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사학자 단재 신채호 출생
한말 언론·교육·신민회(新民會)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중국 망명 후에는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노선을 견지하면서 외교론 중심의 상해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활동했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 무정부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또한 역사연구를 통해서 한국근대역사학의 방법론과 인식을 성립시켰다.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박철(朴鐵)·옥조숭(玉兆崇)·윤인원(尹仁元).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정언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星雨)에게서 한학교육을 받았고, 10여 세에 사서삼경과 〈통감〉을 읽어 신동이라 불렸다. 1897년(광무 1)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집에 드나들면서 신구서적을 섭렵했으며, 1898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남규(李南珪)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김연성(金演性)·변영만(卞榮晩)·이장식(李章植)·유인식(柳寅植) 등과 사귀었다. 그해 10월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활동했으며, 1901년 신규식이 설립한 문동학원(文東學院)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04년 6월 성균관에서 조소앙 등과 함께 항일성토문을 작성하여 이하영(李夏榮) 등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신규식·신백우 등과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폈다.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사퇴하고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사에 입사했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등을 실어 무기정간을 당하자, 1906년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사에 들어가 주필이 되었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등의 논설과 〈독사신론 讀史新論〉 등 역사관계 논문, 시론인 〈천희당시화 天喜堂詩話〉 등을 연재하고, 〈대한협회월보〉·〈대한협회회보〉 등에 〈대한의 희망〉·〈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등을 발표했다. 번역서로 〈이태리건국삼걸전〉·〈을지문덕〉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교육용 한글잡지인 〈가정잡지〉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언론활동과 더불어 1906년 3월 국권회복을 위해 교육과 산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목표 아래 결성된 대한자강회와 그 후신인 대한협회에 참가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공개운동이 어려워지자 1907년 양기탁·이동녕·이회영·이동휘·안창호·전덕기·이갑·이승훈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을 통해서 운동을 고무하는 한편 스스로 담배를 끊어 돈을 기탁하기도 했다. 1909년 윤치호·안창호·최광옥(崔光玉)·최남선·박중화(朴重華)·장응진(張膺震) 등과 청년학우회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집필했다.
1910년에 들어 일제의 한일합병 정책이 노골화되어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구축을 계획한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4월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산둥[山東] 반도의 칭다오[靑島]에서 열린 신민회의 '청도회의'에 참가했다. 회의는 북만주지역에서 토지를 개간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해조신문 海潮新聞〉의 후신인 〈대동공보 大東共報〉에 관여한 후 〈청구신문 靑丘新聞〉도 발행했다. 1911년 윤세복(尹世復)·이동휘·이갑 등과 함께 조직한 광복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같은 해 12월 권업회(勸業會)의 기관지로서 교민들의 산업진흥과 민족의식의 고양, 그리고 교민 사이의 대립을 해소시키고자 했던 〈권업신문〉이 창간되자 주필이 되었다. 1913년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하이[上海]의 교민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고 이무렵 신규식·문일평·박은식·정인보·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청년교육을 위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웠다. 1914년 대종교 관계자인 윤세용(尹世茸)·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만주 펑톈 성[奉天省] 화이런 현[懷仁縣]으로 가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사〉 집필에 착수했다. 그리고 장차 독립군 양성도 꾀할 겸 백두산에 오르고, 남만주 일대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광개토왕릉을 답사하기도 했다. 1915년 3월 이상설·신규식·박은식 등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서의 한중합작을 도모하는 한편 효율적인 독립투쟁을 위해서 신한혁명단을 조직해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일단의 동지가 검거되고 국제정세가 여의치 않아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1916년 베이징[北京]에서 사담체(史談體)의 자전적 중편소설 〈꿈하늘〉을 집필했다. 그해 8월 대종교 교주인 나철(羅喆)이 죽자 통분하여 〈도제사언문 悼祭四言文〉을 지었다. 1918년경 베이징의 푸퉈옌[普陀庵]에 머무르며 〈조선사〉를 집필하면서 〈중화바오 中華報〉·〈베이징르바오 北京日報〉에 논설을 기고했다.
1918년 1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국외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에 참여했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서울의 한성정부, 만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함께 4월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서울에서 발표된 한성정부에서도 평정관에 선임되었다. 이들 여러 정부를 통합한 상해 임시정부의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지명에 대해 그의 위임통치청원 사실을 들어 반대했다. 그해 4월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정식의원으로 선출되고, 7월 제5회 전원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았으나 초기부터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면서 위임통치안을 철저히 규명할 것을 주장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사퇴했다. 이어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10월에 임시정부의 외교론과 준비론을 비판하고 무력투쟁을 전제로 한 실천적 독립운동을 주창하며 발간된 〈신대한 新大韓〉의 주필이 되었다. 〈신대한〉이 일제와 임시정부의 방해로 휴간되자 1920년 9월 박용만·신숙 등과 만주의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여 효율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군사통일촉진회를 발기했지만 당시 독립군 활동이 일제의 만주토벌에 따라 침체에 빠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보합단(普合團)의 조직에 참여하여 내임장(內任長)에 추대되었다. 1921년 1월 김창숙과 함께 시사논설과 한국사론을 다루는 한문잡지 〈천고 天鼓〉를 발간했다. 그해 4월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인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사실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기초하여 김창숙·장건상 등 54명의 서명을 받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상해 임시정부와 완전히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해갔다. 1921년 4월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준비회를 열고 임시정부에 이승만의 불신임과 임정의 해체를 주장하는 통첩을 발송했다. 5월 군사통일회의에서 결의된 국민대표회의 결성을 위해서 김정묵(金正默)·박봉래(朴鳳來)와 함께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발기했다. 이들의 주장이 여운형·안창호 등의 호응을 받아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고 그는 창조파로 활약했다.
