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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파견을 앞두고 대한산악연맹에서는 75년 8월 100일간 전지훈련을 겸해 7명으로 구성된 제1차 에베레스트 정찰대를 네팔로 보냈다. 꼭 30년 전의 일이다. 이 정찰대원 중 3명은 이미 고인이 됐고, 2명은 외국에 살고 있으니, 한국에 남아있는 대원은 김인섭 선배와 나 단 둘뿐이다.
▲ 네팔왕국 국경일에 카트만두 시내에 모인 군중과 웅장한 힌두교사원. |
당시 정찰대는 2년(74년, 75년)에 걸친 국내 동계훈련과정을 통해 엄선된 젊은 산악인들로, 곧 국내 준비와 훈련에 돌입했고, 네팔에 가서는 카트만두와 캐러밴 도중의 각종 자료 수집은 물론, 아일랜드피크(6,189m) 전원 등정, 에베레스트 제1캠프까지 진출, 푸모리(7,145m) 6,200m까지 등반, 비행기 타고 웨스턴쿰 공중정찰 등 다방면으로 훈련과 정찰활동을 펼쳤었다.
생각해보면, 그 해 1~2월 동계훈련, 3~7월 정찰준비와 훈련, 8~11월 현지 정찰활동, 12월 장비 및 사진전시회 개최로 일관했으니 정찰대의 1975년도는 오직 에베레스트 원정준비를 위한 한 해였다.
당시 대원은 대장 최수남(41년생·1976년 설악산 훈련 중 눈사태로 작고), 부대장 김인섭(44년생·현 마하라자어드벤처 여행사 대표), 촬영 담당 김운영(33년생·미국 거주), 장비 담당 한정수(48년생·1997년 지병으로 작고), 식량 담당 이원영(50년생·인도네시아 거주), 수송 담당 김병준(48년생·필자), 의료 담당 고상돈(48년생·1979년 매킨리 등정 후 하산 도중 작고)이었다.
▲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10km를 달리며 체력훈련을 강행했다. |
서울국제전신전화국 : 인공위성 전화
30년의 변화를 무엇보다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한국과 네팔의 전화통신이다. 당시 까마득히 먼 나라 네팔로 전화를 걸려면 서울국제전신전화국(현 광화문 교보빌딩 자리)을 찾아가야만 했다. 국제전화 신청을 서면으로 하고 느긋이 기다리면 대략 2~3시간이 지나서야 실내 스피커를 통해 “네팔 신청하신 분은 몇 번 전화박스로 들어가세요” 한다.
▲ 1975년 제1차 정찰대 7명이 포터들을 데리고 캐러밴을 떠나고 있다(바카루). |
전화박스 안에는 달랑 전화기 한 대만 놓여있다. 수화기를 들면 오퍼레이터가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잠깐 기다리라” 말한 후 일본을 통해 네팔과 연결시킨다. 또 한참을 기다리면 심한 잡음 속에 네팔의 수화자 목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실수로 전화가 끊기면 또 앞의 절차를 밟으며 부지하세월 기다려야 하기에 사전에 준비한 내용으로 빠르게 통화를 마쳐야 했다.
에베레스트 BC에서 한국으로 소식을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등정소식이나 구조요청 등 화급을 요할 경우 남체바자르에 있는 간이전신소로 메일러너를 내려 보내 카트만두 전신국으로 무선통신을 취하면, 전신국에서 이를 주 네팔한국대사관으로 전달해준다. 대사관에서는 텔렉스로 본국에 보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80년대 초 일본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정상에서 직접 무전기로 인도양의 일본상선으로 등정소식을 전하고, 이 선박이 태평양의 어느 상선을 통해 본국으로 무선통신을 보내 에베레스트 등반사상 가장 빨리 등정소식을 본국으로 보냈다는 뉴스가 신문의 해외토픽에 났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에베레스트 BC에 누워서 한국의 어느 집으로건 인공위성을 통해 직접통화가 가능하고, 또 한국 어디에서도 언제든지 번호만 누르면 에베레스트로 직접 전화통화가 가능한 세상이다. 격세지감도 유분수지, 이쯤이면 기가 막힐 밖에.
