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1-5)
할렐루야! 하나님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올해 장마가 오늘로 끝이라고 합니다.
내일부터는 폭염과 열대야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합니다.
작년만큼이나 덥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지만, 그래도 폭염과 열대야 속에서 건강관리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할까요?
대통령을 바꾸고, 장관을 바꾸고, 국회의원이 바뀌면, 살만한 세상이 될까요?
정치에 소망을 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경제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까요?
자녀에게 소망을 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부모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까요?
때로는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소망을 두어야 할 때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소망을 둘 때가 없어서, 더욱더 힘들어 합니다. 괴로워 합니다.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찾아옵니다.
똑같이 맑은 날씨가 되기도 하고, 비가 쏟아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런 그 순간이 찾아오면, 세상 사람들은 바라볼 때가 더 이상 없어서, 자신의 귀하고 소중한 삶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마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 해도, 극단적인 선택을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이라 할지라도, 의지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는 주만 바라봅니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습니다.”라는 고백 한 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나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주님께,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9-10)라고 기도했습니다.
시편 71:9-12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주님께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내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내 영혼을 엿보는 자들이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때는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제로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상점에서 어떤 물건을 살 때, 현금으로 계산하기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용카드로 계산을 합니다. 요즘 현금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핸드폰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서도,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핸드폰으로 물건을 사는 등, 모든 것들을 손쉽게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용카드로 만원짜리 물건을 사면, 그 물건을 파는 사람은 신용카드로 만원을 결제하는 순간, 10프로는 세금으로 나가고, 그리고 신용카드 단말기 사용 수수료로 얼마 정도가 지출이 됩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은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할수록, 많은 수수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울시에서 시작하고, 정부가 지원하고 있는 제로페이라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로페이의 특징은 수수료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건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정책입니다.
그런데, 신문에 보니, 제로페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용자가 제로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가게에서 제로페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달에 한 명 꼴이랍니다.
사람들이 왜 제로페이를 사용하지 않을까요? 제로이기 때문입니다.
신용카드는 내 통장에 돈이 들어있지 않아도, 물건을 살 수 있는데, 제로페이는 반드시 내 통장에 돈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체크카드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체크카드는 물건을 살 때, 가지고 있는 체크카드만 주면, 결제가 완료되는데, 제로페이는 물건을 선택하고, 스마트폰 앱을 실행하고, QR코드를 인식하고, 마지막으로 계좌이체를 실행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누가 하느냐 하면, 물건을 사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번거로워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별로 사용을 하지 않습니다.
한달 월급 받으면, 이것저것 다 빠져나가고, 텅빈 통장이 달랑 남는데, 그래서 카드로 외상거래하는데, 통장에 돈 넣어놓고, 제로페이 쓰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힘든 일입니다.
통장에 돈이 없는 사람들은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정책입니다.
여러분! “제로페이”를 보면서, 아무리 큰 이상을 가지고, 멋진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그것이 원래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씁씁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나, 물건을 사는 사람, 모두에게, 큰 도움을 주고자 야심차게 계획했지만, 현실적으로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로페이” “사용제로” “소망제로”
여러분! 세상은 제로페이처럼 우리에게 유익을 주려고 시도합니다. 조금이라도 소망을 주려고 몸부림칩니다.
서울시와 정부에서는 사람들이 “제로페이”를 많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로페이”를 광고하는데 있어서,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투자한만큼, 원하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전혀 엉뚱한 곳에 투자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소망을 주려고 하지만, 거기에서 큰 소망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신용카드는 외상거래이죠. 눈치 안 보고, 외상거래 할 수 있었는데도, 애초부터 통장에 돈이 없는데, 그것 쓰라고 하니, 답답하고, 초라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1절)라고 외쳤습니다.
시편 기자에게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누구를 향한 갈급함입니까?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시편 기자에게는 주님을 찾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2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갈급”이란, “속이 마를 지경으로 몹시 바라다”, “몹시 급한 갈증”을 의미합니다.
“갈망”이란, “간절하게 애타게 바라다”라는 의미합니다.
“소망”이란, “바라고 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갈급”, “갈망”, “소망”이란 모두 비슷한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속이 마를 정도로,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얼굴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계시는 성전에 나아가, 예배하며, 찬송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갈급함, 찬양의 갈급함, 기도의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목마름, 영적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6:1절을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그곳,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왜,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까요?
웃시야 왕에 대하여,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은 웃시야 왕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향단에 분향하는 일을,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이 웃시야 왕을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직접 분향하려 하다가, 나병이 걸려 죽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웃시야 왕은 좋은 왕입니까? 나쁜 왕입니까?
역대하 26:16절을 보면,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마지막에,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나 그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주 좋은 왕이었습닏다.
여러분! 역대하 26장을 보면, 웃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시야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웃시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스가랴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스가랴서를 쓴 스가랴 선지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가랴 선지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후에,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 건축을 독려했던 선지자입니다.
