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DJ의 리베로’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건대
‘DJ의 리베로’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두 차례의 전국구 의원 공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민주당 총재비서실장, 문화관광부 장관. ‘풍운아’ 김한길의 앞길에 거침이 없다. 배경도 없고, 정치권 ‘짬밥’으로야 이제 막 신인티를 벗었다고 할 그가 ‘거물’로 급부상한 사연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hans@donga.com" target="_blank"> 기자hans@donga.com
9 월20일 김대중 대통령이 김한길(48) 민주당 의원을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하자 한 시사주간지는 “DJ의 ‘보은형 인사’와 ‘리베로형 인사’의 복합형”이라고 비난했다. 보은형 인사란 DJ가 97년 대통령 선거 때 입은 은혜를 인사로 갚는다는 뜻이고, 리베로형 인사는 DJ가 한번 잘본 사람은 일의 성격에 관계없이 전천후로 중용한다는 의미다.
그런 인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가치 판단을 논외로 한다면 김대통령과 김장관의 관계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97년 대선에서는 사상 최초로 후보들의 TV토론회가 벌어지는 등 영상 미디어 선거전이 당락에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당시 김대중 후보측의 방송대책팀을 이끈 김장관은 참신한 감각과 빼어난 순발력으로 TV 시청자들의 폐부를 꿰뚫어 DJ가 1.6% 표차로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이를 계기로 김장관은 선거가 끝난 뒤에도 DJ의 리베로형 특급참모로 활용됐다.
DJ는 그를 대통령당선자 공보팀장,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대변인, 국민회의 총재특별보좌역,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민주당 총재비서실장 등의 핵심요직에 잇따라 기용하며 곁에 머물게 했다. 또한 98년 6·4 지방선거 때는 수도권 미디어대책본부장을 맡겼고, 지난 4·13 총선 때는 민주당 총선기획단장에 앉히는 등 선거 때마다 그의 지략을 빌려 김장관에겐 ‘DJ의 딕 모리스’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김장관은 92년 대선 직전 국민당에 들어가 정주영 대표의 공보특보를 맡으며 정치권과 연을 맺었지만, 본격적인 정계 입문은 96년 국민회의에 입당, 전국구 공천을 받아 15대 의회에 진출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시간적으로야 이제 막 정치신인 티를 벗었다고 할 그가 동교동 30년 가신들도 꿈꾸지 못할 ‘거물’로 뛰어오른 요인은 무엇일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정치권에서의 경험은 짧지만, 김장관은 여고 교사, 소설가, 구성작가, 기자, 방송인 등 다채로운 경력이 있다. 그는 한때 ‘벗기는 소설’을 쓴 작가로 알려진데다 낭인 생활을 한 적도 있고, 약간의 ‘불량기(?)’까지 풍기는 자유분방한 언행 때문에 정계에 들어간 후에도 ‘건달’의 이미지를 쉬 떨쳐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은 하나같이 “껄렁껄렁한 겉모습만 보고 김한길을 판단했다간 큰코 다친다”고 경고했다. 그들이 말하는 ‘김한길의 진면목’은 ‘매우 성실하다. 의원회관에서 가장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데가 김한길 의원 방이다. 잠을 하루 평균 3∼4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한다. 화투나 포커도 못친다. 워낙 꼼꼼해서 답답할 만큼 작은 것까지 일일이 챙긴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김장관의 청소년기는 불우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의 부친은 한국 진보정당의 선구자인 전 통일사회당 당수 김철씨다. 군사정권 치하의 진보주의자. 신산한 삶은 부친뿐 아닌 온 가족의 몫이었다. 김장관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늘 민주화와 민족과 못사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면서 정작 당신이 거느린 식솔들에게는 한없이 무력했던 분, 세상에서는 옹고집 반골로 불리면서도 정작 당신 둘째 아들의 반항에는 속수무책이던 분, ‘통일이고 민주화고 개뿔이고 간에 아버지, 제발 우리한테도 좀 신경을 써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들면 말없이 한숨만 내쉬시던 분”이었다.