등반 도중 캠프간 무선통신도 상상을 초월한다. 당시 BC에서는 대형 무전기를 사용하는데도 통화가 잘 안돼 높게 안테나를 설치해야만 했다. 전진기지격인 제2캠프도 BC와 통화가 여의치 않아 높다랗게 안테나를 설치하고, 음질이 좋지 않을 때는 텐트 밖으로 약 50여m 가량 걸어 나가서 통화할 때도 많았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좋다는 일제 무전기를 사용했지만, 1kg이 넘는 무게에 부피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등반 중에는 배낭뚜껑이 아닌 배낭 안에 넣어야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극기를 높이 든 고상돈 대원의 사진을 보면 가슴에 매달려있는 커다란 무전기를 볼 수 있다).
▲ 아이스폴 지대를 통과하고 있는 대원들. 셰르파들은 사다리 건너기를 꺼려했다. |
석유버너 : 태양열발전기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열(熱)과 따뜻한 온기(溫氣)를 구하기 위해선 가스램프 아래 석유스토브와 땔나무가 전부였던 그 시대의 BC를 현재와 비교해 보자.
요즈음은 포터블 석유발전기 외에 태양열발전기, 풍력발전기, 나아가 전기와 열을 동시에 공급하는 열병합발전기 등을 BC에 설치해 밝은 전기불은 물론, 전기장판, 전기담요, 전기난로를 애용한다. 여기에 충분한 온수의 공급은 물론, 컴퓨터 등 풍부한 전자기기 사용이 가능하다.
또 에너지 전환효율을 높이는 우수한 발전기가 매년 새롭게 BC로 운반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소형 난로에 난방 속내의를 입는 요즈음이다.
헤드램프를 봐도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투박한 헤드램프는 머리에 쓰고, 연결된 건전지통은 허리에 차거나 주머니에 넣어야 했다. 대형 1.5V 건전지 3개를 넣으면 잘해야 2시간 정도 사용이 가능했다. 따라서 그 무거운 건전지를 예비로 각자 최소 6개씩은 갖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성냥갑 크기의 가벼운 헤드램프에 건전지는 원정기간 내내 교체할 필요가 없다. 성능은 최소 10배는 더 우수하다.
중요한 신발의 경우, 오늘날 이미 구닥다리가 된 플라스틱 제품은 당시엔 꿈도 못 꾸었다. 이너부츠도 끈으로 묶는, 무겁고 젖기 쉬운 가죽제품이었다. 요즈음 그 신발 신고 등산하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저을 것이다. 아이젠 착용은 요즘의 원터치식이 아니라 일일이 끈으로 묶어야 했으며, 쉴 때마다 느슨해져 있지 않나 점검해야 했다.
신발 못지않게 중요한 의류도 요즘 그 흔한 고어텍스, 폴리에스터, 폴리프로필렌, 스판덱스, 플리스, 윈드스토퍼 등의 원단은 듣도 보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탄생한 소위 알파인스타일은 그만큼 각종 장비가 발달했기에 가능했다.
▲ 산속 마을에서 대민의료활동을 벌이고 있는 조대행 의무대원. |
북한대산관 : 코리언 드림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네팔로 들어서는 첫인상을 보자. 지금의 카트만두공항은 초라한 편이긴 해도 에어컨시스템도 있고 제법 현대적이다. 그러나 당시 원시적이고 어수선한, 그리고 수백 명에 달하는 짐꾼들의 혼잡한 공항 분위기는 정말 독특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대략 30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었다.
시내에서도 경찰은 총이 아닌 작은 칼을 차고 있었고, 시민의 80% 이상은 맨발이었다. 시민의 주 교통수단은 버스와 마차가 고작이고, 대부분은 걸어 다녔다.
지금은 많이 복잡해지고 현대시설의 호텔도 제법 들어섰지만, 시민의 맑은 표정과 착한 성품을 비롯해 시내 곳곳의 고전적 운치와 여유로운 낭만, 거리의 깨끗함은 30년 전이 훨씬 더 좋았었다.
현재 카트만두시내는 거리거리마다 너무 지저분하고, 엉망인 도로에 자동차와 오토바이는 늘어나고, 매연이 너무 심해 일부 외국인들은 시내 다닐 때 산소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진풍경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띄엄띄엄 다니는 택시를 타고 Korean Embassy(한국대사관)으로 가자고 하면, 꼭 북한대사관으로 안내해 주었다. 한국대사관은 지도에도 없었고, Korea 하면 으례 북한이요, South Korea를 아는 시민은 거의 없었다. 대사관 직원도 북한은 수십 명이고, 남한은 고작 3명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네팔에서 북한과 남한의 이미지는 완전히 바뀌었다. 요즈음 네팔사람에게는 한국이야말로 ‘코리언 드림’이다. 작년 봄 한국에서 일할 근로자 500명을 뽑는데 무려 35,000명이 한국대사관 앞으로 몰려 거리가 며칠동안 마비된 적도 있었다. 한국말 할 줄 아는 현지인도 꽤 많다.
