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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중국의 종교
126. 신석기시대의 종교 신앙
중국의 고고학적 자료 중 가장 이른 것은 BC5000년~6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중국민족이 다양한 민족적 결합에 의해 형성된 것처럼 중국문화 역시 복합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종합을 이루어 형성된 것이다. (홍산문화 - 별지)
최초의 신석기문화는 앙소 반파에서 발견된 이른바 ‘앙소문화’로서 BC4115 또는 BC4365년으로 소급된다. 흑토기(흑도)로 특징지어지는 용산문화는 두 번째 신석기문화로서 BC3000년~2000년대의 신석기 후기문화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BC6000년대에 이미 농업은 물론 가축 사육, 도기 제작, 청동기 제조 등이 행해졌다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고대 오리엔트의 몇몇 지역에서 농업과 야금술이 전파되면서 중국의 신석기문화와 청동기시대의 문화가 발전되었다고 설명된다. 또한 선사시대의 중국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을 거쳐 전파된 서방의 다양한 문화들을 수용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신석기 앙소문화의 종교적 사상과 신앙은 대부분 성스러운 공간, 풍요 그리고 죽음에 관한 것들이다. ‘장례의 주제’(죽음의 문양)가 장식된 붉은 색 토기는 특히 흥미롭다. 세 개의 도상학적 모티프-삼각형, 장기판, 조개껍질-는 유골단지에서만 발견된다. 그런데 이러한 모티프는 성적 결합, 탄생, 재생 등의 사고와 관련된 복합적인 상징괴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마도 이러한 문양의 장식은 저승에서의 영생과 ‘재생’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앙소사회는 모계의 출계원리를 지켰으나 용산사회는 조상숭배가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는 부계제사회로 이행했다. 남근의 그림에서 ‘조상’을 뜻하는 상형문자 祖가 유래했다. 남근모양의 그림은 또한 ‘영혼의 집’을 의미하는데, 중국 선사시대의 ‘영혼의 작은 집’은 역사시대의 ‘(조상의) 위패’의 선구이다.
요컨대 앙소와 용산문화는 다른 신석기 문명에서도 공통되는 전형적인 신앙의 특징이 드러난다. 즉 삶, 풍요, 죽음, 사후세계의 연관성과 역법에 의해 설명되고 의례를 통해 실현된 우주적인 순환에 대한 개념이 그것이다. 또한 주술-종교적인 힘의 원천인 조상의 중요성과 ‘죽음의 문양’과 같은 것에서 확인되는 역의 합일의 ‘신비’가 있는데, 이것은 우주적인 삶의통일성/총체성이라는 사상을 어느 정도 예견하는 신념으로 후대에 가서도 지배적인 사상이 된다.
127.청동기시대의 종교 : 천신과 조상
보통 상대(BC1751~1028)는 선사에서 역사로 진입하는 원역사시대로서 중국고대사의 여명기에 해당한다. 이 시대의 특징들로는 청동기 야금술의 등장, 시가지 및 수도의 출현, 군인 귀족정치의 실현, 왕권제도의 형성, 문자기록의 개시 등을 들 수 있다. 고증자료로는 의례용 청동기, 갑골문자, 주(周)의 텍스트(예를 들면 詩經) 등 많은 고대의 자료가 있다.
학자들은 청동용기의 여러 도상 자료들이 이전 시대인 앙소의 채색도기에서 확인된 모티프들(도룡용, 호랑이, 용 등)과 더불어 다음 시대의 종교적 상징과도 일정한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탄생 및 재생의 순환, 빛과 생명을 암시하는 매미와 도철 가면, 상반된 이미지의 결합(날개달린 뱀, 뱀과 독수리 등) 즉 도교 사상가와 신비가의 중심 주제인 ‘逆의 합일’과 역설의 논증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청동용기는 死者의 집을 의미하는데 그 모양은 도기나 목기에서 온 것이다.
