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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명 : 그릇(수 필) | 조회수 : 14 |
작가명 : 김은미 (원본은 서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등록일 : 2004-03-10 |
김동화의 '빨간 자전거' 중에서 겨우 세 식구, 그것도 거의 매일 잠이 미처 깨지 않아 눈도 감은 채 허둥지둥 국에 밥 몇 술 말아 후루룩 마시고 가는 아침과, 좋아진 세상 때문에 급식으로 떼우는 점심과, 걸핏하면 약속으로 밖에서 먹게 되는 저녁 때문에 집에서의 조촐한 식사를 온가족 모여 먹는 일이 드문 요즈음이다. 어디 우리 집만 그렇겠나? 집집마다 가족수가 예전보다 현저히 줄었고, 어른은 맞벌이, 애들은 방과 후 학원 따위로 밖에서 돌다보면 사정은 우리나 그들이나 매일반일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집이나 여전히 묵직한 그릇들은 부엌 찬장을 차지하고 빛내고 있기 마련이다. 결혼 준비에서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도 그릇류가 아닐까. 결혼할 때 그릇은 별로 준비를 하지 않았다. 다소 늦은 결혼이었던 나는 친구들의 결혼을 지켜볼 일이 많았고, 그러므로 결혼할 때 평생 쓸 그릇 몽땅 마련하는 옛식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저 둘이 먹는 그릇 몇 개, 그것도 마구 다뤄도 되고 쉽게 버려도 아깝지 않을 멜라민으로 마련을 했고, 사람 좋아하는 남편의 성격을 미루어 손님용으로 몇 벌 더 준비한 것이 다였다. 하지만 살면서 쌓이는 그릇들이라는 것이, 처음에 많이 가져왔더라면 억울할 뻔했을터이니...이런 것도 욕심이라 할 것인가,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다고 할 것인가. 우선 무슨 명절 때면 은행이니 상점이니에서 선물 명목으로 각종 찬그릇이나 찻잔이나 심지어는 냄비까지도 나온다. 그리고 물건 하나 사도 꼭 따라오는 것이 값싼 플라스틱에서부터 제법 값은 있음직한 게르마늄 세트까지 그릇류가 필수인 듯하다. 거기다 아무리 조금 해도 한 끼에 다 먹지 못 하는 것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놓기 위해서는 저장용 찬기도 나날이 더 필요해진다. 그리고...여자들의 제일 무서운 적-부엌용품 욕심을 무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좁은 부엌에 이리 놓고 저리 쌓고 또한 더덕더덕 얹고...다른 살림 느는 것도 물론이지만 부엌 살림 느는 것은 정말 한숨이 나올 정도이다. 남자들에게는 절대 필요치 않아 보이는 그것들이어서인지 어쩌다 내가 돈을 주고 샀다는 말을 들으면 남편은 코웃음까지 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조리용구 외에는 그릇 종류는 거의 사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늘어나는 것, 어쩌란 말인가. 몇 년 전이었다. 친구가 백자 그릇이 있는데 쓰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실 늘어가는 그릇이라고는 해도 여기저기서 얻어온 것이 대부분인 만큼 상 위에 보기좋게 늘어놓아 구색을 갖춘 것이 거의 없는지라 세트라는 말에 혹해서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래서 친구가 가져온 것이 백자 세트, 그것도 여러 세트. 찬기도 크고 작은 것 여러 벌이고 접시도 역시 크기마다 달라서 어마어마한 숫자가 되고 말았다. 친구에게 아주 잘 사는 언니가 있는데 이번에 그릇을 몽땅 바꾸는 바람에 쓰던 백자는 모두 버리려 문 앞에 내놓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알뜰한 친구가 욕심을 내어 다 챙겨온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 역시 이미 다 자라 집에서 밥 먹는 일이 거의 없는 아들 둘에 남편까지 네 식구일 뿐이므로 그 부잣집의 여러 벌 그릇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그 백자들은 내 집 밥상에 올라앉게 되었고, 결혼 후 처음으로 묵직한 백자들로 상을 채우니 처음엔 상당히 뿌듯했다. 하지만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자 그것이 여간 애물단지가 아닌 것이다. 