의열단의 선언문을 기초해달라는 김원봉의 요청으로 1923년 민중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의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했다. 그가 이회영·김창숙·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 등 무정부주의에 공명하는 사람들과 빈번한 접촉을 하고 있었던 만큼 이 선언에는 무정부주의적 양상이 나타난다. 이무렵 그는 베이징대학교 도서관에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연구하며, 리스쩡[李石曾]·리다자오[李大釗]와 관계를 맺었다. 1924년 베이징에서 이규준(李圭駿)이 창단한 다물단(多勿團)의 선언문을 작성했다. 그해 3월 베이징 근처 스덩옌[石燈庵]에서 수도승 생활을 하며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여, 1925년 〈동아일보〉에 〈낭객의 신년만필〉·〈전후삼한고〉·〈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 등을 연재 발표하기도 했다. 1927년 2월 민족통일전선으로 조직된 신간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타이완[臺灣] 사람 린빙원[林炳文]의 소개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고 선언문 작성에 참여하는 한편 기관지인 〈동방 東方〉에 논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무렵 무정부주의 이념을 소설화한 〈용과 용의 대격전〉을 발표했다. 1928년 5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잡지 발간과 폭탄제조소의 설치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던 중 타이완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다롄[大連]으로 이송되었다. 1930년 5월 다롄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복역중이던 1931년 신백우와 안재홍(安在鴻)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조선사〉·〈조선상고문화사〉가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감옥에서 뇌일혈로 죽었다.
1923년 1월 신채호가 집필한 의열단 강령인 〈조선혁명선언〉 초판 원문(부분) 신채호의 초기 역사연구는 한말 언론활동 등의 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서 진행되었으며, 〈독사신론〉 등의 역사논문, 이순신·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영웅들에 대한 전기를 비롯해서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등의 역사관계 논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1910년 망명 후에 본격적인 역사연구를 하여 1920년대 이후 〈조선혁명선언〉·〈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를 집필했다. 그의 역사학은 이념과 방법론에서 중세의 왕조 중심의 역사관과 편년체 등의 방법론을 극복하여 근대적 역사학으로 발전했으며, 당시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의 역사인식은 영웅중심적 사관에서 점차 민중주체의 역사관으로 바뀌어갔다. 특히 〈조선혁명선언〉에서 일제 타도와 독립쟁취는 민족과 민중의 힘에 의한 조직적 투쟁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독립은 사회 내부의 불평등한 여러 요인도 제거하는 것을 전제로 함으로써 역사의 주체가 민중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역사의 본질을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하여 대외적으로는 아의 단위인 우리 민족과 국가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내부적으로는 각 시대의 여러 역사적 현실간의 모순상극은 투쟁으로 지양된다고 하여 이를 사회발전의 계기로 보는 변증법적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역사서술은 민족의 성장발달의 상태와 상대자인 타민족과의 관계를 기본으로 그 위에 경제생활, 계급대립의 대세, 정치, 외세침략의 영향을 주조로 하여 전개했다. 한편 종래의 역사서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여 사료비판과 고증을 중시하고, 역사적 사실의 인과관계를 파악하여 사실의 종합적 이해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보는 근대적 역사방법론을 전개했다. 그의 한국사 저술은 주로 고대사에 치중되었는데 종래의 삼한과 신라 중심의 기술에서 벗어나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체계를 세우고 그 무대를 한반도에 한정하지 않고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종래 한반도에 있었다고 본 한사군을 반도 밖에 있었거나,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고대사 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판적으로 보고 발해의 역할을 강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1년] 슬라브3국 `독립국가공동체` 창설
러시아, 우크라이나 및 벨로루스(구 백러시아) 등 소련의 슬라브계 3개 공화국이 1991년 12월 8일 외교, 국방 및 핵통제권 등을 공동 관장하는 한편, 수도를 민스크로 하는 독립공동체(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발트3국 독립 후 나머지 12개 공화국을 가능한 한 많이 끌어모아 새로운 연방을 결성하려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노력이 끝내 좌절됐으며 지난 74년간 존재해온 소련이 사실상 사라지게 됐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을 비롯한 이들 3개 공화국 지도자들은 이날 벨로루스 소재 부크강변 브레스트에서 지난 7일부터 이틀간 계속된 비공개 회담을 끝내면서 발표한 공동성명을 통해 독립국 공동체 창설을 발표했다. 성명은 독립국 공동체가 "외교-국방정책을 공동운용"하며 "역내 배치 핵무기는 궁극적인 폐기를 목표로 공동 관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비핵지대화 및 중립국 지위확보를 향한 노력에도 일절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으로 발표됐다.
