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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
문동환- 떠돌이 목자의 노래
1998년 1 월 중순 나와 내 아내에게 2월 25일에 있을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이 전달되었다. 이 초청장을 받은 나는 “기어이 대통령이 되고야 말았군!”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내 눈 앞에 그가 정계에서 떠나겠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방문했을 때의 장면이 보이는 듯 했다.
“얼마나 섭섭하십니까?”
“모두 내 부덕 때문이지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정계를 떠나시면 어떻게 합니까?”
“때가 이르면 내가 아니라도 민주화가 되겠지요. 나도 문 박사가 깨끗이 은퇴하듯이 은퇴해야지요.”
“저와 김 총재는 다르지요.
“다르기는 무엇이 달라. . . . ”
‘이렇게 담담한 심정으로 정계에서 은퇴하기로 결정을 했었는데 다시 정계로 돌아온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결정을 하셨을까?’ 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가 그렇게 경정한 데는 김영삼 대통령이 경제나 외교에 있어서 죽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 한 나머지 결정한 것이리라고 생각이 되었다. 김 영삼 대통령이 군의 하나회를 척결한 것은 잘했으니 경제와 외교, 특히 북과의 관계 개선에는 너무나 큰 실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에 있어서는 당시 확산되는 세계화 운동을 무분별하게 받아드려 한국 경제를 파탄 상태로 만들었었다. 은행들이 이자율이 4%나 되는 외자를 함부로 들여와 기업들에게 10%의 고리로 빌려주어 기업들이 도산하게 방치했었다. 그리자 외국 투자회사들이 서둘러서 자본을 회수하는 바람에 한국 경제는 소위 IMF 사태로 몰락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경제 문제에 밝은 김 선생이 이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으리라. 그리고 통일 문제에 있어서 북의 김일성 주석이 서거했을 때 이에 조의를 표시해야 하는데 조의를 표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북으로 가려는 사람들에게 방북을 허용하지 않아 북으로 하여금 크게 분노케 하여 풀리려고 했던 남과 북의 관계가 극악의 상태로 치닫게 되었다. 사실 김일성 주석과 김영삼 사이에 정상회담을 하기로 되었던 상태에서 말이다. 이것이야 말로 이해할 수 없는 실수이다. 본래 김대중 선생은 경제문제에 대하여 일가견을 가진 정치가이다. 그리고 정계에서 은퇴한 뒤 영국의 겜부리치 대학에 가서 독일의 통일 문제를 생각하면서 남과 북의 통일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기에 김영삼 대통령의 실정을 보면서 견딜 수가 없었으리라. 그래서 주저주저 하면서 정계에 돌아 왔었음에 틀림이 없으리라. 나는 김 선생이 헝클어진 한국 정치를 바로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귀국채비를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동료들에게서 들었더니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 출마하자 여당(하나라당)은 무슨 방법으로든지 정권을 재창출해야 하려고 또 다시 종전과 같은 흉계를 꾸몄다고 한다. 첫째로 김대중이 북과 내통한다는 소위 북풍 작전, 둘째로 그가 노태우에게서 20 억 원을 받았다는 풍문을 돌리고, 셋째로 고령이요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것, 넷째로 필요하면 암살이라도 한다는 흉계다. 그리고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 이회창을 그들의 후보로 선정을 했다.
그러나 그 흉계들이 다 적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풍 문제는 하도 오래 써먹어서 효과가 없었고 노태우가 20 억을 줬다는 것도 신빙성이 약했고 그가 나이 많다는 것은 다소 영향을 주었으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가정 안방에까지 파고 든 그의 연설이 크게 효과를 내어 ‘준비된 대통령’라는 구호가 주효를 했고 암살을 한다는 계획이란 마지막 까지 근소한 차이었기 때문에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김종필과 합작을 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종필, 노무헌, 박태준, 박철언 등의 지원 연설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회창의 아들이 병역을 회피했다는 것 역시 이회창에게 적지 않은 지장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게 도움이 된 것은 완전히 실패한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이었다.
서울에 도착했더니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을 받은 것은 나 외에도 그동안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해외에서 애쓴 동지들은 거의 다 초청이 되었었다. 미국의 경우 한국인으로 김동건, 동원모, 박찬웅, 이재현, 이하전, 안중식, 이승만등이 초청이 되었고 미국인으로 페어리스 하비, 죠지 오글, 짐 시놑, 폐기 빌링스, 퍁 패터손, 일본의 김인하 등등. 그 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초청이 되었었다.
취임식이 있은 2 월 25일은 날씨가 비교적 따뜻했다. 식장은 국회 의사당 앞의 넓은 광장이었다. 의사당 앞에 높은 대를 마련해 놓고 그 앞에는 곳곳에 확성기와 강대의 영상이 비치는 영상막이 설치되어 멀리 있는 사람들도 대 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있게 만들었다.
우리 내외는 외국 손님들이 안게 된 자리로 찾아갔다. 물론 거기에는 그 동안 만나보고 싶었던 많은 동지들이 모여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손을 잡는 우리들의 심정이란 정말 감격스러웠다.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는 김대중 선생이 오늘 한국의 대통령이 된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정계에서 은퇴했다고 섭섭해 했던 그가 군사정권의 후예들이 그렇게 반대하는 데도 말이다.