당시 교민은 기억에 아른거리지만, 공항공사를 맡은 고려개발 직원 약간과 UNDP 소속 2명, 국가대표 축구감독 1명, 태권도 선생 1명 등이 전부였던 것 같다. 몽땅 모여야 10명 정도였다.
우리는 카트만두 시내를 주로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녔다. 시내를 구석구석 다녀도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손짓발짓 대화에 사람들은 참으로 온순하고 친절했다. 지금의 카트만두는 아직은 그래도 순박한 편이나, 중심가의 밤거리는 자칫 방심하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다. 바가지 요금에 고약한 인심은 물론이고, 치안이 그야말로 개판이다.
당시는 먹고 마시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물은 꼭 여과기로 거르고 끓인 물을 준비해 마셨고, 저녁 식사시간이 되면 지저분하지만 주로 중국음식점을 찾았다. 튀긴 닭고기(Fried chicken & rice)에 고추소스를 넣어 먹는 것이 가장 한국음식에 근접해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 당보체 출발. 지금은 아이스폴 전담 셰르파들이 사다리를 놓기 때문에 사용료만 내면 된다. |
한 달 대장정 캐러밴 : 루클라 비행장
이제 에베레스트를 향해 출발해 보자. 30년 전에는 카트만두 시내의 외곽지역인 람상고까지 2시간 정도 트럭에 짐을 싣고 간 후, 그곳에서부터 한 달간 줄곧 걸어야하는 장장 400km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자동차 구경을 할 수 없는, 오직 험준한 도보길의 연속. 거대한 산과 고개를 넘고, 계곡과 숲을 지나며 오르락내리락 하루에 꼬박 7~8시간씩 걸어갔다.
이 여정은 꿈에 그리던 에베레스트로 가는 필수요건이었기에 고달픔은 생각도 안했다. 오히려 이 긴 캐러밴이 등반 못지않게 그리운 추억으로 지금도 아련히 남아있다. 진정한 낭만이 여기에 있었다. 하루의 산행을 끝내고 느긋이 야영하는 맛이란 너무 멋졌다. 수백 명의 포터들이 원정대 짐을 짊어지고 가는 긴 대열도 장관이었다.
캐러밴 도중 어느 산을 지나건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면 어김없이 밭을 일구었고 집이 띄엄띄엄 있었다. 에베레스트로 향해 가는 주변 경치는 매일 매일 신비롭고 환상적이었다. 저 멀리 하얀 고산이 나타나면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매일 저녁 캠프를 칠 때마다 노천창고를 만들어 포터들이 짊어지고 오는 각종 물건을 종류별로 쌓고, 쿡과 키친보이를 데리고 대원이 직접 요리를 했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척박한 생활에 찌든 주민들은 약을 달라고 찾아오고, 어린이들은 우리 야영지를 구경삼아 모여들곤 했다. 비교적 풍요로운 농촌의 집은 대개 1층에는 소, 염소 등 가축이 있고, 2층에 사람이 살았다. 방이 따로 없는 어두운 홀은 퀴퀴한 냄새와 함께 장작불 연기로 가득했다.
▲ 정상의 고상돈 대원(가슴에 달린 커다란 무전기 주목). |
▲ 1975년 제 1차 정찰. 캐러밴에만 22일 걸렸다.
에베레스트 등반의 과거와 현재
에베레스트 등반의 30년 전과 지금은 우선 제도적으로 몇 가지가 크게 변화했다. 첫째, 당시 에베레스트 등반은 봄에 한 팀, 가을에 한 팀, 1년에 2개 팀만 등반이 가능했다. 네팔 정부가 봄, 가을로 나눠 한 팀씩만 입산허가를 해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 년 전에 미리 신청해야 했다. 77년 한국원정대의 경우 71년도에 신청해 74년에 허가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원정대가 네팔에 도착해서 신청해도 곧바로 입산허가를 내준다. 원정대의 수에 제한이 없다. 일례로 금년 봄에만 네팔로 23개 팀, 티베트로 25개 팀 총 48개 원정대가 에베레스트에 몰렸다.