[1985년] 유명우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유명우 선수가 미국의 조이 올리버 선수로부터 1985년 12월 8일WBA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을 획득했다. 유명우는 1991년 12월 17일 18차 방어전에서 일본의 이오카 히로키에게 타이틀을 물려줄 때까지 6년간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챔피언을 빼앗긴 지 11개월만인 1992년 11월 18일 다시 이오카 히로키에게 도전, 챔피언 벨트를 되찾은 그는 집념의 복서였다. 이듬해 7월 1차방어에 성공한 후 마침내 1993년 9월 3일 현역에서 은퇴해 영원한 `챔프`의 길을 택했다. 유명우 선수는 한국 복싱사에서 몇개의 기록을 갖고 있다. 총21차례로 세계타이틀을 가장 많이 치른 선수, 18차 방어전으로 최다 방어기록을 갖고 있는 선수, 가장 오랜 기간(6년) 타이틀을 보유했던 선수, 국내 최다연승(36연승)을 기록한 선수가 그의 복싱 이력이다.
[1570년] 퇴계 이황 사망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주역〉 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년(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재임중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그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을 진강(進講)했으며 그의 학문의 결정인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1570년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1913년] 슈워츠[Schwartz, Delmore] 출생 1913. 12. 8 미국 뉴욕 브루클린~1966. 7. 11 뉴욕 시. 문화적 소외와 정체성 추구를 서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위스콘신·뉴욕·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하버드대학교와 그외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처녀작 〈꿈속에서 책임감은 시작되고 In Dreams Begin Responsibilities〉(1939)로 즉각 명성을 얻었는데, 이 작품에는 같은 제목의 단편소설과 서정적 아름다움, 뛰어난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들이 실려 있다. 그뒤 출판한 작품으로는 시극 〈셰넌도어 Shenandoah〉(1941), 내면을 성찰한 장시 〈창세기 제1권 Genesis, Book Ⅰ〉(1943), 주로 중산층 유대인 가정의 삶을 다룬 단편집 〈세계는 하나의 결혼식 The World Is a Wedding〉(1948)·〈성공적인 사랑 외(外) Successful Love, and Other Stories〉(1961) 등이 있다. 또한 명료하고 날카로운 비평문을 여러 정기간행물에 발표했으며, 1959년 〈신작시선 1938~58 New and Selected Poems 1938~58〉을 펴냈다. 〈파티전 리뷰 Partisan Review〉(1943~56)·〈뉴 리퍼블릭 The New Republic〉(1955~57)의 편집장으로도 일했다. 명석하지만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그는 솔 벨로의 소설 〈험볼트의 선물 Humboldt's Gift〉(1975)에 나오는 주인공 험볼트의 모델이었다.
[1906년] 루엘린 [Llewellyn, Richard] 출생 본명은 Richard Dafydd Vivian Llewellyn Lloyd. 1906. 12. 8 영국 웨일스 펨브로크셔 세인트데이비스~1983. 11. 30 아일랜드 더블린. 웨일스 지방의 광부 가족을 그린 베스트셀러 소설 〈나의 계곡은 푸르렀도다 How Green Was My Valley〉(1939, 영화화 1941)로 유명하다. 또 〈노래하는 산 속으로 Up, Into the Singing Mountain〉(1960)·〈작은 달이 뜨는 곳에서 나는 잠들리 And I Shall Sleep……Down Where the Moon Is Small〉(1966)·〈지금도 푸르른 나의 골짜기 Green, Green My Valley Now〉(1975) 등을 발표했다. 웨일스와 런던에서 공부한 뒤 호텔 경영을 배우려고 이탈리아로 갔으나, 영화사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군대에 잠시 있다가 영화사와 잡지사에서 좀더 일한 뒤, 미스터리 극 〈악의어린 글 Poison Pen〉(1938)과 〈올가미 Noose〉(1947)를 내놓아 성공을 거두었다. 소설로는 〈외로운 마음뿐 None But the Lonely Heart〉(1943, 영화화 1944)과 〈A Few Flowers for Shiner〉(1950)가 있다. 20번째 소설 〈별빛 밝은 밤 A Night of Bright Stars〉(1979)은 브라질의 비행탐험가 알베르토 산토스 두몬트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 작품이다.
[1894년] 시가 출생 Elzie (Crisler) Segar 1894. 12. 8 미국 일리노이 체스터~1938. 10. 13 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
미국의 시사만화가, 연재만화 〈뽀빠이 Popeye〉의 작가. 시금치를 먹으면 엄청난 힘이 솟는 우락부락한 선원 뽀빠이는 세계에 알려져 대중의 영웅이 되었다. 청년시절에 시가는 주택 도장, 간판 그림, 영사기사 등의 일을 했다. 자신이 그린 만화가 숱하게 거절당하자 그는 통신교육을 통해 시사만화 과정을 거친 후 시카고로 갔다. 그곳에서 시사만화가 리처드 F. 아우트콜트의 도움으로 〈헤럴드 Herald〉지에 일거리를 얻어 〈찰리 채플린의 희극적 장난 Charlie Chaplin's Comic Capers〉을 그렸다. 이 신문이 1917년에 발행을 중단하게 되자 그는 뉴욕으로 가서 킹피처스신디케이트사(社)를 설득하여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연재만화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1919년에 〈팀블 극장 Thimble Theatre〉이 등장했다. 이 만화는 처음에는 어리숙한 노처녀 올리브 오일과 그녀의 바보스런 동생 케스터 오일 및 올리브의 남자친구 햄 그래비의 공상적인 모험을 주로 다루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인 뽀빠이는 1929년 1월에 처음 등장했다. 그 이후 뽀빠이와 올리브 오일 간의 끈질긴 연애가 진행되었고 뽀빠이는 시금치의 도움으로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물리쳤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아마도 햄버거광인 교활한 식객 J. 웰링턴 윔피일 것이다. 이 인물들은 맥스 플라이셔가 제작한 수많은 뽀빠이 만화영화에도 등장했다. 뽀빠이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시금치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결국 그가 등장한 지 6년쯤 되었을 때는 대규모 시금치 재배지인 텍사스 주 크리스털시티의 중앙광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질 정도였다.
