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암
학도암은 1624년(인조 2) 무공화상(無空和尙)이 불암산에 있던 옛 암자를 지금의 자리로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정을 적은 기록이 없어 옛 암자라고 한 것이 어디에 있었으며,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1927년 편찬된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학도암(鶴到庵)」조에 의하면 창건이후 250여년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아있고, 1878년(고종 15)에 가서야 벽운화상(碧雲和尙)이 재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학도암 주차장 아래 자연암벽에 선각(線刻)으로 조성되어 있는 2기의 부도가 있어 1878년 벽운화상이 재창한 이전의 역사를 말해준다. 이 부도는 왼쪽부터 “청신녀월영영주지탑(淸信女月影靈珠之塔)”“환□당선사취근지탑(幻□堂禪師就根之塔)이다. 이 가운데“청신녀월영영주지탑(淸信女月影靈珠之塔)”은“가경이십사년기묘십월(嘉慶二十四年己卯十月)”이라는 명문이 함께 기록되어 있어 1819년(순조 19)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환□당선사취근지탑(幻□堂禪師就根之塔)도 19세기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또한 사찰의 뒤쪽 암벽에 선각된 마애관음보살좌상을 1870년(고종 7) 명성황후가 발원하여 조성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1819년 무렵과 1870년 무렵에도 사찰은 법등을 이어오고 있었으며, 1875년에 이르러 벽운화상이 중창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에는 1878년 한씨(韓氏) 일가의 시주로 마애관음좌상을 보수하였고, 다시 1885년(고종 22) 벽운화상이 화승(畵僧) 경선화상(慶船和尙)을 불러와 불상 1구를 개금하고 불화 6점을 그려 봉안하였다. 이 시기 불사에 관한 내용은 〈천보산학도암개금탱화시주록기(天寶山鶴到庵改金幀畵施主錄記)〉로 기록되어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에 전하고 있다.
학도암 전경
학도암 큰법당
학도암 청동 사리탑
학도암 법당내 아미타불
학도암 영산회상도
학도암 법당내 신중탱
학도암 석조 지장보살좌상
학도암 수조
학도암 약사전
석굴속에 모셔진 약사여래불
학도암 삼성각
학도암 삼성각내 칠성탱
학도암 산신탱
학도암 지장탱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4호
암자 뒤쪽의 커다란 바위 면에 13.4m 크기로 새겨져 있는 거대한 마애관음보살좌상이다. 양각의 융기된 선묘(線描)로 새겨진 이 마애관음보살상은 연화좌대 위에 앉아 있는 좌상으로 화불(化佛)이 있는 보관장식이나 칠보문, 옷 주름 표현 등에서 불화의 도상을 그대로 바위에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보관 양쪽으로 뻗어 나온 관대(冠帶)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양어깨 위에 늘어져 있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 관음보살상의 얼굴은 가늘고 긴 눈과 뭉툭한 코, 작은 입술 등으로 인해 새침한 인상을 준다. 짧은 목에 표현된 형식적인 삼도(三道)는 가슴 아래쪽으로 내려가 있다. 양쪽 어깨에는 대의(大衣)를 걸치고 있으며 안쪽의 내의(內衣)는 가슴 위에 수평으로 입고 그 위에 띠 매듭을 표현하였다. 두 손은 엄지와 셋째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사뿐히 얹혀놓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서 들고 있다.
이 보살상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가슴 가운데에 있는 작은 사각형의 홈인데 복장(腹藏) 감실의 흔적으로 짐작된다. 복장이란 불상을 조성할 때 불상 내부에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와 불경 등을 넣는 것으로 부조상인 마애불에 그러한 예가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와 같이 마애불의 가슴부분에 구멍이 있는 예는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도솔암마애불좌상(보물 제1200호)에서 볼 수 있다.
마애관음보살좌상 왼쪽 벽면에는 50여 글자가 되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명문에 의하면 1870년(고종 7)에 명성황후가 발원하여 조성했다는 내용과 함께 1878년에 학도암을 중창하면서 한씨(韓氏) 일가의 시주로 장선화상 등이 마애불상을 보수했다고 되어 있다.
이 마애관음보살상은 조선 말기의 불상이지만 왕실에서 후원하여 조성된 만큼 조선 말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불교조각의 전통을 볼 수 있으며 조성 명문이 남아 있어서 자료적인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