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수행자들은 특유의 정신적, 신체적 수련을 하여 진아와 결합하는 것[yoga는 산스끄리뜨로 '결합'을 뜻한다]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수련의 대부분은 약 2천년 전에 씌어진 빠딴잘리(Patanjali)의 {요가경}(Yoga Sutras)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라자 요가(raja yoga)로 알려져 있는 빠딴잘리의 체계는 독특한 여덟 가지 수행 단계로 되어 있다.
1. 금계禁戒(yama) :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행戒行, 즉 거짓말, 절도竊盜, 상해傷害, 음행淫行, 탐욕 등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2. 권계勸戒(niyama) : 자기 자신이 지켜야 할 법도, 즉 청결, 평온, 검소함, (경전) 공부와 (신, 스승에 대한) 헌신 등이다.
3. 좌법坐法(asana) : 펴기, 굽히기, 균형 잡기 및 앉기 등의 수련이다. 이러 한 수련법은 오늘날 총칭해서 하타 요가(hatha yoga)로 알려져 있다.
4. 조식調息(pranayama) :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호흡 수련이다.
5. 지감止感(pratyahara) : 육체와 감각 기관으로부터 주의注意를 거두어들이 는 것이다.
6. 집중集中(dharana) : 마음의 집중이다.
7. 명상冥想(dhyana) : (한 대상을) 명상하는 것이다.
8. 삼매三昧(samadhi) : 실재를 끊임없이 관조하는 것이다.
이같은 수행의 대부분은 다른 수행 체계(종교)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예외는 하타 요가와 조식(pranayama)인데, 이것이 라자 요가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사람들이 슈리 라마나에게 이들 행법에 관해서 물으면, 그는 하타 요가는 몸뚱이에 집착한다는 이유에서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영적인 문제들은 마음을 제어함(다스림)으로써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 하나의 기본 전제이며, 따라서 그는 육체를 돌보는 데 먼저 신경을 쓰는 수행법은 절대로 권하지 않았다. 그는 조식[호흡 제어]에 대해서는 다소 높이 평가하여 그것이 딴 방법으로는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편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그것도 초보자들이나 할 수행으로 간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라자 요가의 다른 측면들[도덕, 명상, 삼매 등]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다른 장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라자 요가와 함께 인기 있는 또 하나의 계통으로는 꾼달리니 요가(kundalini yoga)가 있다. 이 계통의 수행자들은 그들이 꾼달리니라고 부르는 영적인 힘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몸 안의 영적인 중심(psychic centres), 즉 짜끄라(chakras)에 의식을 집중한다. 이 수행의 목표는 척추의 맨 밑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이어져 있는 영적인 통로, 즉 수슘나(sushumna)를 통해 이 꾼달리니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꾼달리니 요기는 이 힘이 사하스라라(sahasrara)[머리 속에 위치한 가장 높은 짜끄라]에 도달하면 진아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슈리 라마나는 꾼달리니 요가는 위험이 따를 수 있을 뿐더러 불필요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헌신자들에게는 결코 그것을 권하지 않았다. 그도 꾼달리니라는 힘과 짜끄라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비록 꾼달리니가 사하스라라에 도달한다 해도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최종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꾼달리니가 사하스라라를 넘어, 불사영맥不死靈脈(amritanadi)[초월영맥paranadi 또는 생명영맥jivanadi이라고도 함]이라고 그가 부른 또 다른 영맥靈脈(nadi, psychic nerve)을 따라 내려가서, 가슴 오른쪽에 있는 심장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자기탐구를 하면 꾼달리니가 자동적으로 심장중심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밖에 별도의 요가 수행은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진아는 우리가 에고의 근원을 찾아서 심장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아 깨달음을 성취하는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은 영맥靈脈, 사하스라라, 수슘나, 초월영맥超越靈脈(paranadi), 꾼달리니, 조식(pranayama) 혹은 여섯 군데의 짜끄라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1
위에서 살펴본 수행법들 외에도 힌두교에는 까르마 요가(karma yoga), 즉 행위 요가라는 것이 있다. 이 계통의 수행자는 다른 사람들을 이타적으로 돕고 봉사함으로써 영적으로 진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수행법은 {바가바드 기따}에서 칭송되고 있기는 하지만, 슈리 라마나는 보통 그의 헌신자들에게 이 길을 따르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 길은, 선행善行을 하려고 하는 '나'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知의 길, 헌신의 길 또는 라자 요가의 길을 따를 수 없다고 판단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이 길을 권하였다.
