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들꽃 그리고 들꽃 교회 ㅡ 평신도설교주일(주찬웅 장로): 2015년 8월 9일
지난달 이 목사님께서 평신도 주일 설교 권유로 주신 설교 숙제를 맡게 된다면, 적절한 말씀 주제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 주제는 어떤 것으로 정할 수 있을까? 등 머리속 여러 생각으로 며칠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저녁 마다 집사람과 함께 아파트 주변 공원을 산보 시간을 갖곤 하는데,
어느 날 그냥 무심코 지나치던 공원 들꽃들이, 제 눈에 좀 더 가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순간 동시에 우리 교회 이름도 함께 떠올려졌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 들꽃 과 들꽃 교회” 로 정해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들꽃 교우들은 아름다운 생활 이름도 각기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름이란 매우 소중합니다.
사람 뿐 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은 각기 다른 언어로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 속에 그 대상의 함축된 특성, 비전, 희망, 노력의 지향점, 심지어 상처까지도 포함되어 기억되고, 그 이름들이 불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꼭 알 맞는, 좋은 이름을 누구나 갖기를 원하고, 또한 좋은 이름에 걸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노력합니다.
따라서 비싼 돈 들여 작명하기도 하며, 훌륭한 사람에게 작명을 부탁하기도 하거나, 개명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누가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비난이나 조롱을 할 때면, 우리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특히 부모 이름을 두고 결심과 다짐도 하는 결연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좀 하라고 하라고 다른 사람을 나무라기도 합니다.
과거 영아 사망률 높았던 시절, 개똥이 소똥이 등 천한 이름을 임시로 지어줘서 아이에게서
귀신이 찾아들지 않도록 하는 전략적 작명도 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이름 앞에서 매우 부끄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창을 가진자” 란 의미를 가진 ‘폰티우스의 필라토스’ 주인공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전 세계 신앙 선배들에 의해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드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인 사도신경이 고백될 때 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께 고난을 지게 한 사람, 아주 나쁜 자란 이름으로 불리고 암송됩니다.
1주일 내내 예배는 어느 형태이든지 지구상 곳곳에서 지속되고, 이 신앙고백도 곳곳에서 언어는 달라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빌라도는 죄 없는 사형수 최종 결정을 한 이름으로, 그래서 영원히 아주 나쁜 자의 이름으로 계속 불리워 질 수밖에 없어 아마도 듣는 그 죄인도 무척 괴로울 것이라 짐작합니다. 게다가 자기 고향 폰티우스까지도 싸잡아서 고향을 욕을 먹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본디오 사람 빌라도로 이 세상 끝 날까지 불려 질 부끄러운 이름과 비견되는 이름 이 또 하나 있습니다. ‘가리욧 사람 유다’ 역시 영원한 배신자의 이름입니다.
창세기 2장 19-20절, 아담에게 첫 임무로 온갖 피조물 생물의 작명 기회를 다스림에 앞서서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23절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자기 아내의 하와라는 이름도 아담에 의해서 작명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6절을 봅시다.
하나님 손바닥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놓으신다고 증언합니다.
여러분의 손바닥에 자녀 이름을 새기기까지 하십니까?
그런데 전지전능하시기에 영원한 기억을 가지고 계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손바닥에 까지
사랑하시는 이름을 새기고 간직하신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함부로 이름을 바꾸지 마세요.^^
이미 내 이름이 하나님 손바닥에 있습니다.
내 이름을 빌라도나 유다 같이 나쁜 이름이 되지 않게 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도 됩니다.
이렇게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너무나도 중요한데, 들꽃 교회 이름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들꽃 교회 이름에 담겨진 신앙적 비전은, 그 간직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제가 말씀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 그 뒤부터, 들꽃들을 보고 지나면서 그들의 아름다운 특성들을 하나씩 찾고자하는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제 눈에 비쳐진 들꽃의 아름다움 특성들을 통해서, 들꽃 교회 공동체가 노력하는 아름다운 신앙 모습으로 함께 그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는 들꽃 교회 식구로 지난 1년간 함께 지내면서 참 좋은 교회 이름, 그 이름 들꽃을 어떻게 처음에 선정하게 되었을까, 무슨 특별한 의도나 사연 또는 의미기 있는지 모르겠다며 궁금했지만 아직도 이 점에 대해 이 목사님께 특별히 문의 드린 바도 없습니다.
물론 제가 지금 표현하고 느끼고자 하는 들꽃 이름의 의미와 표현도 이 교회의 시작과 함께 내건 들꽃 이름의 비전과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것 같이 이름을 지을 때, 얼마나 소중한 단어를 이름으로 선택하는지를, 또한 귀한 이름을 나타내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다시 말씀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제가 준비한 오늘의 말씀 주제로 제 눈에 보여진 들꽃의 아름다움을 한가지 씩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들꽃의 아름다움을 들꽃 교회 신앙 공동체가 노력하고 지향하는
신앙의 아름다움과 함께 견주고 싶었었습니다.
제 눈에 비쳐진 들꽃의 아름다움은 대부분 들꽃들이 꽃의 크기가 작다는 것입니다.