우선 너무 크고, 너무 무겁고, 설거지조차 조심스럽고...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 둘 씩 찬장 속 깊숙한 데에 넣어버리고 말았으니, 작년에 이사할 때 그것이 제일 큰 골칫거리였다. 결국 하구한날 손님 치르느라 여념이 없는 어느 장손집으로 죄다 실어나르고야 말았다. 지금 흔적처럼 남아 있는 세 종류 크기의 여섯 개 찬기가 찬장에 있을 뿐이다. 내 또래의 여자들은 누구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 명절 전에 마당에 벌여놓고 연탄재와 지푸라기로 박박 닦아대던 놋그릇의 추억이 있으리라. 두툼하고 어마어마하게 크던 아버지용 자기 주발도 눈에 어른거린다. 또 양은 냄비, 양은 솥은 좀 많았는가. 땜질장수 지나갈 때면 불러서 짠 양념으로 여기저기 삭아 구멍난 곳을 메우던 모습은 햇살 따스한 어느 골목에서건 흔히 보는 모습이었고, 치약통으로 땜질을 마친 냄비니 솥이니가 어찌 그리 신기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처음 스테인레스 그릇이 나왔을 때 어머니가 기뻐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저 일상의 설거지만으로도 유지되던 그 편리한 그릇이라니... 쭈그러진 양은 대야는 우리 몫이요, 묵직하고 소리의 울림마저 깊던 스테인레스 대야는 아버지 몫이어서 어머니 안 계실 때면 몰래 아버지 대야에 손을 씻어 보기도 했다. 지금도 친정에 가면 어머니가 쓰시다가 손잡이마저 다 빠져 몸통만 덩그라니 남은 스테인레스 냄비가 있는데 나보다 겨우 한 살 위인 올케가 아직도 그것을 쓰고 있다. 조금 더 지나자 법랑그릇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밝은 색에 예쁜 무늬까지 있던 법랑그릇으로 밥공기를 하고 찌게를 끓이고... 쉽게 얼룩이 져 잘 지워지지 않고 입힌 법랑이 또한 쉬이 깨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집집마다 법랑 하나 쯤은 다 마련해 놓던 시절이었다. 8년 전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지하실 정리를 하는데 한 번도 쓰지 않고 포장까지 고스란한 법랑 냄비들이 줄줄이 나오는 데는 아버지도 올케도 나도 혀를 내둘렀다. 유행따라 사고서도 아까워서 차마 내쓰지 못 하고 모셔뒀던 어머니 마음...때문에 우리는 내내 손잡이 덜컥대며 빠지기 일보직전이었던 스테인레스 냄비에서 찌게를 떠먹었던 것이다. 그 법랑그릇들은 지금 올케 손에서 다루어진다. 시어머니 덕에 한 번도 유행하는 새 그릇을 못 써본 올케인 게다... 엊그제 재오픈한 마트에서 저장용기 세일을 하길래 중간치와 작은 것을 두 개, 불과 몇 천 원에 사가지고 왔다. 집에 와 거기에 반찬을 담다가 문득 냉장고 안을 차지하고 있는 타파용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닦고 삶고 해도 묻은 세월을 어쩔 수 없어 거뭇거뭇하게 색이 변해 버린 타파웨어, 뚜껑마저도 헐거워져 정신차리고 닫지 않으면 금세 국물이 새 버리는 그것들도 한 때는 이 땅 위의 모든 주부들 사이에서 무섭게 번져가던 유행이었다. 새 것 두어 개 사 물을 담아놓고 거꾸로 놓아보며 신기해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내 모습처럼 후줄그레해진 것이다. 문득 그것들 몽땅 비워 내다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주섬주섬 냉장고에서 내 쌓아놓고 보니 상 하나 가득이다. 그런데...버려지지가 않는다. 내 손으로 산 것은 기껏 서너 개던가, 이사나간 집 앞에 버려져 있던 것 중에 쓸 만한 것 추려내어 가져오고 더는 쓰지 않는다는 친구한테도 얻어오고 하면서 가난한 내 형편에 한숨지었던 기억이 먼저 내 머리를 치는 것이다. 버려졌던 것이건만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말짱한, 새 것이나 진배없었던 그것들을 찬장에 넣어놓고 그래도 기뻤던 나의 젊은 날...별 게 다 추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구나 싶어지면서 다시 주섬주섬 냉장고에 집어넣고 말았다. 이즈막에 다시 불처럼 번져 몇 개나마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요즘 사람 아닌 듯이 취급당하기 딱 맞은 락앤락 저장용기를 지난 주 남편 친구네 갔다가 그 아내로부터 세 개나 얻어왔으니 그래도 유행에 뒤진 예편네는 아니라고 슬쩍 웃었다. 