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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이탈리아를 목졸라 살해하다"
이는 한국이 이탈리아를 누르고 8강전에 진출한 바로 다음날 실린 어느 외국 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어느 나라 신문인지 맞춰보라. 이탈리아냐고? 아니다. 정답은 중국이다.
베이징 지역에서 최고의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북경청년보는 6월19일 신문에서 여러 면에 걸쳐 한국-이탈리아전의 심판 오심 논란을 집중 부각시켰다.
이 신문은 에콰도르 심판이 이탈리아 선수에게 옐로카드를 내보이는 사진을 커다랗게 싣고, "한국은 붉은색, 이태리는 파란색, 심판은 검은 색"이라는 사진 설명을 달았다. 양국 선수와 심판의 유니폼 색깔을 빗대 심판 판정에 흑막이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긴 것이다.
북경청년보가 아닌 로마청년보를 보는 듯한 느낌
이날 실린 북경청년보의 월드컵 기사 가운데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도 있었다.
'대전은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이 아니다'
필자는 혹시 북경청년보가 이탈리아 선수들의 난폭한 경기 태도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은 것이 아닌가, 아니면 한국과 이탈리아 선수 모두에 대한 양비론을 실은 것인가라는 호기심으로 이 기사를 읽었다.
그런데 기사는 초지일관 한국 선수들을 걸고 넘어졌다. 한국 선수들이 경기 내내 이탈리아 선수들의 상의를 붙잡고 늘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기사의 마지막을 "한국의 승리는 아시아의 영광인가 아니면 치욕인가? 이런 식으로 경기하는 월드컵이 과연 재미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부호로 마무리했다.
이 기사 어디에서도 이탈리아 선수들이 한국 선수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했다든지 하는 등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이탈리아 선수들이 경기 내내 거친 플레이로 일관했으며, 연장전 당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한 토티는 헐리우드식 시뮬레이션을 시도하다가 옐로카드를 받은 것이라는 한국 언론의 보도와 유사한 내용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탈리아 쪽에 편향된 기사만을 싣고 있어 마치 북경청년보가 아닌 로마청년보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북경청년보는 한국이 포르투갈전에서 승리한 다음날에도 한국 어린이 축구팬의 사진을 싣고는 "장래에 이 어린이가 기억하는 한국의 포르투갈전 승리는 레드카드가 아닐까"라는 사진 설명을 달았다. 한국-포르투갈전에서 포르투갈 선수 두 명이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한 사건을 빗댄 것이다.
심판 판정 문제를 집중 부각
중국 최대의 국영 방송사 CCTV의 월드컵 중계방송 사회자들은 한국-포르투갈전에 이어 한국-이탈리아전 종료 직후에도 얼굴이 굳어 있었다. 축구 프로그램의 유명 사회자인 유건홍(劉建弘)은 경기를 보고 난 자신의 심정이 무척 복잡하다는 말로 경기 소감을 요약했다. 이웃 나라인 한국이 8강에 진출한 것은 잘 된 것이지만 자신들은 깨끗하고 공정한 월드컵 경기를 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회자 심빙(沈冰)의 얼굴 역시 그녀의 이름마냥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농구이고 축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스스로 밝힌 축구 중계방송 사회자 심빙은 한국-포르투갈전과 한국-이탈리아전 직전 한국의 붉은 악마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한국 축구팬들이 한국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같은데, 만약 한국팀이 진다면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분노한 한국팬들이 혹시 무슨 사고라도 저지를지 모르는데) 한국 경찰의 보안은 얼마나 철저한가라는 등 한국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한 듯한 질문을 월드컵 현장에서 취재하는 기자에게 퍼부었다. 또한 자신은 기술이 뛰어난 일본 축구를 좋아하며, 이번에 한국 축구를 본 소감은 플레이가 거친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두 사회자는 한국-이탈리아전 직후 이 경기가 한일 월드컵 기간 중 가장 멋진 경기였다는 AFP 기사를 소개하며 쓴웃음으로 이 기사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대신하기도 했다.
