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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예천 쪽으로 34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만나는 첫 번째 다리가 송야천松夜川에 걸려 있는 송야교, 즉 솔밤다리이다. 그 다리 끝에서 좌회전하여 들어서는 방죽길이 낙동강을 따라서 풍산읍에 이르는 924번 지방도이다. 방죽길로 들어서면 곧 이어 13시 방향으로 마치 낙타 등처럼 생긴 산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산이 청성산靑城山(251m)이다.
1608년, 선조 41년에 편찬된 안동부의 읍지인 {영가지}의 [산천] 편에는 안동의 산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 중 설명이 가장 많은 산이 청량산淸凉山(870m)이고, 두 번째가 청성산이다. 다른 산에 비해서 청량산에 대한 설명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은 이해가 간다. 예로부터 청량산은 명산으로 소문이 났을 뿐더러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청량산을 '내 산(吾山)'이라고 부를 만큼 좋아했기 때문에 예전 이황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이었던 안동에서는 청량산을 안동의 제일 명산으로 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청량산은 산 자체의 높이나 아름다움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다른 명산들과 견주어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청성산은 그렇지 않다. 높지도 않고 모양이 특이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을 대표하는 명산이 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판단으로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 산에 깃들인 '인물'이며, 둘은 '풍수'이다. 청성산과 관계를 맺은 인물은 누구인가? 그가 바로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1532∼1587)이다.
그는 열 다섯에 이황에게 나아가 배움을 구하고, 30세에 어머니의 명으로 응시한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벼슬을 단념했다. 1566년 서른 다섯 살에 청성산 아래에 연어헌鳶魚軒을 짓고 은거한 뒤, 쉰 일곱으로 죽을 때까지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청성산과 함께 소요 자적한 안동의 처사處士이다.
청성산 찬가
권호문은 [성산기城山記]에서 청성산이 "마치 큰 거북이 바다에서 몸을 솟구치면서 앙연히 머리를 들고 서 있는 듯하다."고 표현하면서 청성산이 얼마나 좋은 산인지를 서술하고 있다.
안동은 예로부터 산과 물이 잘 어울린 고을이라고 일컬어졌다. 낙동강을 따라서 안동의 산을 말해보면 청량산, 여산, 청성산을 나란히 칭찬할 만하고 나머지 산들은 들을 것도 없다. 그러나 청량산은 다만 높고 밝을 뿐이며, 여산도 한갓 그윽하고 깊숙하기만 하니, 어떻게 청성산이 두 산의 기상을 함께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한 멀리 확 트인 경치를 가진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시인과 은자들이 머무르며 고상한 뜻을 기르기에 마땅한 곳이다.
안동의 명산이 세 개인데 그 중에도 청성산이 제일이라는 주장이다. 세 산 가운데 청량산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여산廬山은 안동 사람들도 잘 모르는 산이다. 여산 주위에 살던 사람들은 여산을 '노산'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은 참으로 절경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여산 아래에는 여강서원廬江書院이 낙동강을 굽어보며 있었기 때문에 한 때 안동을 대표하다시피 한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안동댐 아래로 깊숙이 잠겨서 흔적마저 사라졌다. 볼 수도 갈 수도 없어진 지 30년도 되지 않았지만 이미 기억 속에서도 아득하게 되었다.
나는 댕기머리 때부터 책을 끼고 이 산을 오르내린 것이 한 해에 두 세 번이었다. 이 산을 사랑하는 것이 서시같은 천하의 미인을 사랑하는 것과도 견줄 수가 없어서 이별이 오래되면 꿈속에서라도 길게 만나야 하고, 와서 찾아보면 늘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정이 드러나니 참으로 잠시라도 떨어질 수가 없다.
권호문이 꿈에서도 청성산을 보았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어떤 특별한 사람은 일반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특정한 산의 기운을 확실하게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특별한 기운을 가진 산은 따로 있다. 이런 사실은 산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권호문도 청성산에서 어떤 '신끼'를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가 청성산을 그렇게 그리워하고 좋아한 것은 아닐까?
청성산 정상 부근에는 절벽처럼 된 큰 바위가 많다. 그리고 그 바위에는 '산신山神, 신명神明' 등의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고, 아래에는 공을 드리는 자리와 촛대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더구나 청성산 아래 연어헌 바로 곁에는 '진원사'라는 간판을 단 '굿당'이 있어서 자주 굿이 행해진다. 신내림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신끼를 유지하기 위해서 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원사에 오는 사람들 중에는 청성산에서 산신 기도를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언제나 벼랑 가에 띠 집을 엮어서 덧없는 반평생을 한가롭게 보내고자 한 것이 얼마 되지는 않았으나 잘못 세속에 물들어 오래되도록 몸을 빼내지 못했다. 올해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내어 산사에 들어가서 세간의 부귀 빈천과 근심 걱정을 말끔히 떨쳐버리고 자연과 함께 하기로 결심했으니 이는 내가 홀로 수양하고자 함이다. 또 이 산에 주인이 없음을 싫어하여 마침내 감암 아래의 냉천 가에 터를 잡고 오는 가을에 집을 짓고 독서하며 즐길 것을 기약하였다.
