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간소한 삶
뜰에 어지럽게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들을 주워내면서
세월의 덧없음을 안으로 새기는 요즘,
내 자신도 언젠가는 이런 낙엽이 되어 흙 속에 삭아질 거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무성하던 나무 아래 짙게 내리던 그늘도 서릿 바람에 많이 엷어졌다.
초록이 지쳐서 물드는 산마루는 요 며칠 동안 운해에 떠 있는 섬이 되곤 한다.
세상에 얹혀사는 우리들도 저마다 하나의 섬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광대무변한 이 우주 공간에 침묵처럼 떠 있는 섬,
물론 섬은 그 뿌리를 지구라는 한 대지에 내리고 있지만,
저마다 외롭게 홀로 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시장기 같은 자신의 무게를 안으로 헤아린다.
우리들이 지나온 그 허구한 그 세월 속에서 과연 내 몫의 삶은
제대로 챙겨왔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계절이 가을이다.
가을은 흔히 사색의 계절이라 한다.
봄 여름 겨울에 비해서 가을은 우리들에게 사색의 뜰을 넓혀 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철학도가 아니라도 제 발부리를 내려다 보게 되고,
지금까지 어떤 삶을 이루어 왔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이 가을에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소망으로 들끓고 있다.
보다 간소하게 살고 싶고, 보다 단순하게 지내고 싶다.
그래서 지녀오던 책들을 대폭 정리하기로 했다.
묵은 책을 오래 지니고 있으면 묵은 생각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틀에 박힌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가치체계에서 우선 탈피해야 한다.
책이란 무엇인가. 물론 그 속에 길이 있고, 지식과 정보의 다리이며
지혜의 길잡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이미 굳어버린 생각과 말들의 창고다.
그 굳어버린 생각과 말들에 붙잡히면 살아서 꿈틀대는 생각과
새로운 말이 움트기 어렵다.
말이란 존재의 집이기도 하지만
창조적인 사유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 삶은 그때그때 새로운 시작과 탄생이 없으면
진부해지고 찌들게 마련이다.
일상적인 타성에 미적미적 갇힐 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빛과 생기를 잃는다.
빛과 생기가 없는 삶은 그 자체가 이미 병든 삶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들의 질병은 바로 이 빛과 생기의 결여에서 온 것이다.
추석 연휴 무렵,
아랫마을에서 짐차를 세내어 책 짐을 서울 약수암으로 실어 보냈다.
그곳의 도서실은 서가를 제대로 갖추고 있고
또 학구적인 기풍이 있는 도량이라,
그 '묵은 생각과 말들'이 꽂히기에 알맞은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슨 물건이든지 그 가치가 제대로 활용될 수 있는 자리에 놓여야
그 물건 또한 빛이 난다.
나는 일찍이 아랫 절의 도서관에 고려대장경 영인본 전질을 비롯하여
적잖은 장서를 넘겨준 일이 있다.
그러나 읽는 사람도 없고 관리도 소홀해서
책마다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는 것을 보고,
후회와 함께 책 들 한데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런 후회가 없도록 배려한 것이다.
어른들께는 실례될 소리지만,
근래에 와서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전 같으면 무슨 일이든지 생각이 나면 한밤중에라도 벌떡 일어나
그 즉시 일을 해치웠었다.
한번은 처마 끝에 달아놓은 풍경이 폭풍 속에 그 소리가 너무 요란했다.
자다 말고 손전등을 켜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떼어서
저 멀리 숲속으로 던져버렸다.
책상의 위치를 한번 옮겨 볼까 생각이 나면
더 미룰 것 없이 그 자리에서 곧 옳겨 놓았다.
그 시각이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않았다. 이와 같이 마음이 내키면
즉각 그 자리에서 행동으로 옮기곤 했었다.
그러던 성미가 요즘에 와서는 많이 게을러져서
자꾸 미루는 못된 버릇이 생긴 것이다.
다락에 있는 책을 언제 정리한다고 하면서도 마냥 미루다가
지난 추석 무렵에야 밤잠을 자지 않고 혼자 끙끙대며 모조리 치워 버렸다.
미루는 일은 곧 게으른 타성, 어차피 손수 해야 할 일이라면
더 미룰 것 없이 생각이 난 김에 이내 해치워야 한다.
그 일이 그날 하루 몫의 삶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미루는 일은 아침 이슬처럼 신선한 삶에 얼룩이 지는 것과 같다.
성에 차지 않는 일상에서 벗어나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우선해야 할 일은 소유와 관계를 정리 정돈하는 작업이다.
때때로 이 소유와 관계에 대한 반성과 정리 정돈이 따르지 않으면,
바로 그 소유와 관계의 곁가지들에 얽키고 설켜
본질적인 삶을 이루기 어렵다.
나무들이 가을이면 지녔던 잎들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일만이 아닐 듯싶다.
새로운 삶을 가꾸기 위해 묵은 것에 결별하는 소식일 수도 있다.
묵은 것을 뗠 쳐 버리지 않고는 새 것은 돋아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여가와 휴식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각자의 생활태도와 삶의 양식에 직결된다.
지난 여름 휴가철에 가는 데마다 목격한 사실인데,
산골짜기건 바닷가건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몇이 모였다 하면
그곳에서는 하나같이 불을 지펴놓고 고기를 끊여 먹거나 구워 먹는 판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또 으레 화투판을 벌였다.
어째서 미국정부가 우리에게 쇠고기를 더 많이 ,더 많이 들여다 먹으라고
그토록 줄기차게 윽박지르는지 그 사정을 알 것 같았다.
모처럼 주어진 귀중한 여가를 그 많은 사람들이
먹자판과 화투놀이로 보내고 있다니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이러고도 선진국 대열에 끼여 들겠다니 꿈도 크지.
사람은 살 줄을 알아야 하듯이 놀 줄도 알아야 한다.
살 줄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귀한 삶을
부질없는 일에 탕진해 버린다.
놀 줄을 모르기 때문에 재창조를 위한 반성과 모색과 탐구의
좋은 기회를 아깝게 놓치고 만다.
우리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
때로는 생각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사색은 삶의 위대한 예술의 하나다.
사색은 누구한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입 다물고 근원과 본질에 귀 기울이면 된다.
금세기의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조용히 지켜보라.
자신의 걸음걸이, 먹는 태도, 말씨, 잡담, 미움과 시새움 등을
자세히 살펴보라. 어느 것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깨우친다면 그것이 명상의 한몫을 차지할 것이다."
자신의 신체적인 동작이나 언어습관 그리고 내면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낱낱이 살피고 있을 때 마음은 저절로 안정을 이룬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맑고 투명해지는 것이
곧 명상의 세계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버스 안에 앉아 있거나 빛과 그림자가 가득한
숲 속을 거닐거나 새의 맑은 목청에 귀를 기울이거나
혹은 아내나 자녀들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도 명상의 세계에 잠길 수 있다.."
사색이나 명상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과 동떨어진 그 무엇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귀중한 시간을 먹고 노는 일에만 쏟아 버릴게 아니라,
삶의 가장 순수하고 투명한 존재의 시간에도
나누어 쓸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보다 간소하고 단순한 본질적인 삶을 이루려면
안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살피고 들여다보는 일에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요즘 우리 사회 일각에서 야기되고 있는 과소비 현상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높아진 이 시점에서, 단순하고 간소한 삶에
의미를 한번쯤 생각해봄직도 하다.
우리는 언젠가 낙엽처럼 나뒹굴 그런 존재 아닌가. (1989).
법정 스님 <버리고 떠나기>중에서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