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도 못 건 넨 풋사랑
뛰다보면 정말로 많은 생각이 교차된다.
나의 경험으로 봐선 숨가쁨 (약 20분)이 지나면
고요한 명상(?)에 빠지게 된다.
물론 그 명상의 시간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지만
거리의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해
짧은 시간 속에 긴 생각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그건 일종의 유체 이탈.
아무튼 머리 따로 몸 따로 달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전 교통부 수장을 지내셨던 이 계익장관의 글을 읽다보면,
그분도 마라톤 중에 초반 5km 정도는
스스로 명상에 빠지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당시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제 조금 달리게 되니까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달리기 명상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휘집기로하고
첫 발자욱을 떼어본다.
아버지들의 꿈은 자식에게서 영글어지는 것같이
그이도 나를 후배로 만들고 싶으셨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만해도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시험을 봐야 했다.
서울 사는 어린 꼬마들의 공부에 대한 강박은 2학년이면 시작된다.
지방이나 대도시도 예외는 아니었고,
서울 4대문 안에서의 명문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세칭 5대 공립이니, 5대 사립이니 하는 초등학교를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일류 중학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전제조건.
내가 들어간 교동 초등이 바로 그런 학교였다.
그 학교는 아버지가 졸업하셨고,
이어 형들이 다닌 학교이다.
세칭 일류라고 불리는 경기, 경복, 서울중학에 들어가려면
교동에서 남자 300백 명 중에 1백 등 안에 들어야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경기 출신인 아버진 맏형이 경복을 들어간 데에 대해
무척 안타까우셨나 보다.
막내인 내가 경기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램으로,
우리 집은 이사까지 하고,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교동 초등에 입학하게 된다.
학교에 입학 후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경기중학에 대한 확신을 내게 심어주셨다.
"너는 날 꼭 빼 닮았어, 우리 막내는 할 수 있을 거야"
그 말엔 당대 최고 경기 중학생으로 화동 길을 거스르던
조선인의 당당함과 일본인에 대한 항거의 질박한 근성이 스며있었다.
허나 나는 아버지를 빼어 닮지도 않았고
머리도 아버지나 형제들만 못했다.
한번 생각해보자 장안에서 머리 좋고,
집안 좋은 아이들이 다 모인 명문 초등에서
100등안에 들기란 하늘의 별따기,
특히 아버지가 원하는 후배가 되려면 전교에서 30등 안에 들어가야 한다.
어린 나의 능력엔 너무나 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때는 치마 바람과 와이로라는 은어가 유행했었다.
그 은어는 부유함을 상징하는 대명사와 같은 말이었다.
아이는 능력이 안 되는데 집안에는 돈이 있고,
장래 출세위해 어찌 되었건 간에 명문 중학에 들여보내야 하니,
선생님의 관심을 끌게 해주고,
칭찬과 격려 속에서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해서
어머니들이 돈을 싸들고 선생님들을 쫓아다니는 것이 치마 바람이고
그 전달하는 돈 봉투가 와이로였다.
해서 없는 집안의 자식들은 한겨울에도 난로 근처에 앉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자연스레 빈부에 따라
계층이 생기고 모임도 물과 기름같을 수밖에....
그리고 지금같이 고액 과외는 아니었지만
2, 3학년만 되면 유명한 족집게 선생을 찾아서
과외 공부가 방과 후 활동이다.
아버지는 나의 공부 성과에 신통함을 느끼지 못하셨는지
나도 2학년이 되어서 특별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살림에 엄청난 혜택이었으리라.
그러나 나의 능력은 전교에서 150등 정도.
어린 나이에 석차가 주는 부담감을 견디기가 쉽지만은 않았고.
아버지와 아들, 나와 친구들,
그리고 먼 훗날 내가 들어갈 학교와 나,
성적은 그 거리를 당겼다 밀었다하는 잣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니 중학교 평준화가 발표되었다.
어린 나이에 그 발표가 무슨 독립선언서 같이 느껴졌다.
지긋지긋한 공부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제는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축구와 달리기를 맘대로 할 수 있게 된 것.
아무리 잘해보려 해도 계속되는 헛발질 때문에
나는 동네 축구에서 항상 후보로 남아 있어야 했고.
동네 축구 후보 선수 생활은 6개월만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교동 초등에 내 동창생 녀석 중에는 피 덕희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키가1m 60cm가 넘어서
웬만한 고등학생의 체격을 가진 친구였다.
교내 60m 달리기에서 항상 일등을 하는 친구였다.
보통아이가 40m쯤 달리면 그 애는 벌써 골인한다.
선생님들도 그의 준족에 감탄해 마지않았는데,
얼굴까지 잘생긴 그 녀석은 우리들의 우상이고 영웅이었다.
덕희가 달리는 모습을 보면 마치 말이 달리는 우아함과 힘이 있었다.