[1889년] 오의선 吳義善 출생 한국의 독립운동가 1889. 12. 8 경기 용인~1931. 5. 6. 이명은 희선(羲善). 1919년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에 다니다가 2·8독립선언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그해 4월 13일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경기도 대표 신석우(申錫雨) 등과 같이 초대의원이 되었으며,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 세칙제정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입법부 업무를 처리했다. 그해 5월 2일 제4회 회의에서 임시정부의 재정난을 타개할 방법으로 내외 공채의 발부, 의연금 수합, 세금의 징수를 주장하고, 이에 불복하는 경우에 대비, 강제규정을 두자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해 6월 예산결산위원장에 선임되어 유정근(兪政根)·백남규(白南奎) 등과 재정문제 해결에 노력했으며, 7월에 조직된 대한적십자회 상의원(常議員)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뒤 경상북도 안동에서 일어난 일본경찰 살해사건의 관계자로 지목을 받았으며, 국내에 들어와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기자 등으로 근무하면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1931년 3월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89년] 앨런 출생 본명은 William Harvey Allen, Jr. 1889. 12. 8 미국 피츠버그~1949. 12. 28 플로리다 코코넛그로브. 미국의 시인·전기작가·소설가. 역사소설 〈앤소니 애드버스 Anthony Adverse〉로 대중문학에 큰 충격을 던졌다. 처음 출판한 작품은 시집 〈변경의 발라드 Ballads of the Border〉(1916)였다. 1920년대에 몇 권의 시집을 더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명성을 굳혔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부상을 입었는데, 장편소설 〈불꽃을 향해 Toward the Flame〉(1926)는 그당시의 체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같은 해 발표한 전기 〈이즈라펠 : 에드거 앨런 포의 삶과 시대 Israfel : The Life and Times of Edgar Allan Poe〉는 인정받은 저작이다. 작가활동을 시작한 지 5년째 접어든 1933년에 〈앤소니 애드버스〉를 써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881년] 콜럼 출생 Padraic Colum 1881. 12. 8 아일랜드 롱퍼드카운티 롱퍼드~1972. 1. 11 미국 코네티컷 엔필드. 아일랜드 태생 미국의 시인. 그의 서정시는 아일랜드 농촌의 전통과 민속을 담고 있다. 19세기말에 더블린을 중심으로 일어난 켈트 부흥운동의 문학활동에 영향을 받은 콜럼은 시집 〈야생의 대지 Wild Earth〉(1907)를 출판했다. 1911년 〈아이리시 리뷰 The Irish Review〉 창간에 참여했으며, 3년 후 미국에 영주했다. 〈극적 전설 Dramatic Legends〉(1922)·〈창조물 Creatures〉(1927) 등의 시집, 〈깨어진 국토 Broken Soil〉(1903 초연) 등의 희곡과 소설, 민요선집, 아동소설 등 다양한 작품을 썼다. 회고록 〈우리들의 친구 제임스 조이스 Our Friend James Joyce〉(1959)는 1912년 그와 결혼한 유명한 문학비평가 메리(1887경~1957)와 함께 쓴 책이다.
