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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증 언 자 : 조아라(여)
생년월일 : 1912. (당시나이 70세)
직 업 : YWCA 회장 (현재 YWCA 회장)
조사일시 : 1989.6
개 요
5월 22일부터 수습위원으로 활동한 조아라씨의 증언이다.
신식교육을 받고 결혼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도 나주에서도 더 들어가는 농촌으로 해안지대와 3, 4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아주 남단이었어. 1912년에 났으니까 올해 일흔아홉, 거의 여든이 됐구만.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가 기독교를 믿어 나는 처음부터 기독교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셈이지. 세례도 젖세례를 받았구.
우리 집안은 한국기독교에서도 초기라 할 수 있는 1900년대 초부터 기독교를 믿었어.
나는 교회에 붙어 있는 사설학교에서 아홉 살, 열 살 무렵까지 배웠지. 내가 열한 살 되던 해에 광주에 있는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했어.
1927년 3월에 고등과에 진학하여 1931년에 4년 졸업을 했지. 졸업 후에는 선교사의 소개로 학교 선생이 되었는데 그것두 1년 10개월 만에 끝났어. 1933년 1월에 소위 '은지환사건'으로 투옥된 거야. 1929년 광주학생사건 때에 지하비밀결사조직이 여럿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 '백인청년단'이라는 조직에 내가 가담했었거든. 그것은 비밀조직이므로 명단도 없고 단원끼리도 서로 몰라. 다만 은반지로써 단원임을 암시적으로 알 뿐이지. 그런데 몇 년이 지나서 우연히 친구의 일기장에서 단서가 잡혀 그 조직이 밝혀진거야. 조직할 때 내가 글 같은 것을 썼다고 주모자로 찍혔고, 그 후 18명이 들어와서 한 달간 고생을 했지. 조사과정에서 단원들이 그 후 시집가고 별활동이 없으니까 기소건이 불충분해서 대개 기소유예로 풀려났지. 최종 조사단계에서 나하고 한 사람만 들어갔다 나왔지. 그 후 나는 학교 선생 자격이 박탈되었음은 물론이고 요시찰 인물로 찍혀서 해방되는 날까지 무슨 일만 있으면 예비검속이라고 해서 꼼짝 못 하고 갇혀지내는 신세가 됐어.
결혼은 1935년에 스물네 살 먹어서 했지. 상대는 교회에서 같이 찬양대도 하고 주일학교 운영도 함께 하던 친구였어. 그는 제2고보(지금의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립학교 선생을 했었는데, 나와 남편이 만나게 된 거야. 결혼을 한 후 광주 금동교회에 있는 금동유치원에서 나는 수보모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일년도 못 돼서 또 그만두게 되는 사건이 터졌지. 1935년이 넘으면서부터는 일제의 발악이 더 심해졌거든. 교회의 강단에도 일장기를 달고 동방요배를 강요하고 했어.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
1936-37년은 신사참배가 최고로 강압되던 해로 기독교학교에도 신사참배를 하라고 위협과 압력이 대단했지. 수피아여고에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민족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그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어.
"신사참배는 못 하요" 하고 버텼지. 결국 신사참배냐 폐교냐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폐교를 택하고, 1937년 2월 자진폐쇄했어. 그 사건으로 해서 나는 다시 잡혀간 거지. 그때는 첫아들 학인이가 돌이 겨우 지난 때로 나는 애를 업고 들어가서 한 달을 살았어. 젖통이 애기밥통이니 데리고 갈 수밖에. 그때 아기는 감기가 들려 폐렴이 되었는데 약병 들려서 데리고 들어갔어. 나는 입은 채로 끌려가서 담요 한 장으로 그 추운 겨울을 독감방 속에서 보냈어. 내가 출옥하고 나니까 남편이 다음날로 평양에 가도록 되어 있다고 하는 거야. 반대할 명분이 있어야지, 그가 간다는데. 유치원 선생도 못해먹고 살기 힘드니 보냈지.
친정에서 무료하게 일년을 보내다 미국에 있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한 달에 30원씩의 도움을 받고 평양 여신학원에 입학했어. 평양여자신학원에 다니면서부터는 어떤 장로네 사랑채를 얻어서 살게 되었어. 그때 여전도사들이 많이 도와주어 아이를 맡기고 휴식시간 15분을 이용해 젖을 먹이고 수업을 받으러 뛰어갔어.
1938년 장로교 연차 총회의 주요안건은 신사참배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결정하는 것이었어. 당시 장로교내에는 찬반이 갈라졌었는데 목숨 걸고 반대하자는 파와 타협을 하고 교회를 유지하자는 파, 둘로 나뉘었어. 하지만 장로교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야 말았어. 그뿐 아니라 장로교가 헌금을 거두어 전투기를 헌납하기로까지 결정이 났어. 미국하고 싸워서 이기라고 말야. 이렇게 결정이 나자 남편은 이런 썩은 학교는 안 다닌다고 총회신학교를 자퇴하고는 나보고 당장 짐을 싸라고 하는 거야. 그때만 해도 여자가 남자 따가가던 형편이라 따라가기로 하고 짐을 꾸렸어. 광주역에 내리니 친정에서 사람을 보냈더군. 일경들이 우리 집을 둘러쌌으니 집으로 오지 말라는 거여. 그 길로 남편은 다른 곳으로 가 버렸지.