둘째, 네팔 정부에 내는 입산료가 하늘과 땅 차이다. 당시에도 에베레스트가 가장 비쌌지만 인원제한 없이 한 팀이 100,000루피였다. 현 환율로 계산하면 고작 150만 원이다.
그러나 현재의 입산료는 팀당 약 8천만 원이다. 그것도 7명까지. 여기에 대원 1명 추가당 1,100만원씩 내야한다. 만일 77 에베레스트 원정대와 같이 대원이 총 19명이라면 네팔 정부에 지불하는 입산료만 2억 원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비교하기가 어렵다.
셋째, 당시는 한 계절에 한 팀만 등반이 가능했기에 대원과 고소포터가 충분한 대규모 원정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폴 통과에만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장비가 필요했다. 따라서 인원수도 식량과 장비도 넉넉해야만 했다. 참고로 73년 이태리팀은 대원수만 64명(8명 등정), 일본팀은 대원수 48명이었다(등정 실패). 75년 영국 크리스 보닝턴팀은 대원 22명에 고소포터 41명, 아이스폴 셰르파 29명, BC 고용인 14명에 원정대가 직접 운반한 물량은 산소통 143개를 비롯해 총 28.8톤이었다(5명 등정). 77년 한국대는 대원이 19명(기자 3명 포함)에 불과하고, 아이스폴 사다리 100개, 산소통 50통을 포함한 물량은 총 22.5톤에 달했으나 당시로는 소규모 원정대였다.
그러나 현재는 팀마다 규모는 다르나 특이한 점은 돈만 내면 누구나 참가 가능한 상업등반대가 많이 몰린다는 점이다. 소규모 원정대도 충분히 가능하다. 돈만 있으면 만사 OK다.
오늘날 에베레스트 등반은 엄청나게 변화됐다. 히말라야의 그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 오직 에베레스트만이 변화됐다. 두말할 나위 없이 세계 최고봉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최고봉을 오르고 싶어 한다. 산을 좋아하는 산악인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전 세계에서 해마다 수많은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신청하니, 네팔 정부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천연자원인 히말라야에 찾아오는 외국 원정대와 트레커들이 주 수입원인 네팔 정부는 너무 에베레스트쪽으로만 원정대가 몰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각 지역의 주민들이 골고루 먹고 사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입산료를 올리는 것이었다. 에베레스트 입산료가 비싸지면 원정팀이 다른 산으로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판단이 잘못됨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기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팀이 에베레스트로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가난한 팀은 더 비싸지기 전에 빨리 세계 최고봉을 올라야겠다는 압박심리가 작용했다. 티베트 정부는 네팔과 너무 차이가 나면 안 되기에 적당히 보조를 맞춰나갔다.
네팔 정부는 재차 에베레스트 입산료를 올렸다. 그것도 아주 파격적으로. 그랬더니 웬걸! 더욱 몰리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자연발생적으로 상업등반대가 생겨났다. 돈 있는 사람들은 상업등반대에 신청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니 아주 편했다. 이것저것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상업등반대는 예상을 뒤엎고 성공하기 시작했다. 가격을 올리면 올릴수록 신청자가 늘어만 갔다.
▲ 제 3캠프 위의 긴 행렬.
에베레스트 등반의 현주소
에베레스트는 세계 최고봉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들에겐 오직 정상이 목적이다. 알피니즘이나 머메리즘 따위는 관심 밖이다. 때문에 등로주의니 새로운 루트개척이니 하는 단어는 에베레스트에선 이미 그 의미가 없어졌다.
순수 산악인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면, 또 진정한 등로주의 등반을 하려면 히말라야에 훌륭한 산이 너무 많은데 굳이 그 비싼 입산료를 내면서 에베레스트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에베레스트를 찾은 그 수많은 원정대가 북쪽이건 남쪽이건 오직 노멀루트만 택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에베레스트 등반엔 결코 넘지 못할 난관이 하나 있다. 바로 셰르파들의 힘이다. 이 세력을 무시한 에베레스트 등반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물론 과거에도 특히 대규모 팀은 캠프 간의 물자수송을 위해서라도 셰르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고소에서 셰르파들의 짐 나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원정대가 필요한 만큼의 셰르파만 고용계약하면 됐다. 셰르파가 전혀 필요 없이 이른바 알파인스타일로 등반하려면 그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에베레스트에서는 말이다.