권호문이 청성산 아래에 지은 집이 연어헌鳶魚軒이다. 연은 솔개이고, 어는 고기다. '연어'는 "연비어약"의 줄임말이며, 이는 또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는 "연비려천鳶飛戾天, 어약우연魚躍于淵"의 줄임말로 {시경}에 나온다. 글 자체의 뜻도 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솟아나는 절창이지만, 이 시구가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중용}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군자의 덕을 설명하고 칭송했기 때문이다.
"청성산의 주인이 없음을 싫어했다"는 것은 소유주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청성산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권호문이 연어헌을 지은 뒤 그는 명실공히 청성산의 주인이 되었으며,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땅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명승지가 된다는 '지승유인地勝由人'은 거저 생긴 말이 아니다. 청성산은 권호문이 있기 때문에 한층 더 빛이 나고, 권호문은 청성산과 함께 영원하다.
청성산 나눠 주기
동파東坡 소식蘇軾(1036∼1101)은 천하의 절창 [적벽부赤壁賦]에서 "강가에 부는 시원한 바람과 산 위에 뜨는 밝은 달은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으니 조물주가 주신 무진장한 선물"이라고 했는데, 어찌 바람과 달만 그러할 것인가? 산과 강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산은 아주 오래 전부터 주인이 있었으며 청성산의 주인은 권호문이었다. 그는 그냥 청성산을 좋아하여 마음으로만 '내 산'이라고 여긴 것이 아니다. 어떤 경위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청성산을 소유했다. 그리고 청성산의 절반을 무료(?)로 남에게 떼어 주었다. 공짜로 청성산의 절반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처음 선생과 학봉이 이 산에서 공부를 하시면서 "올해(1568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함께 청성산의 주인이나 되자"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해에 학봉은 급제를 하고 선생은 청성산에 은거하셨다. 이 해(1585년)에 이르러 학봉이 선생께 "청성산의 절반을 기꺼이 저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보내오자 드디어 산의 반을 잘라서 학봉에게 주셨다.
청성산의 절반을 받은 사람은 권호문과 동문 수학한 친구이자 권호문보다 여섯 살이 적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다. 김성일이 과거에 급제한 해는 선조 1년인 1568년인데, 이때 권호문의 마음은 이미 사환仕宦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1566년 서른 다섯 살에 이미 연어헌을 짓고 청성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위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해인 1568년 이전에 아마도 김성일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연어헌으로 왔고, 권호문도 그와 함께 글을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권호문이 공부하는 목적은 과거 급제에 있지 않았다.
그 뒤 김성일이 편지로 청성산의 절반을 달라고 한 때는 약속(?)을 한 지 17년이나 훌쩍 흐른 1585년이다. 더구나 그 약속이라는 것도 무슨 내기이거나 꼭 지켜야 할 성질은 아닌 듯하다. [연보]의 기록만으로 살펴보면 김성일의 요구도 농담 반, 진담 반의 느낌이 들지만 저간의 자세한 사정이야 내가 알 수가 없다. 권호문의 시 [청성산 아래에서 읊조리다.]를 감상하면서 청성산을 나눠 준 심정이나마 짐작해보자.
낚시하는 어부가 정승을 업신여긴다는 一竿漁翁傲三公
그 말은 늘 틀린 말이라고 여겼더니 此句常疑語不中
탁 트인 강가에서 즐거이 놀아 보니 樂事江天今恰得
억만 금이 한 줄기 바람만도 못하구나. 萬鍾難敵一絲風.
그런가? 참으로 그렇단 말인가? 억만 금이 한 줄기 바람만도 못하단 말인가? 일찍이 관중管仲(?∼B.C 645)이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넉넉해야 영욕榮辱을 안다."라고 갈파했듯이 생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거늘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굶주리지 않을 정도의 밥과 남루를 면할만한 옷이 있다면 강상의 청풍과 함께 하는 삶이 주지육림보다 못할 것이 없다. 환락의 끝에 찾아오는 허망함의 깊이가 어떠한지를 아는 자라면, 세상의 영화에 연연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송암을 따를 수 있을까? 조금 더 두고 볼 일이다.
1584년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던 김성일은 1586년에 일어난 사직단社稷壇 화재에 책임을 지고 해임되어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청성산의 절반을 양보 받은 뒤 연어헌 위쪽 가파른 절벽 위에 자신의 정자인 석문정사石門精舍를 세운다.
