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여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 19)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수마허의 작은 표현이 우리네 일상의 많은 부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봅니다. 요즘은 사진 찍는 것이 시들어지고 게을러진 듯싶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늘 콩밭에 가있듯이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여러 이유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곧 나가겠지요. 더욱 이렇게 계절이 바뀌면서 들녘에 만발할 작은 들꽃을 보고 싶고 찍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사진을 찍다보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더 공감이 갑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주의 오름(=작은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오름 전체가 온통 들꽃이요 사방이 전부 들꽃이 만발해 있다고! 그 곳에서 느끼는 것은 <생명이 그렇고 자연이 그렇고 우리 모두가 다 아름답다.>는 사실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늘 큰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 온 우리의 이글어진 마음을 작은 들꽃의 무리들이 모여 펼쳐진 풍광을 볼 때 참으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들꽃 하나를 접사(=가까이 찍는 사진 기법) 혹 초접사로 찍는다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의 더 실감하실 수 있고, 그 작은 것 안에 모든 우주의 생명과 생명의 리듬을 볼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렇습니다. 저 광활한 대우주도 그 시작은 아주 작은 먼지 하나뿐인 작음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작음을 외면하고는 큰 것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이나 계명도 작은 것의 실천으로부터 큰 계명이나 하느님의 큰 뜻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우주보다 더 크신 존재),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같아지기 위해서 세상의 가장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체 안에 계십니다.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할 수많은 존재 중의 한 존재로 마치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겨자씨 한 알(마태 13,31-32참조)처럼 작은 존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해서 지구라는 행성에 살았고 살아갈 인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갈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 존재와 삶을 통해서 걸어야 할 길이 되시고, 살아야 할 진리가 되시며, 누려야 할 생명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세세 대대로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가르침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성하다.>는 그리스말로 <‘이루다’ 혹 ‘채우다.’>라는 뜻인데, 본문에서는 ‘단순히 이루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 본래의 뜻을 ‘채워서’ 율법의 본뜻을 다시 찾게 하시려는 의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이나 계명을 얼마나 충실하게 잘 지키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명이나 율법의 본래의 의도와 정신을 채워 온전하게 한다는 의미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계명들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어기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되고,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 사람이 된다.>(마태5,19)고 한 것은 계명의 크고 작은 것에 관계없이 계명의 본래 뜻과 정신을 되살려 완성하시고자 함이지 여러 가지 행위의 잘잘못을 가리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사실 누가 계명의 크고 작음을 구분할 수 있겠으며, 누가 자기 편리대로 어기고 어기도록 가르친다면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편리나 안위를 위한 것이지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은 때론 큰 것 보다 작은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99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셨고, 한 작은 아이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2마리를 작다고 하시지 않으셨으며,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마태18,6) 불행하다고 하였으며.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18,10)고 당부하셨습니다.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며 작은 것은 큰 것의 시작입니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됩니다. 넓고 큰 강도 작은 개울이 모여서 만들어지고 큰 바다도 한 방울의 물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큰일을 할 자격과 능력이 있고,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큰 것도 소홀히 하게 마련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탈렌트 비유에서 본명하게 밝히신 바가 있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마태25,21)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지키도록 내려주신 계명에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계명은 계명인 것입니다. 어쩌면 작은 계명 안에 하느님의 큰 사랑이 담겨 있는지 모릅니다. 하찮고 너무 시시 골골한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사랑의 실천이며, 작은 사랑의 실천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받는 길입니다. 작은 것들을 무시하며 살아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수도 있지만,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오늘 하루의 작은 일들을 작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하늘에 나는 작은 새도, 들에 핀 작은 나리꽃들 하나에도 관심을 쏟으시는 주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좋게 보시기에 우리가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몸짓을 참으로 사랑스럽게 보실 것입니다. 하느님 눈에 어느 것 하나 작고 의미 없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다 좋게 보입니다. 우리 역시도 소화 데레사처럼 작은 계명 하나라도 큰 사랑으로 지키고 또 지키도록 도와주고 가르치는 우리 자신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저의 견해를 저는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13,10) 그러기에 <특정한 날을 중시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중시하는 것이고 , 아무 것이나 먹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가려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로14,6) 우리는 먹는 것도 주님을 위하여 먹는 것이고 먹지 않는 것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알면 알수록 주님의 계명을 더 잘 지킬 것이며(1요2,3),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1요2,5) 그러기에 계명이 크든 작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1요5,3)
<주님, 저희가 당신을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시며, 저희 앞에 내놓은 당신의 율법과 계명을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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