동물의 뼈와 껍질에 새겨진 내용은 천상의 최고신 帝 또는 상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제는 우주의 리듬과 자연현상을 지배하고 왕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작물의 풍작을 보장하기도 하지만, 재앙과 병 그리고 죽음을 내리기도 한다. 제는 종묘와 교(郊)에서 두 종류의 제사를 받는다. 종묘에서는 조상으로서 교에서는 천신으로서 제사를 받는 것이다. 후에는 제보다 왕가의 조상이 중요해졌으나 여러 왕의 조상과 모든 신들은 여전히 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왕의 조상만이 제를 중재할 수 있었고 왕만이 조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태고의 조상숭배에 정치적인 기능이 부여된 것은 자신의 시조를 제의 자손으로 여길 수 있는 왕의 특권 때문이었다.
여러 간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 종교의 큰 줄기를 파악할 수 있다. 천신과 조상숭배의 중요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종교력과 관련된) 희생제의와 점복술의 복합성은 점쟁이, 사제, 샤먼과 같은 ‘성사전문가’의 실존을 전제로 한다. 결국 여러 도상 자료들은 중국의 고전적인 주요 종교개념으로 발전할 만한 우주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상징들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128. 왕조의 귀감 : 주(周)
BC1028년 마지막 상왕(商王)이 주군(周君)에게 정복당했다. 주군은 천명을 부여받아 포악한 상왕을 몰아냈다는 선언문을 통해 자신의 반란을 정당화했는데, 이것이 천명교리에 대한 최초의 진술이다. 주군은 주나라 무왕이 되었고, 중국 역사에서 최장의 왕조(BC1028~256)를 개창했다. 중국의 문명을 꽃피우고 최고의 철학적 사상에 도달한 시기가 BC8세기에서 BC3세기이니까 바로 주왕조 때 중국 문명의 틀이 세워진 것이다.
왕조가 개창될 때부터 천(天) 또는 상제(上帝)는 인격신의 특징을 보였다. 그러나 천신은 점차 그의 종교적 성격을 잃어갔으며, 급기야 우주질서의 원리 또는 도덕률의 근거로 변모해 갔다. 그렇지만 천은 여전히 왕조를 보호하는 존재로 남아있었으며 왕은 천자(天子 하늘의 아들)이자 상제의 대리자였다. 이런 까닭에 원칙적으로 왕만이 천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상숭배는 상대(商代)의 구조가 계속되었으나, 예전의 유골단지는 조상의 사당에 모셔둔 위패가 대신하였다.
대지신 및 대지신과 관련된 의례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정보는 불충분한 편이다. 어머니의 존재로 표상되기 이전에 땅은 무성이거나 양성인 우주적 창조의 힘으로 경험되었다.(홍산문화 우하량 여신묘) 고대에는 죽은자를 집안에 매장했는데 그곳은 씨앗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했다. 씨앗의 수호자는 오랫동안 여성이었다. 주대에는 왕실 소유에 뿌려질 씨앗이 왕후의 궁실에 보관되었다.
후에 부계의 가부장적 질서와 제후의 세력이 출현했을 때에야 비로소 토지가 하나의 신이 되었다.(주왕조는 신의 명에 따라 보리와 밀을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곡물의 신 후직의 후손이라고 여겨졌다.) 땅은 농경적 풍요의 원천이자 하늘을 보완하는 힘으로서 그 자체가 우주의 총체를 이루는 한 축이었다.
중국의 민족적 계통은 동질적이지 않고, 언어나 문화 그리고 종교에서 통일적 체계를 갖추지도 않았다. 타이, 퉁구스, 터키, 몽골, 티베트 등 중국 주변민족들이 중국문명의 형성에 기여한 요소들이 많다. 특히 중국종교에 끼친 북방 샤머니즘의 영향과 도교의 기원에도 주변문화의 영향이 크다. 중국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고대 문명이 ‘이방 오랑캐’의 문명과 매우 다르다는 주장을 하나 초(楚)의 예를 보더라도 주변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초는 이미 BC 약 1100년경에 세워졌다. 그들은 상의 문화를 흡수하긴 했으나 몽골에 기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는 샤머니즘과 엑스터시의 기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한 대의 중국 통일은 비록 초문화의 파괴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지속적으로 초의 종교적 신념과 실천을 중국문화에 보급시켰을 것이다. 아마 초의 많은 우주론적 신화와 종교적 실천들이 중국문화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129. 세계의 기원과 구성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보존되어 내려오는 중국의 우주창조신화는 없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서와 많은 전설 속에서 의인화되고 세속화된 창조신들을 구별해낼 수는 있다.