결혼생활 3년 10개월에 남편과 사별
나는 임신 6개월의 몸으로 친정으로 다시 돌아왔어. 그 후로 남편은 소식이 없었어. 그러다가 그해 11월 말경에 밤중에 집을 찾아 들어왔는데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들어왔대. 방에 숨겨놓고 한약을 지어 먹여도 효험이 없어, 입이 타고 있더라구. 미국병원으로 옮겨보니 진성 장질부사였어.
입원한 지 얼마 안 되어 26세에 영원히 가버렸어. 결혼생활 3년 10개월 만에, 그것도 별거기간까지 다 합쳐서 말여.
1939년 2월 17일에 작은 아이를 낳았어. 첫 국밥을 먹는데 소태같이 쓴 게 영 먹히질 않아서 못 먹었지. 그냥 눈물만 쏟아지는데, 밥을 차려주는 부모님께 죄송해서 몇 술 뜨는 척하다가 말고 그랬지.
내가 그렇게 되니까 수피아학교 교장이 나한테 일자리를 만들어줬어. 오전에는 편지도 써주는 비서 노릇을 하고 피아노도 치고 하면서 자기 집에 들락거리라는 거여. 친정에 사니까 먹고는 살지만, 그때 돈으로 15원을 줄 테니 그 일을 하라는데 나를 위로하기 위해 일부러 만든 자리지.
일본놈들은 내가 미국 선교사 집에 다니니까 나를 친미파 스파이로 알아가지고 날 잡으러 왔어.
새벽 4시에 독방으로 갖다 내버리드라고, 나는 그때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었어. 아이는 죽었을 테니 나도 따라가마 하고 죽기로 결단을 한 것이야. 내 죄목은 모르지만, 하여간에 항복 안 하고 죽을 것이다 맘을 먹었어. 감옥에 갇혀서 젖이 불어터질라 하니 아무것도 안 먹고 닷새 동안 지냈어.
"하나님 빨리 데려가시오."
하고 기도만 했어. 그때가 내 일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여. 우유가 있어,뭐가 있어. 한참 홍역으로 빨갛던 애를 놓고 왔으니....
그렇게 3주나 지나서 한국 순사부장이 왔어. 죄명은 안 가르쳐주고 인정심문만 하데. 일주일 후에 그가 오더니 나가자고 해. 낭자머리는 흩어지고 옷은 거지꼴을 해가지고 광주경찰서 앞까지 왔어. 거기서 집으로 가라고 하는 거야. 마땅히 잡아둘 죄목이 없으니까 더 잡아두기가 어려웠겠지.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나는 전도사하고 뉘 집에 심방을 갔다가 항복방송을 들었어. 라디오가 너무 끓어서 어떻게나 안 들리는지... 그래도 함께 있던 교회 여성들이 해방의 기쁨에 젖어 소리들을 지르고 감격해 울고 했어.
해방이 되고 8월 16일 저녁에 여성들이 금동교회에 모였어. 교회당이 아니고야 그때 뭐이나 있었겠어? 여성단체를 만든다고 모인 것이지. 그때 내 나이가 서른 세 살이었는데, 나를 따라다니던 형사가 없어져서 처음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활동을 하게 된 것이지. 그 동안은 순사부장이 가면 간다고 인사를 오고 새 놈이 오면 왔다고 인사를 해서 참말로 십리도 자유가 없었으니까. 참 징글징글 해.
1950년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는 전쟁고아가 많이 생겨났어. 특히 인민공화국 시절에는 면장, 경찰 가족의 고아가 많았지. 그런 전쟁고아를 위해 사업을 벌인 것이 지금의 성빈여사야. 1951년부터 시작해서 정식인가가 난 것은 1952년인데, 처음 목적은 중학교 들어갈 나이의 여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하고 거기서 가능한 학교교육을 시키려는 거였어.
그런데 동생을 데리고 오는 애들이 자꾸 생기는 거야. 지기들끼리라도 헤어지지 않게 하려고 같이 받아들이다 보니 애기들도 많아져서 결국 육아원이 되었지.
전쟁 때는 최고 2백20명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1백20명쯤 돼.
미공보원에 항의하고 수습 위해 나서
5월 18일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에서 학생들이 공수에게 쫓겨 달아나는 것을 봤어. 다음날 나는 YWCA 총무와 함께 서울에 갔지. 2살 때 이민간 총무님이 한국에서 활동하다 미국으로 아주 가기로 되었거든. 1972년에 한국 YWCA재단 총무로 있던 공로자인데, 이분이 오후 4시 비행기로 출국한다고 해서 배웅을 간 거야.
점심을 먹고 난 직후 광주에서 전화가 왔어. 공수들이 YWCA 건물로 들어와서 때려 부수고 직원들을 두들겨패서 머리가 찢어지고 난리가 났다는 거야. 어른들이 모두 서울간 사이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직원들이 얼마나 놀랐겠어? 아네스트 총무님께 양해를 구해 비행장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곧바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갔지.
광주에 있는 자식, 친척이 걱정된 사람들이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 모여들어 그곳은 굉장히 붐볐어. 우리는 5시 50분 차표를 끊었어. 사람들이 5시 50분 차를 타면 광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통행금지에 걸린다고 만류했어. 하는수없이 차표를 물리고 다음날(20일) 일찍 출발하여 오전 11시 조금 넘어서 광주 공설운동장 앞에 내렸지.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들어갈 수 없다는 거야. 우리 일행은 택시를 잡아타고 YWCA로 갔어. YWCA에 난입하여 황일봉을 구타한 일이며, 건너편 전남고시학원에 들어가 학원생을 구타,연행한 사실을 전해 듣고 그들의 만행에 치가 떨려 미공보원으로 한달음에 쫓아갔어. 책임자를 만나 한참을 대들었지.