71년, 김한길은 정원 20명에 21명이 응시한 건국대 국문과 입학시험에서 ‘당당히’ 한 명을 물리치고 합격한 뒤 모친이 달러빚을 얻어 마련한 등록금 덕분에 대학생이 된다(나중에 정치외교학과로 전과). 대학에서는 ‘예평회’라는 문학·예술평론 서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곧 유신시대의 막이 올랐지만,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기관의 감시대상이던 김한길은 시위에 나서지도 못했다.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이 서클에서 후배들을 지도했던 김홍신 한나라당 의원은 “김한길은 리더십도 있었고 모임에도 적극적이었으며, 문학적으로 이견이 있을 때는 끝까지 따져드는 등 매우 치열하게 살던 후배라 남달리 애정을 쏟았다”고 기억한다.
대학생 김한길은 친구들에게 ‘부드러우면서도 어려운 친구’였던 듯하다. 동기생인 송영석 도서출판 해냄 대표의 회상.
“얘기를 나눠보면 더없이 부드럽고 유머러스하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한 천착과 깊이있는 사고 때문에 가끔은 경외감까지 들게 한 친구였다. 그래서 30년지기면서도 그때나 지금이나 한길에겐 막말을 못한다. 그의 흑석동 산꼭대기 집에 처음 갔을 때 방안 가득 쌓인 엄청난 책 무더기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대단한 독서량이었다. 겉으로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친구가 벽에다 시간계획표까지 세세하게 써붙여 놓은 것도 놀라웠다. 학과성적도 올A였다.”
구두닦이 생활을 하느라 1학년을 3년이나 다니고 택시 스페어 기사 노릇까지 하는 등 곡절 많은 대학시절을 보낸 그는 입학한 지 8년만인 79년에 졸업장을 받았다. 80년에는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돼 등단의 꿈을 이뤘지만, 81년에 돌연 미국으로 떠난다.
병정일기
미국행을 단행한 데는 몇가지 계기가 있다. ‘누구의 아들’인 이상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기는 애초부터 틀린 일이었다. 유일하게 기댈 기둥은 문학이었는데, 여기에도 횡액이 닥쳤다.
제대하고 복학해서 군복무 시절 얘기를 소재로 ‘문학사상’에 ‘병정일기’를 몇회 연재했는데, 참신하다는 평과 함께 출판제의가 빗발쳤다. 작가 한수산은 “우리는 6·25 이후 수십년간 이만한 병영문학을 갖지 못했다”고까지 했다. ‘병정일기’중 한 편을 읽어보자.
‘훈련병 생활이 끝났다. 이등병 계급장을 받았다. 험상궂은 표정과 욕설과 발길질 속에, 점잖은 공갈 속에, 우리는 군대를 배웠다. 틀려도 다 똑같이 틀리기만 하면 괜찮은 군가를 배웠다. 수십 가지 기합의 체위를 배웠다. 남보다 편할 수 있는 요령을, 괜한 상소리를 배웠다. 얄팍한 거짓 웃음과 애교를 배웠다. 그리고 분노를 배웠다. 그것을 삭이는 인내를 배웠다. 지쳐 쓰러진 친구가 뺨맞는 것을 차려 자세로 지켜보면서, 영하 18도의 새벽 2시에 팬티바람으로 기어 언 땅을 녹이면서 우리는 증오와 굴종을 배웠다. 그래서 우리는 겨우 이등병이 된 것이다. 장군이 되려면 무엇을 얼마나 더 배워야 하는가.’
