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을 물고 늦더위가 한창인 때 계곡이 발달한 산에 가기로 했다.
새벽 5시부터 설쳐서 춘천행 열차에 몸을 싣고 비몽사몽 졸다 보니 1시간 못 미처 가평역에 도착했다.
춘천행 열차를 타고 가다 보면 어느 역에 내리든 멀리 가지 않아도 산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주변에 산이 많다. 유명산, 연인산, 칼봉산, 호명산, 매봉, 축령산, 굴봉산, 삼악산 등등.
우리는 오늘 물 많기로 소문난 칼봉산에 가기로 했다. 칼봉산은 연인산 도립공원에 속해 있는 산이다. 이름만 들으면 무시무시하지만 이름처럼 바위가 삐죽삐죽 솟아 있는 산은 아니다.
가평역에서 버스 연결편이 좋지 않아 택시를 이용해 칼봉산 들머리인 경반리 칼봉산 자연휴양림 입구에 내렸다. 오늘 코스는 경반리에서 정상을 거쳐 승안리 용추 계곡 방향으로 내려갈 예정이다. 자연휴양림 입구에 내리자 벌써 물소리가 사방을 점령했다. 다시 한번 지도를 확인하고 오전 9시 50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어떻게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는지 '白鶴洞 한석봉 마을'이라는 안내석이 붙은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바로 물이 콸콸 흐르는 계곡을 건너야 한다. 어쩐다? 잠깐 고민했지만 방법이 없으니 얼른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 양손에 들고 물로 들어간다. 시원하고 좋구먼.
장난끼가 발동해 첨벙첨벙 소리까지 내면서 계곡을 건넌 후 다시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고. 아쿠아슈즈를 신었어야 하는데 실수했네그려. 선견지명이 있어 아쿠아슈즈를 신고 오신 고문님이 부럽다.
주변을 살피며 열심히 걷는데 길 위쪽에서는 임도를 만드는지 아니면 자연휴양림 통나무집을 더 만드는 공사를 하는지 기계소리가 한창이다. 그러느라 잠깐 길이 엉망이다.
잘 나 있는 길을 따라 속도를 높여 걷는데 뒤에서 오던 시몽이 소리쳐 부른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고문님께서 부르신단다. 분명히 이정표를 보았는데 무슨 일이람? 조금이라도 거꾸로 내려가지 않으려고 걸음을 멈추고 상황을 파악한다. 아마도 안내판에 쓰인 것을 보고 그러신 모양이다. 나도 오는 길에 안내판에 쓰인 내용을 보고 잠깐 고민을 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안내판 위치로 보아 공사가 진행되는 곳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내처 발길을 옮겼고 그 다음에 경반초교 방향이라는 이정표를 확인하고는 발길을 옮겼다.
처음부터 계곡물을 만나고 물소리가 시원하니 일행은 아이들처럼 신이 나서 걷는다. 길은 비포장도로이지만 널찍하니 걷기에 좋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또 나타나는 계곡, 가만히 살피니 신을 벗지 않고 조심스레 건너면 될 것도 같다. 선두에서 살금살금 바위를 딛고 건넌다고 했는데 바위 하나가 흔들거리는 바람에 계곡에 빠져 버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박총무님은 재미있어 하면서도 흔들거리는 바위를 확인하고 뒷사람들이 빠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놓는다. 자상하기도 하지.
벌써 계곡을 두 번이나 건넜다. 경사가 약간 있는 길을 따라 걷는다. 초반에는 날씨가 흐린 것이 도리어 산행을 도와준다 싶더니만 해가 반짝 났다. 그래도 처서를 지나고 나니 햇살 빛깔이 노래지고 하늘이 높게 느껴진다. 게다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주니 금상첨화 아닌가. 처서가 지났으니 긴팔 셔츠를 입는 것이 날씨에 대한 예의라고 헛소리를 하며 오늘 긴팔 셔츠를 입었는데 다행히 그다지 덥게 느껴지지 않는다.
거울 같이 맑은 물이 있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는지 경반 계곡 물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고 주변 바위가 희어서 더 깨끗해 보인다. 일행은 농담 삼아 어디 한 군데 자리잡고 놀면 좋겠다고 한다. 그렇게 싸온 음식 먹으며 하루를 보내면 더할 나위 없는 피서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누구 하나 그 말을 진담으로 듣지 않으니 속으로 나는 조금 섭섭하다. 누적된 피로에 나무 그늘에서 물소리 자장가 삼아 누우면 그대로 곤한 잠에 빠져들 것만 같다.