[1865년] 시벨리우스 출생 Jean Sibelius
본명은 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 1865. 12. 8 핀란드 헤민린나~1957. 9. 20 에르벤페에. 시벨리우스는 러시아 통치하의 핀란드에서 핀란드어로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였던 핀란드 교원양성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핀란드의 문학, 특히 그에게 있어 지속적인 영감의 근원이 되었던 핀란드의 신화적인 서사시 〈칼레발라 Kalevala〉를 접하게 되었다. 〈포횰라의 딸 Pohjola's Daughter〉·〈루온노타르 Luonnotar〉 등을 포함한 그의 많은 교향시들이 이 서사시에서 비롯되었다. 법률가가 되려 했으나 그는 곧 헬싱키에서 법률 공부를 중단하고 음악에만 전념했다. 처음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려고 했다. 베겔리우스의 지도를 받아 많은 실내악곡과 기악곡을 작곡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 활동을 위해 원래의 세례명 대신 '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0대 중반에 핀란드를 떠난 그는 베를린과 빈에서 계속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작곡가인 로베르트 푹스와 카를 골트마르크에게서 사사했다. 핀란드로 돌아오자마자 발표한 그의 최초의 대규모 관현악 작품 〈쿨레르보 교향곡 Kullervo Symphony〉(1892)은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과 그 뒤를 잇는 작품들인 〈엔 사가 En Saga〉·〈카렐리아 Karelia〉·〈4개의 전설 Four Legends〉로 그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부상했다. 〈교향곡 1번 E단조〉(1899)를 작곡하기 이전인 1897년 핀란드 의회는 시벨리우스의 재능을 인정하여 그에게 연금을 지급하도록 의결했다. 그의 교향시 〈핀란디아 Finlandia〉는 1899년에 작곡되어 1900년에 개정되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시벨리우스의 명성은 대륙을 관통했다. 학생으로서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와 친교를 맺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페루치오 부조니는 베를린에서 〈교향곡 2번 D장조〉(1901)를 지휘했고, 영국의 작곡가 그랜빌 밴톡은 〈교향곡 3번 C장조〉(1907)를 의뢰했다. 이 작품에서 시벨리우스는 2번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1903)와 같은 민족적 낭만주의에 등을 돌리고 〈엔 사가〉와 〈교향곡 4번 A단조〉(1911)에서처럼 더욱 철저하고 단호한 양식을 취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인 마지막 3개의 교향곡(5번 내림 E장조, 6번 D단조, 7번 C장조)과〈타피올라 Tapiola〉(1925)를 출판했지만 말년에는 긴 침묵에 빠졌다. 8번 교향곡(1930년대초에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음)과 심지어는 9번 교향곡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자필 악보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1930년대에는 영국의 세실 그레이와 컨스턴트 램버트, 미국의 올린 다운스 등의 작가들 덕분에 시벨리우스에 대한 인기가 유행처럼 번져갔다. 이러한 유행에 대한 다음 세대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시벨리우스는 음악 대중에 대한 확고한 영향력을 견지했다. 비록 그의 음악적 영감이 스칸디나비아의 경관과 내밀한 연관이 있다고는 해도, 시벨리우스를 대뜸 ‘자연시의 시인’ 쯤으로 기억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교향시와 7곡의 교향곡에서 성취한 업적은 주로 형식에 대한 탁월한 섭렵에 기인한 것이다. 3번 교향곡의 1악장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교향곡의 1악장에서 볼 수 있는 구조적 명료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기적 총체성과 음구조의 구축은 오히려 그 모델들을 능가하고 있다. 그의 천재성의 비밀은 이러한 유기적 구조물의 구축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864년] 클로델[Claudel, Camille-Rosalie] 출생 1864. 12. 8 프랑스 빌뇌브쉬르페르~1943. 10. 19 아비뇽 근처 몽파베 몽드베르그 보호소.
클로델이 제작한 청동상 (1890경)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오귀스트 로댕의 오랜 연인이며 그에게 영감을 준 인물로 더 알려져 있다. 시인인 동생 폴 클로델의 일기와 회고록은 그녀의 생애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해준다. 5~12세에 그리스도 교리수녀회에서 공부했다. 가족이 노장쉬르센으로 이주한 뒤로는 가정교사가 클로델가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때부터 그녀는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수많은 책이 갖추어진 아버지의 서재에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었다. 10대에 이미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대의 미술가들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 1881년 아버지가 다시 직장을 옮기면서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녀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지금의 그랑드 쇼미에르)에 들어가 평생 친구인 제시 립스컴(뒤에 엘보른으로 알려짐)을 만났다. 현존하는 초기 작품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클로델과 로댕은 1883년에 처음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뒤 곧 그녀는 그의 제자·협력자·모델·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계속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면서도 당시 로댕의 작품들, 특히 〈지옥문 The Gates of Hell〉 등에 삽입될 많은 조상과 그 일부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1888년 라폴리뇌부르에 있는 로댕의 작업실 근처로 숙소를 옮겼으나 1892년경 로댕과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1898년까지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1893년경에는 독립하여 작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끊임없이 일을 했지만 가난해지고 점점 세상과 등지게 되었다. 그녀는 때때로 작업실에 있는 모든 작품을 완전히 부수기도 했으나 공인된 미술전람회들(살롱 도톤과 살롱 데 앵데팡당) 및 뱅 화랑과 외젠 블로 화랑 등에 작품을 계속 전시했다. 로댕이 자신에게 부당한 처사를 저질렀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그와 그의 ‘무리’에게 학대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회를 멀리하고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가까웠던 동생 폴과도 멀리 떨어져 살았으며 이러한 사정이 그녀를 더욱 짓눌렀다. 1913년 3월 10일 그녀는 강제로 빌레브라르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1914년 9월 몽드베르그의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1815년] 멘첼 출생
멘첼이 종이에 그린 유화 〈거실에 있는 화가의 누이〉(1847), 뮌헨에 있는 Neue Pinakothek 소장 뛰어난 역사화가로 널리 알려졌던 독일의 화가·판화가 그당시 뛰어난 역사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그의 애국적 작품들은 19세기 전반에 걸친 프로이센의 영토 확장이 낳은 선전 예술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켜주었다. 20세기에는 주로 섬세한 광선 처리와 독창적인 구도가 돋보이는 작은 풍속화들로 평가를 받았다. 1832년 돌아가신 아버지의 석판화 공방을 맡아서 운영했으며 독학으로 유명한 석판화가가 되었다. 그당시 그는 프로이센의 다양한 역사책, 특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통치를 다룬 역사책에 삽화를 넣어 급속히 명성을 쌓았다. 이어 프리드리히 대왕의 저술에 약 200장의 도판을 곁들인 호화 장정본(1844~49)을 만드는 등 그와 비슷한 출판물을 위해 삽화를 그렸다. 그후 얼마 안 가서 멘첼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상수시 궁전에서 열린 음악회 같은 장면을 화려하게 묘사한 그림이나 활기찬 빌헬름 1세의 궁전을 묘사한 〈무도회가 열린 저녁 The Ball Supper〉(1878, 독일 베를린 국립박물관)으로 곧 유명해졌다. 후기에는 1840년 이후에 그린 소품과 드로잉들로 존경을 받았다. 실내 정경과 거리 및 풍경을 묘사한 이 그림들은 비정통적인 시각과 빛의 효과에 대한 세련된 감수성을 보여준다. 〈발코니가 딸린 방 Room with a Balcony〉(1845, 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관리재단 박물관)·〈거실에 있는 화가의 누이 The Artist's Sister in the Sitting Room〉(1847,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같은 작품들은 프랑스 인상파 운동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작품의 대상을 고의적으로 높거나 낮은 각도에서 바라보며 그렸고, 〈압연 공장 Rolling Mill〉(1875, 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관리재단 박물관) 같은 작품처럼 산업을 주제로 다루는 혁신적인 탈선을 감행했을 뿐 아니라, 주제의 배치와 구도에 대한 종래의 관습에서 벗어났다.
