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조 학사집(鶴沙集)
통훈대부 행 사섬시 직장 소천 박공 묘갈명 병서(通訓大夫行司贍寺直長蘇川朴公墓碣銘幷序)
공은 휘가 수근(守謹), 자가 경정(景靜)이다. 함양 박씨는 계보가 신라 혁거세(赫居世)에서 나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다. 예부상서(禮部尙書) 휘 인정(仁挺), 판삼사사(判三司事) 응천공(凝川公) 휘 신유(臣蕤),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 문제공(文齊公) 휘 충좌(忠佐), 밀직부사(密直副使) 휘 문재(文梓), 공조 전서(工曹典書) 휘 규(規)가 더욱 현달하였다.
이조 참의에 추증된 휘 소종(紹宗), 창락도찰방(昌樂道察訪)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휘 눌(訥), 이조 정랑 휘 종린(從麟), 이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된 휘 운(蕓)이 공에게 고조(高祖)ㆍ증조(曾祖)ㆍ조(祖)ㆍ고(考)이다. 응천공의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병조 참판공의 다섯 아들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세상에 없었던 일이다.
어머니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부친의 휘는 승선(承先)이고 생원시에 장원하였으며, 대사헌 휘(諱) 침(忱)이 조부이다. 공은 만력(萬曆) 병자년(丙子年, 1576, 선조 9)에 태어나서 천계(天啓) 임술년(壬戌年, 1622, 광해 14)에 졸하여 이해 12월에 계실(繼室) 김씨(金氏)의 무덤과 합장하니, 곧 예천군(醴泉郡) 북쪽 유리동(流里洞) 오향(午向)의 언덕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일가를 이루었다. 잠시 서울에 유학하였는데, 상국(相國) 윤승훈(尹承勳)이 그의 어짊을 추천하여 영릉(英陵)ㆍ효경전(孝敬殿)ㆍ태릉 참봉(泰陵參奉)에 거듭 제수되었다가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와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으로 승차되었다.
계축년(癸丑年, 1613, 광해군 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해에 일 때문에 파직되었다. 이때부터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이 담박하게 지냈다. 아, 공은 일찍이 월천(月川) 조 선생(趙先生, 조목)에게 수업하였는데, 직접 가르침을 받고 얻은 것이 있었다. 문을 닫아걸고 책을 보다가 긴요한 말을 끄집어내어 벽에 써서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성품이 침중하여 말수가 적었고 매양 엄숙한 모습으로 단정히 앉아 있었으니, 집안의 자제들은 부르지 않으면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고 동료들은 공경하고 꺼려 감히 자(字)를 부르지 못했다. 치가(治家)에는 법도가 있었고, 제사에는 반드시 목욕을 하였으며, 제수(祭需)는 반드시 직접 보고 점검하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대부인을 문안하였으며 밤에는 백씨와 중씨들과 함께 번갈아 창화하고 또 자제들로 하여금 익숙히 노래하도록 하여 날마다 일상으로 삼았다.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된 여동생을 불쌍히 여겨 기전(基田)을 분할하여 살게 해주고 또 그 땅을 관리해주었으며, 자식을 가르치는데 엄격하여 학업을 닦게 하고 예용(禮容)을 익히게 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해주에서번조(燔造)하는 일을 감독하게 되었는데, 이전의 관리들이 으레 쓰던 품삯을 공이 오랜 친구에게 나누어 주자 고을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였다. 의금부(義禁府)가랑(假郞)이 되어서는 역도를 잡아들이는데 조금 늦었다는 일로 최유원(崔有源)이 올린 계로 인해 파직되었다.
뒤에 최유원을 공격하려는 자가 장차 소를 올리려는 뜻이 있어 공에게 이전의 유감을 가지고 일을 함께하자고 하였다. 이에 공이 정색을 하고 그를 꾸짖었다. 일은 결국 잠잠해졌으며, 최유원이 듣고서 부끄러워하면서 경복하였다. 향인들이 공을 추대하여 정산서원(鼎山書院) 원장으로 추대하니, 학문의 진흥에 깊이 유념하여 인재 육성을 급선무로 삼았다.
아! 만약 공이 오래 살았더라면 덕은 더욱 높아지고 재주 더욱 발전되어 그 수립한 바가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나 갑자기 불행하게 되었으니 운명인가 보다. 전배(前配)는 의성 김씨 찰방(察訪) 휘(諱) 수일(守一)의 따님이었으나 곧장 죽어 임하(臨河)경출산(景出山)선영(先塋)에 장사 지냈다.
후배(後配)는 순천 김씨(順天金氏)로 증 판결사(判決事) 휘(諱) 덕남(德男)의 따님으로 맑고 삼가며 규방의 행실이 있었다. 공보다 4년 먼저 졸하였으며 향년 46세이다. 아들 넷은 형(瑩)ㆍ감(𤪋)ㆍ탕(璗)ㆍ예(瑿)이고, 딸 셋은 생원(生員) 권상달(權尙達), 충의위(忠義衛) 권길(權佶), 유학(幼學) 이세미(李世美)에 출가하였다.
형(瑩)의 한 아들은 종화(宗華)이고, 두 딸은 김학규(金學逵)와 김행일(金行一)에게 출가하였다. 감(𤪋)의 한 아들은 어리고, 세 딸은 권윤(權鈗), 김종하(金宗河)에게 시집갔으며 하나는 어리다. 탕(璗)의 두 아들은 전화(全華)ㆍ사화(思華)이고, 세 딸은 홍우(洪宇), 권이혁(權以赫), 권순(權恂)에게 출가하였다.
