에 이어 가슴에 또 호수가 꼽혔다.
자꾸 기침을 해서 폐에 들어간 외부공기를 빼내라고 일러준 대로 눈물을 닦으며 기침을 해 보았다.
물에 잠겨 있는 호수 끝으로 공기가 빠져 나오는지, 뽀르륵 뽀르륵 소리와 함께 공기 방울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날 밤에 들것에 실려 응급실에서 윗 병동입원실의 이미 지정된 침대로 옮겨졌다.
비로서 안정된 정식 입원생활이 시작되었다.
입원만 되면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되었다.
밤이 되면 또 열에 시달리며 큰 얼음주머니를 가슴에 안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떨어야 했다.
응급실에서는 식사를 조금씩 할 수 있었는데, 수술 후 병동을 옮긴 후론 다시 입맛을 잃는 증세가 나타났다.
끼니 때 마다 먹기 싫어서, 또 맛을 모르는 혀 때문에 수저 들기가 고역이었다.
약을 먹기 위해 겨우 두 세 수저를 억지로 뜨는게 최선이였다.
호흡하기는 한결 편해졌으나 물 병을 찬 채, 들고서 화장실에 왕복하는 것도 여전히 힘들었다.
몸이 그러니 맘도 약해져서는 아이들이 보고싶어서 뜨거운 눈물로 베개와 시트를 적시는 일이 잦아졌다.
밤이면 열에 시달리며 얼음 주머니를 끌어 안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흐느낀다.
죽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어서 빨리 병상을 털고 일어나고 싶었다.
결국엔 속히 살려주시면 주의 일을 하겠노라고 오열하며 서원하게 된다.
밥을 앞에 놓고 맥없이 처다보고만 있는 모습이 안됐는지 마주한 침대에서 식사하던 아가씨가 일러준다.
“언니! 밥맛이 없어도 식사를 하셔야 회복할 수 있어요.
나도 처음엔 언니처럼 먹지 못했는데,
어느 언니가 일러준 되로 매일매일 한 숱 가락씩 늘여 먹다 보니 서서히 밥맛이 돌아왔어요.
이병은 잘 먹어야 치료될 수 있어요. 이 병은 먹지 못하면 죽는 병 이예요.”
그녀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응급실에서 죽어가던 공군소위도,
입원 후 한번도 일어나 앉아있는 것을 보지 못했던 미싱사 아가씨도
통 먹지 못하고 절망처럼 두 눈을 꼭 감은 채 누워만 있었다.
모두 그렇게 죽어 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먹는 걸 포기하고 누워있는다면 나역시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끼니 때 마다 먹고 싶은 마음 1도 없는 밥을 앞에 두고 비장한 각오를 한다.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밥을 씹고 씹어 액이 되도록 씹어서 억지로라도 삼키는 작업을 했다.
‘한 숟가락만 더, 한 숟가락만 더’ 를 그녀가 일러준 대로 주문처럼 되뇌였다.
그건 곧 살기위한 비장한 투쟁이었다.
간절한 기도와 먹기 위한 노력 속에서 한달이 지날 쯤에 서서히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점차 몸의 기력이 날마다 다르게 조금씩 호전됨을 느낄 수 있었다.
호수를 뺀 가슴의 상처도 아물어갔고, 식사량도 반 공기 정도는 먹을 수 있었다.
입맛이 돌아온 것이다.
즉 살아났다는 증거였다.
윗 병동 생활 두 달쯤 되어 갈 때, 나는 병실을 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문이 조금 열려 있는 한 병실에서, 응급실에서 누워있던 그 미싱사 아가씨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는 변함없이 링겔로 모진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전히 삶을 체념한 듯 한 얼굴로 죽은 듯 누워있었고,
드러나 있는 그의 골반엔 욕창에 의한 심한 상처가 치료되지 않은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열려 있던 문을 가만히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회복되니 찬양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폐활량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하나님, 찬양을 할 수 있도록 폐를 회복시켜 주시면 찬양으로 영광올려 드리겠습니다.'
이 기도 역시 서원기도인 것이었다.
병원 생활 3개월이 될 쯤 어느 날 수간호사는
‘병원에 더 있으면 전염될 수 있으니까 퇴원하라’ 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퇴원하여, 걷기에는 조금은 현기증이 나는 몸을 가누며 친정으로 돌아왔다.