[1730년] 잉겐호우스[Ingenhousz, Jan] 출생 1730. 12. 8 네덜란드 브레다~1799. 9. 7 영국 윌트셔 보우드.
잉겐호우스, 동판화(부분) 녹색식물이 햇빛을 받아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하는 광합성과정을 발견했다. 1765~68년 의사로 런던에 있는 동안 에드워드 제너의 천연두 백신법에 대한 초기 지지자의 한 사람이었고, 1772~79년 빈에서 궁정의(宮廷醫)로 있는 동안에는 오스트리아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족을 예방접종했다(→ 인두접종). 1779년 런던으로 돌아와 식물생리학에 있어 화학물질의 영향에 대한 기발한 연구 결과를 〈식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 햇빛에서 대기를 정화하는 힘 및 밤과 그늘에서 대기를 손상시키는 힘〉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이미 식물이 동물의 생활에 필요하며, 동물들이 파괴하는 것을 대기 중으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었다. 잉겐호우스는 ① 빛은 이 복구작용인 광합성에 필요하다, ② 광합성은 식물의 녹색부위에서만 일어난다, ③ 식물체의 모든 살아 있는 부위는 공기를 손상시키나(이를 호흡이라고 함) 녹색식물에 의해 공기에 복귀되는 양은 그 손상되는 양을 훨씬 초과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러 방면에 과학적 관심을 가졌던 잉겐호우스는 1766년에 많은 양의 정전기를 발생시키는 증진장치를 발명했고, 1789년에는 금속막대의 열전도 정량측정법을 최초로 확립했다.
[1542년] 메리 여왕 출생 Mary
별칭은 Mary Queen of Scots. 본명은 Mary Stuart(또는 Stewart). 1542. 12. 8 스코틀랜드 로디언 린리스고 궁~1587. 2. 8 잉글랜드 노샘프턴셔 포더링헤이 성. 스코틀랜드의 여왕(1542~67), 프랑스의 왕비(1559~60). 현명하지 못한 결혼 결정과 정치적 조치로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란을 유발해 잉글랜드로 피신해야 했고, 급기야는 잉글랜드의 왕권을 위협하는 로마 가톨릭교도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5세와 프랑스 출신 왕비 기즈의 메리 사이의 외동딸인 메리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아버지가 죽자 스코틀랜드 여왕의 자리에 앉았다. 종조부인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자기 뜻대로 메리를 움직이려 했으나(메리의 할머니가 헨리 8세의 누이였으므로 메리는 튜더가의 혈통을 지녔음) 실패했고, 스코틀랜드의 섭정은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어머니는 5살 난 메리를 프랑스로 보냈다. 메리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궁정에서 왕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비롯해 수많은 왕실 가족들과 함께 자라났고, 외가가 권세있는 기즈가였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빈번한 사냥대회와 무도회(메리는 2가지 모두 뛰어났음)를 비롯해 어린시절을 호사스럽게 보냈으나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라틴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를 비롯해 그리스어도 약간 배웠으며 프랑스어가 가장 유창했다. 어느 모로 보나 메리는 스코틀랜드인이라기보다는 프랑스 여성으로 성장했다. 큰 키에(거의 180cm나 되었음) 날씬한 몸매, 금발에 호박색 눈을 가진 뛰어난 미모에다 음악과 시에도 취미가 있었던 그녀가 1558년 4월 앙리 2세와 카트린 사이의 맏아들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할 때의 모습은 당시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적인 공주의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이 결혼은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이었고, 신방을 차리지는 못했지만 메리는 진심으로 어린 신랑을 좋아했다. 1558년 11월 튜더가의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는데 이는 튜더가의 혈통을 지닌 메리가 그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여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가톨릭교도들은 헨리 8세가 아라곤 출신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한 것은 무효이고 따라서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이며 메리야말로 합법적인 여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리의 시아버지인 앙리 2세는 잉글랜드 왕위는 메리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559년 앙리 2세가 죽고 프랑수아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메리는 프랑스 왕비로 화려하게 즉위했다. 그러나 프랑수아가 1560년 12월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람에 18세에 과부가 되었다. 1561년 8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으나 프랑스의 안락한 환경 속에서 자란 자신이 당면한 여러 문제를 처리해나갈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메리는 잉글랜드의 왕위를 요구해서 엘리자베스의 미움을 샀다. 한편 메리는 로마 가톨릭교도였는데 스코틀랜드의 국교는 그녀가 없는 사이 프로테스탄트로 바뀌어 있었다. 