구도자가 기질상 앞의 두 방법[지知와 헌신]에 적합하지 않고, 거기다 나이가 많아서 세 번째 방법[요가]도 택하기 어려우면 행위의 길(karma marga)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고귀한 품성이 더욱 뚜렷해지고, 그는 사심 없는 즐거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도 앞의 세 길 중의 하나를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2
슈리 라마나는 행위 요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수행자가 자신이 남을 돕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자기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도 아무런 집착 없이 무관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처럼 행위 요가를 그다지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모든 행위가 '내가 행위자다'하는 생각 없이 이루어진다면 앞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 문 ] 요가는 결합(union)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무엇과 결합한다는 말입니까?
[ 답 ] 바로 그겁니다. 요가는 먼저 분리(division)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나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결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누가 누구와 결합해야 합니까? 그대는 구하는 자(seeker)이며, 어떤 무엇과의 결합을 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대가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 그대와 분리된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대의 진아는 그대에게 친접親接(intimate-거리 없이 밀착해 있음)해 있으며, 그대는 항상 그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그것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무한(the infinite)으로 확장될 것이며, 결합(yoga)이란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 분리(viyoga)란 누구의 것입니까?3
[ 문 ] 저는 모르겠습니다. 분리라는 것이 정말 있습니까?
[ 답 ] 누구에게 분리가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그것이 요가입니다. 요가는 모든 길에 공통됩니다. 요가란 실로 그대가 진아, 곧 실재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요가들―행위 요가, 지知 요가, 헌신 요가 및 라자 요가―은 서로 다른 진보 방식(modes of evolution)을 가지고 (사람들의) 상이한 기질들에 맞추기 위한 상이한 수행 노선들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진아와 다르다고 하는 오랜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떨어져 있거나 우리와 다른 어떤 것과 합일하려고 한다는 의미에서의 결합 내지 요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진아와 분리된 적이 없으며, 분리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4
[ 문 ] 요가와 탐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답 ] 요가에서는 식심제어(chitta-vritti-nirodha)[생각의 억압]5를 권하지만, 저는 자기진입自己進入(atmanveshana)[자기 자신의 탐구]을 제시합니다. 이 후자의 방법이 더 실천하기 쉽습니다. 기절했을 때나, 단식을 한 결과로도 마음은 억압되지만, 그 원인이 사라지면 그것은 되살아납니다. 즉, 생각들이 그전처럼 흐르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제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근원을 찾아 들어가든지, 아니면 지고의 힘에게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맡겨 버리는 것(순복, surrender)입니다. 순복은 보다 높은 절대적 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려 할 때, 만약 마음이 이에 따라주기를 거부하면, 그것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다시 그것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십시오. 참을성 있는 끈기 없이는 누구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6
[ 문 ] 호흡을 제어할 필요가 있습니까?
[ 답 ] 호흡 제어(breath control)는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보조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제어함으로써도 마찬가지로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제어되면 호흡은 자동적으로 제어됩니다. 따라서 호흡 제어를 시도할 필요가 없고, 마음 제어(mind control-식심제어)만으로 충분합니다. 호흡 제어는 곧바로 마음을 제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나 권하고 싶습니다.7
[ 문 ] 조식調息(pranayama)은 언제 해야 하며, 그것은 왜 효과가 있습니까?
[ 답 ] 탐구나 헌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자연진정조식自然鎭定調息(natural sedative pranayama)을 해볼 만합니다.1) 이것은 요가의 길(yoga marga)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모든 관심은 목숨을 건져야 한다는 하나의 초점에 집중됩니다. (마음이 호흡에 집중되어) 호흡이 안정되면 마음은 그것이 좋아하는 것, 즉 바깥의 대상들에게로 달려나갈 수 없게 됩니다(달려나가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호흡이 안정되어 있는 한, 마음은 휴식합니다. 모든 주의가 호흡이나 호흡 조절(breath regulation)에 쏠리면, 다른 관심은 다 사라집니다.8
호흡의 근원은 마음의 근원과 같습니다. 따라서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진정시키면 다른 하나도 자연히 진정됩니다.
[ 문 ] 짜끄라에 집중하면 마음이 가라앉습니까?