형편이 좋건 나쁘건 요즘은 흔해 빠진 게 그릇인지라 쉽게들 그릇을 바꾸는 모양이다. 유행은 또 어찌 그리 변하는지, 꽃무늬 화사한 것들은 어느 새 천덕꾸러기가 되고, 손으로 빚어 울퉁불퉁 자연스런 멋이 있다고 뻐기던 것들도 아파트 쓰레기장에는 수두룩하고, 게르마늄 들었다나 참숯이 섞였다나 기능성 그릇들도 어제 인기였나 하면 오늘은 쓰레기가 되고 만다. 이제는 그런 것들 주워오는 것도 삼갈 만큼 내 찬장도 포화상태다. 간혹 나도 쓰레기 처리하고 좀 더 새 쓰레기 가져다 채우면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쓰임새도 없는 그것들을 욕심 내기에는 이제 내가 너무 나이 든 것일까. 아니면 이제 나도 내 손으로 새 그릇 골라 왕창 바꾸고 싶은데 아직 사정은 여의치 않아 차마 일을 저지르지 못 하는 심통으로 낡은 것들 고수하는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진짜 말간 마음으로 가볍기만 한 유행의 마음들이 비웃어지는 것일까. 예쁘고 날렵한 그릇들 놓고 밥 먹으면 맛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요, 이내 눈은 다른 것을 찾게 되지. 더구나 밥상 앞에 앉아서도 TV에만 눈을 주고 신문만 뒤적이는 이즈음의 밥상머리 풍경을 감안하면 유행 따른 그릇들의 역할은 고작 주부의 만족 외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꽃밭 앞에 앉듯이 밥상을 모양내봤자 거기에 담기는 것이 가공식품이요 냉동식품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게고, 오가는 대화가 살갑지 않으면 찌그러진 양은 냄비 속의 김 무럭무럭 나는 라면보다 나을 게 하등 없을 것이다. 겉치레로 밥상을 장식하며 새 그릇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생활 자체가 달리 채울 것이 없다는 뜻일테지... 유행에 따른 새 그릇을 살 수 없는 것이 약오를 게 아니라 우리를 채울 것이 없는 것을 억울해 해야 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추억'보다는' 정도가 아니라 추억은 행여 남겨두어서는 안 될 창피한 것 쯤으로 여기고 희망으로만 목을 축이고 있다. 하지만 과거가 없는 현재가 어디 있으며 현재가 없는 미래가 어디 있겠는가. 자식이 소중하면 나 자신을 우선 잘 추스려야 하고 부모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바른 길일터인데. 새로 산 그릇이 빛이 나는 건 그 뒤 어둠 속에 고즈넉히 앉아 있는 묵은 그릇들이 지키고 있음이요, 그 그릇들에서 내가 먹었던 어머니 손맛, 그 때 밥상머리에서 오갔던 온갖 얘기들을 묻혀 오늘의 내 그릇 앞에서 내 자식에게 두런두런 들려줄 수 있는 것 또한 남겨지는 것 아니겠나. 늙었다고 부모를 외면하는 세상이니 까짓 그릇 쯤이야 훌쩍 쓰레기 더미 위에 내놓은들 무어 대술까 하겠지만, 부모건 그릇이건 추억하는 소중함의 크기는 그닥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와 아까운 건 어머니의 놋그릇 하나 챙겨놓지 못 했다는 것. 일제강점말기에 쇠붙이란 쇠붙이를 죄다 공출당해 나무 수저를 사용했을 어머니께는 사용하는 데 성가시러웠을망정 그 놋그릇 새로 마련한 것이 스스로 얼마나 대견하셨을까 생각하니 소홀히 취급해 어디 누구에게 넘겼는지도 모르겠는 그것들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다. 거기에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 한, 먼저 저 세상 여행을 떠난 나의 언니 오빠들의 누런 콧물도 묻었을 것이고 웃음과 앙탈도 묻었을 것인데... 대학 때 친했던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말이, 정말 한국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그릇이라고 했다. 평생 몇 번 못 만날 사람들 찾아오면 제일 귀한 그릇 내주면서 매일매일 함께 어우러져 인생을 꾸려가는 소중한 내 가족은 왜 허드레 그릇에다 밥을 먹이는지 모를 일이라 했다. 한국인의 손님 대접이 그만큼 정성이 깃든 것이라는 것, 정성이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스스로 안을 되짚어보아 내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야 않지만, 나 역시도 손님보다 더한 내 가족에 대한 정성을 소홀히 하는 것 역시 고쳐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니, 내 가족은 차치하고라도 나 자신에게 우선 정중할 것. 