따라서 칼뱅파 지도자인 존 녹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눈에는 메리가 다른 종교를 가진 외국인 여왕으로 비쳤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방계 왕족들의 움직임을 좇아 파당을 만들고 소란을 일으켰으며 국왕을 보좌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싸움이나 세력확대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메리는 통치 초기에 사생아이자 이복남매 사이인 머리 백작 제임스의 도움을 받고 특히 종교 관용정책을 펼쳐 국정을 잘 이끌었다. 또한 우아한 궁정생활을 연출하고 전국 순회 행차를 즐긴 아름다운 젊은 여왕의 모습을 스코틀랜드인들 모두가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메리는 1565년 7월 레녹스 백작 4세 메슈 스튜어트의 아들이며 사촌인 단리 백작 헨리 스튜어트와 2번째 결혼을 했으나, 이 결혼은 불행한 운명의 시발점이 되었고 결국 메리를 파멸로 이끌어 갔다. 그녀는 미남 단리와 사랑에 빠져 무분별한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의 권력구조와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파멸을 초래한 선택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또 다른 튜더가 출신과 결혼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이복남매간인 제임스는 레녹스가의 세력 확대를 시기해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단리의 성격은 외모와는 달리 나약하고 방탕했으나 야심가였다. 1566년 3월 다른 귀족들과 함께 단리는 메리의 면전에서 신뢰하는 신하 데이비드 리치오를 비정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이 일로 메리는 단리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같은 해 6월 아들 제임스가 태어났으나 두 사람은 전혀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토록 갈망하던 후계자를 갖게 된 메리는 이를 이용해 난관의 타개책을 찾으려 했다. 그 뒤의 8개월은 메리의 일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논란이 많은 시기였다. 이때 메리는 보스월 백작 4세 제임스 헵번과 간통해 함께 단리를 죽인 뒤 결혼할 계획을 세웠다는 비난이 있었으나 단리가 죽기 전에 이들이 간통했다는 당시의 증거는 전혀 없다. 메리가 보스월에게 썼다는 편지와 시들을 모아놓은 이른바 '캐스킷 편지집'이 논란이 되고 있으나 그 신빙성이 매우 희박하며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증거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1566년 10월 메리는 심한 병을 앓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뒤 단리와 이혼할 생각을 했다. 1567년 2월 9일 밤 단리가 요양중이던 에든버러 외곽의 커크오필드에 있는 집이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단리는 빠져나오려 했으나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이 사건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해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왔다. 그 가운데는 단리가 메리를 폭사시키려고 했다가 자기 덫에 걸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단리를 미워하는 귀족들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주장이 가장 신빙성 있다. 메리가 사전에 이 사건을 얼마만큼 알고 있었든지 간에 그 이후에 보여준 행동은 지극히 어리석었으며 여왕을 보좌하는 훌륭한 자문관이 없음을 잘 보여주었다. 3개월 뒤 메리는 이 사건의 주모자로 의심받고 있던 보스월에게 유괴되어 겁탈당한 뒤 그와 결혼해버렸다. 애정이 바탕이 된 결혼이 아니라면 메리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을 보좌해줄 강력한 힘 없이는 스코틀랜드가 당면한 문제들을 처리할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건강의 악화로 이러한 절망감은 한층 깊어졌다. 그러나 시기심 많은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이 보기에는 보스월 역시 단리와 마찬가지로 달갑지 않았다. 메리와 보스월은 1567년 6월 15일 카버리힐에서 영원히 결별했다. 보스월은 추방된 뒤 투옥당해 1578년에 죽었고, 메리는 리븐 호수에 있는 작은 섬에 유폐되어 1세밖에 안 된 아들 제임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이듬해 잠깐 동안 자유를 얻었으나 랭사이드 전투에서 지지자들이 패배해 다시 도망쳐야 했다. 메리는 친척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는 잉글랜드로 피신했다. 그러나 메리와는 달리 정치적 간계에 능숙한 엘리자베스는 단리 사건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구실삼아 이후 18년 동안 메리를 여러 감옥에 번갈아 가두며 잉글랜드에 붙잡아두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에서는 메리와 이복남매간인 제임스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감금생활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신앙에서 위안을 얻고 자수를 하거나 애완견이나 새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운동부족으로 건강이 나빠지고 뚱뚱해졌으며 미모도 사라졌다. 이런 모습은 1578년 검은 벨벳 옷과 흰 베일을 쓴 그녀의 모습을 그린 유명한 초상화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메리는 부당한 감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탄원을 하고 나중에는 음모를 꾸미는 등 온 힘을 기울였다. 