1. 반고는 하늘과 땅이 알과 같이 혼돈의 상태였을 때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반고가 죽었을 때 그의 몸은 만물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원초적인 존재의 희생에 의한 창조-티아마트, 푸루샤, 이미르-를 발견할 수 있다.
2. <서경>은 수많은 민족과 다양한 문화의 층위에서 입증된 또 다른 우주창조의 주제가 고대 중국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성한 지배자인 황제가 신들의 하강을 중지시키기 위해 중(重)과 려(黎)로 하여금 하늘과 땅 사이의 통로를 끊게 했다. 그러나 어떤 특권을 가진 존재들-샤먼, 신비가, 영웅, 군주 등-은 엑스터시 싱태에서 하늘로 비상할 수 있으므로 ‘태초에’ 단절되었던 통로를 재건한다.
3. 홍수가 일어났을 때 여와는 오색의 돌로 파란 하늘을 손질했고(여와봉천), 큰 거북의 발을 잘라 사방 네 귀퉁이의 기둥으로 삼았으며 흑룡(공공)을 죽여 세상을 구했고, 갈대의 재를 쌓아 물의 범람을 멈추게 했다. 다른 문헌에서는 하늘과 땅이 생긴 후에 여와가 황토(고귀한 사람)와 진흙(가난하고 가련한 사람)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4. 우(禹)는 조물주와 문화영웅의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 지식인들에게는 세계를 조직하고 인간의 제도를 세우는 일은 우주창조와 동등한 것으로 이해된다. 악의 세력을 축출하고 최고의 통치자 자신이 중앙에 존재하면서 사회의 조직체를 완결하는 때가 곧 세계창조의 때이다.
5. 사실 노자와 그의 제자들은 고대의 신화적 전통에 의존하고 있다. 노자는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알의 형태를 띤 총체성으로서의 혼돈이 지닌 고대의 우주창조적 주제를 형이상학적 언어를 통해 반복했다.
6. 5라는 우주론적인 수-사방과 중심-는 여러 상징과 대응한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에 놓여있고, 그 수도는 왕국의 중심에 있으며, 왕궁은 수도의 중심에 위치한다. 완전한 수도야말로 건목(建 木)이라고 불리는 신비한 나무가 자리잡고 있는 우주의 중심에 위치해야 한다. 중국의 전승에 따르면, 모든 수도는 세계의 형상인 동시에 역법의 상징인 명당이라는 의례적 궁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명당은 사각의 토대(땅) 위에 세워지며, 둥근 초가지붕(하늘)으로 덮인다.(天圓地方) 1년을 주기로 통치자는 궁전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겨간다. 왕은 역법에 합당한 처소에 거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새로운 계절과 달을 개시한다. 최고 통치자는 어떤 의미에서 세계축을 구현하고 땅과 하늘을 결합한다.
130. 양극성, 교대 그리고 재통합
사방과 중심을 나타내는 우주적인 수 5는 대우주와 소우주 간의 정교한 상응체계를 이루는데, 이 체계는 음양체계와 통합되어 상극상생의 순환체계 즉 음양오행설이 된다.(2수, 3수 분해) 세계는 상호 교대하며 보충하는 두 개의 현상을 결합시킴으로써 주기적인 총체성을 드러낸다. 교대의 관념은 대립의 관념을 극복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우주는 주기적으로 교대하는 일련의 대조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난다.