크지 않다, 크기를 뽐내지 않는다는 겸손을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또한 비슷한 크기로 무리와 함께 어울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균형과 조화의 공동체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공동체 역시, 들꽃 무리 같이 겸손과 조화의 공동체로 걸어갈 이길
또한 대부부 한 가지 색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는 색을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아마 혼란스런 조합을 지양하고 단조로움 속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봅니다.
아마도 자기의 단색조는 다른 꽃 색과 함께 하기 쉽게 하기 위한 배려의 정신이라 사료됩니다.
또한 피는 색깔과 모양이 주변 다른 들꽃들과 어색하지 않기 위한, 결국 어울림과 조화, 관용과 이해, 나눔과 사랑의 미덕이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일 겁니다.
또 하나, 꽃 자체의 크기나 색깔이 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미처럼 꺾일 염려도 없습니다. 겸손과 절제, 가냘퍼 보이지만 허리를 지지해주는 바람이 있기에 부러지지 않고, 꼿꼿하고 강인하기도 합니다.
무심코 지나는 자의 발자국에 넘어졌다가도 일어서는 강인함, 건강하고 강인한 믿음은 온실 같은 특별한 가꿈 없이도, 자생력과 건강한 생명력으로 자기들이 서있는 위치를 통해 버려진 빈자리를 채우면서도 자기 위치를 욕심내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장 적당한 곳을 채우는 들꽃이야말로 희생과 봉사의 미덕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계절을 정확히 꽃으로 나타내는 긴장감으로 게으름이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철을 앞서거나, 처지거나 하지 않는 가장 적절한 때 자기 모습을 드러냅니다.
난 봄에 들국화, 가을에 진달래를 본적이 없습니다.
꽃 자체가 가장 적절한 철(때)이 들어 있어서 철을 잃지 않으려는 성실한 긴장감과 순종의 정신이 가득합니다.
요즘 미래를 기대하는 청소년들에게 하는 말이 ‘언제 돈 벌래’ ‘언제 취직할래’ 라면 과거에는 ‘언제 철들래’ ‘언제 클 래’ , ‘언제 나이 값 할래’ 였습니다.
심지어 야단 칠 때도 ‘철딱서니 없다’는 말이 주류였지요.
그러나 들꽃은 제 철을 꼭 알맞게 간직하고 표현하는, 들꽃은 정말 제대로 철들은 피조물임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가물어도 생존하는 들꽃, 비를 기다리는 인내, 무관심에도 초조하지 않는 인내를 보입니다.
꽃은 다가오는 이의 시각을 미소로 행복하게, 잔잔한 향기로 후각을 훈훈하게, 줄기와 잎의 푸르름은 가슴에 생기를 선사하고, 꽃은 제철 과일같이 맛까지도 제공하는 섬김의 사명을 감당하며, 관찰하는 사람에게 평화의 미소를 선물하고,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좋아하게 만들어 깊은 친교와 교제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시 한 수 같이 읽어 볼까요!
- 풀 꽃 - 나태주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꽃 자체가 빈자리 주변으로 스스로 번져나가 아름다움을 퍼져나가게 하듯 꽃 관찰자도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입소문으로 전파하는 복음 과 전도의 능력도 있습니다.
들꽃은 주변에 신선공기와 숲, 오솔길과 공존하면서 휴식과 평안을 가져다주며, 회복까지도 제공하고, 풀벌레 소리와도 공존하는 평화주의자입니다.
잡초와는 모습이 확실히 구분되어, 잡초의 확산을 막기도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도 하지요.
이렇게 들꽃의 수많은 아름다움과 특성들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들꽃의 정원사이시기 때문입니다.
- 들꽃 언덕에서 - 유안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을
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
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
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오늘의 말씀 안에(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모두 들꽃정원의 아름다움에 깃들여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인내)과 자비(친절)와 양선(선함)과 충성(신실)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만일 그 전체 중심에 맨 처음의 사랑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죠.
예수님이 공생애 이전 생활하신 광야에서 예수님의 눈에 함께한 민중들은 들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접하신 향기는 민중의 향기였습니다.
세상적인 화려함은 없었을지라도 예수님 앞의 광야는 들꽃 동산입니다.
그러니 들꽃 민중들에게 구원의 양식을 주시고, 오병이어로 먹여주시고, 평화 소망 주신 예수님을 들에 핀 백합으로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의 들꽃, 그 들꽃 아름다움을, 이름부터 나타낼 수 있는 신앙공동체가 바로 들꽃 교회입니다. 그래서 들꽃의 건강한 생기를 지니기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로, 또한 제대로 이름에 걸맞게 살도록 노력하는 교회로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칭찬되길, 함께 소망합니다. 또한 들꽃의 아름다운 미덕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는, 성령의 풍성한 열매가 기대되는 들꽃 교회, 사랑으로 시작하여 절제로 마무리 되는 들꽃 공동체에게 정원사이신 주님께서 시작하시고, 가꾸시고, 거두시려는 들꽃 교회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결국 주님의 따뜻한 손바닥에 들꽃 교회 이름과 함께 우리들의 각자 이름을 선명하게 새겨 주실 것 이라고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