예(瑿)의 두 아들은 어리고, 세 딸은 이만엽(李萬葉)에게 출가하였고 두 명은 어리다. 측실 소생에 딸은 우창규(禹昌奎)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자손의 남녀가 70여 명이다. 감(𤪋)은 명민(明敏)하고 조행(操行)이 있는데, 지금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있기에 와서 성묘하고 비갈에 새기려 하니, 어찌‘다하지 않아 선을 준다.〔不匱錫類〕’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작성(鵲城) 소수(蘇水)의 경치를 가장 좋아하여 그 위에 대를 쌓고는 소천(蘇川)이라 자호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이미 인재를 태어나게 해놓고 / 天旣生才
어찌 갑자기 목숨을 빼앗아 갔는가 / 何遽奪壽歟
아니면 별도로 주재자가 있어서 / 抑別有主宰
우주에서 조물주를 희롱하는가 / 而播弄造化於宇宙者歟
아아, 후손들에게 무궁히 전해지리니 / 嗚呼其在後者無窮
빗돌은 굴러가도 명성은 썩지 않으리라 / 石可轉而名不可朽
--------------------------------------------------------------------------------------------------------------------------------------------------------
[脚註]
[주01] 수근(守謹):
원문에는 수겸(守謙)으로 되어 있으나《사마방목》에 의거하여 수근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수겸은 수근의 형이다.
[주02]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
원문에는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으로 되어 있으나 제목에 사섬시 직장으로 되어 있으므로 제목을 따라 바꾸어 번역하였다.
[주03] 번조(燔造):
질그릇, 사기그릇, 도자기 등을 불에 구워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04] 가랑(假郞):
임시로 임명된 낭관을 말한다.
[주05] 경출산(景出山):
청계(淸溪) 김진(金璡) 등 내앞[川前]의 의성 김씨 선영이 있는 곳으로, 안동시 임하면 사의리(四宜里)에 있다.
[주06] 다하지 …… 준다〔不匱錫類〕:
효자의 집에 계속 효자가 나서 다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시경》〈기취(旣醉)〉의 “효자가 다하지 않는지라, 길이 너에게 선을 주
리라.[孝子不匱,永錫爾類.]”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역) | 2019
--------------------------------------------------------------------------------------------------------------------------------------------------------
[原文]
通訓大夫行司贍寺直長蘇川朴公墓碣銘 幷序。
公諱守謙。字景靜。咸陽朴氏。系出新羅赫居世。世襲冠冕。禮部尙書仁挺,判三司事凝川公臣蕤,咸陽府院君文齊公忠佐,密直副使文梓,工曹典書規。尤顯。贈吏曹參議諱紹宗,昌樂道察訪贈兵曹參判諱訥,吏曹正郞諱從麟,贈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諱蕓。於公爲高曾祖考。凝川公五子。俱登文科。兵曹參判公五子。又俱登文科。世未有也。妣平康祭氏。贈貞夫人。考諱承先。生員壯元。大司憲諱忱。祖也。公生于萬曆丙子。沒以天啓壬戌。是年十二月。合窆繼室金氏墓。卽醴泉郡北流里洞午向原。公少力學。業成。薄遊京師。尹相承勳薦其賢。荐授英陵,孝敬殿,泰陵參奉。陞司饔院奉事內贍寺直長。癸丑。中司馬。是年因事罷。自是無意進取。泊如也。嗚呼。公嘗受業月川趙先生。親炙而有得。杜門看書。拈出喫緊語。書于壁以自警。性凝重寡言。每肅容端坐。家人子弟。非命召不敢近。儕輩敬憚。不敢以字呼。治家有法度。祭必沐浴。祭需必親看檢。晨起省大夫人。夜與伯仲諸公。更唱迭和。且令子弟習歌之。日以爲常。憐寡妹無依。割基田家之。又爲之經紀。嚴於訓子。課學業習禮容不懈。其監燔造役于海州。前官例用役價。公散與知舊。州人吐舌。及爲禁府假郞。拿逆差後期。爲崔有源所啓罷後有攻崔者將投疏意。公挾前憾同事。公正色責之。事遂寢。崔聞而慙服。鄕人推公爲鼎山洞主。深留意於興學。以育才爲先。噫。使公而壽得。德益邵 才益展。其所樹立如何。而遽爾不淑。天也。先配義城金氏。察訪諱守一女。旋夭葬臨河景出先塋。後配順天金氏。 贈判決事諱德男女。淑愼有閨行。先公四年卒。壽四十六。男四。瑩,𤪋,璗,瑿。女三。生員權尙達,忠義權佶,幼學李世美。瑩一男宗華。二女。金學逵,金行一。𤪋一男幼。三女。權鈗,金宗河。一幼。璗二男。全華,思華。三女。洪宇,權以赫,權恂。瑿二男幼。三女。李萬葉。二幼。側室女禹昌奎。內外子孫男女七十餘人。𤪋明敏有操行。今宰龍宮。來省墓。將碣而銘之。豈不匱錫類者非歟。公最愛鵲城蘇水之勝。築臺其上。仍自號蘇川。銘曰。
天旣生才。何遽奪壽歟。抑別有主宰。而播弄造化於宇宙者歟。嗚呼。其在後者無窮。石可轉而名不可朽。<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