음과 양의 교대에 의해 진행되는 우주의 끊임없는 변화는 말하자면 도의 외적인 면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철학 및 종교사상에서 도라는 것은 모든 실재의 영역에 내재하는 질서의 원리이다.(천도, 지도, 인도) 이러한 몇가지 의미들은 고대의 원초적인 통일서/총체성의 사고 즉 우주창조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덕경> 42장 “도는 하나를 낳았다. 하나는 둘을 낳았다. 둘은 셋을 낳았다. 셋은 만물을 낳았다. 만물은 음을 짊어지고 양을 감싼다.” 하나는 곧 전체이다. 그것은 많은 신화에 친숙한 주제인 원초적인 총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주석에 의하면 하늘과 땅(즉 둘)의 결합은 현존하는 모든 만물을 낳았다. 그러나 노자에게 하나 즉 원시적인 통일성/총체성은 이미 창조의 한 단계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비롭고도 불가지한 원리인 도에 의해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는 원초적인 총체성으로서 살아있는 동시에 만물을 낳는 것이지만 형체와 이름은 없는 것이다. 도교의 모든 학파에 공통되는 본질적인 요소는 문명이 승리를 거두기 이전에 존재했던 원시적 인간의 조건에 대해 그들이 보냈던 찬사일 것이다.
131. 공자 : 예의 위력
정확히 말해서 공자는 종교지도자가 아니다. 그러나 직간접적으로 공자는 중국 종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도, 천신, 조상숭배 같은 전통적인 관념들을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공자에게 있어 도는 천명에 의해 확증되는 것이었다. 공자는 하늘의 초월성을 인정한다. 그에게 있어 하늘은 데우스 오티오수스가 아니었다. 천은 모든 개개인에게 관심을 갖고 그가 보다 잘 되도록 돕는다. 귀신에 대해서도 공자는 그 실존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귀신의 중요성은 의심했다. 그것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지혜’라고 그는 충고한다.
공자가 구상한 도덕적 정치적 개혁은 ‘총체적인 교육’ 즉 보통의 인간을 ‘군자’로 교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구성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라도 도에 준거하는 의식적인 행위, 즉 의례와 관습(예)의 정확한 실천을 배우기만 하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 당시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천더가 요나 순 같은 문화영웅과 주의 문왕 및 무왕 같은 제왕들에 의해 범례적으로 밝혀질 수 있다고 여겼다.
132. 노자와 도교
사마천은 ‘노자는 도와 덕을 계발해냈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사람은 은거하면서 이름을 드러내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고 썼다. 그러나 공적인 생활을 멀리하고 명예를 하찮게 생각하는 것은 공자에 의해 주창된 ‘군자’의 이상과는 정확하게 반대된다.
전승에 따르면 노자가 서역으로 가기 위해 함곡관을 지나갈 때, 이윤(伊尹)의 요청으로 5000자 분량의 책을 엮었는데 그 책이 유명한 <도덕경>이라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형태의 <도덕경>이 공자 당시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없으며, 아마도 BC 3세기경에 쓰였을 것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진다.(태사담, 통행본 노자, 백서노자, 죽간노자, 노장신한열전)
역설적으로 <도덕경>은 제왕과 정치 군사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충고를 많이 담고 있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노자는 군왕이 도를 지키기만 하면, 다시 말해 무위의 방법을 실천하기만 하면 국정이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도는 항상 작위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도가가 정사에 개입하지 않는 이유이다.
요컨대 공자가 군주나 그밖에 배우기를 원하는 누구에게나 ‘완전한 인간’의 이상을 제시했던 것처럼, 노자는 정치 군사 지도자에게 도가의 방식으로 행할 것을 권한다.
<도덕경>은 첫머리에서 ‘도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常道)가 아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마도 노자가 말하고 있는 도 역시 상도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실재에 대한 총체성을 반영하고 있는 상도는 존재의 양식을 초월하므로 지식으로써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자도 장자도 도의 실체를 입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노자는 ‘제2의’ 부수적인 도에 관해 언급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2의’ 도는 ‘만물의 어머니’로 불린다. 그것은 불사의 곡신(谷神)과 현빈(玄牝)으로 상징된다. 계곡의 이미지는 비어있음과 동시에 물을 담는 저장소, 곧 풍요의 사상을 암시한다. 비어있음은 한편으로는 풍요와 모성의 관념과 관련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각능력의 결여(도의 독특한 양식)와 관련된다.
