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시각장애인 위한 미술교육 앞장선 ‘우리들의 눈’ 엄정순 디렉터
“시각장애는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시선, 미술은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하하 호호 시끌벅적 미술 시간 시끄럽긴 하지만 하하 호호 시끌벅적 미술 시간 재미있어요”
즐거운 미술 수업을 묘사한 초등학교 저학년 동요 <미술 시간>. 20여 년 전만 해도 시각장애인들은 이 노래의 감성을 공유할 수 없었다. 미술이란 다가가기 난해한 활동이었다. 대중은 시각적인 부분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여겼고, 시각장애인들 스스로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20여 년 전만 해도….
하지만 (사)우리들의 눈 엄정순 디렉터가 시각장애인 미술교육에 뛰어들면서 시각장애인들도 동요 <미술 시간>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엄정순 디렉터는 “시각장애인은 다른 시선으로 감각하고 창작할 뿐이다. 우리는 단지 그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 있을 따름이다”라고 말한다.
Q. 성당 건축 프로젝트로 시각장애 학생과의 인연이 닿았다고 들었습니다.
A. 한 독지가가 맹학교 학생들의 심리․정서 안정을 위해 추진한 계획이었어요. 여러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참여했고, 저도 관심을 갖고 지원했죠. 계획이 변경되어 체육관이 들어서게 됐지만, 당시 성당 부지의 특성과 그 시설을 이용할 학생들의 생활을 고려하기 위해 맹학교를 곧잘 방문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시각장애 학생들과 어울릴 기회가 늘었고,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시각장애인도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우리가 눈으로만 볼 때, 그들은 만지고 향을 맡고, 때로 맛을 보고 두드려 소리를 들으면서 본다는 것을. 문득 ‘본다는 건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시각장애 학생들과 미술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았습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을 제시해 줄 것 같았거든요. 충주성모학교를 찾아가 제 바람을 전했고, 당시 교장으로 계셨던 수녀님의 허락으로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도예 수업을 진행 중이었기에, 저도 진흙을 재료로 활용하기로 했죠.
Q. 그 일이 ‘우리들의 눈’ 재단으로까지 이어졌군요.
A. 프로그램 소식이 알려지면서 다른 맹학교에서도 수업 진행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혼자 진행했던 수업도 저와 같은 주제에 관심을 보인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하게 되었죠. 사람이 모이고 수요도 증가하면서 정식 단체를 결성할 필요성이 생겼어요. 그래야 적극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고, 활동도 더욱 자유로워지니까요. 그렇게 사단법인 비영리 재단 ‘우리들의 눈’이 탄생했어요. 현재 재단 인력은 화가 및 사진작가 등의 예술인과 대학생 등의 봉사 인원, 후원․기부금을 관리 지원받는 팀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가끔 시각장애인에게 미술을 교육하는 활동에 주력하는 재단으로 오인되기도 하는데, 그보다는 미술을 매개로 교류하고 탐구하는 ‘아트 랩’의 성격이 강합니다. 작품 전시를 비롯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촉각책 등 교구 연구․제작, 미술 워크숍 등을 진행하고 있어요.
Q. 맹학교 미술교육과 일반 미술교육의 차이점이 있다면요?
A. 우리들의 눈의 모든 활동에서 꼭 지키는 세 가지 원칙이 있어요. 첫째 전문성, 둘째 섬세한 교류, 셋째 양질의 재료입니다. 미술은 작품 완성이 목적이 아닌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찾아가는 활동입니다. 마음껏 표현하려면 환경이 최상이어야 하니, 양질의 재료와 다양한 교구, 여러 방법을 제시할 전문 예술인, 그리고 시각장애 학생의 시야에 공감하려는 마음이 필수라고 생각했어요. 피복선과 알루미늄 막대로 온갖 일상 소품을 엮어내기도 하고, 도화지에 털실을 고정해 윤곽을 잡고 물감으로 색칠해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그 과정에서 저를 포함한 예술가들은 시각장애 학생들을 통해 온몸으로 보는 법을 엿볼 수 있었죠. 한번은 서로 다른 진흙을 가져간 적이 있어요. 흙의 색이 다르기에 육안으로 구분이 가능했는데, 시각장애 학생들은 흙의 점성과 찰기, 심지어 냄새로 두 재료를 인식하더라고요. ‘온몸이 곧 눈’이란 표현이 은유만은 아닌 셈이었죠.
