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무반주첼로-72회
덕을 베풀더라도 인자한 마음이 우선되지 않으면 위선일 수 있다는 점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현지의 느낌은 묘했다.
부부는 동등한 관계인데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사람으로서 가능한가.
생명까지 내어주는 예수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현지는 벌써 한계를
느끼고 있지 않은가. 자기들 다섯 식구끼리만 조용하고 오붓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음이 그것이었다.
이내 시동생들이 사용할 방도 청소를 했다. 그렇게 서울 생활은 시작되 었다.
방학인지 실직인지 모르는 채로 한 달은 속히 지나갔다.
남편의 곁으로 오긴 했으나 학교에 사표를 던지고 온 일이 마음에 걸릴 즈음
하나님께서는 무심치 않으셨다. 서울 근교 학교로 전근이 된 것이다.
아무래도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일을 주는 가운데 좋은 일을 섞으신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현지는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서울에 오고 보니
사범학교 졸업만으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우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잊고 있던 방송통신대학에 진학하여 더 공부하리란 계획을 세웠다.
함께 있었던 시동생들은 친정 부모에게 맡기고
이젠 서울에 와서는 모처럼 단촐하게 사나 했더니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둘째 시동생이 올라왔다.
특별한 계획 없이 서울에서 무엇이든 해보겠다고 했다.
박정하게 쫓아내려 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시동생보다 차라리 시어머니가 올라와 아이들을 건사해주면 도움이 되겠는데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시어머니는 시골에 작으나마
농사터가 있고 집이라도 있으니 비우고 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도 남편 김상태는 말이 없었다.
그는 집안일은 아내가 어떻게 잘 꾸려가는 모양으로 아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현지는 속이 답답하면 기도를 했다. 남들처럼 바가지를 긁는 다는 것은 유치했다.
현지는 생각다 못해 칠순이 가까운 친정 할머니를 모셔왔다.
할머니는 현지가 학교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부터 고생하셨는데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현지는 분초를 쪼개가며 집과 학교를 오갔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집안일을 도왔다. 결혼하기 전 부터 늘 현지를 아끼던 할머니의 사랑이 이젠
손녀사위와 증손들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고 있는 게 늘 고마웠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갔고, 친정 동생 현순이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혼을 시작으로 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백일이 막 지났을 때
미국에 유학중인 남편 곁으로 떠났다.
엄마는 미국으로 딸을 보낸 허전한 마음을
일하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 모양이다. 친정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엄마는 여전히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봉래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안 후로는 점점 비뚤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계속하여 사고를 쳐서 이승원이를 힘들게 했다. 아버지의 금고를 몰래 털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돌아다녔다.
집안 내에서 어디서 씨도 모르는 남의 자식 때문에 속을 썩인다고
원망할 즈음 보란 듯이 봉래의 생모가 나타났다.
봉래가 이승원의 친 자식이라며 아들 없는 집에 아들을 낳아줬으니
대가를 받아야겠다고 거침없이 들이대었다.
떠들어대는 폼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이번은 지난번같이 둘러댈 수만은
없었던 듯하다. 이승원이 꿀 먹은 벙어리로 묵묵부답인 채
그 여자에게 당하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끄러웠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들여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돈을 주고 입을 함봉하도록 조처했고 또 언제 그런 일이
다시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기에 결국 아들을 돈을 주고 산 셈이 되었다.
아들이 도대체 무엇인가 많이 배운 이승원도 결국은
시대를 크게 앞질러 가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현지는 그러한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하나밖에 없던 아들을 전쟁통에 잃고,
딸 하나는 산에 묻은 엄마에게 어떻게 저토록 잔인하게 할 수 있는가.
사람이라면 저럴 수는 없다. 어린 생명을 제 손으로 묻어야 했던
엄마의 속을 조금만 생각한다면 말이다.
결국 거짓말은 거짓을 부르기 마련이었다. 봉래가 업둥이로 들어왔을
적에 이실직고 했다면 봉래는 업둥이라는 말은 듣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
랬다면 봉래가 비뚤어진 길을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다음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