정말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어린 시절의 꿈은 끝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의 달리는 모습을 보고,
골목대장인 난 동네 아이들을 모아 야밤 달리기를 시작한다.
그땐 내가 느끼기에는 엄청 넓은 골목길이었는데
어른이 되어서 그곳에 가보니 폭이 3m도 되지 않는 아주 좁은 길이다.
동네 한 바퀴는 200m도 채 되지 않았다.
그 길을 밤마다 5바퀴씩이나 뛰었다.
물론 대장인 내가 1등이다.
덕희를 따라잡으려고(?) 한달 정도 달렸다.
어느 가을날 운동회 날이다.
청군 홍군 대항 200m 달리기 대회가 열리고,
나는 청군으로 덕희는 백군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녀석은 워낙 교동에서는 대단한 스타여서
그 애가 나타나자 모두들 난리다.
참 부럽다. 1m 30cm인
작은 나를 쳐다보며 박수를 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전교생이 모두 "덕희, 피덕희..."를 환호할 때,
어디선가 아주 가녀리지만 또랑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린다.
"건수야 힘내, 파이팅..."
낯설지 않은 그 소리 쫓아 나의 시선은 꽁지머리 한 여학생에게 가 닿는다.
- 아니, 정 명희가...-
명희는 몹시 하얀 피부를 가진 4학년 5반 아이였다.
그 애는 전국 피아노 콩쿨에서 상위 입상이 독차지.
당시만 하더라도 피아노 레슨을 받는 아이는
장안에서 꽤 산다는 집안의 자식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음악시간이면 선생님을 대신하여 손풍금으로 반주를 했고,
나는 합창에는 관심 없이 그 연주에만 몰두하였다.
천상의 소리를 천사가 연주를 하는 것 같이 보였다.
유난히 길고 가냘픈 손가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한 순간의 행복이었고
그 애는 우리반 반장이었다.
보통은 남자아이가 반장이었는데,
명희는 우리 반 일등으로 기세등등한 남자 녀석들 체면을 여지없이 구겨놓았다.
오똑한 콧날과 보석과 같이 빛나는 눈빛이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 눈이 부셔,
명희를 차마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아주 드물게 마주치는 눈빛에 애써 외면하며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시선을 피하는 것을 명희는 알고 있을까?
나는 아직도 그 아이의 검정색 벨벳 짧은 원피스와 레이스 달린 흰 양말과
왼 손에는 항시 손수건을 쥐고 하늘하늘 파라핀 칠한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조숙한 것이었을까?
명희를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콩캉콩캉, 얼굴이 화끈화끈,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기억이 아직도 내 기억에 연연하다.
사십이 지난 이 나이가 되도록 명희와는 단 한마디 말도 나눈 적이 없지만
그녀는 쥴리아드 음대를 나와 미국에서 잘 산다는 소식만을 접한 적하고 있다.
명희의 파이팅에 화들짝 놀라 출발선에 서니
정신 어질어질 하다.
"탕"
어떤 화답도 하지 못하고 달려 나간다.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뛴다. 명희의 얼굴만이 내 큰 과녘이된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고, 얼굴이 파래질 정도로 내달리고
숨이 다 헤어졌는데
덕희 1등. 나는 5등이었다.
붉어진 얼굴로 명희를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하나의 꿈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건수야 잘 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명희는 왼 손에는 아주 하얀 흰 손수건을 꼭 쥐고 있었다.
세상을 사는 것이
자기 만한 꿈을 조금씩 깨뜨리며 살아가는 것일지 모르겠다.
나에게 남은 꿈은 얼마나 있을까 자문해 본다.
오히려 초등학교 시절 꿈은 내게는 잊어진 시어들이다..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명희와의 일별을
그리워하며 세상을 헤쳐 달려본다.
비록 성기지 못할 만남이지만,
내 땀 속에서,
명희의 모습이 살포시 스며난다.
아 그립다.
그 가을날의 운동회가.......
첫댓글 어린 시절의 좋아함도 사랑이라는 추억속에 머물러 있는건 지난날이 순수하고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우리에 꾸ㅡㅁ 지도 추억이 살포시 살아나는군요,3학년때 반장하는 여자아이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을 하지요.(나성희)공교롭게도 위대하신 이프로님과 이름만 같군요.좋다는게 괴롭히는거 였지만....아직도 입술 옆에 점이 하나 있을까요?
선배님은 아직도 초등학교 4학년 같으세요.
한마디도 못 건 넨 풋사랑? 누구에게나 그런 사랑이 있나봐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지는 뛸때 소설 몇 편은 쓰는데~~~ 그래서 못 달리나 봐요....어떤 달리기 고수는 항상 뛰면서 자신의 자세를 생각하면 뛴다고 하더라구요~~~
어릴적 아련함이 느껴집니다... 정말 부러운 달필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