"이것이 지금 무슨 일이오. 당신들은 민주주의하고 인권을 존중한다면서 왜 죄없는 시민들을 죽이는거야? 한미연합사령부가 군작전지휘권을 갖고 있으면서 이렇게 군인을 투입해 양민을 학살하다니."
"미안하게 되었소."
공보원이 대답을 못 하고 어물거리자, 계속 항의하다 나중에는 정세파악을 잘 하고 올바른 정치를 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꼭 벌을 받는다고 위협조로 퍼붓고 나는 그곳을 나와 집으로 갔어.
계속 전화로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 시내 상황을 체크하느라 밤잠을 설쳤지.
21일 오후에 집을 나왔어. 모든 시내버스와 택시는 끊어지고 대신 지나다니는 차에는 총을 든 청년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어. 또 중, 고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차에 타고 다니며 "광주시민 여러분, 모두 나오셔서 헌혈을 합시다. 헌혈을 합시다. 지금 여러분의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헌혈을 합시다."고 외쳐대더군. 기독병원을 방문하기 위해 길을 나서 부근에 있던 장로님 댁으로 갔는데 "지금 환자들이 많아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가보지 못하고 나도 헌혈을 권유하고 다니다 저녁이 돼서 집으로 갔어.
도청에서 수습대책 논의
이튿날(22일) 아침 YWCA 사무실로 출근해 보니 홍남순 변호사, YMCA 이사들과 목사님들이 나오셔서 천주교와 손을 잡고 신.구교가 함께 현사태를 해결하자고 입을 모았어. 큰 문제가 생기면 신.구교가 공동대처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사회선교위원회'가 있는데, 남동성당 김성용 신부가 회장이고 나와 이성학 장로가 부회장이었지. 우리는 종교계에서 문제해결을 하기 위해 남동성당으로 김성용 신부를 찾아갔어. 김신부님도 무척 걱정을 하고 있더군. 나는 우리가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도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앞으로 진행될 상황을 알아보자고 제의했어.
도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도지사는 없고 부지사는 현재 학생들과 얘기중이라고 하드구만. 남동성당에 있던 분들과 함께 도청으로 갔어. 부지사를 만나보고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 보자는 식이었지.
도청 정문에서 청년들이 길을 막고 진입을 제지했으나 "우리는 재야인사들인데 빨리 안으로 들어가 부지사와 할 얘기가 있다"고 하자 들여보내주더군.
부지사실에 들어가 보니 정시채 부지사를 중심으로 이종기 변호사, 침례교 장목사, 조선대 신교수 등의 몇몇 사람이 모여 수습대책회의를 하고 있었어. 그들은 이종기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계엄사와 협상할 7개항의 요구사항을 작성했지.
1. 사태수습 전에 군 투입하지 말라.
2.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3. 군의 과잉진압 인정하라.
4. 사후보복 금지.
5. 책임면제.
6. 사망자 보상.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를 하겠다.
계엄사에 가서 협상에 응할 대표를 뽑는데 이종기 변호사, 장목사, 장휴동 등이 대표로 가겠다고 해서 그들을 보내고 그들이 다녀온 후 보고를 하기로 했지. 시민들이 도청 앞 분수대 주변에 가득 모여 있었기 때문에 수습대표들이 계엄사에 다녀온 결과를 가지고 보고대회를 하기로 했어.
우리는 부지사를 만나러 상황실로 갔어. 부지사는 와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드구만. 곧바로 부지사를 향해 질문을 했지.
"도대체 현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작정입니까? 그 답변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확실한 대안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해결방법을 물어오대.
"시민에게 총이 있으면 아마 계엄군들이 또다시 광주에 진입할 것입니다. 재진입의 구실을 없애기 위해 내가 최선을 다해 총기를 회수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몇 정의 총이 시민 수중에 있습니까?"
"2천5백여 정이 나왔습니다."
"내가 어머니들에게 호소해서 무기회수에 앞장설 테니 계엄군의 재진입으로 인한 피해가 없도록 각별이 신경써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 방법이 대단이 좋겠습니다."
나는 정말 광주시민의 어머니 된 입장으로 생각했을 때 이제 더 이상의 피해는 절대없어야 된다는 결론을 얻었어. 그래서 부지사와 면담 끝에 무기회수에 관한 얘기를 한 게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부지사에게 추가로 이런 요구를 했어.
'잡혀간 시민, 학생을 석방하고 사망자의 가족에게 장례비를 지급하고 관에서 장례대책을 세워라'는 요지의 요구사항을 전달했지.
우리는 앞으로의 사태를 수습할 목적으로 간단한 회의를 한 후 부상자, 사망자 숫자 파악을 위해 종합병원으로 갔어.
병원은 완전히 난리가 났어. 영안실은 가득 차서 시체를 병원 밖 땅바닥에 가마니를 덮어놓았고, 자식이나 친척이 들어오지 않자 찾아나선 아낙네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시체를 뒤적이고 다녔지. 또 부상당하거나 죽은 자식이라도 발견한 엄마들은 그자리에 엎어져 통곡을 하는데 가슴이 아파서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었어.
