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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25-40 세상은 지나갑니다. 2005. 6. 26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33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34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36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37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3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5)죽으면 자유 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지난 한 주간 주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감사하며 사셨습니까? 경기도에 계신분이 설교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자족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겠다는 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문제입니다. 부르신 그대로 살려고 하면 핍박과 고난이 닥치게 됩니다.
어떤 핍박이 오겠습니까? 먼저 가족으로부터 올 것입니다. 지금 전세방에 살고 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이것도 과분하니 자족하면서 감사하며 삽시다고 하면 어느 아내가 여보 당신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신앙은 그래야지요! 하면서 나올 아내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내나 부모나 자녀들까지 그런 모습을 비전이 없다고 하면서 무시하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목표를 계속 상향조정하는데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회사에 붙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에 오니 역시 해마다 새로운 목표를 세워놓고서 독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유에 어느 개척교회에서 우리는 교회에 사람모이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겠다는 주보를 보고서 그 교회를 찾아 갔더니 교회 입구에 전도목표가 2만 명이라는 글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있습니다.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월급이 적은 곳을 택하라,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을 가지 말고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을 가라. 황무지를 찾아가라는 식의 십계 중에서 9번째가 이런 내용입니다.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라면 틀림없다. 의심 없이 가라. 복음으로 만족하겠다는 사람에 대한 반대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복음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거창 고등학교의 이런 십계는 만든 사람이 어떤 정신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십계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 하면,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쪽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여 인간승리를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고진감래입니다. 고생은 되더라도 보람이 되는 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인간의 의지나 결단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를 종말론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미 끝이 왔다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이상적인 희망이든 꿈이든 간에 인간이 이루어 내어서 만들 유토피아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신 그대로 자족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자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 답변은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29-31절입니다. “봉독”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사라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형적들, 이 세상이 모습들,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고 사라지고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여기고,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아니한 자들처럼 여기고,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여기고,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이렇게 살고 계시지요? 그렇지 못하다면 왜 그럴까요? 이 세상의 모든 형적들이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달라고 애통하면서 기도해야 할까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의 나라를 그 약속의 나라를 눈에 보듯이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거의 대부분인 사라질 것들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도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다는 것은 주의 영이 임하여야 됩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세상의 종말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어느 정도로 자족하였는가 하면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부요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합니다. 일체의 비결을 알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빨리 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살기가 괴로워서 빨리 죽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 그 십자가로 완성된 나라가 너무 좋아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아서 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신앙의 자세입니다. 이런 신앙이 부럽지 않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시면 전부다 쉽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고개가 끄떡여지는 것입니다. 처녀 딸이 있느냐 내 생각에는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임박한 환난이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루살렘의 멸망일수도 있고, 로마의 핍박일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은 온 세계의 멸망의 모델로 보아도 됩니다. 그런 때에 누가 더 환난을 당하게 됩니까?
마태복음 24:15-20절입니다.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ㄱ)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아이 밴 자와 젖먹이는 자들이 도망하기 힘 드는 것입니다.
어제가 6,25기념일입니다. 저는 전후세대라서 그 비참함을 모릅니다만 기록을 통하여보면 그 전쟁의 비참함에 대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피난을 내려오다가 국경을 넘는데 인민군이 지키고 있습니다. 몰래 넘어와야 하는데 어린애가 갑자기 울려고 합니다. 그러자 어린애의 입을 손으로 막았는데 한참 막고 있다 보니 아이가 힘이 스르르 빠지는 것입니다. 그대로 질식사 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두렵지 않습니까? 재림의 시기를 알아서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재림의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에 속한 것이고 지금 우리가 종말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세란 메시아가 오시면 말세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것도 말세의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이 이미 종말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든 제자들이 처음에는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서 따라 갔습니다. 예수님이 높아지시면 자기들도 한 자리 하고자 서로 누가 높으냐며 시기질투하고 치맛바람까지 일으키면서 따라 갔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니 세상의 끝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의 끝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까? 이 세상의 형적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에는 두려워서 도망간 관원들 앞에서 큰소리를 치게 된 것입니다. 관원들이 제자들을 잡아서 협박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의 끝을 안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여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라질 형적들을 붙들고 있으면 그것들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 어떤 중요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결혼하여 있는데 이혼할까요?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나누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 때는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다가, 결혼하게 되니 어찌하면 아내와 남편을 기쁘게 할까하면서 그 마음이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별을 했는데 꼭 결혼을 해야 하거든 주 안에서 하고, 차라리 그대로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모든 형적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32-35절을 봅니다. 이 세상의 형적이 지나가는 것이기에 세상에 일들이 마음이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인간이 살아가는 일에 큰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인륜지대사라 하여 관혼상제 즉 성인식, 결혼, 초상, 제사를 말합니다. 이러한 일조차 종말에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고자하는 사람이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하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고 하니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겨두라고 하십니다. 지금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눈에 보이는 형적들에 마음이 얼마나 빼앗깁니까? 너희의 보물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형적들을 보물이라고 여기면 마음이 거기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물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에 마음이 갈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이 말씀 앞에 다시 점검해 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3: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1)진노가 임하느니라” 이런 종말론적인 삶의 열매들이 주의 성령의 역사로 우리에게도 나타나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