한국의 8강 진출 이후 공동개최국인 일본 언론은 전반적으로 한국의 선전을 축하하고 한국의 투지에 감탄하는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이에 비해 중국은 한국 축구의 승승장구의 비결을 한국 축구의 실력에서 찾기보다는 월드컵 개최국인 한국이 심판 덕을 보고 있다는 식의 논조를 펴고 있다. 그러면 왜 중국 언론은 한국 축구의 선전에 이 같은 질투 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중국팀 예선 탈락하면서 악의적 보도로 돌변
한일 월드컵의 중국내 중계권을 갖고 있는 CCTV의 보도 내용을 놓고 살펴 보자면 중국 언론의 한국과 한국 축구에 대한 보도는 월드컵 기간을 전후해 두 단계에 걸쳐 변화를 보인다.
첫 단계는 월드컵 개최 이전 중국 축구의 16강 진출을 목표로 내세우며 희망에 들떠 있었던 때와 중국팀이 조별 리그에서 브라질 등과 경기를 가질 때이다. 이때만 해도 한국과 한국 축구에 대한 긍정적인 보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한국 관광지와 음식 등을 집중 부각시키는 등 한국에 대한 보도가 일본에 대한 보도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마치 이번 월드컵이 한국에 의해 단독 개최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 대표팀이 자국 축구팬인 치우미(球迷)들에게 내건 16강 진출 목표에 근접하기는커녕 3차례의 경기 동안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자신들이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한일 양국에 비해 졸전을 치르자 보도 태도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국의 16강 진출에 이어 8강에마저 진출하자 한국 축구에 대한 부정적 보도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번 월드컵 직전 열린 한중 평가전에서 중국은 한국과 0대0으로 비겼다. 중국은 일본 축구는 자신들보다 많이 앞서 있지만 한국 축구는 이 무승부 경기로 이제 자신들과 같은 서열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은 사상 최초의 월드컵 무대에서 꼴찌의 성적을 기록한 반면 최대 라이벌이라 여기고 있는 한국이 경기장에서 펄펄 날고 있고, 8강에까지 진입한 것이 중국으로서는 믿겨지지가 않는 모양이다.
마치 이탈리아 언론이 한국이 8강전 티켓을 도둑질했다고 몰아가듯이 중국 언론 또한 자신들이 최대 라이벌로 여기는 한국이 중국팀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경기 성적을 거두자 한국의 승리는 한국팀의 실력이나 투혼 때문이 아니라 경기장 밖의 검은 거래 때문이었다고 치우미들에게 강변하는 분위기다.
한국을 우습게 보는 중국인들
중국의 한국 축구에 대한 걸고 넘어지기에는 평소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오만함도 한 가지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재 중국이 두려워 하는 국가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 뿐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여전히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점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고 있지만 일본 경제가 10년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을 추월할 것이란 자심감이 중국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1인당 GDP에서는 중국보다 10배 가량 많지만 전체 GDP에서는 이미 중국에게 추월당한 한국은 이미 중국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도 아니고 축구 경기장도 아닌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벌어진 중국 공안의 한국 외교관 구타 사태가 중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중국 언론이 한국 축구를 낮춰보는 태도에 한국도 약간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중국의 한국 축구에 대한 깎아내리기식 보도 태도는 한국 심판인 김영주씨의 터키전 오심 논란으로부터 시작해 서귀포 구장의 독일-파라과이 8강전 공석 사태와 전주구장의 미국-멕시코 8강전 공석사태로 확대돼갔다. CCTV의 사회자 유건홍은 월드컵 8강전인데 저렇게 공석이 많아서 과연 성공한 대회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을 월드컵 기간 여러 번 되풀이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월드컵 조직위원회도 책임질 부분이 많지만 공석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FIFA에 있는데, CCTV는 이에 대해 잘 몰랐는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 경기장이 상대적으로 꽉꽉 들어찬 것은 영국-아르헨티나전 등 빅경기가 주로 일본에서 열린 것도 한 요인인데 이에 대해서는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중국, 히딩크 감독 영입에 관심
그러면 스스로를 '동북아 3대 축구강국'의 한 곳으로 부르고 있는 중국은 이번 월드컵 경기 동안 한일 양국에 비해 자국 선수단의 성적이 매우 부진했던 이유를 어디에서 찾고 있는 것일까?