Q. 혹시 다른 학업과 연계한 미술 활동도 있나요?
A. 연계 수업은 장기적인 계획과 학교 선생님들과의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수업에 도움이 되는 교구를 제작해 지원하는 서포터 역할을 한 적은 있어요. <움직이는 궁궐>이라고 궁을 시각장애인들이 만져볼 수 있는 크기로 축소해 각종 건물 등을 옮겨볼 수 있게 만든 조형 작품입니다. 그런 한편 교외 학습의 일환으로 12개 맹학교 중 9개 학교가 참여한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를 기획․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다>는 관용구에서 비롯되었죠.
Q. 그 프로젝트 내용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어요.
A. 시각장애인들은 자기 체구를 기준으로 어떤 사물을 판단하는데, 자신보다 큰 스케일의 무언가의 경우 상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더라고요. 그래서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 코끼리를 경험하게 하면서 한눈에 파악이 어려운 무언가에 다가가고 그것을 표현해보는 경험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막연하게 부담스러워하거나 혹시 생길 수 있는 안전 사고를 걱정하는 동물원 관계자분들의 우려로 장소 선정이 쉽지 않았어요. 다행히 광주 우치동물원의 승낙으로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동물원 사정상 코끼리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가게 되면서 프로젝트가 주춤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태국 치앙마이에 있는 코끼리 자연공원을 알게 되어 국제적인 프로젝트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어요. 맹학교 학생 선정 후 1년에 걸쳐 사육사 초청 강의, 코끼리 만지기, 작품 만들기 워크숍, 전시 등으로 진행되었는데, 전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비용이 어마어마했죠. 전시 콘텐츠 판매와 후원으로 자금을 마련하는데,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라 프로젝트 예산이 비교적 잘 확보되어 해외까지 갈 수 있었어요.
Q. 시각장애인의 미대 입시와 장애 예술인 인큐베이팅도 진행하시죠.
A. 시각장애인에게 미술은 금기 아닌 금기로 치부되어 왔어요. 그러나 시각장애인은 다른 관점으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예술성으로 발휘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았어요. 시각장애인 미대 지원 ‘가지 않는 길 프로젝트’의 동기입니다. 현재 2명의 시각장애 학생이 미대에 진학했고, 앞으로도 차츰 진학율이 증가하길 바라고 있어요. 한편 장애 예술인을 지원하는 인큐베이팅 활동의 일환으로 유명 신발 브랜드 반스와 함께 시각장애인 디자이너의 작품이 들어간 운동화를 출시한 ‘커스텀 메이드 캠페인’을 진행 중입니다. 판매 수익의 일부는 장애 예술인을 지원하는 데 쓰일 예정이죠.
Q. ‘코로나 블루’가 예술계에 우울을 불러왔는데 우리들의 눈은 어떤가요?
A. 가장 큰 영향은 맹학교 미술교육이 잠시 중지된 겁니다. 감염 위험으로 인해 외부 인원의 출입이 어렵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유독 미술 수업을 좋아한 시각장애 학생들이 떠올라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일입니다. 대신 20~30대 성인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 미술 강좌를 기획하는 데 힘쓰고 있어요. 코로나 사태가 하루빨리 종식되어 학생들과 다시 만나길 희망합니다. 또 창의력과 감수성을 중시하면서도 입시에 떠밀려 부득이 미술이 뒤로 밀리는 교육현장이 국가 정책적인 지원으로 달라졌으면 좋겠어요.
Q. 장애인으로서 예술을 꿈꾸는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응원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A. 미술 활동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보았으되 놓치고 지나쳤던 무언가를 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시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이는 눈으로 넓은 세상을 담을 수 있는 대신 얕게 볼 때, 시각장애인들은 한정된 범위 안에서 세상을 인식하는 대신 좀 더 깊은 면까지 더듬어 헤아리는 능력이 있어요. 여러분들의 장애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제3의 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술은 여러분의 감성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고요. 시력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세상 시선에 너무 얽매이지도 말고, 자신이 느낀 바를 세상을 향해 표현했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우리들의 눈에서 함께 작업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신혜령 기자
* 본 원고는 <손끝으로 읽는 국정> 7월호에 쓸 목적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초고에 원본이고, 가필첨삭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간행물에 실린 원고와는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