그러나 그의 집 앞에 맨먼저 달려온 것은 출판사에서 보낸 차가 아니라 보안사 요원들을 실은 검은색 지프였다. 지하실에서 흠씬 두들겨맞고(그는 지금도 치아가 좋지 않다)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각서까지 쓰고 겨우 풀려나왔다. 취직도 안 되고 글도 못 쓰는 이곳에선 더 희망이 없었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도 마침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렵사리 여권을 얻어 결혼한 지 20여일 만에 아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생활도 파란만장했다. 건축현장의 막노동, 햄버거집 주방장 보조, 주유소 밤 당번을 전전하다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 자리를 얻어 다시 볼펜밥을 먹게 됐다. 아버지에 대한 죄송스러움을 떨칠 수 없었던 데다, 한국에서 전해지는 민주화 투쟁 소식을 듣고 ‘도피자’의 자괴감 때문에 더운 물 샤워를 하지 못했다. 주말에 피크닉 가는 것도 꺼렸다. 그저 게걸스럽게 일에만 매달리며 부채감에서 벗어나려 했다”고 말한다. 아내는 그런 그를 ‘행복해질까봐 겁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무렵 가수 조영남씨는 샌프란시스코에 연주회를 하러 갔다가 취재 나온 김한길 기자를 만났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가 ‘병정일기’와 ‘미국일기’를 건네주기에 호텔에서 심심풀이로 뒤적거리다 어느새 글에 빠져들어 밤을 꼬박 새웠다. 조씨의 말.
“그때껏 산문이라고 하면 김승옥 이제하 오태석의 감수성을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김한길의 글을 읽어보니 우리말로 쓸 수 있는 또다른 영역의 산문이 있구나 싶었다. 김승옥 이제하 오태석의 글엔 어쩔 수 없이 의식이 배어 있는데, 그의 글은 얼마나 투명한지, 마치 어린아이의 영을 보는 듯했다. ‘얘 이거, 생텍쥐베리잖아’라는 혼잣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러면서도 펜끝이 예리했다.”
그후 두 사람은 아삼륙이 돼 어울렸다. 조씨의 드문 히트곡인 ‘화개장터’의 가사를 써준 사람이 바로 김장관이었다. 조씨는 87년에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고속 출세
“그때 나는 이혼하고 보따리 싸서 나와 개포동 독신자 아파트에 처박혀 있었다. 젊은 여자와 바람나서 가정을 버린 놈이 됐기 때문에 2∼3년은 방송출연도 못하고 죽어 지낼 각오를 했다. 너무 무료해서 한길이에게 전화를 걸어 ‘심심해 죽겠다. 여기 와서 나랑 살자’고 했다. 그 무렵 한길이도 이혼을 한 데다가 미국생활에 지친 듯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길이가 정말로 돌아왔다. 더플백 하나 달랑 메고 슬리퍼 질질 끌면서. 그날부터 진짜 한심한 생활이 시작됐다. 둘 다 하도 할 일이 없어 벌건 대낮에 나란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다가 천장 벽지 무늬가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토론’하던 생각이 난다.”
조씨의 ‘백수’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얼마 후에 방송출연 제의가 들어와 슬슬 방송국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김한길은 그때도 일이 없어 조씨를 따라 ‘슬리퍼 신고’ 방송국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김한길의 ‘고속 출세’에 불이 붙더라고 한다.
“언젠가 방송국에서 한길이가 대학동창인 PD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친구더러 ‘야, 넌 무슨 시사 프로그램을 그 따위로 만드냐’고 했다. 그랬더니 그 PD가 ‘그럼 네가 와서 해봐’ 했다. 며칠 후 그 방송국 부장 PD가 한길이 원고를 받으러 우리집에 와서 한길이가 잠깰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또 얼마후엔 한길이가 ‘형, 나 어제 KBS 본부장하고 술 마셨어’라고 지나가듯 말했다. 처음엔 허풍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또 좀 지나니 이번엔 방송위원회 사무총장으로 갈 것 같다기에 또 사기치는 걸로 알았는데, 정말 그 자리로 갔다.
