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답사 후 김제로 방향을 잡지 않았다면 전주를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스쳐가기에는 아니 간 것 보다 못한 매력적인, 특히 내게는 더욱더 그러한 맘이기에 한옥
온돌방에서 하룻밤 유하면서 체험하지 않고서,어찌 전주를 이야기 하겟냐마는 장님이 호랑이
다리를 더듬듯 경기전과 풍남문을 들린 작은 느낌을 전개해 보겠다.
한 무리의 관람객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기에 열중이다. 제기럴 쪽바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그들 특유의 티를 내고 있어 영 찜찜하다. 그들만 보면 과민성 열받음증 환자인 까닭에 화려한
모습의 쌍거북이 기단의 하마비를 피해서 경기전으로 들어가 앉아, 내외삼문의 진입공간을 눈에
가득 담고서, 전돌이 깔린 답도를 피해 흙을 밟으며 친절하게 동입서출(들어 갈때는 동쪽, 나올 때는
서쪽으로 주 전각에서 바라볼 때 왼편이 동쪽 입니다) 안내문이 있는 내외삼문을 지나니(우리님들
서원,향교,경기전등에 들어가실 때는 가운데 돌이 깔린 길을 피해 들어가세요.그 길은 신들이
출입하는 상징적인 길로 神道라고 합니다) 경기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역시 예상한되로 주자학의 검소,절제,장엄을 상징하는 맞배지붕이며(서원,향교 건물에도 강학공간은
팔작지붕이나,묘는 맞배지붕이며,영정이나 위패가 모셔진 전각에는 장엄의 의미로 단청을 하며
강학공간인 전각에는 단청을 하지 않는다.) 한치의 오차없이 좌우대칭 배치도 역시 절제의 주자학에
부응한 것이다.
영정이 모셔진 전각 앞으로 퇴를 내어 丁자형(여기에 대해서도 상주하고 계신 해설사님과 많은 대화를
주고 받았으며 다음 기회에 설명하겠다)의 헌을 낸 박공판에 조선왕조의 번영과 혼이 길이 이어지라는
의미임이 분명한 박공판을 오르는 거북이 생동감있게 조각되어 있다.
용마루 역시 기와를 얹지 않고 생석회로 마감한 까닭도 태조가 왕이요,용인데 용의 머리위에 무슨
용마루가 필요하리냐는 상징성일 거고 헌데 치미가 다른 전각과는 다르다(왜? 이것은 우리님들에게
내는 숙제임) 좌우 맞보며 세종,영조,정조,철종,고종,순조의 어진이 설치되어 있는데 의미를 지금
이 순간 까지도 몰라 안타깝기 그지 없다.
잠시 예를 갖추고 태조의 영정과 함께 어진을 옮기거나 봉안할 때 사용했던 신연(神輦)이라는 가마와
향로를 옮기던 향정(香亭)이라는 가마, 왕이나 고관의 행차시에 사람이 타고가던 가교(駕轎),
옥교(玉轎)라는 가마를 보고 있는 곁으로 노신사 한분이 다가오시며 문화유산 해설을 해주신다.
어진에는 도사,추사,모사가 있다는 설명으로 시작한 그분과 대화는 누가 해설사인지 모를 정도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져서 너무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기둥 아래의 흰색은 구름을 상징
하는 것이며, 경기전의 대나무는, 대나무의 곧고 바른 성품처럼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항상 왕에
대한 충성심과, 대나무의 늘 푸른 성품처럼 왕과 그 후손의 영원한 번창함을 기원한다는 것, 또한
내외삼문 홍살에 글씨 卍,亞 글씨가 교차로 아래위로 써여진 것이 불교와 유교의 차등없는 어우러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맘이 편안해 왔다.
오늘 김제를 거쳐 보령까지 가야하기에 전주 이씨 시조 위패를 모신 조경묘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
했던 전주사고를 먼 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완주 어느지역의 태실마을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는 예종대왕의 태실을 바라보지만 내고향 성주의 세종대왕 왕자 태실에서 느끼는 그런 감흥이
들지 않는 까닭은 너무 화려해서일까?, 아니면 태실마을의 태봉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전동성당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꼭 들리고 싶다는 염원을 새기며 풍남문으로 향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호남제일성 현판이 걸려 있는 성문안이 넓게 복원된 것 보다는 옹성이 있는
성문의 앞쪽을 넓게 복원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에 노예가 되어 김제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풍남문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옮겨 놓겠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풍남문은 전주의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98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창건했다고 하며 풍남문(祮南門)이란 편액은 서기순 감사가 쓴 것이라
한다.
풍남이란 이름을 명명한 유래에 대해서는 이를 중건한 조선 후기 영조 때에 중국 한고조 유방의
향리(鄕里)명「풍패(豊沛)」를 따서 남문은 풍자를 머릿글자로 하고 서문은 패를 머릿글자로 해서
「풍남」,「패서」라 불렀다고 한다.
1905년 조선 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전주부성 4대문 중 풍남문만 제외한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었다.
풍남문은 동학 혁명군이 전주에 진격하여 이곳에 집강소를 설치하기도 한 곳이며,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이 순교한 뒤, 그의 목을 풍남문의 누각에 매달아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기도 한 곳이다. 1980년 종각과 포루, 풍남문 바깥 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