우리는 전남대 병원장을 찾아가 부상자, 사망자 숫자를 물었지. 그는 "말할 수 없다"고 일축하고는 더 이상 답변을 하지 않았어. 그래서 서무과장을 찾아갔지.
서무과장도 자기는 그런 일은 전혀 모른다면서 계속 부인하더군. 병실에 들어가려고 갔더니 이거는 발디딜 틈도 없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부상자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어. 기독병원, 적십자병원 등 그 같은 상황은 어디나 마찬가지였지 .
우리는 도청으로 가서 계엄사에 갔던 대표들을 기다렸어. 4시경에 그들이 돌아왔는데 우리한테는 한마디 말도 없이 곧바로 도청 분수대 앞에서 협상과정을 보고하드만. 협상대표 장휴동 씨가 단상에 올라가 이런저런 말을 했다고 하자, 흥분한 시민들이 "사기치지 마라. 현상황을 정치적으로 악이용 하지 마라"며 그를 끌어 내리는 일이 발생했지. 그날 밤 7시경 도청에서 나올 때까지도 계엄사에 대표로 갔다 왔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일언반구도 없었어.
23일 아침 남동성당에서 종교계 신.구파 임원과 교수,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한 재야인사들만 모이기로 했어. 바로 그 시각에 도청에서는 상공회의소 회원, 한국부인회 등 친여세력, 친여단체를 중심으로 한 몇몇 사람들이 자칭 독립투사 최한영을 모시고 정식으로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려고 했나봐. 그들이 먼저 도청에 모여 우리를 급히 오라고 하드구만. 남동성당에 있던 우리가 부지사실로 갔어. 그들은 최한영을 대표로 하여 회의를 진행했지. 가만히 들어보니까 "현사태가 시민들의 잘못으로 발생했다"고 몰아붙이는 경향이 짙자 화가치민 내가 한마디 했어.
"정식 조직의 대표였든 아니든 어제 계엄사에 대표를 보냈는데 결과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으니 그 보고를 듣고 어제 협상된 사항은 빼고 해결되지 않는 것을 재고하려면 먼저 보고대회를 듣고 회의를 진행합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사람 말을 못 믿소?"
최한영 영감이 기독교인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드구만. 그러자 YWCA총무로 있던 김천배씨가 화가 나서 대꾸했지.
"영감님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내뱉으요?"
공기는 금새 험악해지고 말았어. 그때 조신머리없던 젊은 목사가 나서대.
"지금 금동 제일교회에서 개신교 목사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는데, 개신교 목사 중에서 가장 존경 받을 만한 한완석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을 모셔다 함께 회의를 합시다."
그가 목사를 데리려 간 동안 우리는 전날 계엄사와의 협상보고도 듣지 못한 채 한목사를 기다리고 있었어. 어제 대표로 갔던 사람들은 계엄분소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고만 말하니까 누가 믿겠어. 장목사와 한완석 목사(교계에서도 평판이 나빴던 사람)가 도청으로 오자 교수, 신부님, 한완석 목사 외 2명을 대표로 뽑아 모두 5명이 계엄분소에 갔지.
어제 계엄사에 갔던 사람들이 보고를 전혀하지 않으니 수습위원들이 가서 몇 가지 사항이라도 해결되면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정부측에 전단을 작성해서 뿌리고, 또 방송을 통해서 "수습대책위원장과 계엄사령부 대표가 이러이러한 합의를 보았으니 시민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태해결에 공동 노력하자"라는 발표를 요구하라고 했지.
최규하 대통령은 22일 계엄사에 와서 "시민들은 흥분하지 마라"면서 모든 잘못을 시민한테 돌리고 그들은 전혀 잘못이 없다고 했지 않았어? 그러자 시민들이 더욱 흥분하고 반감을 표현했잖아. 대통령이 계엄사로 갈 것이 아니라 도청으로 와서 수습위원들과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했어야 옳은 일이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우리 편에서는 진정으로 수습하려고 나섰는데, 계엄사측은 답변을 차일피일 미루는 등 아주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어.
25일 오후 도청에 있던 학생들이 수습위원회가 쓰던 사무실로 와서 큰소리로 호통쳤지.
"학생들이 얼굴을 모르는 교수가 무슨 교수냐? 그리고 과거 유신정권 때 빌붙어 살았던 종교인이 무슨 사태수습을 한답시고 얼쩡거려. 모두 나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어."
자칭 조선대 신교수, 하나님교회 김재회 목사, 장목사를 향해 고함을 치자, 그들은 얼굴이 빨갛게 변해서 나가버렸어. 그때도 분위기가 몹시 살벌했거든. 그 후 재야 인권단체 변호사, 목사, 신부, 교수 등이 계속해서 올바른 수습방안을 찾아 더 큰 희생을 당하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어.
그날 밤 7시쯤 돼서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이 울먹이면서 들어왔어.
"데모를 시작할 때부터 집에도 못 가고 있어요. 도청 구내식당에 있는 TNT가 폭발하면 이리역 참사 몇십 배의 피해가 날 텐데 어떻게 학생들이 지키겠습니까. 어른들이 오늘 밤 같이 있어주세요."
라고 애원하대. 재야인사들이 그날밤 함께 있겠다고 했어.
