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www.blazersedge.com/2013/5/12/4324570/jack-ramsay-portland-trail-blazers-blazermania-espn-sick-retire
여러분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잭 램지 박사가 건강상의 문제로 2013년 플레이오프 남은 경기에 대한 ESPN 라디오 중계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하게 되었다. 램지가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와 포틀랜드 농구 커뮤니티에 남긴 유산을 되돌아보기에 이번이 적절한 시기일듯 하다.
잭 램지는 농구가 큰 사업이 되기 이전의 시대에 포틀랜드로 왔다. NBA는 근 30년이 다 되었지만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의 폭풍은 아직 오지 않았다. 프런트는 유명인이나 과거 슈퍼스타에 의해 채워지지도 운영되지도 않았다. 반쯤 무명인 농구인들이 복도와 사이드라인을 걸어다녔다.
램지는 동부에서 왔으며, 5~60년대에는 모교 - 필라델피아의 성 조셉 대학 - 에서 감독을 맡았다. 60년대 중반에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GM이 되었으며, 이후에는 감독으로 옮겼다. 식서스를 4년간 3번 플옵에 올려놓은 후, 버팔로 브레이브스로 가서 다시 똑같은 일을 해냈다.
램지가 브레이브스에서 감독을 하는 동안,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는 신생 프랜차이즈의 역사상 최초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 위한 로스터를 구성하느라 바뻤다. 라인업은 빌 월튼이 중심이었다. 월튼은 UCLA 출신의 슈퍼스타 센터로서 리그의 처음 2년간을 자신의 명성에 부응하는 건강과 자신감을 찾는데 보냈다. 1975년과 76년 월튼의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인해 팀성적은 5할 아래에 75-76 시즌 종료후 레니 윌킨스 감독이 해임되었으며, 곧바로 램지가 브레이브스에서 건너왔다.
1976년 여름, 포틀랜드는 놀라운 재능의 유입이라는 수혜를 입었다. 3년차를 맞이하는 빌 월튼은 마침내 건강해졌다. ABA가 문을 닫으면서 분산 드래프트가 있었고, 거기에서 포틀랜드는 올스타 포워드 모리스 루카스와 스타팅 PG 데이브 트워직을 얻었다. 드래프트에서는 영리한 PG 자니 데이비스를 지명했고, 시애틀 슈퍼소닉스로부터는 험 길리엄을 사왔다. 새로 들어온 4명 모두 다가올 시즌에 핵심 역할을 맡았으며, 3명은 결국 코치나 프런트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오프시즌은 그야말로 어메이징이었다.
유입된 - 월튼의 경우는 부활한 - 재능들은 2년차 윙인 라이오넬 홀린스와 바비 그로스, 베테랑 포워드 로이드 닐, 포틀랜드의 터줏대감인 6년차 SG 래리 스틸과 합류했다. 라인업은 두터웠지만 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같이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팀들은 가끔 한두명의 중요한 선수들을 라인업에 융화시키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포틀랜드는 4명의 완전히 새로운 선수들을 끼워넣어야 했다. 스타팅 라인업은 부진한 슈퍼스타, 타리그 출신의 스타, 2년차 선수 두명, 새로운 PG로 구성되었다. 루키 하나와 새로 온 FA 하나와 저니맨이 백업을 맡았다. 스타팅 라인업의 평균 연령: 24세. 선수 로테이션 탑10의 평균 연령: 24.6세
사람들은 잭 램지의 포틀랜드에서의 영광스러운 첫해를 돌아보면서 "흠, 램지가 좋은 상황에 들어왔었군"이라고 말한다. 이는 사실로 드러났지만, 꼭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건 아니다. 젊음, 변덕스러운 플레이, 서로 다른 뒷배경, 함께 플레이한 시간의 부족이라는 조합은 재앙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 대신에 램지는 현재에도 플레이되어야 하는 게임의 방식임을 증명하는 충격적인 농구의 하모니를 지휘했다.