시간이 되자 높은 대 위에 특별히 초청이 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자 우리로 하여금 어처구니가 없다고 느껴지는 두 인물이 당당하게 나타나 앞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전두환과 노태우다. 노태우는 그래도 김대중과 정치를 같이 했었으나 전두환은 그 동안 죄인 취급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전직 대통령이라고 뻐젓이 등단하는 것이다. 정말 뻔뻔스럽기 한이 없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나타날 수 있은 것은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하면서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의 취임식에는 사양하고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도 한 가지 어처구니없는 일이 전게 되었다. 그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초청을 받았는데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한 동지인데. 여러 가지로 서로 언짢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취임식에 나타나야지. 그리고 새 대통령에게 빠톤을 넘겨주는 의식을 행하여야지 어찌 그럴 수가 있을 것인가? 정말 옹졸하기 그지 없다고 느껴졌다. 전두환과 그렇게 대조적이다.
시간이 되자 나팔 소리가 나고 김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일어나 청중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사회자의 개회사로 식이 진행 되었다. 식에는 군악대의 연주와 유명가수들의 노래 등으로 식의 분위기를 돋궈 주었다. 특히 남한의 8 도를 대표하는 젊은이들이 그 도의 특징을 살리는 분장을 하고 대 앞으로 지나가면서 새로 태어난 대통령에게 환성을 올리는 순서는 퍽 인상적이었다. 그런 뒤 국회의장 앞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손을 들어 선서를 한 뒤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15대 대통령 김대중이 국민들에게 취임연설을 했다.
그는 그를 지원해 준 국민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앞으로 5년 동안 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종으로 있는 성의를 다하겠다고 하면서 특히 세 가지 점을 강조했다. ‘첫째로 앞으로 철저한 정치적인 민주주의를 이룩할 것이다. 둘째로 모두가 동참할 수 있는 경제적인 민주주의를 이룩하겠다. 셋째로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이룩하겠다.’ 라고 힘을 주어 강조했다. 행사는 비교적 단순하게 끝났다. 한국의 경제 사정 등이 어려운 것을 생각한 것 같았다.
취임식이 끝난 뒤 우리는 준비된 버스를 타고 축하 파티 장으로 갔다. 가는 도중 내 옆에 앉은 김인하 목사와 ‘정치적인 민주화와 경제적인 민주화를 이룩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룩할 수 없는 약속이다.’ 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국제적인 경쟁이 심한 세계화 시대에 대 기업을 밀어주어야 하고 따라서 빈부 격차가 일어나게 마련인데 어떻게 경제적인 민주화를 이룩할 것인가. 그리고 오늘의 정치란 돈으로 조정이 되는 것인데 정치적인 민주화라는 것도 크게 반문할 수밖에 없지 않은 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말에는 큰 의미가 있다고 봤다. 그야 말로 평화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평화통일에 크게 기여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한국 역사에 기록될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세종회관에서 가지는 축하파티에 가 보았더니 커다란 홀에 수백을 헤아리는 축하객들이 모여들어 서로 인사를 하기에도 힘이 들었다. 거기에서 우연히 방 한 구석에 서 있는 최영근 전 의원을 반갑게 만났었다. 그는 내가 평민당에 있을 때 같이 부총재 역할을 했던 나와 퍽 가까운 분이다. 그 동안 병고로 신음을 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궁금하던 차에 반갑게 만났었다. 아직 완쾌하지는 않았으나 점차 나아간다고 했다.
얼마 있다가 새 대통령 내외가 타나나서 홀의 가운데를 지나가면서 온 축하객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너무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그냥 뒤에서 보기만 했다. 내일 외국에서 온 민주인사들이 청와대로 가서 그를 만나기로 되었기 때문에 지금 기어이 만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열시 쯤 우리는 해외 동지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갔더니 4,5 명의 안내원들이 우리를 일층에 있는 한 커다란 방으로 인도했다. 그 방에는 약 30 여개의 의자들이 반월형으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앉을 두 개의 의자가 있었다. 우리가 그 반월형으로 된 놓인 의자에 앉아 김 대통령 내외가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그리자 페어레스 하비 목사가 일어나서 축하의 말을 했다. 미리 그렇게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하비 목사는 본래 말솜씨가 좋은 분이기에 분위기에 맞게 환영의 말을 멋있게 했다. 그리자 김 대통령은 우리를 한번 둘러보시더니 다른 분은 할 말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리더니 나를 보고 문 목사도 한마디 하라는 것이다. 내가 당에 있을 때에도 자주 벼락 연설을 시키시더니 또 그러시는 것이었다. 나는 주저하다가 일어서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춥고 어두운 밤에서 고생을 했었다. 그리면서 새벽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이제 김 선생이 대통령이 됨으로 새벽이 동트는 것 같다. 김 선생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더 아두운 침침칠야를 걸어오셨다. 그리시면서 이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꿈꾸셨다. 이제 앞으로 그 꿈을 잘 가꾸시어 나라와 민족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시기 바란다. 우리도 위하여 기도하면서 할 수 있는 협조를 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새벽의 집의 기원이었다.
그리자 우리 앞에 간단한 다과가 제공이 되었다. 우리가 그것을 들고 있을 때 김 대통령은 앉으신 대로 그의 생각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그 동안 우리가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서 노력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다고 하면서 오늘의 그가 있는 것은 우리와 같은 새 내일을 갈망하는 자들의 피땀 때문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그 간절한 엄원을 잊지 않고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특히 북과의 관계 개선을 하여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여러분들의 기도와 후원이 계속되기를 바라다.‘
그 뒤 몇몇 분이 그들의 느낌을 이야기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약 한 시간 정도의 대화가 있은 뒤 우리는 앞으로 김 대통령을 통해서 한국 역사에 한 새로운 장이 전개되기를 바라면서 버스를 타고 청와대를 나왔다.
글쓴이: 문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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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뭉클하고 감회가 새롭습니다. 눈물이 울꺽 쏟아 질 것같은 마음이 저 밑으로부터 나오고 ...
영원한, 우리 민족의 지도자... 선생님... 그립습니다.
문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