셰르파들은 서로가 연대해 원정대를 도와주고 돈을 받는다. 아니 어느 원정대건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셰르파들이 아이스폴 지역에 길을 만들고 계속 보수하면서 통과료를 받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년 가까이 됐다. 통과료가 제아무리 비싸도 원정대가 직접 길을 내는 것보단 경비가 덜 들고, 시간과 힘, 중간에 점검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서로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각 캠프도 마찬가지다. 셰르파들은 서로 단합해 각 구간마다 길을 만들고 통과비를 요구한다. 고소로 오를수록, 또 정상에 오르면 그때그때 셰르파에게 지불해야할 비용을 미리 정해 놓았다.
한편 셰르파는 모든 팀이 원활히 오르게끔 각 구간은 물론, 정상 바로 아래까지 고정로프를 견실히 설치해 놓는다. 물론 사용료를 받는다. 팀과 대원의 필요한 짐도 미리 옮겨준다. 가급적 많은 팀이, 많은 대원이 정상에 올라야 더 많은 돈을 받으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또 각자 소속팀의 대원과 함께 등정하지 결코 그들만의 등정은 없다. 그들에겐 오직 돈이 목적이고, 에베레스트야말로 이른바 황금어장인 셈이다.
대원들은 오직 자신만의 하루산행에 필요한 가벼운 배낭에 가벼운 옷차림이면 족하다. 새로 길을 개척할 수도 없으며, 셰르파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오르내리며 고소순응만 하면 된다. 그 수많은 팀의 모든 대원이 다 똑같다.
기상예보시스템이 발달해 날씨가 나쁘면 움직이지 않도록 권고하고, 또 굳이 나쁜 날씨에 움직이려는 팀도 없다. 또 요즈음은 제3캠프까지 올라갔다오면 고소순응이 됐다고 본다. 그 이후론 BC에 대기하다가 날씨가 좋아진다는 예고가 있으면 한 캠프 한 캠프 오르고, 이어 정상까지 잘 닦여진 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웬만하면 대부분 제3캠프부터 산소를 사용한다. 하루에 수십 명씩 오르는 것은 이래서 가능한 것이다. 팀별로 움직인다는 것도 이젠 무의미해졌다.
수백 명이 거주하는 BC는 멀리서 보면 큰 마을을 연상시킨다. 그 수많은 울긋불긋한 텐트들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밤의 야경도 환상적이다. 텐트마다 불이 켜져 있고, 여기저기서 파티를 하며 노래와 춤의 향연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BC에는 필요한 것이 대부분 갖춰져 있다. 컴퓨터는 물론 위성전화, 영화, 음악, 술, 담배, 도박기기, 각종 음식 등등 무엇이든 모자란 듯하면 어김없이 아랫마을에서 운반해와 비싼 값에 판다. 셰르파들에게는 하룻밤 여자도 판다. 날씨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로부제, 페리체, 당보체 등 아랫마을로 내려가 호텔에서 푹 쉬다가 오는 대원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
반면에 팀 수가 많아 불편한 점도 많다. 가장 큰 문제가 식수문제다. 팀마다 많은 텐트를 치고 화장실도 마련하는데, 평평한 빙하의 얼음과 눈 사이로 오물이 통해 BC에서는 누구나 한두 번쯤 설사 복통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제1캠프, 제2캠프, 제3캠프는 별도로 화장실을 마련하지 않아 물을 구하는 데 큰 곤욕을 치르곤 한다.
이 틈새를 노려 BC에는 간이병원이 생겼다. 1회 진찰료로만 50달러씩 받는 폭리를 취하며 성황리에 개업하고 있다. 세탁소도 생기고, 쓰레기 청소회사도 생겼다.
놀라운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제트엔진을 부착한 신형 헬기가 이미 작년에 해발 8,000m인 사우스콜 착륙에 성공했는데, 올해엔 10,210m 상공까지 오르고 이어 에베레스트 정상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해발 2,886m의 루클라에서 출발한 헬기는 국제항공법의 기준대로 2분 이상 정상에 머문 후 무사히 루클라 공항에 귀환했다.