‘제2의 도’에 순응함으로써 도사는 자신의 여성적 잠재력 즉 ‘유약함’, 겸허, 무저항을 소생시켜 강화시킨다. 어찌 보면 도교도는 양성구유 즉 완전한 인간에 대한 고대의 이상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두 성이 결합됨으로써 보다 손쉽게 유년기의 상태 즉 인간존재의 ‘시원’으로 회귀하게 된다. 이러한 회귀는 삶의 주기적인 재생을 가능케 한다.
상반되는 것을 통합하는 모델은 언제나 도이다. 도의 통일성/총체성 내에서 음과 양은 공존한다. 여성에 대한 도교도의 태도는 봉건적인 중국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는 첨예하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도는 ‘온 우주를 순환하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생과 사는 음양의 교대로 설명된다. 도교도들은 생명을 무한히 연장하거나 심지어 육체의 불사를 얻는 방술을 알고 있었다. 장생 추구는 도 탐구의 일부에 해당된다. 그러나 노자는 육체의 불사 또는 인성의 지속을 믿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도교의 방술이 그 기원과 구조에 있어서 샤먼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트랜스가 진행되는 동안 샤먼의 영혼이 그의 몸을 떠나 우주적인 영역을 여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장자가 전하는 일화에서, 공자에게 ‘나는 만물의 시원으로 노닐러 갔었다’고 한 노자의 표현은 도교적인 신비경험의 본질을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엑스터시 여행은 사물의 시원으로의 회귀를 내포한다. 그러나 노자의 만물의 시원으로의 여행은 다른 종류의 신비경험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조건의 한계를 초월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론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도교의 제2의 위대한 교사인 장자는 아마도 BC 5세기에 살았을 것이다. 노자와 마찬가지로 장자도 당시에 유행하던 견해와 논증적인 지식을 거부한다. 유일하게 완전한 지식은 엑스터시적 지식인데, 그것은 실재에 대한 이원론을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장자는 삶과 죽음을 동일시했다. 삶과 죽음의 통일이라는 주제는 도가의 저술가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졌다. (장주와 나비) 그는 사해 밖에서 노닌다. 삶과 죽음의 변화는 그와 무관하며, 더욱이 선과 악의 개념은 그와 전혀 상관없다. 이러한 엑스터시적 편력은 실제로 내면의 여행이다.
샤머니즘의 영향 하에 있었던 민족들 예를 들면 터키-몽골인들의 경우 엑스터시적 여행이 이루어지는 동안 샤먼이 겪는 시련과 모험은 시인을 고취시켰으며 서사시에서 찬양되었다.
133. 장생술 ~ 134.도교와 연금술
중국에서는 보통 철학적 도교인 ‘도가’(道家)와 종교적 도교인 ‘도교’(道敎)를 구분한다. 그들은 노자와 장자는 ‘순수한 철학’의 도가로 보아 ‘육체적 불멸성’을 추구하는 ‘도교’와 대비시켜 생각한다.
도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육체의 불사를 얻는 것이었다. 불사의 존재인 신선은 표기상 인간(人)과 산(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의미상으로는 은자를 암시한다. 신선의 두 번째 범주는 일종의 지상의 낙원인 봉래산이나 곤륜산에서몇 백 년을 살았던 도사들이다. 마지막 세 번째 범주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상의 낙원에 도달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는 대신 지팡이나 검 또는 신발을 관 속에 넣는 형태로 존재를 드러낸다.
장생술의 기본적인 원리는 ‘생명력을 기르는 것’ 곧 양생(養生)이다. 대우주와 인간의 육체는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므로 생명력은 몸에 있는 9개의 구멍으로 드나들면서 공기뿐만 아니라 태양, 달 그리고 별 등이 내뿜는 기운을 들이마신다.
태식(胎息)은 어머니 자궁에 있는 태아의 호흡과 유사한 것으로서 내부의 순환적 호흡을 말한다. 본바탕을 회복하고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노쇠를 몰아내고 태아의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
3세기에 나온 <태평경>에 따르면, 내적인 통찰력에 의해 오장에 거하는 신들을 분간해낼 수 있다.명상을 통해 도사는 신들과 소통하고, 그 신들을 통해 그 자신의 몸을 강화시킬 수 있다.