잉글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프로테스탄트 군주인 엘리자베스를 왕위에서 몰아내고자 했고, 따라서 가톨릭교도인 메리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나 이는 메리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1586년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음모가 적발되어 가톨릭교도의 반란이 일어나자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확신했던 것이다.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군주였음에도 잉글랜드의 법원에서 재판과 선고를 받았다. 아들 제임스도 메리를 젖먹이시절 이후로는 보지 못한데다가 잉글랜드 왕위계승에 골몰해 있었기 때문에 이 재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메리는 1587년 피터버러 근처에 있는 포더링헤이 성의 넓은 방에서 처형당했는데 그때 나이는 44세였다. 살벌한 처형장면은 오히려 메리가 죽음에 임박해서 보여준 위엄있는 자태에 가려졌다. 그후 왕위계승에 성공한 아들 제임스는 어머니를 위해 웨스트민스터 대사원 안에 거대한 기념관을 세우고 이곳에 시신을 안장했다. 지지자들에게는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인물로, 정적들에게는 간악한 요부(妖婦)로 비친 메리는 살아 있는 동안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가리켜 "논쟁을 몰고 다니는 애"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녀의 극적인 생애는 계속해서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16세기의 요부' 메리에 대한 대중의 흥미는 지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밖에 1999 `스타워즈` 20세기 최고영화로 선정 1991 서울방송, 방송허가 취득 1990 민주화 운동가 김병곤 사망 1989 삼성전자 4M D램 반도체 해외 첫 출하 1987 미-소, 중단거리 핵미사일(INF) 폐기협정에 서명 1987 대륙붕 6광구서 처음으로 가스층 발견 1983 브라질, 한국인 불법체류 4,500명 영주권 부여 1981 영산호 준공 1980 존 레논 피살 1979 긴급조치 9호 해제 1978 포철 3기 설비확장공사 준공 1978 전(前) 이스라엘 수상 메이어 여사 사망 1978 서울대병원 준공 1977 한국-지부티 국교 수립 1977 14년 만에 쌀막걸리 제조 허용 1974 그리스 국민투표로 142년간의 왕정 종식 1966 그리스 여객선, 에게해서 침몰. 234명 사망. 생존47명 1966 북한 권투선수 김귀하, 주(駐)크메르 일본대사관에 망명 요청 1964 미국 7함대 원자력잠수함 7척 배치 1964 한국-독일 해운협정 1964 동양방송 TV (TBC) 개국 1963 역도산, 일본 동경 적판(赤坂)의 카바레서 칼에 맞음(15일 사망) 1963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여객기추락사고 81명 사망 1963 한국 독립운동가 신건식 사망 1961 미-소 양국 신군축위 구성에 합의(동서 각5국, 중립 8국) 1958 카이로에서 아시아-아프리카 경제회담 개막 1950 대한여자청년단 발족 1950 유엔군, 원산서 철수 완료 1949 우루과이, 한국 승인 1947 체크 출생 미국의 생화학자·분자생물학자 1944 일제, 종교보국회 강제 결성 1943 한글학자 이윤재 옥사 1941 외국인 신부-교구장 67명 피검 1938 독일 과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슈트라스만, 원자핵 분열 성공 1931 동축 케이블 미국에서 특허 승인 1924 경남도청,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 결정 1922 미 프로야구단 초청. 국내 전(全) 조선군과 경기 1914 독일 순향함 4척 포클랜드 부근서 침몰. 1,800명 사망 1909 기독교, 일진회 성토문 발표 1903 영국 철학자 스펜서 사망 1900 태극기 규정, 흰바탕에 길이 2척 넓이 1척 태극 7촌 청홍색 1898 사회주의 운동가 차금봉 출생 1863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 사망 1863 칠레 산티아고의 라 캄파니아 교회 화재로 2500여명 사망 1861 듀랜트 출생/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판매실적을 가진 거대기업으로 성장된 제너럴모터사를 설립한 미국의 기업가 1859 후퍼 출생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발행인으로서 세일즈 부문 등에서 출판사업에 혁신을 가져온 미국의 백과사전 발행인 1847 나카에 조민 출생 프랑스 철학자 루소의 평등주의 사상을 일본에 보급하고 일본 자유민권운동의 정신적 창시자 역할을 한 일본의 저명한 문필가 1845 자일스 출생 중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웨이드-자일스 방식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한 영국의 중국어학자·중국문화학자 1832 비외른손 출생 입센·헬란·리와 더불어 19세기 노르웨이 문학의 '4대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노르웨이의 시인·극작가·소설가·언론인·편집인·대중연설가·연극연출가 1829 뒤퓌 출생 1873년 베트남 북부에서 프랑스의 세력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실패하게 된 프랑스의 모험가·무역업자·출판업자 1816 피슈호프 출생 오스트리아의 정치이론가로 1848년의 빈 혁명 주도자 가운데 한 사람 1795 한센 출생 태양계 내에 있는 주요한 천체의 궤도에 대한 이론과 궤도표를 개선한 덴마크의 천문학자 1790 칼라일 출생 언론자유를 위해 열렬히 투쟁한 영국의 급진적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