빠르면 내년부터 이 헬기를 이용해 루클라에서 바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5분간 내려준다고 한다. 현재 예상가격은 1인당 15,000불이다. 소문에 의하면 벌써부터 예약주문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신사복 위에 우모복만 걸치고 정상에서 태극기 들고 사진 찍게 됐으니 문명의 이기의 혜택을 톡톡히 보게 된 셈이다. 어차피 셰르파들의 도움으로 줄지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세계 최고봉인데, 차라리 헬기를 타고 정상에 간들 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남극의 경우를 보자. 수많은 사람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비행기로 남극에 다녀온다. 남극점에 건설한 좋은 시설에서 며칠 잘 쉬면서 기를 받아 돌아온다. 남극점부근에서 며칠 썰매나 스키, 워킹을 즐기기도 한다. 이들에겐 굳이 해안선에서부터 수십 일 걸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이라고 특별히 다를 바 없는 것이다.
▲ 아이스폴 지대(사진=남선우 양정원정대)
에베레스트 등반의 의미
30년 전처럼 그 긴 캐러밴을 해야만 에베레스트에 가는 진정한 의미가 있고, 아이스폴에 직접 길을 내고, 대원이 직접 끝까지 루트를 만들어 올라야만 에베레스트 등반에 진정한 멋과 맛이 있다고 우긴다면, 요즈음 산악인들이 과연 인정할까?
서운한 심정이지만, 에베레스트는 이제 우리 산악인 곁을 떠났다. 우리 산악인만의 전용물에서 일반인의 공유물로 옮겨진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에베레스트에선 더 이상 참다운 개척정신도 없고, 진정한 모험심도 없다. 팀웍도 동료애도 점차 없어지고 있다. 오로지 정상에 오르는 행운을 잡느냐, 아니면 못 잡느냐만 존재한다.
이렇게 변해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히말라야에는 우리 산악인이 올라가야할 많은 산들이 있으니, 에베레스트를 잃었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세계 최고봉은 일반인에게 양보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산악인은 설악산에 가도 일반인과 달리 꼭 대청봉에 오르지 않는다. 대청봉이 최고봉이라는 뜻 외에 별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리라.
셰르파에게 그렇게 의존해서라도, 제3캠프부터 산소 마시며 줄지어서라도 꼭 세계 최고봉 정상에 서고 싶다면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젠 1년에 수백 명씩 등정하는 에베레스트에 가겠다고 스폰서 잡기도 산악인으론 좀 민망한 노릇이 됐다. 에베레스트는 광고효과도 당연히 줄어들었다. 대한산악연맹도 이제는 에베레스트 원정대라면 지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해도 자기만족에 그칠 뿐, 남에게 크게 자랑할 만한 일은 못된다. 적어도 산악인 사이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봉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앞으로도 꾸준히 많은 팀이 몰릴 것이다. 내년에도 한국에서 무려 7개 팀이 에베레스트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에베레스트의 현재 실상을 아직 잘 모르고 있기에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가야한다면 이들에게 꼭 조언해줄 말이 있다. 첫째 반드시 정상에 오르겠다는 대원으로만 7명 이내로 신청할 것. 둘째, 어차피 모두가 한 팀으로 함께 움직이니 대장이나 부대장 중 한 명은 등반경험보단 영어실력이 좋아야 할 것. 셋째, 4월에 느지막하게 출국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트레킹하고, 고소적응을 끝낸 후 BC에서 느긋이 운기조식하면서 때를 기다릴 것.
에베레스트에 오르건 안 오르건 각자의 자유다. 다만, 진정한 산악인이라면 이제는 에베레스트 말고 다른 산을 찾기 바란다. 히말라야에 좋은 산은 너무 많다.
김병준 대한산악연맹 전무이사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에베레스트 정상이 아니더라도, 산 밑에라도 한 번 서 불 수 있을까?
우리 산케친구들이면 트래킹 정도는 모두 가능하지 않겠나? 다만 시간이 문제지...그런데 내가 아는 19회 선배님은 정년퇴직하고 히말라야 트래킹을 두번 다녀 오셨다네 해발 5300까지..
그 30년 시간이 많은 것을 변화시켰네. 진정한 알피니즘이 아직 남아있을라나 모르겠네. 그려, 제일 높다는 것이 항상 최고는 아니지. 12회 선배 한 분도 5년 전인가 트레킹 다녀오셨는데, 중년 숙녀들도 같이 다녀오데.
다리에 힘있을때 가봤으면....영녕이가 산케에 보관시킨 버너도 함 써먹고.
에베레스트 트래킹 해볼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좋은 자료 고맙소.
만 오천불내고 헬기타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간다.. 세상 좋아졌네... 먼 발치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