서울로 올라와 고열이 시작된 날로부터 치료받고 퇴원하기까지의 4개월 보름 남짓 속에서
삶을 위한 여러 사건들을 치러냈다.
병원으로 가지 못했다면, 더 오랜 기간이 요구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모친은 가계일에 바빴고, 누구도 제 때에 식사를 챙겨 줄 사람도 없었고,
병원처럼 끼니마다 균형있게 잘 짜여진 식단도 챙겨 먹을 수 없을테니 말이다.
아니 곁에서 꼬박 꼬박 챙겨준다해도
밥이 목으로 넘어가질 않으니 두 서너 수저 먹으면 고작이었을 것이고,
그렇게 방치 되어 시간과 시름하며 지내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이셨음을 믿는다.
육신의 시련을 통해 영으로도 혼으로도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처절한 사투였던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마감되어 진다.
하나님의 응답되로 살아난것이다.
짧다면 짧고, 길 다면 돌이키고 싶지 않도록 처절하게 길었던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감사하신 내 아버지 하나님!!
* * *~~~
(글의 맥락상 해야할 이야기라서 이어 적는다.)
몸을 어느 정도 가눌 수 있게 되자 아이들이 그리워서 견딜 수 가 없었다.
아들의 돌 하루 전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다시 소생해서 아이들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것이 가슴을 뛰게 했다.
능력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결과앞에 감사하며 설레이는 가슴이 아이들을 향해 앞서 달려갔다.
지난 여러 달 동안 두 아이는 엄마라는 존재를 잃어버린 듯 했다.
딸아이는 나에게 ‘언니’라고 불렀다.
아들은 서먹한 듯 거리감을 두고 이리저리 살피며 주변에서만 서성였다.
서먹해 하는 아이들에게 엄마임을 인식시키며 다시금 시골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의 술에 취하는 날이 잦아지고 불만과 불평의 술사가 밤 새도록 이어지곤한다.
견디다 못해 그 동안의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상세히 말해 주었다.
1년간 더 약을 먹어야 하고 회복기에 있는 환자로서의 상항과,
앞으로 어떻게 몸 관리를 해야 하는지 의사가 일러준 되로 말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겨우 살아서 돌아왔으니 조금의 배려를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관심도 갖지 않았고 주 중 2,3회 행사처럼 이어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서울로 돌려보낼 처세임을 취중의 그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생각에 잠겨서 누워 있던 남편이 내게 제의했다.
그는 단호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30만원을 줄 테니 딸아이만 데리고 서울에 가서 살라는 것이었다.
서울 어느 변두리에 가면 싼 방이 있고, 공장의 남자들을 상대로 의복을 세탁해 주는 일을 하면
두식구 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뜻밖의 제의에 의기소침하여 말없이 듣고만 있는 내게 그는 확인하듯 말했다.
만약 아들을 데리고 간다고 하면, 딸아이는 고아원에 데려다 줄 것이라고 한다.
그는 확고한 대답을 요구하는 차디찬 눈으로 날 주시하고 있었고,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는 코너에서 ‘노’ 든 ‘예스’ 든 분명한 의사 표시를 해야했다.
이미 결정된 문제를 놓고 나의 선택을 강조하는 그 앞에서 침묵한 채 생각해 보았다.
궁핍하고 불안한 생활은 지속 될 것이고, 그의 무분별한 행위를 벗어날 출구도 없고..,
스스로도 제재할 힘도 개선시킬 능력도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틀이 멀다하고 시달리느니 차라리 몸을 위해서라도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몇 날 후 30만원이 내게 주어졌다.
시어머니께서 해 주신것 같았다.
침울한 얼굴로 가방을 챙기는 곁에서
분위기가 이상한지 큰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는 어린 아들과 다시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 했다.
아들은 아빠 무릎에 앉아있어선지 울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린 눈망울 속에서 어디 가는지 묻고 있는 아들의 맘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런 말도 못한채 딸 아이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2달도 채 안된 시골 생활을 다시 접어야 했다.
쌀 한포의 외상값을 지불하고 가계를 나서는데 딸 아이가 힘없이 묻는다.
“엄마! 왜, ( )는 안 데리고 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동생을 찾는 딸아이의 물음에 그저 눈물로 답하며,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의 쓰라린 아픔을 억제하며 무작정 서울로 향해야 했다.