[ 답 ] 요기들은 사하스라라(sahasrara)[천 개의 연꽃잎 모양을 한 짜끄라]와 같은 영적인 중심에 마음을 고정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얼마든지 오랜 시간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 한 그들은 어떤 즐거움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고요해졌던 마음이 다시 나타나서 활동하게 되면, 그것은 세속적 생각들에 또 몰두합니다. 따라서 마음이 밖으로 쏠릴 때마다, 명상(dhyana)과 같은 수행법으로 그것을 다스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가라앉음도 없고 떠오름도 없는 상태에 도달할 것입니다.9
[ 문 ] 조식으로 얻은 마음 제어도 일시적입니까?
[ 답 ] (마음의) 고요함은 호흡이 제어되는 동안만 지속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요가의) 목표는 분명 조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감止感(pratyahara), 집중(dharana), 명상 그리고 삼매로 계속 이어집니다. 이들 단계는 마음 제어를 위주로 하는데, 조식을 먼저 수련한 사람은 그러한 마음 제어가 한결 쉽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조식은 요가 수행자를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이들 높은 단계들이 마음 제어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마음 제어가 요가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다 진보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호흡 제어(조식)를 수련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마음 제어로 들어갈 것입니다.10
[ 문 ] 조식에는 내쉼, 들이쉼 그리고 멈춤의 세 국면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조절해야 합니까?
[ 답 ] 육체와의 동일시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내쉼(rechaka)이요,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를 통해 내면으로 몰입하는 것이 들이쉼(puraka)이며, '내가 그것'인 단 하나의 실재로서만 안주하는 것이 멈춤(kumbhaka)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조식입니다.11
[ 문 ] {마하 요가}(Maha Yoga)를 보니까,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는 호흡, 즉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집중하여 어느 정도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나서, 그 마음의 근원을 찾아 심장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2) 저는 이같은 실제적인 요령을 몹시 아쉬워해 왔습니다. 제가 이 방법을 따라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올바른 것입니까?
[ 답 ] 중요한 점은 어떡하든 마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탐구의 방법을 따를 만한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을 제어하는 보조수단으로 조식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조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호흡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것과, 단순히 호흡을 주시하는 것이 그것입니다.12
[ 문 ] 호흡을 제어하는 데 있어서 들이쉬고, 숨을 멈추고 또 내쉬는 비율을 1:4:2로 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습니까?
[ 답 ] 그런 비율들은 어떤 때에는 숫자를 세지 않고 진언을 암송하면서 조절하는데, 모두 마음을 제어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호흡을 주시하는 것도 조식의 한 방법입니다. 들이쉬고, 멈추고, 내쉬는 것은 (이보다) 더 격한 방법이며 경우에 따라서, 예컨대 각 단계마다 그 수행자를 이끌어 줄 마땅한 스승이 없으면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호흡을 주시하는 것은 쉬우면서도 위험성이 없습니다.13
[ 문 ] 꾼달리니 샥띠(kundalini sakti)[꾼달리니 힘]는 샥띠를 얻는 요가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납니까, 아니면 헌신(bhakti)이나 사랑(prema)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까?
[ 답 ] 꾼달리니 샥띠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누굽니까? 그 힘의 참된 본질을 알면, 그것은 전일의식專一意識(akhandakara vritti)[끊어짐 없는 의식] 또는 자성광명自性光明(aham sphurana)['나'의 광휘]3)이라고 불립니다. 꾼달리니 샥띠는 어떤 길을 가는 사람에게나 다 있지만, 그 부르는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 문 ] 그 샥띠는 다섯 가지 국면으로 나타난다고도 하고, 열 가지, 백 가지 그리고 천 가지 국면으로 나타난다고도 합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다섯입니까, 열입니까, 백입니까, 아니면 천입니까?
[ 답 ] 샥띠는 단 하나의 국면뿐입니다. 그것이 여러 가지 국면으로 나타난다고 말해진다면, 그것은 단지 표현 방법의 문제일 뿐입니다. 샥띠는 단 하나뿐입니다.
[ 문 ] 진인은 그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 뿐 아니라 요가와 같은 다른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 답 ] 물론입니다. 그는 어떤 길을 따르는 사람들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산이 하나 있다 합시다. 이 산을 오르는 데는 여러 길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자신이 온 길로 올라오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 길로, 그 길로만 올라오라고 한다면 그들은 올라올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진인은 그것이 어떤 길이건, 어느 특정한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다 도와줍니다. 중간쯤 올라온 사람들은 다른 길들의 장단점에 대해 잘 모를 수 있지만, 정상에 다 올라와서 거기 앉아 다른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는 사람은 모든 길들을 다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이쪽 저쪽으로 조금 움직이라거나 함정을 피하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는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14
[ 문 ] {슈리 라마나 기따}(Sri Ramana Gita)에서 말하는 방식대로 식신연계識身連繫(chit-jada-granthi)[의식을 육체와 동일시하는 것]를 단절할 수 있으려면, 생명 기운(prana)을 어떻게 수슘나(sushumna nadi)[척추의 영맥] 속으로 끌어올려야 합니까?