귀국 이후 중국 대표단이 CCTV에 출연해 가장 많이 지적한 이유는 중국이 한일 양국에 비해 월드컵전 유럽, 남미 등 강팀과의 평가전 기회가 적었다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강팀과 경기를 가져봤기 때문에 충분한 자신감을 갖고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았던 반면 자신들은 태국 등 약한 팀들만 상대했기 때문에 그런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팀의 선전 이유로 히딩크의 지도력을 꼽고 있다. 그래서 중국은 현재 히딩크를 노리고 있다. CCTV 월드컵 중계방송 사회자인 유건홍은 히딩크가 이번 월드컵이 끝나면 한국을 떠날 가능성이 큰데 그를 중국으로 데려오는 것을 검토해봐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그동안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월드컵 기간 중국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보라 밀로티노비치 역시 히딩크에 버금가는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는 축구감독이고, 밀로티노비치가 중국팀과 함께 한 기간이 히딩크가 한국팀과 함께 한 기간보다 길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밀로티노비치는 잘 알려졌듯이 코스타리카와 멕시코, 미국팀을 모두 월드컵 16강전에 진출시켜 세계 축구계에서 16강전 보증수표로 통했다. 밀로티노비치 감독이 맡은 국가대표팀 가운데 유일하게 16강전에 진출하지 못한 국가는 바로 중국이다.
'중국의 라이벌' 한일 양국이 월드컵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두자 벌써부터 중국은 4년 후를 내다보며 걱정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은 공동개최국인 한일 양국이 본선 진출권을 자동적으로 얻게 돼 중국이 예선전에서 손쉬운 상대들을 만나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한국과 일본이 돌아오는데' 과연 중국이 다시 월드컵 본선에 오를 수 있을지 우려하고 있다. 특히 북경청년보는 한국-이탈리아전을 계기로 이미 사라진 공한증이 다시 생길까 겁난다고 지적했다.
CCTV를 비롯한 중국 언론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이 트루시에를 영입해 4년 동안 준비하고, 한국이 히딩크와 함께 1년6개월 동안 준비한 것처럼 자신들도 앞으로 준비만 철저히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8천만 치우미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중국 축구 선수들과 청소년들을 대거 유럽으로 보내고, 히딩크나 세네갈의 메추같은 뛰어난 외국 감독을 영입하자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앞으론 한ㆍ중ㆍ일 축구 삼국지 시대
필자는 당장은 중국 축구에 대해 맘을 놓고 있지만 솔직히 10년쯤 후의 중국 축구에 대해서는 좀 걱정이 된다. 중국은 급성장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축구에 대해 '인해전술식' 퍼붓기 투자를 할 자세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미 축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종목에서 세계 정상급의 실력을 과시하고 있다. 중국이 한국보다 훨씬 더 뜨거운 축구 열기를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를 해나간다면 한국이 늘 중국 축구에 우위를 점할 것이란 보장을 하기는 힘들다.
중국이 현재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은 일본이다. 일본이 청소년 선수들을 대거 브라질에 유학시킨 것처럼 자신들도 개인기에 기반한 남미의 기술축구를 배우겠다고 중국 축구협회의 고위 관계자가 최근 CCTV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열린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한ㆍ중ㆍ일 3국 모두가 역사를 만들어 냈다. 중국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아봤고, 일본은 16강에 들었으며, 한국은 8강을 넘어 4강, 결승까지 바라보고 있다. 한국이 가장 크게 웃고 있고, 일본도 한국 못지 않은 기쁨을 누렸으며, 중국 역시 월드컵 본선 경기라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이번 월드컵은 장기적으로 동북아 축구의 '삼국지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일본과 중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승자의 자리를 계속 굳히기 위해서는 월드컵 이후에도 중ㆍ일 양국 못지 않은 축구에 대한 열정과 투자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붉은 악마와 거리 응원전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월드컵 열기가 청소년 축구선수의 체계적인 육성과 프로 리그의 활성화로 이어져 한국 축구의 승리가 계속될 때 중국 언론들도 더 이상 한국 축구에 대해 걸고 넘어지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