옆에서 얼쩡거리고 있다가 잠시 안 보인다 싶어 눈을 돌려보면 그는 저만치 올라가 있었다. 신출귀몰, 그렇게 수직상승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국회의원 출마한다는 말도 안 믿었는데, 정말 나갔다. 선거에서 떨어지기에 이젠 좀 쉬겠지 싶었다. 그런데 한두 해쯤 지나서 ‘형, 나더러 청와대(YS)에서도 오라 하고, DJ쪽에서도 오래’ 했다. 그 말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진짜였다.”
96년 4·11 총선을 앞두고 김한길은 여와 야 양쪽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 그는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지금의 여당 구성원 중에는 우리 아버지를 잡아다 고문하고 못살게 굴던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내가 그런 사람들과 정치를 같이 하며 동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YS는 “그런 사람들은 다 물갈이 할 테니까 걱정말라”고 했다. 그러나 ‘물갈이’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는 야당인 국민회의를 택했다.
DJ 대통령 만들기
이듬해 대선에서 김한길 의원은 발군의 감각으로 DJ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천하의 DJ도 TV 카메라 앞에서는 방송시스템의 생리를 꿰뚫고 있던 그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다. 그는 유세방송이나 TV토론을 앞두면 DJ가 아무리 바빠도 옷자락을 잡아끌어 반드시 한번 이상 리허설을 한 다음에야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허락’했다. 사투리와 발음교정, 메시지 전달, 표정 변화, 조크 구사 등을 하나하나 훈련시켰다. 대통령의 2분짜리 TV 멘트 문구를 다듬느라 호텔방에서 꼬박 밤을 지새기도 했다.
8월초 DJ는 주부대상 토크쇼 ‘임성훈입니다’에 출연했다. 이날 시청률은 30%가 넘어 이 프로그램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주부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봤다는 얘기다. 이날 DJ는 전처 차용애씨를 회상하는 대목에서 눈물을 글썽거렸는데, 이 모습이 절묘하게 클로즈업됐다. 물론 DJ가 일부러 눈물을 흘린 건 아니었지만, 김한길 방송대책팀장이 치밀한 ‘각본’과 사전조율로 자연스럽게 눈물을 유도한 결과였다.
이 장면이 전국의 주부를 울렸다고 한다. ‘DJ도 눈물이 있는 사람’이라는 연민의 정을 자아냈던 것. 그때까지만 해도 DJ에 대한 성별 지지율은 남성이 여성보다 10% 가량 높았다. 이 비율은 몇 년째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나가고 열흘 후에 성별 지지율을 조사한 결과 여성의 지지율이 남성의 그것을 미미하게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9월28일 도쿄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예선 한·일전에 선거캠프의 만류를 뿌리치고 DJ를 보낸 것도 김한길 팀장이었다. 당시 일본팀이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한국팀이 질 경우 선거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DJ의 방일을 반대했다. 그러나 김팀장은 ‘한국이 져도 DJ에게 유리한 일곱 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들이대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축구 한·일전이 진행되는 동안은 지역갈등을 떠나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드문 기회이며, 설사 경기에 진다 해도 DJ가 풀죽은 우리 선수들을 힘차게 격려하는 광경이 TV에 비치면 DJ에게 플러스 효과를 가져온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한국팀은 통쾌한 역전승으로 DJ의 어깨를 가볍게 했고, 이 자리에서 김대중-박태준의 DJT회동이 이뤄지는 부수효과까지 얻어냈다.