그 스가랴 선지자와 여기 스가랴는 이름만 같을 뿐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여러분! 웃시야 왕 옆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가랴 선지자가 있었고, 그로 인하여,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즐겨 찾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웃시야 왕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찾는 동안에는 형통하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직접 나가,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승리하였고, 블레셋 땅에, 성읍들을 건축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때,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그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습니다.
여러분! 웃시야 왕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국방을 빈틈없이 튼튼히 했습니다.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웃시야 왕이 농사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웃시야 왕은 경제를 살렸습니다. 백성들이 먹고 사는데 있어서, 힘들지 않게 했습니다. 열심히 농사 지으면, 배 곪지 않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백성들을 돌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은 적들과 싸워야 할 때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싸운 용사였습니다.
전쟁이 없을 때에는 직접 논과 밭에 나가, 농사 짓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웃시야 왕의 이름이 멀리 퍼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강성해졌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만 보면, 웃시야 왕은 아주 선하고 좋은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열심히 농사를 짓어,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살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국방은 튼튼하였고, 주변 나라들은 조공을 바칠 정도로, 안정되고, 평화로웠습니다.
여러분! 이제야, 나라가 나라다워지고, 백성들이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웃시야 왕이 있다고 하는 사실이 너무나 든든했습니다.
부국강국이었습니다. 태평성대였습니다.
백성들은 웃시야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소망을 웃시야 왕에게 두었습니다.
평범한 왕족이었던 이사야도 웃시야 왕이 있음으로, 그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웃시야 왕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직접 분향하려고 했습니다.
용맹한 제사장 80명이 웃시야 왕을 붙들고, 만류했습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웃시야 왕 곁에 서서,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라고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제사장들에게 화를 내면서, 분향하려다가,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웃시야 왕은 교만해졌습니다. 아주 좋은 왕이었는데, 그만 교만해짐으로, 사리판단을 잘못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분향하는 일은 마땅히 제사장들이 해야 하는 일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그 일마저도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당했습니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을 구별해야 하는데, “왕이니까, 나이니까.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왕이라 할지라도, “내가 다 할 수 있다”라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교만했다가 쫓겨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분명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웃시야는 나병에 걸림으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쫓겨났고, 궁궐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홀로 별궁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어도, 왕이 왕의 자리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요담이 웃시야 대신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담 왕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나라는 점점 강해졌습니다.
여러분! 왜,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까요?
이사야는 웃시야 왕에게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웃시야 왕만 있으면, 나라는 튼튼해지고, 백성들은 살기 좋은 세상에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웃시야 왕이 죽음으로, 무너졌습니다.
그의 소망이 산산조각 깨져버렸습니다. 하루아침에 그의 소망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웃시야 왕만 있으면, 더욱더 좋은 세상이 올텐데, 갑작스러운 왕의 죽음으로, 그의 소망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에게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었던 웃시야 왕이 한 순간,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의 소망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암 5:4)
하나님은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암 5:5)
여기저기 두리번 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저기 마음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을까? 혹시 저기에 소망이 있을까?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무언가, 소망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결코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시편 146:3-5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문에 보면, “오늘의 운세”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오늘의 운세”를 보았는데, 그곳에, “서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나게 되고, 그 귀인이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더랍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서쪽 바다 갯벌에서 그 운세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럼, 그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사람들은 그런 귀인들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런 귀인을 만나면, 그의 인생이 활짝 피게 될 것이라는 어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만나면 안됩니다. 패가망신합니다.
“오늘의 운세”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귀인은 그런 귀인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귀인은 힘있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알고 있으면, 든든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알고 있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높은 직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아들 딸들을 취업시켜 달라고 했다가, 탈이 난 것들이 많습니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기 보다는, 높은 사람이 자기가 가진 그 힘을 이용하여, 낮은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아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을 빼앗아 가는데, 그 힘을 사용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큰 탈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의지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시편 기자는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누군가 “나만 믿어. 나 믿지”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믿으면 안됩니다.
믿고서, 인감 통장 맡겼다가, 보증 한번 잘못 섰다가, 패가망신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먹고 잘 살면, 그럴 말 들을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꼭, 우리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너 하나님 믿는다면서, 교회 다닌다면서”라고 우리의 아픈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시편 기자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음이 상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가 처한 상황 때문에, 그의 마음이 아팠고, 주변 사람들의 말로, 그 마음이 찢어질 정도로 더 아팠지만, 그는 그 순간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리쳤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절)
여러분! 혹시, 세상 모든 줄이 다 끊어졌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줄은 끊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38-3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줄은 절대 끊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때로는 크게 선포하십시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어떤 일을 만난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불안해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감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되신 주님!
주님만 바라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었을지라도,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이 우리를 유혹한다 할지라도, 딴 곳에 우리의 마음을 두지 않도록, 우리를 강하게 붙들어 주옵소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소망되신 주님만 바라봄으로,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