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듣고 입으로 따라 부르다 보니 저절로 익혀져서 흥얼대기도 했다. 자라면서 새롭게 듣는 노래들은 곡의 흐름과 가사에 따라서 점점 감성에 자극을 받기도 하고 어떤 스토리에 연결되면서는 입으로 노래하고 마음속으로는 그림을 그려나가는 습성도 생겼다.
소년 시절에는 새벽기도 후에 찬송가를 즐겨 불렀고 자연으로 나가서 멀리 길을 걷거나 산책할 때에도 혼자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생각하면 노래를 장르별로 구분할 줄도 모르고 동요나 민요나 대중가요는 어렵지 않지만 우리 전통 가곡이나 국악 판소리 같은 음악은 듣기는 좋아도 어려워서 부를 줄은 몰랐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나 가스펠송이나 국내외 현대 가곡은 배우기도 쉽고 감성에도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가장 많이 쉽게 들을 수 있으면서도 따라 부를 수도 있는 대중가요 트로트는 흔히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서 마음속에 묻고 사는 사람들 간의 이야기들을 곡을 붙여서 노래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주제곡들이 이야기와 함께 오래 머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즈음 코로나19는 우리 모두에게 코와 입을 막고 발걸음조차 제한시켰다.
요즘 여성들의 얼굴이 거의 비슷하게 예뻐졌다. 하얀 마스크는 모두가 갖는 얼굴 꾸밈새를 위한 장식처럼 보이면서 눈으로 말하고 눈으로 대답하는 눈빛이 많은 사람들이 거의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그러다 보니 마음도 모두가 통일 된 것처럼 착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마스크는 답답하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강조 받다보니 가까운 이웃과의 만남조차도 자재하게 되었다. 불안감이 커지고 우울 증세까지 많이 보인다고 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의 안방까지 찾아준 사람들이 트롯 맨들 이었다고 말한다.
며칠 전에 홍지민과 임영웅의 듀엣으로 부른 ‘노래는 나의 인생’은 한 순간 나를 매혹시키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매끄러운 가락과 리듬을 갖춘 화음으로 혼신을 다하여 서로의 가슴에 묻힌 사랑을 아름다운 고백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서로 간에 손끝 한 번 스치지 않으면서도 눈과 눈만으로 서로의 깊은 심정들을 뿌리 채 담아내어 화답하는 모습에서는 그들의 소리와 숨결이 하나가 된 것처럼 순간 나도 그들 속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애절한 가사 내용을 소리로 건네주고 받을 때 이것이 아니었느냐고 서로가 확인하는 것은 그들만의 소리도 몸짓만도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음색은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지만 그들의 눈빛은 무엇으로도 방해 받지 않는 강렬한 시선이었다.
모든 것을 담아내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확인하는 힘이 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주어진 시간은 단 3분에 불과했다.
그제 밤에 TV로 보여주는 영화 천일의 앤에서 앤이 왕과 사랑을 나누던 1000날 중에서 진정한 사랑을 마음으로 가졌던 날은 단 하루에 불과했다고 스스로 고백하며 회고했다.
오늘 나의 눈은 어디를 향해서 시선이 머무르는가? 나의 전신을 담아 시선을 보내줄 곳은 어디인가? 정확하게 잠시나마 서로 화답해 줄 사람은 있는 것일까?
성경에서 거지 바디메오는 앞을 볼 수 없었음에도 예수님과 시선 한번 맞추고 나서 영육간의 복을 당장 받게 되었고
예수님 볼 것을 마음 깊이 염원하던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시선을 맞추더니 역시 영복을 누리는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가수 두 사람이 3분 동안 완벽하게 열창으로 빚어낸 듀엣이나
왕과 왕후가 세상의 권세와 영예를 위한 천일 속에서 건져낸 하루도
이 땅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세상이 주는 것이기에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점점 빛이 바래지고 낡아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참 평안과 기쁨을 약속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한 순간도 변함없이 영원하실 것이라는 음성으로 들려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