그때 수습위원 중에 여자는 나하고 이애신 총무밖에 없었어. 여자들이 있으면 불편해 할까봐 가겠다고 나섰지. 양서조합 책임자 장두석씨가 따라 나와 배가 고파 죽겠으니 먹을 것을 보내달라더군.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YWCA로 갔어. 내가 8천 원, 총무가 4천 원을 보태서 대자보를 쓰고 있던 정현애씨에게 빵을 사서 도청으로 보내라고 부탁하고 YWCA를 나왔지. 그때가 8시쯤 됐을 거야. 시내는 조용했어. 이애신 총무와 집으로 가기 위해 전남대 의대 앞을 지나는데 한 청년이 다가왔어.
"혹시 조아라 씨 아니세요?"
"맞는데 왜 그러시오?"
"평소에 아는 분이 지나가길래 불렀습니다."
"댁은 왜 여기 있소?"
"내 동생이 4일째 소식도 없이 들어오지 않아 병원 시체실을 돌아다니다 집에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지금 집에 가는 길이요."
"밤길이 위험하니 제가 모셔다드릴께요."
괜찮다고 한사코 만류해도 학동까지 동행해주고 그 청년은 오던 길을 돌아갔어 .
그날 밤 집에서 자는데 26일 새벽 4시에 현 CBS 보도부장이 전화를 했어. 계엄군이 진흥원을 넘어 진입해 오고 있으니 빨리 피하라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어.
전화를 끊고 급히 도청으로 전화를 걸었어.
"계엄군이 진흥원으로 진입해 오고 있다는데 알고 있소?"
"네, 알고 있습니다."
"수습위원들은 지금 피하고 있어요?"
"계엄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방금 현장으로 갔습니다."
아침을 먹고 YWCA로 가서 10시까지 기다려도 수습위원들이 돌아오지 않았어.
1시가 지나서야 NCC 위원장 이성학 장로가 기가 죽어서 들어왔어. 그를 붙잡고 어떻게 되었냐고 다그치자 아무리 설득해도 계엄군이 쳐들어오겠다고 했다면서 힘없이 말했어. 빨리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할 텐데, 수습위원회의 대변인이던 김성용 신부가 오지 않았어. 나중에 알고 보니 김성용 신부는 광주상황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광주를 탈출해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러 서울로 갔다는 거야. 그러느라고 그분은 도청으로 오지 못했던 게지.
이총무와 함께 도청으로 갔어. 수습위원과 학생들이 시장과 장례문제로 면담을 하고 있드만. 도지사가 회의를 주관했지. 숭의실고 대표 김신근과 나, 그리고 몇 명이 더 있었어.
학생들이 도민장을 주장했는데 그 입장을 들어보니 수긍이 가드라고. 광주시민 뿐만 아니라 목포, 강진, 해남 등 도민들이 사망했으니 도민장으로 치뤄야 된다는 거야. 나도 학생들 의견에 따랐어. 도지사가 최종적으로 도민장을 승락했지.
그런데 장지를 결정하는데 애로가 많았어. 학생들은 앞으로 성역이 될 만한 그런 장소를 시에서 내놓으라는 거였어. 시장은 그것은 불가항력의 일이니 양보하라고 했어. 썩어가는 시신을 이대로 방치하면 되겠느냐며 아직 적당한 장지도 없는데 언제 장례를 치루겠느냐는 거야. 대신 망월동 묘지를 내줄테니 그곳을 장지로 정하자면서 울면서 호소했어. 재야인사와 학생들이 그 말에 수긍하고 망월 묘지를 장지로 결정했어. 장례일은 29일로 잡았지. 회의가 끝나자 시장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으면서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으니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대. 구용상 시장도 날마다 그 참혹했던 꼴을 보면서 못 죽어서 사는 듯한 인상이드라고. 이미 결정된 일이니 그렇게 하자며 오히려 내가 위로했지.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수습위원회에 알리려고 내려왔어. 그런데 학생수습위원회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는거야. 정상용, 김종배는 이 참혹하게 죽은 시신을 놔두고 절대 도청을 나가지 않겠다고 하고, 김창길은 5시 이후에는 나가겠다고 서로 우기고 난리를 치는 거야. 그 꼴을 보니 속이 뒤집혀서 "비극 속에 비극을 보는 것 같다. 모두 힘을 합쳐 싸워도 모자라는 판에 이게 무슨 추태냐. 나는 이런 꼴을 못 보겠으니 내가 나가겠다"고 호통을 쳤어. 김창길이는 끝내 도청을 나갔어. 그가 나가자 김창길 추종자들도 모두 나가더군.
조비오 신부, 오병문 교수, 장목사, 이종기 변호사 등 몇명이 남아 있는데, 정상용과 김종배가 "우리는 모두 죽고 단 한 사람이 남더라도 끝까지 여기서 일하겠습니다. 우리는 못나갑니다. 우리와 함께 최후까지 일을 합시다"라고 울면서 말했어.
그때가 7시쯤 되었을 때야. 8시경 내가 집에 간다고 하자 조비오 신부, 오병문 교수가 따라 나와 YWCA까지 데려다줬어. 그날밤도 이총무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갔어.
27일 새벽 총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어. 그 전날 수습위원들이 찾아가 절대 진입하지 말라고 항의했는데도 기어이 쳐들어온 거야. 천지가 진동하는 총소리를 들으니 입에 침이 말랐어. 도청에 있던 사람이 모두 죽겠다 싶으니 속이 타서 안절부절 못하겠는 거야.