램지가 시대를 얼마나 앞서갔는지를 잊기가 쉽다. 램지는 신체 단련(physical fitness)의 초기 구루 중에 하나였다. 달리기, 수영, 일반적인 적응 훈련... 이것이 곧 농구 스킬은 아니었다. 램지는 선수들이 빨리 달리고 코트 위에서 필요한만큼 머물수 있길 원했다. 램지는 컨디셔닝 훈련에 자신의 팀을 참여시켰고, 진지하게 다루었다. 램지는 자기 팀의 젊음을 장점으로 바꿨고, 속공이 첫번째 옵션이라고 이야기했다. 램지는 빅맨들이 리바운드를 잡고 있거나 경기 템포를 늦추는걸 원치 않았다. 잡고, 돌아서, 아울렛 패스를 던지고, 달려가라구. 가드가 레이업을 넣지 못하면 센터가 2차로 골밑을 채울 수 있었다.
하프코트 오펜스 또한 늦추지 않았다. 볼 무브먼트는 수비에게 압박을 가하고 득점 기회를 만들어냈다. 아티스 길모어와 대릴 도킨스로 가득한 리그에서는 스타 센터가 오펜스 세트의 종착점으로 여겨졌다. 램지는 월튼을 전달자로 삼아 가드처럼 패스하도록 했다. 월튼이 하이에 있든 로우에 있든, 월튼의 손에서 공이 떠났을 때 어디로 가는지는 절대 알수 없었다. 단독으로 막으면 월튼은 득점했다. 더블팀을 붙이면 빠른 패스 한두번에 외통(checkmate)이었다. 나머지 다른 선수들의 공격에서 건장한 집행자(enforcer) 모리스 루카스는 페인트에 딱 붙어있었다. 램지는 루카스로 하여금 페이스업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는 똑같이 거대한 PF들 위로 오픈 점퍼를 넣도록 했다. 빅스타들에게 너무 신경을 쓰면 그로스나 홀린스가 치명적인 점퍼로 댓가를 치르게 만들었다. 포틀랜드는 누가 슛을 쏘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슛이 들어가는걸 원했다.
달리기, 정점의 신체 컨디셔닝, 4번의 페이스업, 시스템 내에서 자기의 공격을 하고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는 기동력있는 센터, 단순히 드리블만이 아닌 패스를 통한 공격, 수비를 움직이기 위해 공격 방향을 뒤집기, 슛이 견제되는지 여부를 슛을 쏜 위치나 선수만큼 중시하는 것... 이는 현대의 농구와 비슷하지 않은가? 1976년이었다 여러분. 1976년!
램지가 이런 개념들을 발명한건 아니다. 그러나 76-77시즌과 이어진 플레이오프, 월튼의 발 부상이 프랜차이즈의 심장을 앗아가기 이전의 77-78시즌 첫 58경기에서 닥터 잭이 해냈던 것처럼 그 개념들을 한데 모으고 그렇게 빨리 재능이 꽃피우도록 확신시키며 팀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것을 그토록 아름답게 이끌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슈퍼스타가 주도하는 데이빗 스턴의 시대에 압도적인 1대1 플레이어가 아름다운 시스템을 무너뜨리면서 램지는 흔적만 남았다. 코칭은 가르침보다 최고의 재능에 대한 피쳐링에 가깝게 되었다. 팀워크는 볼 무브먼트보다 좋은 병졸이 되어 주득점원이 가는 길을 비켜주는 것에 가깝게 되었다. 그러나 램지는 방송중계를 통해 커리어를 이어갔으며, 필리에서, 이후에는 마이애미에서, 마지막으로는 ESPN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되찾았다. 전국의 청취자들은 포틀랜드 팬의 한 세대를 가르쳤던 사람의 무릎에서 배웠다. 램지는 경기와 함께 발전했고, 램지의 코멘트는 과도하게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각각 이어지는 흐름의 가장 좋은 면을 조명했다. 램지는 아름다운 플레이에 신나지 않는 법이 없었다. 듣다보면 항상 램지가 덩크를 내리꽂거나 3점을 성공시킨 선수만 칭찬하는게 아니라 아름다운 피니쉬를 이끌어낸 효과적인 실행에 대해서도 칭찬하는걸 알수 있다.