[ 답 ]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함으로써입니다. 요기(yogi)는 꾼달리니를 각성시켜 그것을 수슘나를 따라 올려보내는 것을 명확히 목표로 삼을지 모르지만, 지知 수행자(jnani-여기서는 '자기탐구자')는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 다 같은 결과를 얻습니다. 즉, 생명 기운(life-force)을 수슘나를 따라 올려 보내고 식신연계를 단절합니다.
꾼달리니란 진아(atma, Self) 또는 샥띠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이 몸 안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이 육체에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진아 또는 진아의 힘(sakti)과 다르지 않으므로, 안에도 있고 바깥에도 있습니다.
[ 문 ] 꾼달리니가 수슘나를 따라 올라가도록 하려면 영맥들(nadis)을 어떻게 휘돌려 주어야 합니까?
[ 답 ] 요기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호흡 제어의 방법을 쓸지 모르지만, 지知 수행자의 방법은 자기탐구뿐입니다. 탐구를 통해서 마음이 진아 속으로 녹아들면, 진아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샥띠, 즉 꾼달리니가 자동적으로 상승합니다.15
요기들은 꾼달리니를 사하스라라, 즉 천 개의 연꽃잎 모양인 뇌의 중심에 올려 보내는 데 최고의 중요성을 둡니다. 그들은 경전에서 생명 기운의 흐름이 정수리의 숨구멍을 통해서 들어온다고 했다고 하면서, 분리(viyoga)가 그 길을 따라 내려오며 일어나므로 합일(yoga)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반대 방향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합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요가 수행에 의해 기氣(pranas)를 끌어올려 숨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지知 수행자들은 요기들이 육체의 존재 및 그것이 진아와 분리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분리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경우라야, 재결합(reunion)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요가 수행을 하라고 요기가 조언할 수 있겠지요.
사실 육체는 마음 안에 있으며, 마음은 뇌를 자기 자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기들도 그들의 숨구멍 이론에 있어서, 뇌는 다른 근원에서 빌려온 빛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지知 수행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약 그 빛이 빌려온 것이라면 (차라리) 그것을 그 본래의 근원에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근원으로 직접 들어갈 것이지 빌려온 자원資源에 의존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 근원이란 바로 심장이며, 진아입니다.16
진아는 어디 딴 데서 오지도 않고, 머리의 정수리를 통해서 몸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이며, 항상 빛을 발하고 항상 안정되어 있어 움직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습니다. 개인은 그 자신을 변화하는 육체, 혹은 불변의 진아로부터 갈라져 나와 존재하는 마음이라는 한계 안에 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릇된 자기인식(identity)을 포기하기만 하면 되며, 그렇게 하면 항상 빛을 발하는 진아가 유일한 비이원적 실재(non-dual reality)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하스라라에 집중하면 분명히 삼매의 황홀경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원습(vasanas), 즉 마음의 잠재적 습성들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기들은 그 삼매에서 깨어나게 되어 있는데, 이는 속박으로부터의 해탈을 아직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에 내재한 원습들이 그의 삼매의 평안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려면, 그 원습들을 뿌리뽑기 위해 여전히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는 다시 사하스라라에서부터 심장까지, 수슘나의 연장延長일 뿐인 생명영맥生命靈脈(jivanadi)이라고 불리는 통로를 따라 내려가야 합니다. 따라서 수슘나는 하나의 곡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짜끄라(물라다라 짜끄라)에서부터 시발하여 척수脊髓를 따라 올라가 뇌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아래로 구부러져 심장에서 끝납니다. 요기가 심장에 도달하면, 그의 삼매는 영원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장을 최후의 중심(짜끄라)으로 보는 것입니다.17
[ 문 ] 하타 요가(hatha yoga)의 행법들은 질병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이라고 하고, 따라서 지知 요가(jnana yoga)를 수행하기 전의 예비단계로서 필요하다고들 합니다.
[ 답 ] 그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질병은 끊임없는 자기탐구에 의해 효과적으로 섬멸됩니다.18 만약 그대가 몸의 건강이 마음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몸을 돌보는 데 끝이 없을 것입니다.19
[ 문 ] 자기 안으로의 탐구(enquiry into the Self-진아탐구)에 있어서 하타 요가는 필요 없습니까?