DJ로서는 그런 김한길 장관에게 단단히 ‘빚’을 졌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선거를 앞둔 마지막 TV토론을 끝내고 방송국을 나오던 날 밤, DJ는 귀가하지 않고 차 안에서 10여 분을 기다렸다. “김한길 의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며. DJ는 당선된 뒤에도 ‘국민과의 대화’, 취임 1주년 기념 회견, 8·15 경축사 등 미디어와 관련된 굵직굵직한 사안들은 대부분 김장관에게 맡겼다. DJ는 김장관의 부친인 고 김철씨와도 인연이 있다. 71년 대통령선거에 김대중 후보 등과 함께 입후보했던 김철씨는 야당 후보들이 난립하자 박정희 정권 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야당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며 맨먼저 후보에서 사퇴했다. DJ는 이를 매우 고맙게 여겼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설득력’
DJ가 김한길 장관을 신뢰하는 이유는 비단 동물적인 선거감각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복잡한 사안을 한 눈에 파악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대책을 제시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한다. 정동영 민주당 의원은 “그는 매우 깊이있고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며 “같은 사안도 뛰어난 분석력을 바탕으로 조각이 아닌 전체로 이해, 그 인과관계와 사회적 의미까지 입체적으로 밝혀내 ‘역시 작가 출신은 다르다’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고 말한다. 복잡다단한 국정을 큰 틀에서 통할하는 대통령의 입장에선 이렇듯 신속한 판단과 결정, 집행능력을 지닌 참모가 지근거리에 있으면 그것처럼 편한 일이 없다. 김장관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던 지난해 7월,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의 자세를 택시기사에 비유한 바 있다.
“유능한 택시기사는 손님이 서울역으로 가자고 하면 을지로로 갈 것인지, 퇴계로로 갈 것인지 묻지 않는다. 그러려면 평소 어느 길이 가까운지, 얼마나 막히는지 지도도 봐놓고 교통방송도 열심히 들어둬야 한다. 어떤 기사들은 길이 막혀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손님에게 미리 길을 묻는데, 이건 손님을 모시는 자세가 아니다. 손님이 시청까지 30분 안에 가야 한다고 말하면 그 다음은 택시기사가 알아서 하듯이 우리도 대통령을 그렇게 모셔야 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 조영남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분위기를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건달 노릇을 할 때 한길이가 단편소설을 청탁받은 적이 있다. 그는 ‘글 쓸 기분이 아니다’고 했다. 그래서 ‘할 일도 없는데 한번 써보지 그러느냐’고 했더니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며 ‘그럼 형이 써볼래?’이랬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 ‘내가 어떻게 소설을 쓰냐’고 되물었더니 ‘사흘 동안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형도 소설을 쓸 수 있어’라고 했다.
심심하던 차라 나도 흥미가 동했다. 그날부터 당장 한길이가 읽으라고 한 카뮈, 샐린저, 라자르의 단편소설 3편을 읽고 나서 한길이의 소설강의를 들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니 정말 나도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정확하게 사흘 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보름만에 완성했다. 그의 강의와 요점정리, 다양한 화제는 기가 막히게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어떤 질문을 해도 막힘없이 ‘썰’을 풀었다. 누구라도 그의 강의를 듣고 나면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말은 어눌하지만 참으로 어마어마한 설득력과 전달력이었다.”
원만한 대인관계와 친화력도 그의 남다른 장점 중 하나. 호남 출신도 가신 출신도 아닌 영입파가 승승장구 요직을 돌아다니다 보면 발목 잡는 사람도 있을 법한데, 한 번도 이렇다 할 구설에 오른 적이 없다. 지난해 말 한강변 별장 탈법 건축의혹이 제기됐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보도를 한 신문사가 정정보도를 실었다. 워낙 구설이 없다 보니 4~5년 전인 결혼 초기에 부인(탤런트 최명길씨)을 때려 입원케 했다는 루머가 아직껏 그를 따라다니고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김장관은 “결코 그런 일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렇듯 구설이 없고 그를 표적으로 삼는 이가 드문 것은 그가 지금껏 자신의 자리에서 ‘힘자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비동교동계 영입파인 정동영 신기남 천정배 추미애 의원 등과 절친하면서도 동교동계 가신들과도 사이가 좋다. 그러면서도 동교동계에 흡수되지 않았다.