27일 아침 YWCA로 갔어. YWCA 문 앞에 탱크를 세워놓고 계엄군이 진을 치고 있 어 들어가지 못했는데, 밖에서 보니까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두 박살났고 총구멍이 온 건물에 콩알처럼 뚫려 있었어. 그것을 보고 YWCA에 있던 사람은 죄다 죽었을 것 같아 애가 타서 바라보고 있는데 YWCA에서 근무하던 아이가 달려오더니 YWCA 신협에 근무하던 박용준이가 죽고 그애하고 제일 친하던 윤상원이도 죽었다는 거야.
학생수습위원회의 기획실장으로 있던 영철이는 어떻게 됐냐고 하자 그것은 모른다고 했어. 그 불쌍한 용준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어버렸어. 애미가 나빠서 핏덩이를 낳아서 버린 애야. 성이 박가라는 것만 적어서 버린 것을 내가 이사장으로 있던 영신원에 들어와 8, 9년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애가 죽다니. 나는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어. YWCA 출입구에 있는 탱크 때문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갔어.
그 이튿날(28일) 11시에 YWCA 앞 약국에서 전화가 왔어. 방금 탱크도 치워지고 시신도 모두 치웠다는 거야. 이총무와 같이 YWCA로 갔어. 문에 들어서면서 보니 현관 유리부터 시작해 4층까지 유리창은 전부 깨지고, 층계에는 총 맞은 시체를 질질 끌고 내려온 핏자국이 역력해. 그것을 보고 정신을 잃고 주저앉아버렸지.
선교사들이 잡아준 차를 타고 집으로 갔어. 파출부한테 연락해서 바닥에 깔린 유리, 핏자국, 부서진 책상 등을 깨끗이 치우라고 하고 자리에 누워버렸지.
보안대로 연행
29일 새벽 6시도 못 돼서 5, 6명의 형사가 집으로 쳐들어왔어.
"내가 뭔 죄가 있어 잡으러 와. 느그들이 저지른 과오는 생각지도 않고, 우리는 느그들이 지른 불을 끄러 간 것이야, 내가 무슨 죄가 있어." 나는 핸드백 하나만 들고 당당하게 그들을 따라나섰어.
원래 내가 일제시대 때부터 자주 들락거려 별로 망설여지지 않은 거야. '가서 조사받고 죄가 없으면 나오는 거지 뭐' 하는 생각이었어.
"이애신 총무집에 전화 좀 걸어주세요."
"무슨 일인데 그래?"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아서 그래요."
"그 사람한테는 잘못이 없어."
"수습위에서 활동한 것 때문에 그러니 전화 좀 해줘요."
"알았어. 잘잘못은 가보면 알게 될 테니까."
내가 전화를 걸었지.
"경찰이 와서 자네 집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나한테 전화하라고 하네."
"알았어요. 문 열어드릴께요."
"문 열어준다고 하니 가보시오."
그러자 3명은 밖에 세워둔 차에 나를 태우고, 3명은 이총무를 데리러 가드구만 .
그들은 나를 광주경찰서로 데리고 가더니 다시 상무대 헌병대에 실어다주고 경찰들은 그냥 갔어. 헌병대에서 뙤약볕에 한참을 세워두고 있다가 오후가 돼서야 보안대로 옮기더군. 보안대 지하실로 끌고 가서 독방에 가두고 바로 옆방에 이총무를 넣었어. 그 옆방에는 홍변호사가 있었는데, 고문을 하는지 비명소리, 고함소리가 들리자 무척 고통스러웠어. 놈들은 바로 그 점을 노린 것 같아.
나를 수사하는 첫마디가 김대중과 관련된 것이야.
"김대중 언제부터 알았어."
"나 그 사람 알아요. 고향사람이기도 하지만 그 부인이 중앙연합회 총무로 있을 때 나는 광주 YWCA총무로 활동하면서 알게 된 동지요. 그이의 남편으로써 알게 된 사람이요."
그들은 조사할 때마다 세 김씨 중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을 거냐고 나한테 물었어. 군사재판 때도 묻더군.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수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했어.
보름간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은 뒤 광산군경찰서로 옮겨졌어.
이애신 총무가 이전부터 고혈압이 있어 항상 약병을 가지고 다녔는데 15일간 보안대 시멘트 바닥에서 생활했으니 몸이 온전했겠어. 왼쪽 몸이 붓고 마비증세를 일으키더니 안면근육까지 실룩거리는 거야. 고혈압은 한번 쓰러지면 영영 그만인데 그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애가 탔어.
하루는 유치장으로 서장이 들어오자 그를 붙잡고 이총무 병세를 이야기하면서 간곡히 부탁했어.
"여기 있다가 혹시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책임질랍니까? 이총무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고혈압으로 돌아가셨고, 오빠도 고혈압으로 쓰러져 하반신 마비로 살고 있어요. 고혈압은 한번 쓰러지면 끝이에요."
그러니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지. 다행히 서장이 편의를 봐줘서 헌병이 그곳에 와서 총무를 통합병원으로 옮겨갔어.
나 역시 늙은 몸으로 보름 동안 아무것도 깔지 않은 채 맨바닥에 누워지내고, 기합받고 했더니 신경통이 생겼어. 송정리로 가서도 마룻바닥에서 3, 4개월을 앉아 있었더니 일어나지를 못 해, 밤이면 변소를 가야 하는데 일어날 수가 없어서 벽을 잡고 일어나려니까 너무 힘들어. 나중에는 내가 일어날 기미만 보이면 애들이 먼저 일어나서 '화장실 가시렵니까?'하면서 일으켜주고, 화장실까지 데려다줬어. 나는 팔, 다리 등의 좌골신경통으로 관절을 전부 못 쓰겠어. 그래도 편한 곳으로 옮겨갈 수가 없었지. 전춘심이 재판을 받아 15년(?)을 구형받고 나오면서 과장한테 "조회장님이 신경통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한다"고 했던 모양이야. 그 덕분에 나도 통합병원으로 가게 되었지. 나와 이총무는 한 달 동안 통합병원에서 보냈어. 한 달간 1심 공판을 8, 9번에 걸쳐 받으러 다녔으니까, 정말 지긋지긋해.
