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알렐루야.”(마태 28,20)
교회는 오늘 폴란드의 수호성인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1030년 경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출생한 성인은 사제로 서품된 후, 설교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려고 애쓸 정도로 깊은 영성을 지닌 영성가로서 또한 교회 개혁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며 교회의 쇄신에 앞장선 인물이었습니다. 1072년 그는 크라쿠프의 주교가 되었는데, 당시 국왕이었던 볼레수아프 2세의 잔학성과 불의를 고발함으로써 왕과 적대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이에 더해 급기야 성인이 국왕을 파문하고 대성당의 출입을 저지하자, 볼레수아프 왕은 크라쿠프 시외의 성 미카엘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그를 직접 끌어내어 살해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성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적 인물이 되고, 1253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에 의해 이탈리아 아시시 대성당에서 시성되었고,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 성인입니다.
이 같은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에 이어지는 요한복음의 말씀으로서 요한복음서는 이 대목의 제목을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라고 명명하며 예수님과 니코데모 사이의 대화에 이어지는 복음서 저자 자신의 묵상으로서 이 대목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명망 있는 유다인이자 유다인들의 최고의회 의원이었던 니코데모와 대화하는 가운데, 누구든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말씀을 듣는 니코데모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그 뜻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미 태어나 성인이 된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단순한 육적인 의미에서의 재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을 통해 새로 태어나는 부활의 삶,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로 새롭게 태어나셨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인 성령과 물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요한 복음사가는 니코데모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부연 설명하는 듯,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설명을 첨가하는데, 바로 오늘 복음 말씀이 그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하늘에서 속한 그리고 그 하늘에서 온 이로서 하느님이 전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말하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의 말씀은 단순히 땅에 속하는 이들의 마음과 머리로 이해할 수 없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 곧 하느님의 영과 물로 새롭게 태어나는 재탄생으로서의 세례가 필요함을 역설하십니다.
성령과 물을 통한 새로운 탄생
복음이 전하는 이 핵심적 진리를 오늘 독서의 사도들의 모습 안에서 역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회에 붙잡혀 대사제에게 심문과 함께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사도 5,29ㄴ-30.32)
예수님이 붙잡혀 가는 순간 모두 도망쳤던 겁쟁이 사도들이, 하녀의 물음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예수님이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보고 도망쳤던 베드로가 이렇듯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대사제에게 담대히, 목숨을 내어놓고 용감히 말하는 모습은 사실 제자들의 이전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 오늘 복음의 표현에 따른다면 성령과 물로 새롭게 태어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하느님이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해 주신다는 그 분의 현존 체험으로 용기를 얻고 변화된 그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을 알린 후, 하늘로 다시 오르신 후, 제자들에게 보내주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듯이 제자들 역시 새로운 삶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 놀라운 사건, 오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의미를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내 삶이 예수님과 같이 부활 되어야 한다는 부활의 현재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현재적 의미’
-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부활이 과연 오늘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내 삶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실제적 사건이십니까?
만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현재의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면 우리는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이 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이 하나의 민족을 뽑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 축복과 저주를 내어놓고 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시며 그 선택을 통해 생명과 죽음을 주시는 하느님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다시 말해 그 분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든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그 분을 부정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 그래서 복음의 예수님은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땅에 묶인 육의 삶을 벗어나 성령과 물로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을 삶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본 후에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믿는 얕디얕은 신앙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참 신앙,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참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성령과 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 그 새로움은 우리에게 죽음이 아닌 부활의 삶을 선물로 준다는 사실, 여러분 모두가 오늘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 안에서 매일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