[ 답 ] 각자가 자기의 잠재적 습성(purva samskara-종래의 상습)으로 인해, 자기한테는 어떤 방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 문 ] 저 같은 나이에도 하타 요가를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답: 왜 그런 생각을 다 합니까? 그대는 진아를 자기 외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며 얻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대는 항상 존재하지 않습니까? 왜 그대 자신을 떠나서 바깥의 것을 추구합니까?
[ 문 ] {실견지각론實見知覺論}(Aparoksha Anubhuti)에서는 하타 요가가 진아 탐구를 위해 필요한 보조수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답 ] 하타 요기들은 탐구가 장애 없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들은 탐구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수명을 연장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심지어 그 목적을 위해서 약물藥物(kayakalpa)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즐겨 드는 비유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화지畵紙(screen)가 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러나 무엇이 화지이고 무엇이 그림입니까? 그들에 따르면 몸이 화지이고 진아 탐구가 그림인 셈입니다. 그러나 몸 자체도 진아라는 화지 위에 그려진 하나의 그림 아닙니까?
[ 문 ] 그렇지만 하타 요가는 보조수단으로 너무나 많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 답 ] 그렇습니다. 베단따(Vedanta)에 정통한 대大학자들도 그것을 계속 수련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20
[ 문 ] 아사나(asana)[좌법-자세 또는 자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필요한 것입니까?
[ 답 ] 요가 경전에는 많은 아사나와 그 효과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자리(seats)로는 호랑이 가죽, 풀 등이 이야기되고, 자세(postures)에는 '연화좌'(lotus posture-결가부좌)니, '쉬운 자세'(easy posture-반가부좌)니 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데 있어 이런 것들이 왜 필요합니까? 진실은 이것입니다. 진아에서 에고가 일어나, 자신을 육체와 혼동하고 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에고적 자만에 사로잡혀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아사나[자리]를 찾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며 모든 것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사나(asana)[자리]란 확고하게 앉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자기 자신의 진정한 상태 외에,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확고히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아사나입니다.21
전 우주가 서 있는 토대(asana)[자리]는, 진지의 공간이며 빛나는 터전인 오직 진아일 뿐이라는 그러한 지知에서 벗어나지 않는 안정성을 얻는 것이야말로, 수승秀勝한 삼매에 들기 위한 확고부동한 자세(asana)입니다.22
[ 문 ] 바가반께서는 보통 어떤 아사나(asana)로 앉으십니까?
[ 답 ] 어떤 아사나냐고요? 심장의 아사나(asana of the Heart-심장의 자리)입니다. 어디든지 편안한 곳이면, 거기에 저의 아사나(자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행복좌幸福座(sukhasana), 즉 행복의 자리라고 합니다. 이 심장의 아사나는 평안하며, 행복을 줍니다. 이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다른 자리는 전혀 필요 없습니다.4)
[ 문 ] {기따}(Gita)는 행위 요가(karma yoga)를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끄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전투에 임하라고 설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슈리 끄리슈나 자신도 큰 무훈武勳을 세우는 활동적인 삶으로써 그 모범을 보였습니다.
답: {기따}는 그대가 육체가 아니며 따라서 행위자(karta)가 아니라는 말로써 시작합니다.5)
[ 문 ]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 답 ] 자신이 행위자라는 생각 없이 행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행위는 에고 없는 상태(the egoless state)에서도 진행될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 어떤 목적을 위해서 나타나며(태어나며), 그 목적은 그가 자신을 행위자라고 생각하든 않든 성취될 것입니다.
[ 문 ] 행위 요가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행위(karma)나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까?
[ 답 ] 행위 요가란 스스로 행위자의 지위를 사칭하지 않는 요가입니다. 모든 행위들은 자동적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 문 ] 그것은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답: 그러한 질문은 행위자가 있을 때에만 일어납니다. 모든 경전에서는 그대가 스스로 행위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문 ] 그러면 행위 요가는 '행위자 의식 없는 행위'(kartritva buddhi rahita karma)로군요.
[ 답 ] 예, 바로 그렇습니다.