11월에 재판을 받았는데 이총무는 구형 3년, 실형 3년을 선고받고, 나는 내란음모죄로 구형 6년, 실형 3년을 선고받고 교도소로 옮긴 지 5일 만에 70세 이상 고령자(원래 70세 이상은 교도소에 있을 수 없음)라는 이유로 석방되었어. 형면제인지 집행유예인지 모르겠구먼.
삼선개헌 반대 투쟁
내가 민주화에 대한 목소리를 외치게 된 것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였지.
헌법에 따라 두 번까지 대통령을 한 것은 그래도 이해를 해. 그런데 삼선개헌을 한다는 말을 듣고 약속을 어기는 일국의 대통령은 믿을 가치가 전혀 없다고 생각 했지. 개인끼리의 사소한 약속도 꼭 지켜야 하는데 가장 모범적이고 정의로워야 할 대통령이 공정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헌법을 고쳐서 다시 대통령하려는 것은 도둑놈 심보인 게야.
나는 그때부터 앞에 나서 반대했어. 삼선개헌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 확고부동한 내 입장이었어. 나는 신문사 인터뷰에 응해서 내 입장은 삼선개헌은 절대반대라 고 표명했지.
그후로 나를 좋게 보지 않고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계속 감시를 해. 그들은 나를 쫓아다니면서 대통령을 지지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했어. 내가 한번 마음 먹었는데 굽힐 이유가 없었던 거야.
"대통령이 유세하러 오는데 어차피 유세장에 나오지 않을 거면 출장이나 갔다 오십시오."
정보과 형사들이 침대권을 사들고 나를 찾아왔어. 그때 침대권이 막 나와서 무척 귀했던 때야. 그 꼴을 대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어.
"당신들은 더럽고 추접해. 침대권 때문에 내가 서울갈 이유도 없고, 설령 서울에 간다고 해도 당신들이 사준 침대권을 사용하지 않아.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그것을 받으면 그 순간부터 당신들에게 말려들게 돼."
나는 침대권을 던져버렸지. 그들이 계속 침대권을 받으라고 요구했어.
"이왕 산 것이니까 그 침대권을 내가 돈 주고 사겠소."
마침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그 표를 사서 서울을 갔어. 서울에서 일을 끝마치고 밤차로 광주에 와서 김대중씨의 연설을 들으려고 아침에 공설운동장으로 갔어.
공설운동장 주변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더라고. 이희호 여사와 이태영 여사는 나주 강연이 끝난 후 다른 지역을 들렸다 오기로 했대. 야당 광주당원들이 조아라 여사가 왔다면서 굉장히 친절하게 대해줬어. 억지로 단상으로 올라가라고 해서 나중에 도착한 이희호 여사와 나란이 앉게 되었어.
김대중 씨 유세장에 나가 단상에 앉았다는 이유로 악랄한 정치보복을 당하게 됐어. 성빈여사는 정부가 지원해 주는 돈과 YWCA에서 보조하여 운영하는 사회사업단체인데 저들이 이것을 털기로 한 거야. 그걸 조사해서 먼지가 나면 나를 묶어두려고 했던 거지. 도경, 검찰, 법원, 시청 등이 연합하여 조사반을 편성하고 경감과 형사 4명이 수사를 담당했어. 내가 그때 YWCA총무로 있을 때였지. "아이들 앞에서 꼴사납게 수사받을 수 없다. 나를 꼭 수사하려거든 YWCA로 와서 해라"고 했어. 일주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심문을 하는 거야. 계속해서 수사관이 붙어 있는데 우리만 밥 먹을 수 없어 밥 먹여가면서 수사를 받았어.
"너희들이 때를 잘못 잡았다. 총선을 앞두고 이런 행위를 하면 누가 피해보겠느냐. 내가 흠 잡힐 것은 없으니 나중에 나한테 책임묻지 마라. 네가 지지하는 후보자가 낙선이라도 하면 결국 누굴 원망하겠느냐." 상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면서 우리를 괴롭혔어. 나 뿐만이 아니라 직원들을 날마다 불러다 조사하고, 아이들 학교까지 쫓아가 이것저것 물어보자 대답은 하면서도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거야. 형사들은 심지어 외국 부모에게서 오는 아이들의 선물까지 검사하는 등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어. 수사관들이 중앙정보부에 1차 보고할 때 "아무리 조사해도 꼬투리가 없다. 성빈여사에서 쌀 한 톨도 갖다 먹지 않았다. 차라리 중단하는 게 났겠다"고 했으나 위에서는 계속 죄를 만들라고 명령했어. 나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했어. "너희들의 계산착오야. 내 뒤에는 벌써 몇만 명이 있어. 날마다 우리 회관에 드나드는 사람이 천여 명인데 그들이 눈치라도 채면 어떻게 되겠어. 광주시민들이 내가 삼선개헌 반대하고 박정희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보복당한다고 소문나면 너희들은 치명적이야."