장수를 얻는 또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방중술이 있다. 1세기 때의 신선 용성공이 추구한 방술인 ‘음도’(陰道)는 ‘정액을 순화시켜 뇌를 회복시키는’ 실천이었다. 이것은 생명 에너지의 분산을 막는 것으로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도교의 전형적인 이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신선 용성공의 원칙은 계곡에 거하는 신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수행은 노자의 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도교의 성적인 수행에서 인도의 영향, 특히 요가 좌도(左道)인 탄트리즘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134. 도교와 연금술
야금술사, 제련공, 대장장이 등에 관한 의례와 신화는 연금술사에 의해 부활되고 재해석되었다. 중국에서도 연금술은 (1) 금속을 금으로 바꾸고 (2)이러한 조작에 내재한 ‘구원론적’ 가치라는 두 신앙으로 구분되는데, BC 4세기부터 명확하게 언급된다.
맹자와 동시대 사람인 추연이 일반적으로 ‘연금술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BC 2세기 유안과 또 다른 저자들에 의해, 연금술로 금을 제조하는 것과 장생불사를 얻는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명확히 기술되어 있다.
중국연금술은 (1)전통적인 우주창조의 ‘원리’ (2)불사의 영약과 신선에 관한 ‘신화’ (3)장생, 지복, 영적인 자발성을 추구하는 ‘방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리, 신화, 방술은 원역사시대 때부터 내려온 문화유산이다.
금의 제조, 불사약의 획득, 신선의 청배(請陪-신령이나 조상의 혼령을 불러 모시는 일)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이 있다. 방사(方士-박수, 벅수)였던 이소군은 한무제에게, 단사로 황금을 만들 수 있고 그 황금을 먹어 장수할 수 있으며, 장수하여 봉래산의 신선을 만나 봉선을 하면 죽지 않을 수 있다고 하였다. 불사의 영약에 대한 탐색은 신선들이 사는 멀고도 신비스러운 곳에 대한 탐색과 연관되었다. 금을 추구하는 것 역시 영적인 탐색을 함축하고 있었다. 금은 황제의 특색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대지의 중심에서 발견되며, 내세(황천) 등과 신비스런 관계를 맺고 있다.
금속의 변성에 대한 신앙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는 문헌은 BC 122년의 <회남자>이다. <열선전>의 전승에 의하면, 연금술사인 위백양은 ‘불사의 환약’을 제조해 제자와 개랑 먹고 함께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가장 위대한 연금술사인 갈홍(283-343)은 단사와 꿀의 혼합물로 만든 환약을 1년 이상 먹으면 불사를 얻게 된다고 썼다.
절대 미분화의 원초적 상태로 물질을 환원시키는 것은, 내면적인 경험의 차원에 있어서는, 출생 이전의 태아 상태로 회귀하는 것에 상응한다. ‘자궁으로의 회귀’를 통한 회춘과 장생이라는 주제는 도교 제일의 목표 중 하나이다. ‘태식’(胎息)이가장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지만, 연금술사는 화덕 속에 여러 성분을 용해시킴으로써도 태아 상태로의 회귀를 성취한다.
어느 시기 이후로 외적인 연금술 즉 외단은 공개적인 것으로 여겨져, ‘비의적’이라고 칭해진 요가적인 유형의 내적인 연금술 즉 내단과 대비되었다.연금술의 과정은 이제 도사의 몸과 의식에서 진행된다.
이미 165년경 문헌에서 노자는 원초적인 혼돈에서 나온 존재로 여겨졌으며, 신인동형의 우주론적 존재인 반고에 비유되었다. ‘교단 도교’는 2세기 말엽 장도릉에 의해 설립되었다. 184년 교단의 지도자 장각은 ‘혁신’이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청천’이 ‘황천’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그들은 황건을 두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가 일으킨 반란은 한나라 왕조를 거의 전복상태로까지 몰아넣었다. 반란 자체는 평정되었지만, 구원에 대한 열망은 중세 내내 계속되었다.
장각의 ‘테평도’는 황제와 노자의 사상을 추앙하는 황로학파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민간사상을 융함한 것이다. 이는 후한 말기 사천지방에서 장릉이 창시한 오두미교와 함께 위진남북조시대에 도교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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