버스안에서 내내 두 사람이 눈물 속에 어른거렸다.
냉혹하게 이별을 선언한 그와 헤여지는 중이지만, 가슴 가득한 끝나지 않은 사랑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마음은 그들 곁으로 달려가는 아쉬움으로 차창밖에 초점없는 시선을 떨구고 있는 내 자신...,
감수성 깊은 딸아이는 덩달아 시무룩한 표정으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며 앉아있었다.
유난히 눈물이 많은 아이,
친정 집에 있을 때 TV를 보다가도 슬픈 장면이 전개되면 그들보다 더 우는 아이,
앙증맞게 앉아 소리없이 우는 그 모습이 애어른 같아서 피식 웃곤 했는데...,
모녀는 그렇게 말없이 울면서 떠나온다.
첫사랑! 그를 만남으로 얼마나 행복했던가 ?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던 마음으로 그를 위한 식단을 짜고,
그의 땀 향취가 묻어있는 옷을 세탁하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밥상에 올리는 일들이 더 없는 행복이였고,
그가 퇴근해 오면 발을 씻어주는 일도,
식후에 누우면 다리를 안마해주던 일들이 다 일상의 즐거운 낙이었던,
그가 웃으면 덩달아 나도 웃으며 마냥 좋아 했던 날 들,
그 일년간은 나에게 꿈 같았던 생애 젤 행복해 했던 날들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동상 이몽같은 현실이었던 것이다.
죽도록 사랑했기에, 이별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애절했지만,
이별이라는 현실앞에 독한 마음으로 결별을 선언하고 또 선언하며 떠나왔다.
서울 언니 집에서 지내며, 방 값이 싼 지역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 주일만에 상계동의 작은 방을 70만원 전세로 얻었다.
이사를 앞둔 몇날 전
시 아주버니와 시어머니가 아들을 업고 친정엄마를 앞세워 언니 집에 찾아왔다.
시어머니의 말인즉,
우리가 서울로 올라온 그날 이후로 남편은 아들을 할머니께 맡겨두고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짜고 아들을 할머니께 버리고 계획적으로 떠난것 같다는 것이었다.
친아들이 아니니까 버리고 간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왜 딸아이는 데리고 가면서
아들만 놔두고 갈 수 있느냐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당신도 친손인지 의심스런 아이를 키울 수 없으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며,
아들을 마루에 내려놓고 두 사람은 붙잡힐 세라 급히 달아나 버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꼭 빼 닮은 얼굴이었다.
손자라면 벌벌 떠시던 분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 황당할 뿐이었다.
기가 막혔다.
아들을 키운다고 하면 딸을 고아원에 버리겠다던 그가 아들까지 내게 맡겨버리려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되어진 일의 전후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아들을 업고 뒤따라 나갔지만, 이미 그들의 모습은 골목 안에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어의가 없었다.
문득 그의 계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시 어머니께서 친정집 가계를 알턱이 없었으니 말이다.
쾌씸한 처세에 갑자기 분노의 눈물이 억제할 수 없이 흘렀다.
30들고 쫒기듯 울며 떠나왔는데, 계속 약을 복용해야 하는 힘없고 능력 없는 내게
두 아이를 무조건 떠 맡겨 버리려는 그가 정말 경멸 스럽기까지 했다.
아들은 엄마가 없는 4개월동안 할머니를 엄마같이 의지했나보다.
다시 만난 엄마와 살면서도 가끔 뜬금없이 울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할머니가 보고싶었서 울었던것 같다.
아들은 말은 못해도
안보이는 할머니를 찿는지, 크게 울움을 터트린다.
등에 업혀 우는 아들과 같이 울며 골목에서서 한참을 서있던 내게 독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 살려 달라고 얼마나 애원했던가,
두 아이의 엄마로서의 길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삶의 과제인것이기에
그 과제 앞에서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변절의 수를 놓을 수 는 없는 것이었다.
'두고 보자, 나쁜 자식!
너 없다고 내가 못 키울 것 같아?!!
내게는 하나님이 계신걸 넌 모를 거다.'
지켜보고 있던 모친과 언니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울고 있는 아들 아이를 가만히 건네어 안았다.
그렇게 일단은 그가 없는 세사람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아멘, 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첫댓글 귀한 신앙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