그 후 변호사들이 나를 찾아와서 만일 불미한 사태가 벌어지면 무료변호해주겠다고 나섰어. 그럴 필요 없이 며칠 뒤 우리는 수사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어.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내무부장관을 지냈던 사람이 급히 광주로 와서 호통을 쳤나봐. "그 할머니의 삶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건드려서 이로울 것 하나 없어. 광주에서의 득표를 포기한 것이냐"며 다그쳐서 수사가 종결된 거야.
나한테는 연락도 없이 가버린 후 3일이 지나서야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어.
그 사람과는 평소 알고 지낸 사이였거든.
정치가의 욕심이란 정말 끝도 없어. 삼선개헌하더니 또 유신헌법을 만들었으니 ... 인간으로는 생각하지 못할 욕심을 부리니 10.26사건 같은 천벌을 받은 게야.
하느님은 절대 직접 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 벌을 하지. 바로 김재규라는 인간을 통해 벌을 내린 거야. 이제 다시는 이 나라에 군정이 들어서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온 국민의 소망이었는데, 그 엄청난 광주시민을 희생시키고 5공화국이 생기고 사람도 아닌 것들이 정권을 잡고 있으니. 난 그들의 행위를 단 한 가지도 용서할 수 없어. 하루빨리 민주화가 되어서 민중이 주인 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대접받는 사회가 이룩되기를 희망하면서 살고 있어. 그런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면 온 국민이 다시는 독재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러려면 언제 어디서나 확실하게 자기의 입장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항상 내가 주장하는 내용이지. 자기 양심에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비굴하게 양심을 속이는 그런 행위는 해서는 안 돼. 자식교육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교육체제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국민의 목숨을 수백 명씩 짓밟고도 권좌에 앉아 있는 악랄한 자들이 그런 교육을 시킬 리 없고 올바로 시킬 수도 없어. 대통령을 존경하고 그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그를 닮도록 노력하는 것 자체가 교육인데 무자비한 인간들이 몇 년씩 우리나라를 망쳐놓으니 큰일이야.
나는 요즘 학생들을 봐도 걱정이 많아. 민주화를 위해 싸운다고 하면서 폭력을 일삼는 것은 잘못된 거야. 폭력과 파괴로는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아. 내가 학생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인데 귀담아 듣질 않는구만. 폭력은 무슨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는 거야. 올해 5월 항쟁기간에도 학생들이 비폭력을 선언했으면 경찰도 당연히 최루탄도 쏘지 말고 곤봉으로 때리지도 말아야지, 최루탄만 쏘지 않고 곤봉과 방패로 마구 구타하면 그게 무슨 비폭력이야. 어느 한편에서 폭력을 휘두르면 꼭 상대편에서도 폭력을 휘두르게 되어 있어. 그리고 자기가 휘두른 폭력에 언제 당할지 모르는 거야. 폭력을 사용해 정권을 탈취하고, 백골단을 길러서 민주시민, 학생을 학대하는 정권이 국민으로부터 진정으로 인정 받는 정권이겠어?
나 죽기 전에 완전한 민주화되는 것도 보고, 통일되는 것도 눈으로 보고 싶은데 현추세를 보면 너무 막연하기만 해.
희생자 가족을 도우며
5.18 이후 정부에서 나를 YWCA에서 쫓아내라고 강요했어. 내가 있는한 YWCA가 정치적인 보복을 당할 것 같아서 나를 제거한 것으로 알고 있어.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어디에 있든 우리의 민권과 여성의 인권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 섭섭하지 않아.
1980년 이후 현재까지 나는 5.18 부상자나 부상자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지. 부상자들이 후유증에 시달려 재치료를 받으려 해도 돈이 없어서 받지 못할 때 치료비를 지불하거나, 노동력을 상실한 부상자나 유가족의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형태로 그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되고자 각별히 신경썼어. 그런데 주로 이러한 돈은 국내에서보다도 외국에 있는 교포나 인권단체 등에서 보내온 것이 많은 셈이지. 따지고 보면 그런 것도 가슴아픈 일이야.
우리는 기까이에서 그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거나 체험한 사람들인데 당사자에게 굉장히 냉담하고 무관심한 것 같아서 걱정돼.
한국에 있다 1974년 추방당한 목사를 며칠 전에 만났어. 나는 그분에게 한국이 왜 반미운동을 하는가에 관해 자세히 써서 건네줬지. "세계 제1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이 왜 한국의 독재자를 지원하고, 군지휘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왜 군대를 보내 비참한 역사를 탄생시켰으며, 오히려 잔악무도한 전두환을 도와줬느냐. 또 미국의 잉여생산물을 팔아먹기 위해 수입개방 압력을 넣고 수입개방으로 인한 피해로 우리 농민의 가슴에 병들게 하고 자살하게까지 만드니, 어떻게 반미감정이 싹트지 않겠는가. 또 당신들은 건강에 해가 된다고 금연운동을 벌이면서 왜 우리나라 국민에게 담배판매를 강요하느냐.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미국을 반대한다" 등의 내용이었어. "그러니 미국의 정책을 고쳐라. 그렇지 않으면 내 반미감정은 씻을 수 없다. 나는 내 민족 내 나라를 위해 한 것이다"라고 말했지.
나는 한평생 민주화를 위해 몸바쳐 살아온 사람이야. 앞으로 어떤 난관에 부딪혀도 내 방식대로 그 길을 향해 나아갈거야.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비개인 후 하늘처럼
해맑은 시간 보내세요.