그래서 어떤 후배는 자기 생일상도 벅차더라도 스스로 상다리 휘게 차려먹고, 낮에 혼자 먹는 점심도 온갖 구색 다 갖춰 차려놓고 먹는다 했는데, 그것이 자기를 존중하는 거구나, 그러므로 가족도 이웃도 어쩌다 들르는 손님도 존중할 수 있겠구나 생각을 했다. 남만을 위해 살다보면 어느 순간 인생 자체가 허무하고 억울할 수도 있는 것, 특히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여인들에게는 노년에 그 허무감이 더할 것이라는 것 짐작키 어렵지 않다. 바가지 하나에 온갖 허접한 것 다 담아 부엌 한 켠에서 허겁지겁 먹던 세월...이 지나도 이제도 우리는 여전히 비빔밥으로 낮 한 끼 떼우는 이 흔한 형편 아니겠나. 그 미국인 친구네서 백화점 카다로그를 본 적 있다. 그릇 부분이었는데, 이것은 우리 할머니 것, 이것은 우리 외할머니 것, 이것은 우리 엄마 것 하며 하나 하나 짚어 경쾌하게 설명하는 친구를 참으로 경이롭게 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 친구네 부엌에서 보았던 바로 그 그릇들이 엄마의 그릇으로 버젓이 있는 걸 깨달으면서 몹시 놀랐었다. 그렇다면 지금 사용하는 저 그릇이 바로 그녀의 어머니가 결혼하던 30여 년 전(당시를 기준으로)에 가져온 것이란 말인가. 그것을 묻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사용하다가 하나 둘 쯤 깨지더라도 언제라도 가서 사와 채워넣을 수 있다는 설명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내 그릇, 어머니 그릇 하면서 애착을 가질 수 있는 게지. 우리는, 20여 년 지난 그 때나 지금이나 봄에 산 그릇을 가을 쯤에 짝 맞추려 해도 이미 찾을 수가 없으니, 그런 것에 익숙한 나로서는 친구의 말을 좀체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만의 것, 그리고 자기와 같은 것을 갖춘 누군가와 공통된 취향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친숙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그 기쁨을 가져본 적도, 남이 가진 것을 본 적도 없는 우리는, 그것 하나 만은 불행한 일이라는 기분이 든다. 찬장을 연다. 제일 정갈하고 마음에 드는 그릇 하나 꺼내든다. 이제부터 당분간은 이것을 내 밥그릇으로 하리라. 젓가락도 무늬 제일 예쁜 것으로 골라든다. 어떤 금붙이보다도 더 소중하게 잘 꾸려놓은 상자 속엔 내 딸내미 어릴 때 처음 이유식 먹던 그릇과 숟가락이 보관되어 있다. 나는 가끔 상자를 열어 그것들을 보면서 이제는 너무 커서 내 품 안에 들어오지도 않는 딸내미가 서운할 때면 10여 년 전으로 훌쩍 날아갔다 오곤 한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세월이 흘러 내가 늙고, 혹은 죽고 난 후에도 내 딸이 이 그릇과 젓가락을 보면서 자기 어린 날의 어머니를 기억하고 빙그레 웃어줄 것 하나쯤 만들어놓고 싶어진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오늘은 속이 거북하여 죽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 귀찮다 말고 나 자신을 위해 죽을 쑤자. 그저 물 만 밥 훌훌 마시고 돌아서질랑 말고, 뽀얀 죽 한 그릇 쑤자. 그래서 골라낸 저 그릇에 담아 향기로운 기름 냄새 맡으며 맛나게 먹자. |
추신 - 그러나 범랑이나 양은, 검은색으로 칠해진 테프론 후라이팬은 발암성이 강해서 안좋다고 합니다.
첫댓글 결국 깨어질 수도 있는 그릇인데 저도 그릇에 사연이 너무 많아요 집착하지 않으려고 자꾸 비우는 연습을 합니다 나이들수롯 둔탁하고 못생긴 옹기들이 좋으니 날렵한 것들은 자꾸 찬장뒤로 밀립니다 그릇도 주인을 닮아가나봐요 놋그릇부터 숯그릇까지 줄섰어요
놋그릇이 있으시다니 와~ 쉽게 사고 쉽게 버리게 되는 플라스틱 그릇류는 자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결국엔 찌든 플라스틱이 되는데 환경 호르몬도 나오고.. 여자라면 그릇에 관심 갖고 새롭고 예쁜 것에 욕심나게 마련인데 그릇 뿐 아니라 뭐든지 실용적이고 계속 쓸 수 있는걸 사는 습관을 들여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