천등산의 한 자락이 구불거리며 수십 리를 달리다가 큰 강가에 이르러 높고 우뚝하게 솟구쳐 청성산이 되었다. 푸른 절벽과 기이한 바위들이 마치 사모紗帽인 듯, 홀笏인 듯하니 그 괴이한 모양을 형용할 수가 없는데 정사가 있는 곳이 산의 정상 부근이다. 낙동강이 동남쪽에서 흘러와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곧바로 이 산 밑에 다다라 다시 서쪽으로 굽어서 산 밖으로 돌아나가니 넓은 백사장과 아득한 봉우리가 그 기이함을 드러낸다. 웅덩이는 맑고 여울은 길고 깨끗하여 마치 쪽진 듯 굽이쳐 거울처럼 펼쳐지니 그 청초한 기상이 참으로 가관이다.
밀암密菴 이재李栽(1657∼1730)가 [석문정사중수기]에서 청성산의 자태와 석문정에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다.
권호문도 [성산기]에서 "활하하첨豁遐瞻"이라고 표현했듯이 250m 밖에 되지 않는 청성산은 중턱에만 올라도 그야말로 거침없는 부감俯瞰이 이루어진다. 그런 장관이 이루어진 이유는 청성산이 낙동강의 흐름을 정면으로 막으면서 강물을 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성산 바로 앞에서 송야천이 낙동강과 합류하기 때문이다.
청성산은 그 큰물의 흐름을 온몸으로 막고 안동 땅의 기운이 급하게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조절하고 있으니 이른바 '한문 門'이며, 청성산 앞이 바로 안동의 '수구水口'이다. 수구에 있는 청성산 같은 산을 풍수에서는 '화표산華表山'이라고 하는데, 안동의 수구는 강골剛骨, 청성산이 늠름하게 지키고 있다.
첫댓글 鳶魚軒(연어헌)에 대한 깊을뜻이......................생각의 깊이를 느끼는구나.................................權(권세권)
우리가 흔히 부르든 석문절이 청성산이며 석문정사가 있다는것도 송암 권호문 선생이 칩거한 연어헌의 유례도 자세히 알게 해줘서 고마우이 .. 기회 있으면 연어헌에 들려봐야지 ..
고마울것 까지는 없고 갈 기회가 있다면 마을 뒤편에 청성서원에도 들러보고 오렴
무식쟁이가 너에게 연어헌이 뭔 뜻이냐고 물었을때 간략히 일러준 내용을 오늘 소상히 알았다...헌이의 깊이에 다시 존경을 보낸다
인간아! 너 오늘 이 인간을 너무 쪽팔리게 만든다. 내한테는 깊이고 존경이고 하나도 안어울리고 너들하고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하는게 제일 어울린다 알았나
석문정? 우리가초등학교 3학년 가을소풍을 다녀온곳인데 기억나는사람 손들어봐! 송암 권호문 선생은 벼슬을 마다시고 강호선비로 일생을 보내신 분이고 교동입구에 종택과 정자인 관물당(觀物堂)이 잘보존되있으며 후손으로는 70년대 서후면장을 지내신 권오상(작고)씨가 직계후손이다. 청성산을 학봉선생과 산을 중턱을 가로로 반으로나눠서 갖기로하고 위쪽에 학봉선생이 후학양성을 위해 석문정사를 지었다 석문은 입구에 바위가 양쪽에문처럼 두개가 벌어져있어서 그렇게 부른다
사진 아래가 석문정사인데 앞쪽우측에 약간보이는 바위에 石門이라 세겨져 있다. 저기서서 앞을 내려다 보면 굽이치는 낙동강의 힘찬물줄기가 보였는데 지금은 잡목들이 너무자라서 바로 앞이 안보여 안타깝더군! 보기에도 양지바르고 풍광좋고 명당이라 학문이 잘되고 시가 절로 나올것만 같지않은가?
고마우신 분들! 우리 할배도 기억해 주시고, 우리 종손도 기억해 주시고, 지손이 이렇게 변변치 못해 까페 댓글로만...............
송암선생과 학봉할배가 연배를 떠나 학문을 논하던 친구분이셨고, 오상종손과 父親이 또한 친구분이셔서 생전에 우리집에 자주오셔서 약주와함께 고담준론을 많이 나누시는걸 술시중들면서 어깨너머로 많이 들었다오~ 우리누나는 송암종택에 심부름갔다가 개한테 물려와서 나는 그집 개털자르러 갔었지(물린개의 털을 태워바르면 낫는다는 옛날의 처방때문에)
검제 김씨들과 사귐을 나눌때면 용미봉탕의 떡 벌어진 상은 아닐지라도 성의있는 소반이라도 만족하며 사랑에서 청함이 도리이나 우리 이렇게 라도 인사드림은 세월의 탓이..................................
이미 貴門과의 來往이 500년을 족하니 接賓의 禮儀는 되레 거추장스러우니 山中에서라도 만날때 탁주 한사발이면 萬事亨通이 아니될런지~
가문과의 왕래가 수백년이 흘렀으나 귀밑머리 희끗희끗 하도록 눈치한번 못채고 어디사는 누구라고 언어소통 없었으니 쑥스러운 마음에 인사치레랍시고 어물쩡 얼렁뚱땅 그래도 쑥스럽네 그려
잘보았네 연어헌기를 써서보낼태니 한번올리시길
역사공부 잘 합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