갈 길이 멀다. 초행이다 보니 정확히 어느 정도 걸리는지 가늠을 할 수도 없다. 산길은 거리만으로 소요시간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길의 난이도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계속 편안한 길이 이어지더니 또 물길이 나온다. 계곡가에 있던 산꾼들이 앞으로도 4번쯤 더 물을 건너야 한단다. 그냥 첨벙거리며 논다고 생각하면 되겠구만. 이왕 버린 발이니 자연스럽게 등산화를 신은 채 걷는다.
먼저 계곡을 건너고 일행을 기다리는데 뒷분들은 처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더니만 김여사가 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향해서 엎드리는 자세를 취한다. 무슨 일이지?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보니 김여사 옷 색깔이 진해졌다. 나보다 한 수 더 떠서 계곡에서 엎어졌단다. 그 바람에 신발과 바지는 물론 티셔츠까지 젖었고 모자는 계곡물에 떠내려갔다나. 그래서 그런 자세가 나왔었군. 그래도 사소한 장비 - 모자나 물통 등 - 를 포기하는 것이 몸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한결 나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오늘 물을 몇 번이나 건너나 박총무에게 한번 세어 보라고 했다.
오전 10시 55분, 작은 계곡까지 대여섯 번 건넌 후에 경반 분교터에 도착했다. 지금은 오토캠핑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텐트 몇 동이 세워져 있는데 당연히 승용차는 물을 건너기 어려우니 SUV가 대세이다. 여가 문화가 발달하면서 차량의 선호도도 달라지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한때 초등학교였던 건물 벽에는 방송국 오락 프로그램인 '1박2일'팀이 다녀갔다는 문구가 쓰인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그 덕에 캠핑장이 유명세를 치렀으리라. 매스컴의 힘은 지나치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니까.
잠깐 쉬면서 수박과 막걸리를 꺼낸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1시간밖에 안 왔는데 무척이나 오래 걸은 것 같으니 앞으로 갈 길이 창창하군. 정말 계곡에서 물장난이나 하면서 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길 옆으로는 간간이 나타나는 민가에서 심은 고추가 빨갛게 익고 있고 달맞이꽃, 벌개미취, 돌배나무도 보인다. 길가 풍경이 정겨운 초가을 들녘 모습이다.
사랑의 날들이
올 듯 말 듯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
그래도 가슴 속에 남은
당신의 말 한 마디
하루 종일 울다가
무릎걸음으로 걸어간
절벽 끝에서
당신은 하얗게 웃고
오래된 인간의 추억 하나가
한 팔로 그 절벽에
끝끝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곽재구의 < 들국화 > 전문
마음이 바빠 걸음을 좀더 서두르기로 했다. 내 뒤를 바짝 박총무님이 따라오고 그 뒤를 오여사가 붙어 온다.김여사는 발이 아파서 속도가 처지고, 시몽은 지난 밤 숙취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고, 고문님께서도 여행의 노독이 안 풀리신데다 후미를 맡으셨으니 당연히 맨 뒤에서 오고 계시다.
오전 11시 25분 경반사에 도착했다. 절집 같지 않은 분위기인데 산신각까지 있으니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네. 경반사 아래쪽 포장도로에 있는 이정표에 따르면 회목고개까지 거리가 4.3km란다. 아니 정상도 아니고 안부까지 그렇게 멀면 지금 반도 못 왔다는 말 아닌가. 등산로 표시는 절쪽으로 있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갸우뚱하게 된다. 고문님께서 도착하신 후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절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렇게 가면 거리는 훨씬 줄겠지.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자 된비알이 기다린다. 바람도 서늘하고 경사가 급하지 않아 편하게 왔는데 이제부터 고생 시작인가 보다. 급경사가 이어지니 땀은 닦을 틈도 없이 흘러내린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가 가늘게 난 산길을 앞에서 헤치고 가자니 길도 아니고 계곡도 아닌 길이 이어진다. 올여름 가평은 비가 많이 내려서 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 또 비가 내렸으니 초목들과 버섯들은 물을 만나 신났지만 산길은 물 반, 흙 반이다.
중간에 잠깐 쉬면서 물을 마신다. 그때 김여사가 색깔있는 물을 돌리면서 마셔 보란다. 무엇인가 했더니 음용식초를 탄 물이었다. 음용식초를 마시면 몸이 굳지 않아서 좋다고 했더니만 김여사와 오여사 모두 아직 유연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달밤에 체조, 아니 숲속에 체조를 한다. 다들 평소에 몸 관리를 잘 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그 김에 한바탕 웃고 떠든다. 남자분들은 따라하시다가는 금세 우드득 심한 소리가 날 수도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물속에 잠긴 신발덕에 물이 더 맑아보이는 사진이 압권입니다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기다렸다 2탄을 봐야겠네요~ㅎㅎ
시간이 조금 걸리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