[ 문 ] {기따}는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활동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 답 ] 예, 행위자 없는 행위지요(actorless action).24
[ 문 ] 만약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행위가 어떻게 진행될 수 있습니까? 행위 요가를 할 여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 답 ] 먼저 무엇이 행위인지, 그것이 누구의 행위인지, 그리고 누가 행위자인지를 이해하도록 합시다. 그것을 분석해 보고 그것의 진리를 탐구해 들어가면, 우리는 결국 진아로서 평안 속에 머무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 속에서도 행위들은 진행될 것입니다.
[ 문 ] 만약 제가 행위하지 않으면 어떻게 행위들이 진행되겠습니까?
[ 답 ] 누가 이 질문을 합니까? 진아입니까, 아니면 다른 누구입니까? 진아가 행위들에 관심이 있습니까?
[ 문 ] 아니, 진아는 아닙니다. 진아와 다른 어떤 누구입니다.
[ 답 ] 그렇다면 진아는 행위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며, 이러한 질문도 일어나지 않습니다.25
[ 문 ] 저는 행위 요가를 하고 싶습니다. 남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 답 ] 그대가 도우려고 하는 누가 있습니까? 남을 도우려고 하는 그 '나'는 누구입니까? 먼저 그 점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26
[ 문 ] 그것은 '진아를 깨달으라'는 말씀이군요. 저의 깨달음이 다른 사람들을 돕습니까?
[ 답 ] 예, 그것이 그대가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움을 받는 다른 사람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금 세공인이 금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보석들을 평가할 때 금만 보듯이, 깨달은 존재는 진아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할 때, 이름과 형상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육체 의식을 초월하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사라집니다. 깨달은 이는 세계를 자기와 다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 문 ] 성인聖人(saints)들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그들과 섞여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 답 ] 섞여 살 다른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진아가 유일한 실재입니다.27
진인은 진정한 자기(진아)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돕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최선의 길은 그 에고 없는 상태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세상을 돕고 싶은데, 그 에고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써는 그렇게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면, 그대 자신의 문제와 함께 세상의 모든 문제를 신에게 맡겨 버리십시오.28
[ 문 ] 고통받고 있는 세상을 도우려고 해서는 안됩니까?
[ 답 ] 그대를 창조한 힘이 이 세상도 창조했습니다. 그 힘이 그대를 돌볼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이 세상도 돌보겠지요. 만약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세상을 돌보는 것은 그의 일이지 그대의 일이 아닙니다.29
[ 문 ] 스와라지(swaraj)[정치적 독립]를 바라는 욕구는 올바른 것입니까?
[ 답 ] 그러한 욕구는 분명 이기利己(self-interest)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향한 실천 작업은 점차 시야를 넓혀주어, 개인이 국가 안에 합일되게 합니다. 이러한 개인성의 합일은 바람직하며, 거기에 따르는 업(karma)은 비이기적[無相](nishkama)입니다.
[ 문 ] (만약 그렇다면) 가령 스와라지가 오랜 투쟁과 끔직한 희생 끝에 얻어진다 해도, 그 사람은 그 결과에 대해 기뻐하고 그에 의해 고양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답 ] 그는 일을 해 나가는 동안에 자신을 더 높은 힘에 맡겨야 하며, 그 힘을 항상 명심하여 결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기분이 고양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 행위의 결과에 대해 상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그 업이 비이기적인 것이 됩니다.
주:
1) 자연진정조식은 호흡을 헤아리거나 호흡을 주시하는 자연호흡법을 가리킨다.
2) {마하 요가}(Maha Yoga)(원서 제9판), 118-9쪽 참조. 이러한 호흡주시의 수행을 오래 하면 호흡이 점점 느려지다가 마침내 멈추어 버리는데(진식眞息 상태), 그러면 마음이 고요해져서 삼매에 들기 쉽다고 한다.
3) 자성광명(aham sphurana, the effulgence of 'I')은 아상(aham-vritti)이 사라졌을 때 특히 심장에서 체험되는 '나-나'('I-I')의 빛이며, 진아의 드러남이다. 이는 끊어짐 없이 지속되는 진아의 체험이기도 하므로, 전일의식(akhandakara vritti, unbroken consciousness or experience)이라고도 한다. 자성광명의 출현은 진아 깨달음의 전단계라고 한다.
4) [역주] 질문자는 자세를 물은 듯한데, 슈리 라마나는 자리로써 답변한다. sukhasana는 보통 편한 가부좌인 반가부좌를 가리키지만, 여기서 슈리 라마나는 이 단어의 본래적 의미를 강조하여 그것을 진아안주와 같은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5)그러나 {기따}의 서두에 실제로 이런 말이 나와 있지는 않다. 이것은 {기따}의 전체적 취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