램지는 포틀랜드 팬들에게도 오래가는 유산을 남겼다. 오늘날까지 포틀랜드 팬들은 팀 바스켓볼을 선호하고, 게으르거나 소프트한 선수를 싫어하며, 1차원적이고 볼호그인 선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가끔씩은 지나칠 정도로 롤플레이들에게 열광하기도 한다. 공격 리바운드, 나가는 공을 세이브하는 것, 블루칼라 같은 플레이, 허슬 등에 덩크할 때와 마찬가지로 박수를 보낸다. 내리꽂는 것은 예상했던 관중의 반응을 이끌어내지만, 누군가가 플로어에 몸을 던지거나 정확한 패스를 할 때마다 열성팬들 사이에서는 거의 자발적인 열기가 올라왔다. 우리의 문화적인 기억은 램지/챔피언쉽 시대에 우리의 DNA에 새겨진 플레이들에 반응해 되살아난다.
그리고 물론 우승 그 자체가 있다. 우승 트로피가 없었다면 블레이저매니아가 지금과 같이 폭발하지도, 트레일 블레이저스가 지역사회에서 지금과 같은 중요도를 차지하지도, 블레이저스 팬덤이 40년 동안 한결같은 열정과 정열로 대대로 이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선수들과 시대도 레전드에 들어갔지만 우승은 무너지지 않는 토대를 제공했다. 그게 없었다면 드렉슬러가 이끄는 우승이 없는걸 슬퍼하며 기댈 구석이 없었을 것이다. 라쉬드 월러스 시대의 희망적인 도약과 참담한 절망 뒤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 우승이 없었다면 2003년에 블레이저스 세계 전체가 혼란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며, 2005년과 2006년에는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블레이저스 팬들이 "이건 오늘일 뿐이야. 내일에 대한 희망은 아직 있어. 누가 알겠어."라고 말하고 해마다 더 많은 열정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우승 때문이다.
더 중요한건 그 우승이 수만명의 아이들로 하여금 동네 코트로 가서 멋진 게임을 배우도록 만들었고 그 아이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걸 대물림한 것이다. 스킬을 배우고 희망을 품고 뛰어남을 추구하고 드리블을 하고 점퍼를 쏘며 우정을 키워카고... 램지의 노력은 꿈을 꾸고 그걸 성취하기 위해 한데 뭉쳐 노력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이번이 잭 램지의 기나긴 커리어의 끝이라면, 포틀랜드의 농구 커뮤니티 전체가 일어나서 램지가 우리에게 중요하고 오래 지속되며 아직 잊혀지지 않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었다고 선언할 수 있다. 램지는 우리가 경기, 프랜차이즈, 그 선수들, 어떤 면에서는 서로에 대해서까지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35년 전에 잭 램지가 포틀랜드의 사이드라인을 빛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매일 공유하는 단어들과 그들이 형성한 커뮤니티는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Blazer's Edge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가 여기 있었을 것은 확실하지만 좋은 것에 근접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감사합니다. 램지 박사님. 약간 변방의 농구 세계에게 있어. 당신의 작업은 정말 소중했습니다.
- Dave Deckard. 1976년부터 트레일 블레이저스 팬이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예전에 블레이저스의 역사를 옮긴 적이 있는데 이번 글은 그것의 프리퀄쯤 되는거 같습니다.
역대 포틀랜드 감독 중에 최고의 인물로 인정받는 분이기도 해서 옮겨봤습니다.
첫댓글 윌튼의 부상이 없었더라면 포틀랜드 왕조가 몇년은 리그를 휩쓸었을텐데 참 아쉽죠.
그런데 유독 이상하리만큼 포틀랜드는 좋은 빅맨들이 많이 나왔는데 대부분 어딘가가 파괴되어 가라앉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