김장관의 문학적 재능을 일찌감치 간파해 문단에 데뷔시켰고, 한때 그의 장인이었으며, ‘작가 출신의 문화부 장관’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어령 새천년준비위원장은 김장관의 상상력을 원만한 조직생활의 ‘무기’로 여긴다.
“진정한 상상력은 창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들이 다 알고 있으면서 위선 때문에 하지 않는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길들여진 자세, 길들여진 언어 때문에 보지 못하던 것, 감추던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김한길은 이런 상상력의 소유자다. 이런 솔직함과 참신함이 관료나 정치인에겐 결점이 될 수 있는데, 그는 이런 나이브한 면모로 오히려 사람들을 파고든다. 그래서 이 사람은 별수단이 없으면서도 작가에겐 보기 드문 현실적 포용력으로 조직사회에서 모나지 않게 살아간다.”
그는 명절 때 여기저기서 선물이 들어오면 일일이 답장을 써 보내준다. 그것도 인쇄된 카드에 서명만 덜렁 해서 보내는 게 아니라 선물을 보낸 사람에게 적절한 메시지를 만년필로 또박또박 써서 보낸다. 가령 책을 선물한 사람에겐 ‘소중한 마음의 양식으로 삼겠습니다’라고 써보내고, 김을 보낸 이에겐 ‘우리 아이가 김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말 맛있게 먹겠습니다’, 와인을 보낸 이에겐 ‘보내주신 와인의 그윽한 향에 취했습니다’라고 쓴다. 보통 정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장점이자 결점
김한길 장관의 정치 커리어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대변인이나 공보팀장처럼 글과 말을 만지는 자리를 잇따라 맡았으면서도 필화나 설화에 휘말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치에 입문할 때 “정치인의 말엔 향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얼마나 이 약속에 충실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대변인을 맡았을 때는 저질발언 시비가 거의 없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말에 있어서는 극히 신중했다. 김태동 정책기획수석, 황원탁 외교안보수석 등이 외부에서 한 발언 때문에 설화를 입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강연 요청도 다 물리쳤다. ‘비서가 밖에 나가서 대통령의 뜻을 적극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수용하지 않았다.
공·사석을 불문하고 기자들과 얘기할 때도 기자들의 질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 말꼬리를 잡히겠다 싶으면 입을 다문다. 그래서 더러 ‘브리핑이 무성의하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김장관의 무난한 처신과 신중함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자기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지 않고 정치권에서 지나치게 잘 적응한다’면서 그를 좋게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특히 자존심으로 먹고 사는 문학인 출신으로 칼럼 등에서 비판적인 논조의 글을 자주 썼던 그가 보스와 계파 중심의 낡은 정당시스템에 편입된 후에는 좀체 입바른 소리를 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해 섭섭하게 여기는 이도 많다. 필화, 설화 겪을 것을 너무 두려워하면 직언, 직필할 자리에서도 몸을 사리게 되기 쉽다는 조언이다.
[김한길 장관 인터뷰]
김 한길 장관 인터뷰는 예정됐던 것이 아니었다. 9월 말경 공보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국정감사가 끝날 때까지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답을 들었다. 김장관의 조심성으로 미뤄볼 때 장관에 취임한 지 열흘밖에 안 된 시점에 인터뷰에 나설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간접 취재에 만족하기로 하고 김장관 주변인물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 소식이 김장관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가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다른 경로로 김장관에게 직접 면담을 청했다. 그는 “나 스스로도 나를 제대로 되돌아보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그 얘기를 써준다니 어떤 기사가 나올지 무척 궁금했다”며 시간을 내줬다. 다른 사람 말과 소문만 듣고 행여 부정확하거나 근거없이 비우호적인 기사를 쓸까봐 꽤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결국 이 인터뷰는 김장관의 신중함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가 바로 그 신중함 때문에 다시 성사된 셈이다.
-업무 파악은 끝났습니까. 둘러보니 딱히 ‘아, 이것이 내가 할 일이구나’ 싶은 게 있던가요?
