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 날 번개 팅>구연식
< ‘헤일로 92’에서 >
오늘은 수필 반 여름 방학 중 임실군 강진면의 ‘천담집’에서 번개팅이 있는 날이다. 날씨가 덥기는 마치 불에 달군 바늘로 온 피부를 콕콕 찌르는 느낌이다. 미팅 장소 부근에 사는 회원은 개인 출발을 하고, 전주 시내에 거주하는 회원들은 한 목사님이 합승 차량을 봉사하여 모두 함께 임실로 내려가고 있다. 나이와 관계없이 피서지로 떠나는 회원들은 어린아이처럼 환호작약(歡呼雀躍)의 표정으로 설렘이 가득하다.
목적지 천담집에 도착하니 미리 와있는 회원들이 반가이 맞아 준다. 주차장 마당에 첫발을 내려 놓으니, 염전처럼 사방에서 후덥지근하고 짭조름한 열기가 품어 오른다. 오늘의 메뉴는 ‘민물 잡고기 조림’이다. 옥정호의 맑은 물, 섬진강 상류의 깨끗한 물에서 자란 잡어들을 넓적하고 큼직한 전골냄비에 각종 채소 그리고 갖은양념을 듬뿍 넣어서 가스레인지에 올려놓는다.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군침이 돌아서 콩나물무침 한 젓갈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면서 군침과 허기를 잠시 달래 본다.
드디어 오늘의 복달임 ‘민물 잡고기 조림’을 국자로 듬뿍 퍼서 앞 접시에 놓고 민물고기 큰 놈을 통째로 씹으니, 잔뼈들도 함께 으깨지면서 고소한 맛을 더한다. 더구나 전북 임실 농특산물인 임실 고추로 양념하여 맛이 있으면서 입 안이 얼얼하여 이열치열(以熱治熱)로 말복 달임을 제대로 했다. 이렇게 푸지게 먹고 나니 시장기가 사라지고 포만감도 느껴진다. 이제는 속도 조절 등 식도락의 예절을 지키고 싶다. 그런데 앞자락을 보니 칠칠 맞게 임실 고추 표 빨간 국물 마크가 선명하게 땡땡이 찍혀 있다. 누가 봐도 이제 막 숟가락질을 배우는 어린애 밥 먹은 흔적이다. 휴지에 물을 적셔 문지르고 있으니, 물티슈로 하면 잘 지워진다고 회원들이 물티슈를 금방 가져다준다. 물티슈로 하니 효과가 있지만 그래도 주황색 흔적은 남는다. 집에 가면 아내의 잔소리가 떠올라, 도착 즉시 다른 빨래와 섞어서 아내 몰래 세탁기에 집어넣어야겠다. 모처럼 후끈하게 음식을 먹고 나니 승화작용(昇華作用)의 현상인지 온몸은 금세 시원한 느낌이 든다.
우리 민족의 생업(生業)은 농업이었다. 그래서 민족문화의 근간은 농경문화이다. 농사일은 태양의 일조량과 염량(炎涼)이 좌우하기 때문에 태양력을 기준으로 한 24절기로 나누어 농사일을 해왔다. 그러나 바다의 고기잡이는 사리와 조금이 좌우하기 때문에 음력을 사용한다. 그런데 삼복(三伏)은 양력도 음력도 아닌, 우주 만물은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중국에서 전해온 음양 5행(火, 水, 木, 金, 土) 이론을 적용하고 있다. 여름은 불(火) 가을은 쇠(金)로 간주하여 여름의 불기운에 가을의 쇠 기운이 너무 뜨거워서 3번 굴복(녹는다)한다. 라는 뜻에서 복(伏)을 써서 삼복(三伏)이라 했단다. 그 옛날에도 쇠를 녹일듯한 더위가 있었는가 보다.
우리 민족 전통사회의 농사는 기계농이 아닌 사람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다. 혼자서 일하는 호락질, 이웃끼리 일을 주고받는 품앗이, 마을 전체가 함께 일하는 두레 등으로, 농기구도 열약하여 손과 발이 농기구였으니, 얼마나 힘들고 건강은 쇠약해졌음이 짐작된다. 그래서 전반기 농사일을 끝내고 후반기 농사일을 위해서 휴식과 건강 회복으로 가장 무더운 복(伏)날쯤에는 복달임으로는 고기로 국을 끓여 먹는 풍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복날에 궁중에서는 관리들에게 쇠고기를 내렸으며 보조식품으로 팥죽을 곁들이기도 했단다. 일반 백성들은 쇠고기보다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개고기나 닭고기를 주로 복달임으로 해먹 던 풍습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참으로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아름답고 좋은 풍속을 간직한 민족이다.
식당 문을 들어갈 때는 배고프고 더워서 짜증만 나서 아무것도 안 보이더니, 식당 문을 나서려니 식당 문 오르는 계단에 청포도 터널을 만들어 놓아 청포도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의 「청포도」가 떠 오른다. 시인은 청포도와 조국 독립을 연계하여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작품을 썼을 텐데, 나는 임들의 덕분에 광복절 하루 앞둔 오늘 복달임을 하고 있으니 죄스러운 느낌이 든다. 어떻든지 이 삼복더위에 냇가에는 가지도 않고 냉방 된 방에서 ‘민물 잡고기 조림’으로 천렵(川獵)의 복달임을 하였으니 평양 감사가 부럽지 않다.
옛 시객(詩客)들은 식사 후의 당연 코스로는 시를 짓고 읊조리는 장소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숲속 문답식 야외수업 방식처럼, 완주군 구이면 숲속의 카페 ‘헤일로 92’로 이동하여 지도교수님의 주관으로 ‘미당 서정주의 문학적 사고’에 대하여 시원 달짝지근한 차를 마시며 자유 토론 시간을 가졌다.
올여름 2차 번개 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머리가 벗겨질 정도의 살인적 폭염에 인간 체력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한계를 측정하는 것 같다. 과학의 종말은 신의 등장이라 했는데 지구의 최후가 염려된다. 기성 정치인들 아집의 인식론인지, 민족의 암흑 터널을 허물고 광명의 빛을 얻어낸 광복절을 이분법으로 갈라놓아 침울한 광복절 하루 전날이다. 농경민족 조상들이 만든 세시풍속(歲時風俗) 복(伏)날의 복달임은 이 모든 것을 녹여서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한 정신을 낳게 하는 ‘복달임’이 가장 좋았다. (2024. 8. 14. 수. 末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