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학파
1923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부설 사회연구소를 설립하여 ‘사회철학 정립’을 내세웠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0년대부터 독일 프랑크푸르트 소재 사회연구소에서 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공동 연구를 추진했던 일단의 연구자들을 지칭한다. 공동연구를 통해 현존 사회를 비판하고 대안적 사회를 모색한 이들의 이론은 흔히 ‘비판이론’ 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단일한 사회비판 모델이나 대안적 사회상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세대와 시대에 따라 그들의 비판이론도 변화를 거듭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지칭되는 사상적 전통은 1930년대 이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사회 심리학자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각별히 연관되어 있다. 호르크하이머는 데오도어 아도르노(철학자, 사회학자, 음악학자), 에리히 프롬 (정신분석학자), 허버트 마르쿠제 (철학자)와 같은 뛰어난 이론가들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이 연구소의 모든 사상가들이 항상 밀접하게 연관되거나 보완적인 연구들을 한 것은 아니기에 "학파"라는 이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1세대는 『계몽의 변증법』을 공동 집필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로 대표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초기에 맑스주의를 표방했으나, 나치 치하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들의 패러다임도 전환을 겪었다. 미국 독점 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전체주의로 변질된 스탈린 체제, 그리고 나치의 가공할 폭력 앞에서 그들은 인류의 문화 과정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했다. 『계몽의 변증법』은 그 결과물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몽의 역사이며, 계몽의 과정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끝은 ‘새로운 야만’ 으로 귀결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신을 대신하며, 자연을 지배하고 조작했지만, 근대사회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물질중심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주의자로서, 계몽의 미완이 야만을 불러왔다고 판단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2세대로는 단연 하버마스가 유명하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보기에 대단히 상식적이다. 그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은 쉽게 말하면 소통만 잘 되면 된다는 정도로 보인다. 근대의 합리성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 합리성이다. 그런데 도구적 합리성이 점점 우세한 힘을 가지며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파괴해 버리면서, 현대 물질문명의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활성화된다면 『계몽의 변증법』이 문제 제기한 야만성은 극복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3세대 대표주자는 호네트이다. 호네트의 이론은 ‘인정’과 ‘무시’라는 일상적 언어로 전개된다. 인간은 인정을 받음으로써 아무런 훼손 없이 자아실현에 이를 수 있으며, 인정의 반대는 무시이다. 인간은 사회구성원으로써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끝없이 ‘인정투쟁’을 벌인다.
1) 1세대 비판 이론(호르크하이머와 아드르노)
이들은 개인의 욕구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함께 충족할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이 목적이었다. 방법은 이성의 실현이었다. 인간의 자유 활동을 가로막는 사회 구조와 왜곡된 개인 이식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이중성을 가졌다. 욕망과 충동의 지배를 받는 자연의 존재이다. 동시에 이성의 법칙을 준수한다. 이성이 욕망과 욕구를 억제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사상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활동하는 것을 자유로 보았고, 이성적 활동으로 보았다. 시장체제는 합리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보편타당성을 지닌다고 믿었다. 교환을 통하여 이익을 얻는 것은 이성 활동에 의한다고 말하였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것은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시장체계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교환은 맹목적인 경쟁에서 이루어진다. 교환에 참여하는 대다수의 인간은 갈등하고, 고통을 겪게 됨으로 함께 충족한다는 보편타당성은 거짓말이라고 보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계는 소주의 자본가만이 이익을 얻는다. 시장은 일반대중의 착취를 숨기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성이 시장의 교환 체계를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자유를 두고 칸트는 개인의 활동이라고 하였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정의의 원칙에 따라서 사회를 형성하는 활동’이라고 보았다. 개인이 이익을 얻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함께 충족하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하였다.(이익을 위하여 서로 다투지 말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사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하였다. 가능할까?) 이것은 사회주의 이념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생산-교환-소비가 자본주의 사회처럼 우연적이고 맹복적인 경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목적을 가지고 계획을 세우고 통제한다.(사회주의 경제 체제이다.) 이렇게 하여 통제 불가능한 시장 경제 체제를 통제할 수 있다. 이들의 역사관이나 사용하는 용어(노동착취 등)를 보면 마르크스 이론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정의로운 사회’론은 쇠퇴한다. 미국의 독점 자본주의, 스탈린 체제, 독일의 나치즘이 휘두르르는 폭력을 경험하고 자기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한가를 깨달았다. 이들 사회는 하나 같이 ‘생산성 향상’이라는 마법에 걸려서 더 비관적인 사회가 되었다.
원인으로 이성을 주창한 ‘계몽 사상’을 들었다. 1947년에 출간한 ‘계몽의 변증법’은 이성의 실현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배 이념을 만들었다는 것이 ‘비판 이론의 패러다임’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학자가 아도르노이다.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하여 자연과 싸워 이겨야 하였다.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이성을 이용하여 사회조직을 만들었다. 이성을 이용하여 자연에 이기는 인간조직을 만드는 과정을 계몽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가 ‘생산성 향상’이라는 마법에 걸린 사회였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안 없는 비판이었다. 현대 사회를 야만사회로 규정하면서도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사회비평을 통해서 현대사회의 야만성을 폭로를 하였지만 대안이 없다면 비관주의에 빠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