“아직 막연합니다. 다만 초점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모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일하고 먹고 자는 것 이상의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걸 향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문화관광부가 할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의 ‘내 속의 보물 찾기’를 돕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건 엄청나게 보람있는 일입니다. ‘어떻게?’에 대해서는 생각중입니다. 문광부가 다루는 분야가 워낙 방대해 많은 공부가 필요한데, 우선 현안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말은 뒤에 오는 게 순서가 맞을 것 같습니다. 국감이 끝나면 생각을 정리해 내놓겠습니다.”
-그 일에 자신이 적임자라고 봅니까. 전문성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문광부는 문화 체육 관광 청소년 종교 등 매우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이들 분야에 두루 정통한 전문가는 드물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면서 정책을 다뤄가면 어지간히 해내지 않겠나 하는 자신감은 있어요.
개인적인 얘깁니다만, 지금까지 저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계속 생소한 분야를 넘나들며 살아왔습니다. 그랬어도 어디에 가서든 크게 실패한 적은 없습니다. 새로운 일을 맡으면 새로운 열정이 자극됩니다. 그래서 새롭게 자세를 다잡으면서 덤비고 버텼습니다. 청와대에 갈 때도 그랬어요.”
내 일 방기한 적 없다
-정치부 기자들이 ‘김한길 그 사람, 늘 뭔가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결과물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 같습니다.
“그렇게 보실 수 있죠. 저는 제 자신이 돋보이는 부분에는 공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정치권에 들어온 후 계속 대통령과 밀접한 자리를 돌았습니다. 그런 자리에선 대통령을 드러나게 하는 게 중요하지, 그 과정에 저를 드러나게 하는 건 피해야 합니다. 가령 92년엔가 ‘뉴DJ플랜’이라고 해서 대통령께 상의 윗주머니에 빛깔 고운 포켓치프를 꽂고 지팡이를 들고 미소짓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런 이미지 메이킹을 한 사람이 밖에 나가서 ‘저것은 내 작품’이라고 떠들어보세요. 그 후엔 대통령이 그런 모습을 하고 다니면 아주 우스워집니다. ‘모시는 분을 통해 나를 도모하지 않는다’는 게 제 원칙입니다.
그렇다고 제 일을 방기하진 않았습니다. 정책기획수석은 청와대 수석 가운데 선임수석입니다. 부(副)비서실장인 셈이지요. 그래서 분야에 상관없이 참견하고 건의할 수 있는 자리예요. 제 의견과 건의가 다 옳은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일에 소홀했던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장관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이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생각을 많이 합니다. 대통령은 아시는 게 많을 뿐 아니라 매우 까다로운 분입니다. 그런 분을 설득하려면 그분보다 몇배 많은 생각과 연구를 해야 합니다. 말을 쉽게 던지지 않되 자신있게 말씀 드리려면 숙고에 숙고를 거듭해야 해요. 대통령은 무슨 말씀을 올리면 너무 잘 받아주시기 때문에 더욱 말을 아끼게 됩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대통령께 꼭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 말씀 드렸습니다. 제 신상을 생각해서 말을 아낀 적은 없어요.”
-대통령이 누구 얘기나 다 그렇게 수용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DJ 고집 꺾을 수 있는 사람은 김한길뿐’이라는 말도 들리더군요.
“그런 건 아니고요… 아마 97년 대선 준비할 때 절 좀 이쁘게 보셨던 것 같아요. 그때 후보토론회를 57회나 했는데, 거의 매주 한두 번씩 했습니다. 그 기간에 대통령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죠. 제가 방송대책팀장이어서 대통령은 아무리 하기 싫은 얘기라도 저와는 해야 했습니다. 가장 적대적인 토론자가 던지는 최악의 질문까지 예상해서 답을 준비해야 했거든요. 그러니 대통령도 ‘저 친구가 무슨 얘기를 해도 받아들여야 된다’는 식으로, 저를 위한 얼마간의 ‘공간’을 허락하셨던 듯합니다.”
‘통합과 조율’에 관심
-적(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출신지역, 학교, 계파 등 어느 모로 보나 든든한 정치적 배경은 없는데, 뒤늦게 영입돼 승승장구하면서도 ‘발목’ 잡히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대인관계가 매끄러운 비결이 있습니까?
“저는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잘 못합니다. 좋아하지도 않고 그럴 시간도 없어요. 사람들한테 별로 친절하지도 않고 처세술도 모릅니다. 친화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그걸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대인관계에 딱히 활용할 만한 게 없어요. 다만 특정 계파에 끼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고, 늘 대통령 주변에 있었으니 다른 사람 옆에 가까이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또한 누구에게나 내 생각을 정리해서 분명하게 말했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는 그걸 통해 나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저를 덜 싫어들 하시는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한 지 5년이 다 돼 갑니다. 정치가 재미있습니까. 선거판과 청와대를 드나드느라 의정활동이 자주 중단됐는데, 훗날 다시 국회로 돌아가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습니까?
“정치하는 게 보람있어요. 더러 ‘정책통’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사회 전반을 챙기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의원들 중에는 ‘전공’이 확실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저는 후자입니다. 국회에 있을 때 교육위, 재경위, 문화관광위, 국방위 등 4개 상임위를 제가 원해서 돌았어요. 사회 전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회발전단계를 보면 어느 시기까지는 전문성을 요구하다가 그 단계가 지나면 통합적 사고를 요구하는 시기가 오더군요. 얼마 전까지 아주 세분됐던 대학 학과도 요즘은 벽을 허물고 통합되는 추세잖아요. 미국에서 빈손으로 덜렁덜렁 돌아온 저를 방송에서 부른 것도 여기저기 기웃거려본 놈이 필요했기 때문일 겁니다.
정치에서도 전체를 보면서 파악하고 통합하고 조율하는 일이 의미있다고 봅니다. 정책수석 자리도 각 비서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이를 조율하는 게 주업이거든요. 나중에 다시 국회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때도 제가 해보지 않은 분야를 맡고 싶습니다.”
-별로 내키지 않는 질문이지만, 김장관에 대한 거의 유일한 구설이니까 물어보겠습니다. 부인에게 손찌검을 한 일이 있습니까?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아무튼 그런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청와대에 있을 때 보고가 올라왔기에 비서실 직원들과 같이 보면서 웃어 넘겼지요. 절대로 그런 일 없습니다. 아내와 저는 지금껏 심각한 갈등을 빚은 적도 없고 부부싸움도 거의 안해봤어요. 더구나 누굴 두들겨패서 다쳤다느니 하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우리 부부가 잘 안됐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죠? 당시 한 스포츠신문이 우리 결혼소식을 특종했는데, 그후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우리집 앞에 진을 치고 몇 달동안 우릴 못살게 했어요(그때 김장관은 기자들에게 ‘우리가 이혼하게 되면 특별히 당신들에게 먼저 알려드리겠소’라고 약속했다). 아마 우리를 좀 별렀던 것 같아요. 또 그때 아내가 몇 편의 CF를 찍고 있었는데, 그게 아주 활동적으로 뛰어내리고 달리고 하는 내용이었어요(맞아서 다친 여자가 어떻게 그런 광고를 찍을 수 있겠느냐, 혹은 그런 광고를 찍으면서 가벼운 상처를 입거나 몸이 불편해진 게 와전됐을 수도 있다는 의미인 듯). 또한 저더러 아내가 일하는 것에 반대해서 싸웠다고 했다는데,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내의 일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세종로 문화관광부 청사를 나와 광화문 사거리에 채 못 미쳤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김장관의 비서관이었다. 김장관이 인터뷰에서 한 말 가운데 단어 두 개를 이러저러하게 수정해달라고 한다는 얘기였다. 정말 놀랍도록 신중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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